1.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22번 문단 해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가운데 처음의 일곱 가지,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와 말로 짓는 네 가지는 각각의 행위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의도와 일치한다. 이런 의도 그 자체는 그 행위를 성취했든 성취하지 않았든 간에 해로운 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업의 길(aniyata-kamma-patha)'이다. 아직 실제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성취하고 목적하는 바를 달성했다면(예를 들면, 죽이려 작정한 대상을 죽이거나 남의 재물을 탈취해서 가졌을 때) 그것은 '확정된 업의 길(niyata-kamma-patha)'이 된다.
이렇게 확정된 업의 길은 재생연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업의 길은 삶의 과정에서 과보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 2가지는 '해로움'과 '확정된' 이다.
확정된 업의 길(niyata-kamma-patha)은 재생연결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삶의 과정에서도 과보로 나타날 수 있다.
확정되지 않은 업의 길(aniyata-kamma-patha) 재생연결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삶의 과정에서만 과보로 나타난다.
여기서 확정되는 것과 확정되지 않는 것은 의도한 바를 결과적으로 성취하느냐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결과를 성취했을 때 확정된다. 결과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 확정되지 않는다.
확정되는 것과 별개로 이 2가지의 업은 모두 해로운 의도를 가진 해로운 업이다.
결과를 성취한 것은 더 나쁜 과보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의도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그 강도와 상관없이 해로운 과보를 가져올 것이다.
몸과 말로 짓는 업에는 확정되는 것과 확정되지 않는 것을 알기 쉽다.
살생이나 거짓말 등의 결과는 그 성취 여부를 눈으로도 보는 등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이나 말이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는 마노로 짓는 세 가지 업은 어떤 법칙으로 그것이 업의 길로 확정되는 걸까?
2.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22-4번 문단 해설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간탐'으로 옮긴 abhijjhā는 탐욕(lobha)의 한 요소인데 남의 재물을 가지려는 욕구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남의 재산을 가지려는 탐욕(lobha)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확정된 업의 길(niyata-kamma-patha)이 되지는 않는다. 그 재산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일어나야만 확정된 업의 길이 되는 것이다.
'악의'로 옮긴 vyāpāda는 성냄(dosa)의 한 요소인데 남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욕구가 일어날 때 확정된 업의 길이 된다.
'그릇된 견해'로 옮긴 micchā-diṭṭhi는 이것이 도덕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견해의 한 형태를 취할 때 확정된 업의 길이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탐욕과 성냄이 남에게 적용되고 남을 해롭게 할 때 간탐과 악의가 된다.
그리고 그 간탐과 악의는 그 마음 자체로 결과를 성취하여 해로운 업의 길로 확정된다.
탐욕(lobha)은 대상을 탐하고, 욕심내고, 거머쥐려 하는 것 전반을 의미한다. 이것은 해로운 업을 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을 낸다고 해서 간탐이 되진 않는다. 삶의 과정에 과보를 가져오는 해로운 업을 생산할 뿐이다.
간탐(abhijjhā)은 탐욕에 속하지만 단순히 대상에 대해서 탐하는 것을 넘어서 남의 것을 실제로 가지려고 할 때 간탐이 된다.
마치 몸과 말로 짓는 업이 해로운 의도의 결과를 성취할 때 확정된 업의 길이 되는 것처럼, 탐욕이 간탐이 될 때 마노로 짓는 업이 업의 길로 확정된다.
탐욕이 간탐이 됨으로써 마노로 짓는 업은 재생연결식을 결정할 수 있는 업의 길이 되고, 동시에 그 결과를 성취하였다.
성냄(dosa)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대상을 싫어하고 밀쳐내려 하는 것은 해로운 업을 생산할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남을 괴롭히고 해치려고 할 때 성냄은 악의(vyāpāda)가 되고 해로운 업의 길로 확정된다.
성냄이 악의가 됨으로써 마노로 짓는 업은 재생연결식을 결정할 수 있는 업의 길이 되고, 동시에 그 결과를 성취하였다.
3.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는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에서 비롯된 상견과 단견이 대표적이다.
자아가 있고 끝없이 윤회한다는 것이 상견이다.
자아가 있고 죽으면 끝이라는 것이 단견이다.
자아가 있고 죽으면 끝이며 선·불선도 없다는 것이 단견에서 심화된 도덕적 허무주의이다.
그릇된 견해가 해로운 업의 길로 확정되거나 확정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결정될까?
필자는 '선·불선과 인과에 대한 믿음 or 앎'이 그것을 결정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선·불선의 인과를 알고 믿는 상견론자와 단견론자는 그릇된 견해로 인한 확정된 업의 길을 짓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윤회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유익한 과보를 받기를, 혹은 죽으면 끝나는 이 삶에서 자아가 유익한 과보를 받기를 원하면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선·불선의 인과도 부정하는 도덕적 허무주의자들은 그릇된 견해로 인해 확정된 업의 길을 짓는다.
그들은 선·불선을 부정하고 그로 인한 원인과 결과 역시 부정하므로, 사견으로 인한 불선업을 끊임없이 지을 수밖에 없고 무거운 해로운 업들도 짓기 쉽다.
이들에게는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지향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확률적으로 대부분 불선한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이 방종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이들은 잘못된 견해로 인해 4악처를 비롯한 비참한 곳을 벗어나기 어려운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실제 작동하는 업의 법칙(niyama), 유익함과 해로움의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 견해 자체로 재생연결을 결정지을 만큼 해로운 업을 짓기 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