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 사야도의 헤마와따숫따 법문』의 제3강을 보면 사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다.
범망경의 62가지 사견 중 대표적인 사견은 세 가지다. 이와 관련한 부분들을 인용한다.
세 번째로는 "kacci 어떤가, mohaṃ 어리석음을(헤매고 잘못 아는 어리석음을), atikkanto 넘어섰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사견(micchādiṭṭhi), 즉 잘못된 견해라는 것은 사실을 알지 못해 혼미하여 잘못 아는 어리석음(moha), 무명(avijjā)과 함께 생겨납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넘어섰는가?"라는 것은 "사견이 없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마음의 악행 세 가지 중에 사견이라는 악행이 없는가?"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사견 세 가지
당시 붓다로 예경을 받던 외도 스승들 중 뿌라나깟사빠는 "karoto na karīyati pāpaṃ 살생이나 도둑질 등을 행해도 악행과 불선업이 되지 않는다. 보시 등을 행해도 선행과 선업이 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다녔습니다. 그 설법 중에 "na karīyati 행한 것이 아니다. 행위나 업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단어에 따라 그 견해를 무작용견(akiriyadiṭṭhi)이라고 부릅니다. 그 견해는 원인인 업을 직접적으로 배제합니다. 원인인 업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 업의 결과도 배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뿌라나깟사빠의 견해는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고 견지하는 사견입니다.
아지따라는 외도 스승은 "natthi dinnaṃ 보시는 이익이 없다. 선행과 불선행 업들의 결과는 없다.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완전히 끊어져버린다."라고 설하고 다녔습니다. 그 설법 중에 "natthi 없다"라는 단어에 따라 그 견해를 허무견(natthikadiṭṭhi)이라고 부릅니다. 그 견해는 결과인 과보를 직접적으로 배제합니다. 결과를 배제하기 때문에 원인인 업도 배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지따의 견해도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고 견지하는 사견입니다.
막칼리라는 외도 스승은 "중생들이 오염되거나 괴롭게 되는 데는 이유가 없다. 깨끗하거나 행복하게 되는 데도 이유가 없다. Ahetū, 원인 없이 저절로 괴롭게 되거나 행복하게 된다."라고 설하고 다녔습니다. 그 설법 중에 "ahetū 원인 없이"라는 단어에 따라 그 견해를 무인견(ahetukadiṭṭhi)이라고 부릅니다. 그 견해는 원인인 업과 결과인 과보 모두를 배제합니다. 그래서 그 견해도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고 견지하는 사견입니다.
빠꾸다라는 외도 스승은 "중생이란 땅 몸, 물 몸, 불 몸, 바람 몸, 행복, 고통, 생명이라는 일곱 요소의 모임일 뿐이다. 그 일곱 가지 몸은 무너지지도 않고 없애거나 무너뜨릴 수도 없다."라고 설했습니다. 그 견해도 "일곱 가지 몸의 모임일 뿐인 중생을 죽이거나 도와준다고 해서 불선업이 되지 않는다. 선업도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고 견지하는 사견에 포함됩니다.
지금 언급한 외도 스승들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릇된 것을 아는 어리석음(moha), 무명(avijjā) 때문에 사견의 교리(micchāvāda)를 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마와따 천신이 "그대의 스승인 붓다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뛰어넘었는가? 그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나는 사견이 없는가?"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 『마하시 사야도의 헤마와따숫따 법문』 P.158-160
수기를 받을 때부터 사견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결정수기를 받고 난 뒤 보살의 생에서부터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라고 고집하는 악행 사견이 없었습니다. 상견(sassata-diṭṭhi)과 단견(uccheda-diṭṭhi)도 없었습니다. 붓다의 지위에 오르실 무렵 수다원도를 통해 모든 사견을 남김없이 제거하셨습니다. 아라한도를 통해 습관과 함께 어리석음(moha)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제거하셨습니다. 악행 사견뿐만 아니라 번뇌라는 모든 것으로부터도 멀리 떠나 깨끗하신 분입니다. 부처님께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악행 사견 등의 번뇌가 없이 깨끗하도록 설하셨습니다. 뿌라나깟사빠 등의 외도 스승들에게 사견이 생겨나는 모습을 설명한 뒤 그러한 사견이 생겨나지 않도록 지도하셨습니다. 지도하신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생, 도둑질 등의 악행을 행해도 불선업이 아니다'라는 등으로 고집하는 사견은 무엇을 의지해서 생겨나는가? 물질을 의지해서 생겨난다. 느낌, 인식, 형성들, 의식을 의지해서 생겨난다. 물질을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알면 ... 느낌을 ... 인식을 ... 형성들을 ... 의식을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알면 그러한 사견이 생겨나지 않는다." (S.ii.171)
특히 막칼리고살라라는 외도 스승을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라고 설명하시면서(A1:18:3) 제도 가능한 중생들로 하여금 사견을 제거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막칼리의 견해를 조금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는 "중생들이 괴롭게 되는 데도 이유가 없다. 행복하게 되는 데도 이유가 없다.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어느 정도 행복할 것이다. 어느 정도 괴로울 것이다'라고 정해진 대로만 괴롭고 행복하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만 저열하거나 거룩한 생에서 태어나 윤회해야 한다. 어리석고 나쁜 이라고 해서 윤회가 더 길고 괴로움을 더 많이 겪지는 않는다. 지혜롭고 훌륭한 이라고 해서 윤회가 더 짧고 행복을 더 많이 누리는 일도 없다. 됫박으로 측정해 놓은 것처럼 정해진 분량의 괴로움과 행복을 경험해야 한다. 바느질실의 시작 부분을 잡고 높은 곳에서 내려뜨리면 실이 다 풀리고 나서야 멈추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든지 현명한 사람이든지 정해진 만큼 윤회하고 나면 괴로움이 다해서 없어진다. 지혜로운 이라고 윤회를 짧게 할 수는 없다. 어리석은 이라고 윤회가 더 길어지지는 않는다."라는 등으로 설했습니다.(D2/D.i.50)
사람이 죽으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견해와 비슷하다.
막칼리는 또 "악행을 행해도 괴로움이 더 생겨나지 않는다. 선행을 행해도 행복이 더 생겨나지 않는다. 정해진 대로만 괴로움과 행복을 경험해야 한다. 시간이 다하면 저절로 무르익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뿐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선행을 하고 싶지 않은 게으른 이들, 악행을 삼가고 싶지 않은 어리석은 이들에게 딱 어울릴 만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단계에서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없다. 성숙되기만 한다."라고 최근에 등장한 '사람 죽어 사람 된다'라는 견해와도 일치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막칼리 스승을 'manussakhippa 사람 잡는 그물'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유인즉, 그 물에 들어간 물고기들은 다시 빠져나올 수 없고 결국 죽어야 하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그 막칼리의 견해를 좋아하면 천상이나 열반에 도달하게 하는 선업을 행하려 노력하지 않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사악도에만 떨어질 뿐이라는 뜻입니다.
요즘도 일부에선 "우리의 가르침만 알면 충분하다.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설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이들도 'manussakhippa 사람 잡는 그물'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주의해야 합니다. 막칼리의 견해만이 아닙니다.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고 설하는 뿌라나나 아지따의 견해도 천상과 열반에 갈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견해일 뿐입니다. 'Manussakhippa 사람 잡는 그물'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의 견해일 뿐입니다.
사견은 언제부터 생겨났는가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고 고집하는 이러한 악행 사견은 사람들의 수명이 천 년인 시기에 다시 생겨났다는 내용이 「짝까왓띠숫따 Cakkavattisutta」 (필자 주 - 전륜성왕 사자후경)에 설해져 있습니다.(D26) 이를 근거로 살펴본다면 평균수명이 천 년 이상이었던 시기에는 사람들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적었기 때문에 사견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사견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천 년이던 때를 시작으로 탐욕 등이 심해져서 사견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백 년이었던 부처님 당시에도 '업과 업의 결과는 없다. 다음 생은 없다.'라는 외도들의 가르침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교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나중에 평균수명이 10년으로 줄어들었을 때는 선업이나 불선업이라는 명칭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짝까왓띠숫따」에 설해져 있습니다. 그 말을 근거로 살펴본다면 평균수명이 10년일 때는 그러한 교리를 사람들 대부분이 좋아할지 모릅니다. 바로 탐욕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만 해도 감각욕망 대상들이 많아졌습니다.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탐욕도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불선 행위를 삼가고 있으면 원하는 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선행을 행하고 있으면 일이 안 된다'라고도 생각합니다. 이것은 '선업은 없다. 불선업은 없다'라는 사견을 좋아하는 것의 원인입니다.
어리석음이 전혀 없다.
업과 업의 결과가 없다는 견해는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어 생겨난다는 사실을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강한 탐욕 때문에 생겨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법과 결과법을 당신 스스로도 아셨고 중생들이 알도록 설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따라 노력하는 이들은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어 생겨나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경험하여 알아 그 사견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이전 생에서의 업 때문에 지금 생에 태어난 것이다. 지금 생의 업 때문에 갈애가 없어지지 않는 한 다음 생에도 태어나야 한다. 업과 업의 결과는 있다"라는 바른 견해가 더욱 확고해집니다.
모든 원인법과 결과법을 알시는 부처님에게 사견이 없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짜 붓다인 외도들과 비교하여 질문한 것이기 때문에 사따기리 천신은 "사견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인 어리석음만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어리석음을 완전히 넘어서셨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 『마하시 사야도의 헤마와따숫따 법문』 P.164-168
사견(micchā-diṭṭhi)이란 그릇되게(micchā) 보는 것(passati)입니다. 즉 그릇된 견해를 말합니다. 사견의 구성요소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삿된대상 옳다취해 사견업의 두요소네
삿된, 즉 틀린 대상에 대해 그것을 옳다고 취하면 사견업이 성립됩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사견 세 가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존재더미사견(sakkāya-diṭṭhi, 유신견)입니다. 실제로 분명하게 존재하는(santo) 것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무더기(kāyo)일 뿐인데, 그것에 대해 '나'라거나 '개인' 등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견(diṭṭhi)을 말합니다. 즉 물질일 '자아'라거나, 자아가 물질을 가졌다거나,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거나,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는 등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느낌 등의 다른 정신 무더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더미사견을 가진 모두가 그 생에서 죽어 사악도에 결정적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존재더미사견이 있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나지 못하거나 깨달음 등의 출세간법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존재더미사견이 있는 한 중생들은 언제든 악행을 범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사악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존재더미사견을 제거하지 못하는 한 "지옥으로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여 수다원도의 지혜로 존재더미사견을 모두 제거해야만 사악도의 문을 완전히 닫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치 가슴에 찔린 창을 서둘러 뽑듯이, 머리 위에 붙은 불을 재빨리 끄듯이 존재더미사견을 제거하도록 수행을, 특히 위빳사나 수행을 서둘러 실천하라고 법문 하셨습니다.(S1:21)
... 두 번째로는 극단사견(antaggāhikā micchādiṭṭhi)입니다.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영혼과 신체는 같다, 영혼과 신체는 다르다'라는 등으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M63) 일반적인 상견과 단견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극단사견은 도의 장애만 됩니다. 천상의 장애는 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결정사견(niyata-micchādiṭṭhi)입니다. 이 견해를 가진 이들은 죽은 뒤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것이 결정적이기 때문에(niyata) 결정사견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허무견, 무작용견, 무인견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른 일반적인 사견들과 달리 이렇게 인과를 부정하는 결정사견은 죽은 뒤 바로 다음 생에 무간지옥에 태어나게 합니다. 더욱이 무간지옥에 태어나게 하는 다른 어떤 업보다 과보가 큽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죽이거나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라한을 죽이거나 부처님 몸에 피멍이 들게 하면 죽은 뒤 무간지옥에 태어나지만, 우주가 무너지기 전에 그 업이 다하면 다시 다른 곳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승단을 분열시킨 경우에는 죽은 뒤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것은 동일하지만 우주가 무너져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사견을 가져서 무간지옥에 태어나면 우주가 무너지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다른 우주의 무간지옥에 태어나든지 허공에서 그 업이 다할 때까지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사견의 허물이 매우 큰 모습을 부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설하셨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큰 허물 중에서 제일 심한 허물이라고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법과 비슷할 정도로 허물이 큰 다른 어떤 법도 나 여래는 보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바로 사견이니라. 비구들이여, 큰 허물 중에는 삿된 견해가 제일 심한 것이다."(A1:18:3/A.i.35)
마찬가지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증장시키는 데 제일 심한 것이라고(A1:17:1),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선법을 버리게 하는 데 제일 심한 것이라고(A1:17:3), 중생들을 악처와 지옥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고(A1:17:7) 설하셨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에서는 이 내용에 대해 "(결정)사견을 지닌 이에게는 사람과 천상이라는 선처도 없고, 도과라는 것도 없다. 우주가 무너질 때 중생들이 범천탄생지에 태어나더라도 (결정)사견을 버리지 못하는 지옥 중생들은 범천탄생지에 태어날 기회가 없다. 무너지지 않는 다른 우주의 지옥에 태어나 고통을 겪는다."라고도 설명했습니다.(AA.i.372)
마찬가지로 『디가 니까야』 주석에서는 사견을 지닌 자는 천상에도 태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과의 지혜로 열반을 실현해서 해탈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계속해서 태어나서 죽기 때문에 대지만 두껍게 할 뿐입니다.
"결정사견을 지닌 이는 죽은 뒤에 천상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하물며 해탈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DA.i.150)
- 『마하시 사야도의 헤마와따숫따 법문』 P.18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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