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Abhidhamma in daily life’에서 아신 자나까 비왐사 스님은 "특별히 부처님이나 벽지불에게 보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승가 전체에 하는 보시가 가장 공덕이 크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M142 「보시의 분석 경」을 보면 부처님의 양모이신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부처님께 옷을 보시하려고 하자 세존께서는 승가에 보시하라고 이르시면서 "승가에 보시하면 나에게도 공양하는 것이 되고 승가에도 공양하는 것이 된다"라고 설하신다. 그리고는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승가에게 하는 보시보다 그 과보가 더 크다고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이나 벽지불 역시 개인이다.
위 2가지는 서로 상충하는 설명인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 역시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이 있고, 승가 전체에 보시하는 것이 있다.
현명한 재가자라면 스님에게 보시할 때 눈 앞의 스님 한 분이 아닌 승가 전체에 보시한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 좋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는 받는 스님이 어떤 분이냐에 따라 그 공덕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눈 앞에 스님 한 분에게 보시하더라도 비구, 비구니 두 집단을 포함한 승가 전체에 보시하는 의도를 내는 것은 한 번의 보시로 모든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만 원을 전체 승가에 보시하면 전 세계의 승가 스님 한 분 한 분에게 만 원씩 보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본다는 뜻이다.
그 중에는 아라한인 스님도 있고,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인 성자 스님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원에 보시하거나 사야도께 보시할 때 우리는 사야도라는 개인이 아닌 승가에 보시한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더 큰 이익이 있다.
이렇듯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 전체에 보시하는 것은 두 번째로 수승한 보시이다.
첫 번째로 수승한 보시, 가장 수승한 승가 보시는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스승들은 보시할 때 그 의도(cetanā)를 강조하신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셨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을 떠올리거나 불상앞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의도를 내며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승가 보시를 행할 수 있다.
우 실라 사야도께선 승가에 공양할 때 부처님과 벽지불, 그리고 전체 승가를 향한 보시의 의도를 내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현명한 재가자라면 어디에 이익이 있는지를 바르게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로 수승한 보시를 할 수 있는데 두 번째로 수승한 보시나 개인에게 하는 보시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왜 자신에게 보시하려는 것을 비구 승가(bhikkhu-saṅgha)에게 보시하라고 하셨는가? 어머니에 대한 연민(anukampā) 때문이었다. 세존께만 보시하려는 의도(cetanā)를 승가와 세존 둘 모두에게로 향한다면 그 의도는 결합되어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MA.v.67)
2.
포살에 대해서 공부할 때, 8계를 지키며 하루 종일 수행 하거나, 경전을 읽거나, 자신의 보시·지계 공덕을 거듭 생각하는 것을 말한 바 있다.
다만, 포살을 지키는 것의 핵심은 8계를 지키는 것이다.
경전을 읽거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포살계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포살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한다.
5계에 더해 음행을 하지 않고, 오후불식하며, 눈과 귀로 감각욕망의 대상과 구경거리를 찾지 않고, 화려하고 치장된 곳을 피한다.
3.
초기경을 보면 욕계 천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누리다 수명이 다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
천상과 인간계 선처 등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은 그동안 쌓아놓은 선업을 까먹는 것과 같은 것일까?
자칫 엄숙주의로 이 부분을 헷갈리는 불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우 실라 사야도께선 감각적 욕망의 대상인 선업 대상들이 나에게 생겨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닌 좋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를 들어 꽃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 지은 본인의 선업의 결과로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감각적 욕망을 즐길 수 있다.
경전에서 천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다 지옥에 떨어지는 경우는 감각적 욕망을 즐겨서가 아닌, 성냄이나 원한 등 다른 불선업의 결과다.
과거 선업의 과보로 즐거운 대상들이 나에게 생기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4.
앉아서 아나빠나사띠를 하는 수행자가 일상에서 부처님을 거듭 생각하며 다닌다면, 이것은 한 가지 명상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잘못된 수행 방법일까?
이것은 보호명상을 수행한 것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네 가지 보호명상은 다음과 같다.
① 자애(mettā): 자주 화가나거나 악의가 일어날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② 붓다를 거듭 숙고함(buddhānussati): 신심이 떨어질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③ 부정관(asubhabhāvanā): 아름다운 이성을 보며 애욕이 일어날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④ 죽음을 거듭 숙고함(maraṇānussati): 게을러질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보호명상은 왜 하는가?
① 위와 같이 수행자에게 닥치는 여러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다.
② 일상에서 온전히 깊게 집중하기 어려울 때 한다.
③ 현재 명상주제에 답답할 때, 스스로를 고양시키기 위해 대상을 바꾼다.
위에서는 각각의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특정한 보호명상을 말했지만, 하나의 보호명상이 여러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신심을 고양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자비로우신 부처님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온화함과 자애의 마음을 동시에 고양시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