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심이 있는 선업과 욕심이 없는 선업
우 실라 사야도께선 바라밀이 되는 선업에 대해서 2가지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① 자기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②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핵심은 '욕심의 유무'일텐데, 욕심이 있는 일반 선업은 작고 한정된 결과만을 가져온다.
빠라미 선업은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일반 선업은 그렇지 않다.
출세간을 목적으로 선업을 지을 때, 바라밀이 되는 선업이 된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갈애가 없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위해서 한다.
열반, 윤회에서 벗어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바라는 것이 따로 있으면서 지은 선업은 일반 선업이 된다.
즉, 내가 받고 싶은 것이 선업인지, 물질 or 인정인지에 따라서 갈리는 셈이다.
바라밀이 되는 선업은 바라는 것이 없다. 좋아서 하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
무엇을 받지 않아도, 인정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 선업을 하는 것만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것과 같다는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살면서 괴로움도 적다. '받아야 할 괴로움'이라고 여기게 된다.
바라밀 공덕은 원하지 않았어도 다른 존재나 모든 세상이 다 안다.
2. 일반 선업(왓따닛시따vaṭṭanissita, 세간선업) vs 빠라미 선업(위왓따닛시따vivaṭṭanissita, 출세간선업)
십바라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세간과 출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세간은 로까(loka)이고 출세간은 로꿋따라(lokuttara)입니다. 로까(세간), 웃따라(초월한), 로꿋따라(출세간). 세간은 중생들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상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출세간입니다. 세간은 물질과 정신의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태어남도 물질과 정신이 태어나는 것이고 죽음도 물질과 정신이 죽는 것입니다.
... 오온을 초월하는 것이 출세간입니다. 출세간은 인과가 완전히 끊어진, 즉 정신과 물질의 과정이 완전히 멈춘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있으면 고통뿐인 세간이고, 오온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면 고통이 없는 출세간이 됩니다. 출세간은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그리고 닙바나(열반)입니다.
... 선업에는 일반 선업과 빠라미 선업이 있습니다. 일반 선업은 중생들을 욕계로 색계로 무색계로 그냥 빙빙 돌게만 할 뿐,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행복이란 꿈도 꾸지 못 하겠지요? 완전한 행복이란 고통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야 빠라미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선업을 열심히 하면 되지, 왜 빠라미를 꼭 해야 하는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일반 선업을 빨리어로 왓따닛시따(vaṭṭanissita세간선업)라고 하고, 빠라미가 되는 선업을 위왓따닛시따(vivaṭṭanissita출세간선업)라고 합니다. 위(벗어남), 왓따(굴레), 닛시따(의존하는)... 이렇게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계속 빙빙 돌게 만드는 세간 선업이 왓따닛시따입니다. 반면에 위왓따닛시따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출세간 선업입니다. 왓따닛시따 선업은 더 좋은 것을 욕심내고, 어떻게 되고 싶은 욕망으로 하는 선업입니다... 물론 왓따닛시따 선업의 결과로 인간으로 태어나면 예쁘게 태어나고, 훌륭한 부모를 만나고, 부자가 되고, 공부도 잘하고, 높은 위치에서 살 수 있지만 결국에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선업일 뿐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선업이 위왓따닛시따 선업입니다. 위왓따닛시따 선업의 기본이 십바라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하는 무주상보시가 바로 위왓따닛시따 선업입니다. 보시뿐만 아니라 계율도 원하는 것 없이 정직하게 지켜야 하고, 수행도 바라는 바가 없는 꾸준한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빠라미가 고귀한 분들이 하는 일이라고 할 때, 고귀함의 기준은 세간을 위해서 하는가 아니면 출세간을 위해서 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한없이 바라고 가지려고 하지만, 출세간은 놓아 버리려고 합니다. 놓아 버리려면 놓아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겠지요? 이것이 잡고 쥐고 가질 만한 것이 아니라고 아는 지혜가 생겨야 놓을 수 있습니다. 사성제로 말하면 고성제를 알아야 집성제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면서 하는 왓따닛시따 선업은 윤회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길에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점을 확실하게 알아야 우리는 바라지 않고 선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20~24,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① 왓따닛시따(vaṭṭanissita - 세간선업, 일반선업)
- 대가를 바라면서 하는 선행이다.
- 더 좋은 것을 욕심내고, 어떻게 되고 싶은 욕망으로 선업을 짓는다.
- 세간적인 이익이 따른다. 훌륭한 외모, 좋은 가문, 부유함, 명석함, 명예 등이 주어진다.
- 거래와 같다.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선행의 격이 저열해진다.
- 중생들을 삼계 31천 속에서 빙빙 돌게만 할 뿐,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② 위왓따닛시따(vivaṭṭanissita - 출세간선업, 빠라미선업)
-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선행이다.
- 원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보시하고, 계율을 정직하게 지키고, 꾸준하게 수행한다.
- 선행 그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선행의 격이 고귀해진다.
- 출세간이 목표이기 때문에 바라고 가지려는 것이 아닌 놓아 버리려고 한다.
3. 빠라미가 되기 위한 조건 4가지
1) 딴하(갈애), 마나(자만), 딧티(사견)에 당하지 않는 선업
빠라미가 되는 첫째 조건은 딴하(taṇhā갈애), 마나(māna자만), 딧티(diṭṭhi사견)에 당하지 않는 선업을 하는 것입니다. 보시할 때 갈애가 들어가면 보시하면서 뭔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갈애에 당한 보시이기 때문에 선업은 선업이지만 빠라미가 되는 선업은 아닙니다.
...보시에도 주면서 뻐기는 자만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줄 수 있다.' 또는 '다른 사람은 이 정도만 주지만 나는 이만큼 더 많이 줄 수 있다.'라고 비교하는 마음들이 있는데, 이것이 자만에 당하는 보시입니다.
또 '내가 준다.'라고 하면 사견(유아견)에 당하는 보시입니다.
...보시하고 나서 '내가 주었다'는 마음이 생기거나 주는 것을 자랑하거나 보시의 대가를 바라고 있으면, 그 자체로 공덕의 질이 많이 떨어져 빠라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애, 자만, 사견에 당하지 않고 보시할 수 있게끔 항상 마음을 잘 관찰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관찰하면서 깨끗한 마음이 되었을 때 보시를 해야 그것이 빠라미가 됩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더 잘 살게 되고, 잘 사는 것 자체가 우리를 열반으로 가게끔 계속 밀어줍니다.
어떤 사람은 수행하고 싶은데 가난해서 수행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보시바라밀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살아도 수행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가진 것으로 즐기면서 놀기 바빠서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생기는 이유가 과거에 욕심으로 보시하고 자만으로 보시하고 사견으로 보시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벗어나는 빠라미가 되는 보시를 하지 않고 세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일반 선업만 했다는 말입니다.
빠라미 공덕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본인도 수행하고 남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빠라미 공덕을 더 많이 쌓아 갑니다... 딴하(갈애), 마나(자만), 딧티(사견)로 계율을 지킨다면 그 공덕은 빠라미가 되지 않습니다. 수행할 때도 갈애, 자만, 사견에 당하고 있으면 노력과 집중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습니다. 질이 떨어지는 마음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절대로 닙바나(열반)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갈애, 자만, 사견을 가진다면 그는 고귀한 사람이 아니고, 고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보시해도 고귀한 보시가 안 되고, 계율을 지켜도 고귀한 지계가 안 되고, 수행해도 고귀한 수행이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고귀하게 만들어야 우리가 하는 일이 빠라미가 되는 것입니다.
2) 빠히땃따찟따(열반을 향하는 마음)
빠라미가 되는 둘째 조건은 선업을 할 때 마음이 항상 열반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빠히땃따찟따(pahitattacitta열반을 향한 마음)는 '닙바낫사빳짜요호뚜!(nibbānassa paccayo hotu!열반의 밑거름이 되기를!)'와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오직 열반만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열반 자체가 '욕심 없음'이기 때문에 사실 열반은 욕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욕심을 놓아 버릴 수 있는 원인이 되기를!'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해야 그것이 빠라미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빠라미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딴하(갈애), 마나(자만), 딧티(사견)에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늘 빠히땃따찟따를 가지기 바랍니다... 마음가짐이 틀리면 아무리 집중하고 노력해도 고귀한 출세간 선업이 안 됩니다. 출세간 선업이 되지 않으면 완전한 행복이란 절대로 없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노력과 집중이라도 빠히땃따찟따가 없으면 결국에는 31천만 빙빙돌게 됩니다.
...수행자의 마음이 빠히땃따찟따로 바뀌려면 빠라미에 대한 지혜로운 앎이 기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빠라미 공덕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생각과 행동과 말이 갈애 자만 사견에 당하지 않게 되고, 수행자의 마음이 출세간인 닙바나(열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세간이 아니고 출세간으로 향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마하까루나(대연민)
빠라미가 되는 셋째 조건은 마하까루나(mahākaruṇā대연민)입니다... 까루나(연민), 마하(크다)... 우리도 빠라미를 잘 실천하려면 부처님처럼 대연민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연민으로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주는 쪽으로 가게 되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욕심을 부리고 움켜쥐는 쪽으로 갑니다. 연민으로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놓아 버리는 넥캄마(욕심을 버림) 쪽으로 갑니다. 이기적이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이겨야 되고 손해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민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신이 하는 보시, 지계, 수행이 빠라미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 우빠야꼬살라(지혜, 방편선교)
빠라미가 되는 네 번째 기준은 우빠야꼬살라(upāyakosalla방편에 대한 밝은 지혜)입니다. 우빠야(방법, 방편), 꼬살라(잘 한다). 사람들 중에는 지혜는 뛰어난데 연민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민은 많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입니다. 불쌍해서 구해주고 싶은데 구해주는 방법을 몰라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 스승을 만나면 제자들이 고통스럽겠지요?
...우리도 부처님을 본받아 빠라미를 잘 하고 싶으면 연민을 가지고 지혜롭게 실천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중생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 '어떻게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해야 빠라미 공덕이 될까?' 그런 것들을 아는 것이 바로 우빠야꼬살라입니다. 이런 방법과 방편에 대한 지혜가 있어야 빠라미를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빠라미가 되는 네 가지 요소를 갖출 때, 그때는 보시를 해도, 계율을 지켜도, 수행을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빠라미가 된다고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26~32,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①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로부터 벗어난 선업
- 뭔가를 바라거나 욕심내지 않으며 보시, 지계, 수행한다. (탐욕)
- '나는 이 정도로 할 수 있다'며 나와 남을 비교하거나 뻐기지 않으면서 보시, 지계, 수행한다. (자만)
- '내가 한다'라고 여기지 않으면서 보시, 지계, 수행한다. (사견)
- 마음을 잘 관찰하여 고귀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었을 때 선행을 해야 빠라미 선업이 된다.
- 빠라미 선업으로 더 잘 살게 되고,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열반을 도와주는 조건이 된다.
② 열반을 향하며 짓는 선업
- '닙바낫사빳짜요호뚜!(nibbānassa paccayo hotu! 열반의 조건이 되기를!)'를 마음에 새기며 선업을 짓는다.
- 열반을 떠올리며 보시, 지계, 수행을 할 때 자연스럽게 '욕심 없음'이 성취된다.
③ 연민이 함께하는 선업
- 연민이 함께하면 무엇이든지 주는 쪽으로 마음이 간다.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움켜쥐는 쪽으로 마음이 간다.
- 연민스럽게 생각하면 넥캄마(욕심을 버림)를 성취한다.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이 이겨야 하고 손해보지 않으려 한다.
- 연민스럽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보시, 지계, 수행한다.
④ 지혜가 함께하는 선업
- 우빠야꼬살라(upāyakosalla방편에 대한 밝은 지혜) → 우빠야(방법, 방편), 꼬살라(잘 한다).
- 연민을 가지되 방편과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지혜롭게 보시, 지계, 수행한다.
- '고통스러운 중생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 '어떻게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해야 빠라미 공덕이 될까?'
4. 빠라미의 공통적 특성(사만냐락카나sāmaññalakkhaṇa)
수행할 때 물질과 정신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아는 것을 '딧티위숫디(diṭṭhi-visuddhi견해의 청정)'라고 합니다. 견해의 청정은 정신과 물질을 네 가지로 나누어 정확하게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 네 가지는 락카나(lakkhaṇā특징), 라사(rasa역할), 빳쭈빳타나(paccupaṭṭhāna나타남), 빠닷타나(padaṭṭhāna가까운 원인)입니다.
락카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키가 크다, 피부가 하얗다, 눈이 크다, 코가 길다고 말하듯이 수행자가 궁극적 실재를 대상으로 관찰할 때 알게 되는 특징들입니다. 라사는 하는 일, 역할입니다. 낏짜(kicca)도 같은 말인데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눈이 큰 그 사람은 의사이다, 혹은 변호사라고 말하는 것처럼 직업을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궁극적 실재가 갖고 있는 역할이나 기능을 말합니다. 빳쭈빳타나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뜨는 이미지 혹은 나타남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는 사자 같다.'라고 말하면 그 말의 의미는 그 사람이 용감하다는 뜻입니다. 빠닷타나는 제일 가까운 원인입니다. 원인은 한 가지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일 수도 있는데, 그때 제일 가까운 원인을 빠닷타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락카나, 라사, 빠쭈빳타나, 빠닷타나, 이 네 가지로 나누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을 견해의 청정이라고 합니다. 빠라맛타담마(궁극적 실재)라는 물질·정신을 이 네 가지로 분석해서 알면 확실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락카나(특성)'에는 사바와락카나(sabhāvalakkhaṇa개별적 특성)와 사만냐락카나(sāmaññalakkhaṇa공통적 특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바와락카나는 각각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사'는 본인, 개인이고 '바와'는 된다는 뜻입니다. 서로서로를 구별되게 하는 개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만냐락카나는 한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십바라밀에도 공통되는 사만냐락카나가 있고, 십바라밀 각각이 가지는 사바와락카나가 있습니다. 먼저 십바라밀의 사만냐락카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십바라밀의 락카나는 남에게 잘해주는 것, 남이 잘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빠라미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일부러 거짓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러 거짓으로 하면 고귀한 마음이 아니고, 고귀한 마음이 아니면 빠라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남의 행복과 이익을 챙겨 주려고 하는 것이 모든 빠라미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는 것이 빠라미의 락카나입니다.
십바라밀의 라사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락카나와 조금 비슷한 것 같지만, 라사는 직접 일을 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이 진짜로 고마워하는 일을 해서 은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빠라미의 역할입니다... 행위를 말합니다. 빠라미는 누가 봐도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마운 일을 해내는 것이 빠라미의 라사입니다.
십바라밀의 빳쭈빳타나는 어떤 행동이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편드는 사람, 자기 가족만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빠라미라고 하면 무량한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의 행복을 챙기고 있다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십바라밀의 빠닷타나는 마하까루나(대연민)와 우빠야꼬살라(지혜)입니다. 연민과 지혜가 있어야 빠라미를 할 수 있습니다. 연민과 지혜가 생기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빠라미가 됩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대연민과 지혜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연민과 지혜가 빠라미의 가까운 원인입니다. 이상 네 가지는 모든 십바라밀에서 공통되는 이야기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40,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① 빠라미의 락카나(lakkhaṇā, 특징): 남이 잘 되게끔 한다.
② 빠라미의 라사(rasa, 역할): 남에게 이익이나 은혜를 주는 행위를 직접 한다.
③ 빠라미의 빳쭈빳타나(paccupaṭṭhāna, 나타남): 무량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챙겨주는 이미지로 떠오른다.
④ 빠라미의 빠닷타나(padaṭṭhāna, 가까운 원인): 연민과 지혜가 있으면 생각, 말, 행동이 다 빠라미가 된다.
필자는 이 네 가지 빠라미에 대한 설명을 공부하며, 빠라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덕(德)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이 있다', '덕을 베푼다'는 것은 남을 돕고 이익되게 하는 성품과 행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덕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도움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
빠라미의 사만냐락카나 역시 남을 돕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에서 준비, 근접, 수순, 종성의 마음을 거쳐 도와 과의 출세간 마음으로 들어갈 때, 종성의 마음에서 빠라미가 부족한 자는 도과의 마음을 경험하지 못해 열반을 성취하지 못한다.
더하여 일반 선업의 공덕은 사용하면 없어지지만(= 일반 보시공덕은 그것으로 잘 살다가 복을 다 까먹고 나면 다시 가난해진다),
빠라미 공덕은 사용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마다 잘 살게 되고, 잘 살면서도 복을 까먹지 않고 닙바나로 갈 때까지 그대로 따라간다.
이것이 빠라미의 힘이고, 이러한 이유로 빠라미 공덕이 윤회에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반드시 십바라밀을 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빠라미가 부족한 자는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 '도과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그 십바라밀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이 네 가지 무량심인 '자비희사'다.
'자비희사'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은 열심히 세상을 받들고 산다는 의미와 같다.
따라서 열반을 성취하길 원하는 선남자는 자비희사를 실천하여 덕을 쌓고, 꾸준한 공부와 수행으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5. 빠라미를 실천하는 마음가짐, 자비희사
우리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선업을 하게 되는데 그때 어떤 마음으로 선업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선업을 하더라도 오로지 닙바나(열반)로 향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보시하면 스님들께서 축원하면서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이 선업 공덕이 생로병사 삼세 윤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 성취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를!)"라고 하지요? 평소에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선업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선업을 할 때마다 닙바나로 향하는 의지가 강하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그 의지를 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삶의 목표 설정이 확실해집니다... 놓아 버려야 하는 것을 잡고 있고, 잡고 가야하는 것을 버리고 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열반을 향한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 태어나더라도 헤매지 않습니다.
우리가 했던 선업과 불선업으로 윤회하게 되지만, 즉 선업으로 인간, 천신, 범천으로 태어나고 불선업으로 사악처에 떨어지지만, 우리는 그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이런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목표 설정이 아주 뚜렷해야 합니다. 닙바낫사(열반의), 빳짜요(조건이), 호뚜(되기를)!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라는 마음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부처님께서 수행의 기본자세로 말씀하시는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성냄을 버리고 수행한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위네이야(버린다), 로께(세상, 오온), 아빗자(지나친 욕심), 도마낫상(성냄, 불만족, 괴로움).
우리는 수행하면서 점점 욕심도 없어지고 성냄도 없어집니다. 세상이 요동칠 때마다 내가 따라서 요동치고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오온)은 조건 따라 일어나 사라지고 있는데, 그에 따라 내가 춤추고 있으면 나만 힘들게 된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어떻게 되든 오만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세상(오온)을 어떻게 보고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데 그 마음이 바로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 입니다.
선업을 할 때마다 항상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는다고 삶의 의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자비희사(사무량심)'가 됩니다... 그냥 챙겨주고 행복하게 해 주고 보호해 주고 유익하게 해주고 싶어 지는데, 그것이 바로 '자비희사'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사무량심(cattāriappamāṇacittāni짯따리압빠마나찟따니)
① 자무량심(mettappamāṇacitta멧땁빠마나찟따)
② 비무량심(karuṇappamāṇacitta까루납빠마나찟따)
③ 희무량심(muditappamāṇacitta무디땁빠마나찟따)
④ 사무량심(upekkhappamāṇacitta우뻭캅빠마나찟따)
무량(appamaññā압빠만냐)은 대상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은 모든 중생들을 대상으로 삼아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내 남편, 내 부인, 내 딸, 우리나라가 아니고 '모두가 하나'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무량은 벽이 깨져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한계가 없음' 입니다.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고,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 결국 서로서로를 위하고 아껴주고 보살피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무량심은 모든 중생을 기쁘게 해 주려는 자애의 마음이고, 비무량심은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의 마음이고, 희무량심은 타인의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수희의 마음이고, 사무량심은 모든 중생들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뜻대로 안 되더라도 모든 존재들은 자기 업대로 사는 것이라고 알고 평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애와 연민과 수희로 베풀 수 있는 것을 다 베풀고 마지막에는 평정심으로 본인의 마음을 고요하게 지켜야 합니다. 업에 대한 견해를 바르게 가지면 평정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항상 자아의 입장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무아의 의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아로 가면 못 살게 된다. 무아로 가면 삶의 의욕이 떨어진다.'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무아'의 마음이 커질수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네 가지 무량심이 커집니다. 무아를 체득하면 범천의 성향들이 나타나고, 아상이 커질수록 동물의 성향이 강해집니다. 인간은 동물과 범천의 반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동물의 성향을 줄여야 하고 범천의 성향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무아의 정신과 함께 생로병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로 향하고 있는 마음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을수록 아상이 깨지고, 아상이 깨질수록 모두가 하나라는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정신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초월하지 않는 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도 지혜가 없다면 세상에서 도망친다 한들 세상 속입니다. 즉 출세간법 없이 세상을 벗어났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착각이라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을 피할 수 없이 만나야 하는데 그때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많이 훈련해야 합니다. 그 훈련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계·정·혜를 실천 수행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행동을 하게끔,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게끔 계율로 훈련시킵니다. 마음은 정(선정)을 키우는 사마타 수행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훈련시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으로 어리석지 않고 지혜를 증장시키도록 훈련시킵니다. 이렇게 계·정·혜를 훈련시키고 있는 이유가 바로 '자비희사'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즉 범천의 성향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이지요... 아상을 버릴 때 더 이상 애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사무량심(자비희사)' 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내 뜻'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닌 '무아'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평정을 유지합니다. 내가 자애와 연민으로 잘 되기를 소망했던 일들이 도저히 안될 때 실망하지 않고, '삽베삿따깜맛사까(sabbesattakammassaka모든 중생들은 업의 상속자로 자기 업의 주인이다)'를 아는 지혜로, 자신이 했던 일의 결과를 자신이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담담한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평정(우뻭카)으로 살게 됩니다.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며 사는 삶이 브라마위하라(범천의 삶) 입니다. 브라마(범천), 위하라(삶, 사는 곳). 범천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범천이고, 범천의 삶을 사는 사람이 범천입니다. 우리는 비록 욕계에서 범천은 아니지만 범천같이 살 수는 있습니다. 아주 비싼 호텔에서 하루 숙박비를 지불하면 하루 머물 수 있듯이, 범천의 집에 살려면 범천의 값을 내면 됩니다. 범천의 값이 '자비희사' 입니다. '자비희사'로 살면 인간이면서 동시에 범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브라마위하라를 위한 첫 번째 일이 보시입니다. 우리는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실제로 무엇이 없어집니까? 욕심이 없어집니다. 진정한 보시라면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주었다면 없어지는 것이 욕심이고 생기는 것이 공덕입니다. 그 공덕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든 가난하지 않고 항상 부자로 잘 살게 됩니다. 부자로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 욕심 없이 잘 보시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업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했던 일의 힘이 따라오는 것이 업과 과보의 법칙입니다.
둘째, 실라(sīla지계)입니다. 계율을 왜 지키는가?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몸과 입으로 남을 해치게 됩니다. 말과 행동으로 남을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해치고 있는 것이 파계입니다. 그러나 '자비희사'로 사는 사람은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자애가 없기 때문에 계율이 깨집니다. 자애로 사는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시의 뿌리는 알로바(alobha욕심없음)이고, 지계의 뿌리는 아도사(adosa성냄없음)입니다... '자비희사'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계율을 지키며 자신도 보호하고 남도 보호합니다.
셋째, 바와나(bhāvanā수행)입니다. '자비희사'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바와나, 즉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됩니다. '자비희사' 자체가 사마타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집중이 되어 지혜가 생기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지요... 여러분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하루 종일 마음을 챙기고 있는 것이 사마타 혹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수행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수행이 여러 가지라고 하는 것은 교리를 모르거나 심리를 분석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인이 하는 수행이 사마타가 아니고 위빳사나가 아니라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합니다. '바와나'라는 단어의 정의를 이해하면 어떤 수행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마음의 행위를 분석해 보면,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거나(사마타) 대상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위빳사나), 이 두 가지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낱낱이 보지 못하는 사람은 수행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본인의 수행이 제대로 안 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수행이 제대로 되면 마음을 알 수 있고, 마음을 알면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 즉 사마타와 위빳사나 뿐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면 우리의 삶에 다나(보시), 실라(지계), 바와나(수행), 이 세 가지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넷째, 아빠짜야나(apacāyana공경)입니다. 아빠짜야나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기 때문에 말하고 행동할 때 예의를 갖추게 됩니다... 존댓말을 쓰거나 겸손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아빠짜야나'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하기 때문에 계율에 속합니다.
다섯째, 웨이야왓짜(veyyāvacca봉사, 소임)입니다. 웨이야왓짜는 죄가 없는 일, 착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사찰에 가서 봉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웨이야왓짜'입니다. 그러나 그때 내 부모, 내 남편, 내 부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 너'가 아니고 '우리 모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을 그냥 하나의 세상으로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할 때 웨이야왓짜 공덕이 나타납니다. 봉사는 어디서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봉사를 할 때 아상이 없는 무아의 정신으로 하게 되면 닙바나로 갈 수 있는 빠라미가 됩니다... 웨이야왓짜는 몸으로 입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율에 속합니다.
여섯째, 빳띠다나(pattidāna공덕나눔, 회향)입니다. 빳띠(본인이 했던 공덕을), 다나(준다). 내가 한 선업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선업이 크고 작고를 떠나서 그 공덕을 자신과 인연 있는 모든 분들에게 다시 보시하는 것입니다. 회향하는 것 자체가 보시공덕 하나입니다... 내가 선업을 해서 공덕이 하나 생겼다면, 그 공덕을 회향함으로써 공덕이 또 하나 더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회향함으로써 선업의 공덕이 배로 더 커집니다... 열 개의 초에 불을 다 옮겨도 1번 촛불의 불꽃은 그대로이면서 밝기는 열 배로 밝아집니다... 회향하면 할수록 선업의 공덕은 점점 더 커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빳따(누가 회향하는 공덕을), 아누모다나(수희, 같이 기뻐하는 것)... 내가 직접 못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같이 기뻐하면 그 자체가 내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사람들, 보시하는 사람들,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두, 사두, 사두'라고 하면 빳따누모다나 공덕을 쌓는 것이고 그 공덕이 더 넓게 퍼져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빳다누모다나는 선업을 주고받기 때문에 보시 공덕에 속합니다.
여덟째, 담맛사와나(dhammassavana청법)입니다. 담마(법을), 사와나(듣는 것).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것도 '자비희사'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중요한 법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법문을 듣고 착해지고 지혜로워지고 행복해지면서 세상을 더 강력한 '자비희사'의 힘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배우면서 지식이 많아지고, 지식으로 지혜를 계발하면 나의 믿음과 노력이 커지고 사띠가 강해지고 그러면서 훌륭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담맛사와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지혜 계발이기 때문에 바와나 수행에 속합니다.
...이 열 가지를 '열 가지 복 짓는 법'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한다는 것은 이 열 가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비희사'는 아상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자비희사'가 무아의 이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무아는 무기력하게 의욕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아를 알수록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저절로 빠라미가 됩니다.
그리고 빠라미 공덕은 사용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공덕은 사용하면 없어집니다. 일반 보시공덕은 그것으로 잘 살다가 복을 다 까먹고 나면 다시 가난해집니다. 그러나 '자비희사'로 했던 다나빠라미(보시바라밀) 공덕은 태어날 때마다 잘 살게 되고, 잘 살면서도 복을 까먹지 않고 닙바나로 갈 때까지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것이 빠라미의 힘입니다. 빠라미는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인데 그때 윤회에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빠라미 공덕입니다. 반드시 십바라밀을 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십바라밀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이 네 가지 무량심인 '자비희사'입니다. '자비희사'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은 아주 열심히, 자기의 몸과 마음의 힘이 다 소진될 때까지 세상을 받들고 사는 것입니다. 용기 있게 힘차게 올바른 견해로,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면서 열 가지 복 짓는 법을 열심히 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삶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152~164, (사)법승 담마야나(2017)
1) 닙바나를 삶의 목표로 함
- 선업을 할 때마다 닙바나로 향하는 의지가 강하면 삶의 목표가 확실해지고, 다시 태어나도 그 의지가 이어져 언제 어디서 태어나더라도 헤매지 않는다.
- 우리는 그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목표 설정이 뚜렷해야 한다.
2)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이 버려짐
-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의 마음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부처님께서 수행의 기본자세로 말씀하시는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성냄을 버리고 수행한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 위네이야(버린다), 로께(세상, 오온), 아빗자(지나친 욕심), 도마낫상(성냄, 불만족, 괴로움)
3) 아상이 버려지고 무아를 체득함
-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으므로 아상은 줄어들고 무아의 정신이 강해진다.
- 무아를 체득하면 범천의 성향이 나타나고, 아상이 커질수록 동물의 성향이 강해진다.
- 모든 일이 '내 뜻'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닌 '무아'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평정을 유지한다.
- 내가 잘 되기를 소망했던 일들이 안될 때 실망하지 않고, '삽베삿따깜맛사까(sabbesattakammassaka모든 중생들은 자기 업의 주인이다)'를 아는 지혜로 담담한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평정(우뻭카)으로 산다.
4)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자비희사가 됨
- 무아를 통해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자비희사의 정신이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된다.
-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며 사는 삶이 브라흐마위하라(brahamā-vihāra범천의 삶)이다. 브라흐마(범천), 위하라(삶, 사는 곳).
- 범천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범천이고, 범천의 삶을 사는 사람이 범천이다. '자비희사'로 살면 인간이면서 동시에 범천이 될 수 있다.
- 사무량심(cattāriappamāṇacittāni짯따리압빠마나찟따니): 모든 중생들에게 자애와 연민과 수희로 베풀 수 있는 것을 다 베풀고 마지막에는 평정심으로 본인의 마음을 고요하게 지킨다.
- 자무량심(mettappamāṇacitta멧땁빠마나찟따): 모든 중생을 기쁘게 해 주려는 자애의 마음
- 비무량심(karuṇappamāṇacitta까루납빠마나찟따):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의 마음
- 희무량심(muditappamāṇacitta무디땁빠마나찟따): 타인의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수희의 마음
- 사무량심(upekkhappamāṇacitta우뻭캅빠마나찟따): 모든 중생들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뜻대로 안 되더라도 모든 존재들은 자기 업대로 사는 것이라고 알고 평정심을 가지는 것
5)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는 훈련, 계·정·혜
-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면 우리의 삶에 다나(보시), 실라(지계), 바와나(수행), 이 세 가지가 반드시 나타난다.
- 몸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행동을 하게끔,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게끔 계율로 훈련한다.
- 마음은 사마타 수행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훈련한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으로 어리석지 않고 지혜가 증장되도록 훈련한다.
- '자비희사' 자체가 사마타 수행이다. 하루 종일 마음을 챙기고 있는 것이 사마타 혹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 마음으로 하는 수행은 이 두 가지밖에 없다.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거나(사마타) 대상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위빳사나), 이 두 가지만 한다.
6. 윤회란 '움직임이 없어서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성공한 인생은 '열반을 향한 움직임'이 있는 인생이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할 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행복이란 고통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체가 고통 덩어리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고통이 없으려면 '나'라는 오온(물질과 정신)이 존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과 정신이 존재한다면 고통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어떤 다른 좋은 것들이 있더라도 완벽한 행복은 아닙니다. 세간의 행복은 고통이 섞여 있고 한계가 있는 행복이고 언젠가는 다시 고통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이란 닙바나(열반) 뿐입니다. 닙바나는 다시 생기지 않는 오온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오온이 소멸되어야 진정한 행복이고 완벽한 행복이 됩니다. 완전한 오온의 소멸이 닙바나라고 해서 '닙바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하면 안 됩니다. 닙바나는 궁극적 실재입니다.
닙바나를 성취하려면 우리는 선업을 할 때마다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정신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로 출세간을 목표로 두고 살면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는 것이 넥캄마(출가)입니다. 출가가 쉬운 일은 아니지요? 출가란 머리 깎고 가사 입고 비구 수계, 비구니 수계를 받아야 되는 것만이 아니라, 욕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다 넥캄마입니다. 넥캄마란 로바(lobha탐욕)에서 알로바(alobha무탐)로 가는 것입니다.
넥캄마(출리, 출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따라오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칸띠(인내)와 우뻭카(평정)입니다. 넥캄마는 자기가 가진 것을 놓아버리는 것인데 그러면서 따라오는 것이 칸띠입니다. 칸띠가 있으면 넥캄마로 인한 부족함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넥캄마는 칸띠가 있어야 완성됩니다. 넥캄마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지만 욕심을 버리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칸띠입니다.
그리고 우뻭카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즉 칭찬을 하던 욕을 하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던 나는 항상 세상을 한결같이 대하는 것이 우뻭카입니다.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유명해도 유명하지 않아도,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도 아니면 전혀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우뻭카입니다. 우뻭카는 무조건 내 뜻대로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잘 되기를 바라면서 자애로 대하지만 내 뜻대로 안 될 때도 욕심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좋은 상태이건 아니건, 좋은 사람이건 아니건, 좋은 것을 얻게 되던 나쁜 것을 얻게 되던, 변함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우뻭카입니다.
넥캄마(출리), 칸띠(인내), 우뻭카(평정)는 다 빠라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수행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본이기 때문에 열심히 훈련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와 함께 계·정·혜를 많이 훈련시키면 아상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기적인 마음과 분별심이 줄어들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모두가 하나, 즉 정신과 물질뿐이라고 알게 됩니다. 누구의 행복과 누구의 고통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과 고통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이 고맙고 은혜롭다고 여깁니다. 생각이 바르고 지혜가 깊으면 모든 것이 다 고맙습니다. 고맙기 때문에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은혜를 잘 압니다. 지혜가 없는 자는 아무리 은혜가 많아도 모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세상이 고마워 은혜를 갚고 싶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고 봉사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빠라미를 하는 마음은 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귀한 마음입니다... 고맙기 때문에 은혜로운 세상에 보답을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식이든 저런 식이든 다 서로서로 관계를 가지며 돕습니다.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면서 넥캄마, 칸띠, 우뻭카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다 보면 빠라미가 되는 좋은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게 되지요. 열 가지 복 짓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한다는 것은 말로만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도 많이 하고 입으로도 많이 하지만 실제 몸으로도 많이 표현해야 합니다. 어떻게? 다나(보시), 실라(계율), 바와나(수행), 아빠짜야나(공경), 웨이야왓짜(봉사), 빳띠다나(회향), 빳따누모다나(타인의 공덕을 같이 기뻐함), 담맛사와나(청법), 담마데사나(설법), 딧티주깜마(견해를 바로 잡는 일), 이 열 가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불자로서 마지막에서는 빠라미를 하게 되는데, 빠라미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희사'를 실천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이 넥캄마, 칸띠, 우뻭카입니다. '자비희사'는 이 세 가지로 시작해야 합니다. 넥캄마, 칸띠, 우뻭카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계·정·혜로 마음을 닦아 번뇌를 씻어내어 아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상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만큼 넥캄마, 칸띠, 우뻭카의 마음을 가지기가 쉬워지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하면서 열 가지 복 짓는 법을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것이 십바라밀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십바라밀이 완성되는 날이 우리가 깨닫는 날이 되고 생로병사 삼세윤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집중이 안 된다고 화를 내는데 집중이 잘 된다면 사실 수행할 필요가 없지요? 집중이 안되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입니다. 반복 훈련하는 수행으로 집중력을 키우고 지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빠라미를 하겠다고 해도 빠라미가 바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계속 마음을 반복적으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반복하는 것이 능숙함을 만듭니다. 한 번 연습하는 사람과 100번 연습하는 사람은 그 능숙함 정도가 다릅니다. 100번 하는 사람과 1,000번 하는 사람은 그 능숙함의 정도가 확연히 다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훈련입니다. 지계도 훈련이고, 사마타 수행으로 집중력을 기르는 것도 훈련이고, 지혜를 계발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수행이란 몸과 마음을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입니다. 만약 1초에 한 번 보는 속도로 1시간을 수행한다면 3,600번을 보게 되고, 하루에 10시간 수행한다면 36,000번 관찰하게 됩니다. 10일 수행했다면 360,000번 관찰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함으로써 능숙함을 만들어 내는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체육계에서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려면 최소한 10년 이상 훈련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하는 운동도 10년 이상씩 하면서, 그것도 100명 중에 한 명 혹은 1,000명 중에 겨우 한두 명 정도가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어려운데, 하물며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마음으로 하는 수행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수행은 윤회를 벗어나는 대표선수가 되는 일로... 그러면 우리도 최소한 10년 이상은 수행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한 시간 해 보고, 하루 해 보고, 일주일 해 보고, 안 된다고 짜증 내지 말고 꾸준히 반복해야 합니다. 작심삼일로 끝내지 말고 반복해서 꾸준히 하면 성공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올바른 태도로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한 번씩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들이 별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의미하다는 느낌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지 못한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우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못 찾았을 때 괴롭습니다. 싯닷타 태자가 왜 출가합니까? 괴롭기 때문입니다. 다 갖추었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그것이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괴롭습니다.
우리가 권세가나 재벌을 보고 대단하다고 부러워할 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이 텅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심입니다. 욕심 있는 자가 행복하다면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착각입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진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롭다고 해도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알 때는 조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 청정할 수 있는 길도 모르고 행복하다면 자기 수준에 맞는 행복이지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100년 인생은 똑같이 힘들지만 100년 후 '일'의 끝남은 다릅니다. '일'이란 완전한 행복(닙바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지혜로워지면 누구라도 언젠가는 꼭 하게 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필요하다고 알지만, 이 일은 숨 쉬는 것처럼 꼭 해야 한다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알게 되면 무조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100년 인생을 살면서 닙바나까지 1,000km를 가야 한다고 할 때, 방향을 바로 잡고 100km 갔다면 남은 길은 900km이고, 방향을 모른다면 열심히 가도 늘 1,000km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즉 길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은 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리학에서 여기서 저기까지의 움직임이 없다면 에너지 소멸이 있어도 '일'이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몇 생을 살아도 '여기서(윤회) 저기까지(닙바나)'라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면 헛된 인생입니다. 얼마 정도라도 움직임이 있어야 '일(윤회에서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빠라미입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 살면서 빠라미가 되는 일을 몇 가지나 했는가, 그것을 체크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십바라밀 공덕이 있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완벽한 지혜로 알 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다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착각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항상 빠라미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빠라미를 실천하는 삶이 움직임이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윤회의 시작을 많이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이런 철학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시작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윤회의 시작과 끝은 움직이지 않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윤회에서 제 아무리 날고 뛰면서 잘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움직임이 조금도 없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제자리걸음에 무슨 시작과 끝이 있습니까? ...늘 한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시작과 끝이 무의미합니다... 윤회는 말 그대로 윤회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시작도 끝도 없이, 제자리에서 계속 그냥 빙빙 돌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런 윤회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윤회의 시작은 없습니다. 윤회는 원인과 결과로 굴러갑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윤회는 인과의 흐름일 뿐, 윤회의 시작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시작이라면 시작의 원인이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인의 원인도 있어야 합니다... 윤회란 움직임이 없어서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돌 때는 시키는 대로 돌았는데, 단지 돌기만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알면 더 이상 돌지 않습니다. 강요해도 돌지 않습니다. 윤회도 마찬가지로 모르기 때문에 계속 돌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 필요가 없다고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돌고 있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아는 사람은 돌지 않습니다. 누가 말해도 돌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자마자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몰라서 윤회하였다. 이제 알았다.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오도송입니다.
...이와 같이 윤회는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게 빙빙 돌고 있습니다. 모습만 바꾸어 거듭 생멸하면서 의미 있는 새로운 삶을 산다고 착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이 아니라고 하려면 열반으로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열반을 향한 움직임이 있어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끝에 도착해 보니까 제자리라면 우리는 많이 실망하겠지요? 한 생을 열심히 살고는 만족하고 있는데, 사실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윤회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태어나서 부지런히 열심히 많은 일을 하고 살지만 아무 보람도 없는 헛된 인생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삶에서 헛되지 않은 것이 바로 빠라미입니다. 빠라미가 되는 선업이 나의 인생을 닙바나로 갈 수 있게끔 조금이라도 움직여준다고 알아야 합니다.
빠라미란 고귀한 분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번뇌가 없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때 고귀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고귀할 때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귀해집니다... '나'에 대한 욕심, 애착, 집착을 버리면서 하는 일은 다 빠라미가 됩니다... 친지나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그들을 집에 한 번씩 찾아오는 손님을 대하듯이 한다면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빠라미가 됩니다. 긴 윤회를 한 생으로 보고 이번 생을 하루로 본다면, 하루살이 인생에서 그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면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데 욕하고 해칠 마음이 날까요? 더 잘 해주고 싶지요? 욕심으로 애착, 집착하지 않고 지혜롭게 잘 해주면 다 빠라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완전히 뒤집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생은 이대로 흘러가도록 두고, 나의 가치관만 바꾸어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 똑같은 삶이라도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고 말과 행동도 아주 아름답게 달라집니다.
지금 모두 삭발하고 일주일, 한 달, 삼 개월간 수행하라고 하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 현실 속에서 지혜롭게 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선업(빠라미)을 할 때도 어렵고 힘들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조금씩 조금씩 빠라미 공덕이 쌓여갑니다. 그런 식으로 꾸준히 해가다 보면 진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는 공덕들이 차차 많아지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1,000km 가야 닙바나에 도착할 수 있다면 내가 1m만 가도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철학 없이 십바라밀을 시작하지 않으면 항상 제자리에 있게 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윤회에서 살아온 수많은 인생이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바라밀을 완성해야 사성제를 깨닫고 닙바나를 성취할 수 있음을 알고 십바라밀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십바라밀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고귀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가? ...고귀한 마음은 지금처럼 끊임없이 계·정·혜를 닦고 닦아 번뇌에 찌든 우리 마음을 씻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계속 계·정·혜를 훈련하면 아상이 없어집니다. 아상을 내려놓게 되면 세상을 하나로 보게 되고 너와 나라는 분별심이 없어집니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 마음이 생기니까 세상을 대할 때 '자비희사'로 대하게 됩니다. 아상을 내리는 것이 빠라미의 기본입니다. 아상을 내리고 고귀한 마음으로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다 빠라미가 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는 행동 하나 하나 남을 해치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말해야, 어떻게 행동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두루 이익이 될까?'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삶 자체가 빠라미가 되는 것입니다.
빠라미를 잘 실천하려면 먼저 '닙바낫사빳짜요호뚜(열반의 원인이 되기를!)' 라는 마음의 씨앗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계·정·혜를 닦음으로써 아상을 내리게 되고 아상을 내릴 수 있는 만큼 넥캄마(출가), 칸띠(인내), 우뻭카(평정)의 기본적인 나뭇가지 세 개가 생기고, 그 가지에서 잎들이 무성하게 나오듯 '자비희사'로 세상을 대하는 힘들이 생깁니다. 마침내 꽃이 피듯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빠라미 공덕이 됩니다. 빠라미 공덕이라는 꽃이 필 때 그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닙바나로 갈 때까지 이 공덕이 우리를 계속 뒷받침해 주면서 따라옵니다. 닙바나가 열매이지요?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174~197, (사)법승 담마야나(2017)
1) 닙바나를 성취하려면 선업을 할 때마다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정신으로 한다.
-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로 출세간을 목표로 두고 살면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이 버려진다.
-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는 것이 넥캄마(출가)다.
2) 우뻭카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던 나는 항상 세상을 한결같이 대하는 것이다.
- 우뻭카는 무조건 내 뜻대로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잘 되기를 바라면서 자애로 대하지만 내 뜻대로 안 될 때도 욕심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 좋은 상태이건 아니건, 좋은 사람이건 아니건, 좋은 것을 얻게 되던 나쁜 것을 얻게 되던, 변함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대한다.
3) 넥캄마(출리), 칸띠(인내), 우뻭카(평정)와 함께 계·정·혜를 많이 훈련시키면 아상이 떨어져 나가고, 세상의 은혜에 고마워한다.
- 이기적인 마음과 분별심이 줄어든다. 온 세상이 고맙고 은혜롭다고 여긴다. 고맙기 때문에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 지혜로운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세상이 고마워 은혜를 갚고 싶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고 봉사하고 도와준다.
-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면서 넥캄마, 칸띠, 우뻭카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다 보면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게 된다. 열 가지 복 짓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4) 안되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이다. 반복하는 것이 능숙함을 만든다.
- 우리가 수행하면서 집중이 안 된다고 화를 내는데, 집중이 잘 된다면 사실 수행할 필요가 없다. 집중이 안되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이다.
- 반복 훈련하는 수행으로 집중력을 키우고 지혜를 계발한다. 마찬가지로 빠라미를 하겠다고 해도 빠라미가 바로 완성되지 않는다. 계속 마음을 반복적으로 훈련시켜야 한다.
- 한 번 연습하는 사람과 100번 연습하는 사람은 그 능숙함 정도가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훈련이다. 지계도 훈련이고, 사마타 수행으로 집중력을 기르는 것도 훈련이고, 지혜를 계발하는 것도 훈련이다.
- 수행이란 몸과 마음을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이다. 수행이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함으로써 능숙함을 만들어 내는 아주 단순한 일이다.
- 수행은 윤회를 벗어나는 대표선수가 되는 일로 최소한 10년 이상은 수행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한 시간 해 보고, 하루 해 보고, 일주일 해 보고, 안 된다고 짜증내지 말고 꾸준히 반복해야 한다. 작심삼일로 끝내지 말고 반복해서 꾸준히 하면 성공한다.
5) 살아가는 100년 인생은 똑같이 힘들지만 100년 후 '일'의 끝남은 다르다. '일'이란 완전한 행복(닙바나)을 성취하는 것이다.
- 이 일은 지혜로워지면 누구라도 언젠가는 꼭 하게 되는 일이다.
- 이 일은 숨 쉬는 것처럼 꼭 해야 한다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알게 되면 무조건 하게 된다.
- 길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은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에너지 소멸이 있어도 '일'이 성립이 안 된다. 우리가 몇 생을 살아도 '여기서(윤회) 저기까지(닙바나)'라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면 헛된 인생이다. 얼마 정도라도 움직임이 있어야 '일(윤회에서 벗어나는 일)'이 된다.
- 윤회의 시작과 끝은 움직이지 않는 제자리걸음이다. 윤회에서 제 아무리 날고 뛰면서 잘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움직임이 조금도 없는 제자리걸음이다. 윤회는 말 그대로 아무런 의미 없이, 시작도 끝도 없이, 제자리에서 계속 그냥 빙빙 돌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윤회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 윤회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아는 사람은 돌지 않는다. "내가 몰라서 윤회하였다. 이제 알았다.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없다."
-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게 빙빙 돌고 있다. 모습만 바꾸어 거듭 생멸하면서 의미 있는 새로운 삶을 산다고 착각한다. 우리의 인생이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이 아니라고 하려면 열반으로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열반을 향한 움직임이 있어야 성공한 인생이다.
- 윤회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태어나서 부지런히 열심히 많은 일을 하고 살지만 아무 보람도 없는 헛된 인생을 산 것과 같다.
6) 빠라미를 잘 실천하기 위해...
- 먼저 '닙바낫사빳짜요호뚜(열반의 조건이 되기를!)' 라는 마음의 씨앗을 잘 만들어 낸다.
- 계·정·혜를 닦아 아상을 내린다.
- 아상을 내릴 수 있는 만큼 넥캄마(출가), 칸띠(인내), 우뻭카(평정)의 기본적인 나뭇가지 세 개가 생긴다.
- 그 가지에서 잎들이 무성하게 나오듯 '자비희사'로 세상을 대하는 힘들이 생긴다.
- 마침내 꽃이 피듯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빠라미 공덕이 된다.
- 빠라미 공덕이라는 꽃이 필 때 그 꽃은 시들지 않는다. 닙바나로 갈 때까지 이 공덕이 우리를 계속 뒷받침해 주면서 따라온다.
- 닙바나는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