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비상카라에 대한 필자의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는 글이다.
더하여 초기불교 학습 시 '퓨어담마' 사이트를 인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견해를 소개한다.
1.
필자는 '네 가지 업, 아비상카라와 상카라, 업과 업의 길에 대한 이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에서 아비상카라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해당 글에서 필자는 '아비상카라'와 관련하여 퓨어담마의 견해를 인용하였는데, 그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아비상카라에서 '아비(abhi)'는 ‘더 강한’의 뜻이다.
- 상카라와 아비상카라는 구분된다.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만이 재생연결의 과정을 이끈다.
- 상카라(sankhāra)가 강하게 될 때, 재생연결(윤회)로 이끌 수 있는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한 상카라)로 불린다.
2.
이와 관련해서 선배 도반 분께서 해당 견해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셨고, 필자는 그 내용에 대해 우 실라 사야도께 확인을 거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아비상카라는 ‘강한 상카라’가 아니라 '업을 형성하는' 상카라이다.
- 아비상카라는 ① 삶의 과정에서나 ② 재생연결에서나 모두 과보를 만드는 모든 선/불선 의도(마음)를 포함한다.
- 즉, 아비상카라는 일반적인 업(약한 업)을 생성하기도 하고, 재생연결을 결정짓는 업(강한 업)을 생성하기도 한다.
1)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상카라(행, saṅkāra)는 초기불교에서 네 가지 의미로 쓰인다.
...Saṁ(함께)+√kṛ(행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ṛ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行)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상카라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첫째, 제행무상과 제행개고의 문맥에서 제행(諸行, sabbe saṅkāra)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saṅkhata-dhamma)들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형성된 것들'로 통일해서 옮기고 있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saṅkhāra-kkhandha)으로 나타나는데,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물질)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은 아비담마의 심소법들이고 식은 아비담마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50가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과 유익한 심리현상들 모두와 해로운 심리현상들 모두를 포함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행온은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로 옮기고 있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쓰이는데, 『청정도론』에서 '공덕이 되는 행위,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⁹⁴⁾'로 설명이 되듯이 이 경우의 행은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mma)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의도적 행위들'로 옮긴다.
⁹⁴⁾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해로운 의도이다. '흔들림 없는 행위(āneñja-abhisaṅkhāra)'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의도이다."(청정도론 XVII.60)
넷째,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kāya-saṅkhāra)·구행(vacī-saṅkhāra)·의행(mano-saṅkhāra)으로 나타난다... 이때의 행은 의도적 행위이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 (『청정도론』 XVII.61 참조) 그래서 신행·구행·의행은 각각 신업·구업·의업의 삼업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이 신·구·의 삼행은 상황에 따라 '작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몸의 상카라(신행)를 들숨날숨으로, 말의 상카라(구행)를 일으킨 생각(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vicāra)로, 마음의 상카라(의행)를 느낌과 인식으로 설명하는 경이 몇 군데 있다. 이 경우에 상카라는 '작용'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들숨날숨이나 생각과 고찰이나 느낌과 인식은 결코 의도적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특히 『청정도론』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상윳따 니까야』에서 저자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
- 각묵스님 지음, '초기불교이해' pp.127~129, 초기불전연구원(2010)
상카라는 'Saṁ(함께) + √kṛ(행하다) → 행(行)'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 상카라의 첫 번째 의미: '형성된 것들' → 항상 복수로 쓰인다.
- 제행(諸行, sabbe saṅkāra)
- 유위법(saṅkhata-dhamma)
- 열반을 제외한 모든 정신과 물질 법들
- 상카라의 두 번째 의미: '심리현상들'(행), '심리현상들의 무더기'(행온) → 항상 복수로 쓰인다.
-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saṅkhāra-kkhandha)
- 오온에서 색법과 심법을 제외한 심소법들 중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50가지 심소법들 모두를 지칭
- 상카라의 세 번째 의미: '업형성들, 업지음들'(kamma-formations), '의도적 행위들(= 업, kamma)' → 항상 복수로 쓰인다.
- 12연기의 두 번째인 무명연행(無明緣行)
-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 흔들림 없는 행위(āneñja-abhisaṅkhāra)
- 상카라의 네 번째 의미: 신행(kāya-saṅkhāra)·구행(vacī-saṅkhāra)·의행(mano-saṅkhāra)의 삼행
- 이때의 행은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의도적 행위' → 신행·구행·의행은 각각 신업·구업·의업의 삼업과 동의어
- 신·구·의 삼행을 업이 아닌 '작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경우: 의도적 행위가 아닌 경우(e.g. 들숨날숨, 느낌과 인식)
12연기에서 두 번째 구성요소인 상카라(saṅkhāra)는 형성된 법들인 saṅkhata-dhamma가 아닌, 업을 형성하는 상카라의 적극적인 측면인 '의도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업]형성(행, saṅkhāra)이다.
이것은 세 번째 구성요소인 알음알이(=재생연결식, viññāṇa)의 조건이 된다.
즉,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을 형성한다.
3번째 의미와 4번째 의미는 '작용'과 같은 예외 케이스를 제외하면 대체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업을 짓는 문에 따라 3가지로 구별했을 뿐, 상카라의 4번째 의미 역시 그 역할이 '업형성', '의도적 행위', '업'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2)
위 인용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각묵스님이 직접적으로 아비상카라에 대한 정의를 설하신다.
-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 →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긴다.
즉, 아비상카라의 뜻은 상카라의 네 가지 용례 중 3번째 의미와 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이 니까야의 다른 주해에서도 일관되게 설명된다.
³⁵⁸⁾"...주석서의 설명에서 보듯이 abhisaṅkharoti나 이것의 명사인 abhisaṅkhāra는 초기경과 특히 주석서에서는 업형성력이나 의도적 행위(cetanā)라는 상카라[行]의 적극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 XVII. §46에서도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를 일러 업형성(abhisaṅkharaṇaka)의 상카라라 부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대림스님 옮김,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의도 경(A4:171)」 p.374, 초기불전연구원(2006)
abhisaṅkharoti, abhisaṅkhāra는 의도적 행위(cetanā)를 통해 업을 형성하는(= 업을 짓는) 상카라[行]의 적극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이는 업형성의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라고 불리며,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이다.
3)
왜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난다'고 한정해서 말하는가?
무명이 있을 때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고, 그것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의 과보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명이 소멸할 때(=아라한과를 성취할 때)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일으키는 의도가 없다.
20가지 과보의 법이 아닌 의도(= 작용만 하는 마음들 20가지)가 일어날 뿐이다.
의도 경(A4:171)
Cetanā-sutta
1. "비구들이여, 몸이 있을 때³⁵⁴⁾ 몸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말이 있을 때³⁵⁵⁾ 말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마노³⁵⁶⁾가 있을 때 마노를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 의도는 무명을 조건으로 한³⁵⁷⁾ 것이다."
³⁵⁴⁾"'몸(kāya)이란 몸의 문(kāya-dvāra)을 말한다. 그러므로 몸이 있을 때(kāye sati)란 몸의 암시(kāya-viññatti)가 있을 때란 뜻이다."(AA.iii.144)
『청정도론』은 몸의 암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에 의해 생긴 바람의 요소가 앞으로 나아가는 등의 행동을 생기게 한다. 이 바람의 요소의 형태 변화(ākāra-vikāra)를 '몸의 암시(kāya-viññatti)'라 한다. 이것은 동시에 태어난 물질의 몸을 뻣뻣하게 하고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조건이다. 이것의 역할은 의도하는 것을 넌지시 알리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원인으로 나타난다. 이것의 가까운 원인은 마음으로부터 생긴 바람의 요소이다. 이것은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의도한 것을 알리는 원인이고 또 그 자체가 몸을 통하여, 즉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알아져야 하기 때문에 몸의 암시라 한다. 이 몸의 암시는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을 움직인다. 또한 온도로부터 생긴 물질 등도 이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과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 등이 생긴다고 알아야 한다."(Vis.XIV.61)
아비담마에서는 이 몸의 암시를 업을 짓는 매개체라 하며 그래서 몸의 문(kāya-dvāra)이라 한다. 그래서 위 주석서도 몸을 몸의 문으로, 다시 몸의 암시로 설명하고 있으며 본문에서 의도(sañcetanā)로 언급되는 업(kamma)은 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22의 해설 참조)
³⁵⁵⁾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말(vacī)은 말의 문(vacī-dvāra)을 뜻하고 말의 문은 바로 말의 암시(vacī-viññatti)이며 이것은 말의 업을 짓는 문이 된다.
³⁵⁶⁾ 같은 방법으로 마노(mano)는 마노의 업을 짓는 문이며 이를 마노의 문(mano-dvāra)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노의 문이란 이런 의도적인 행위 즉 업에 개입된 매순간 일어나는 알음알이를 전체적인 측면에서 일컫는 집합적인 명칭이라고 CMA는 설명하고 있다... 한편 아비담마에서는 구체적으로 잠재의식(바왕가, bhavaṅga-citta)을 일러 마노의 문이라 한다...
³⁵⁷⁾ "만일 [사실을] 가려버리는 무명이 조건이 되면 세 가지 문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조건이 되는 의도가 일어난다. 이처럼 근본이 되는 무명을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한 것이다."(AA.iii.144)
즉 주석서는 무명은 마음의 문에서만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문과 말의 문을 포함한 세 문 모두에서 의도가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2. "비구들이여, 스스로가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지으면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그에게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지으면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면서³⁵⁹⁾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지으면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서³⁶⁰⁾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지으면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³⁵⁹⁾ "유익한 것(kusala)을 유익한 것이라고 해로운 것(akusala)을 해로운 것이라고 유익한 과보를 유익한 과보라고 해로운 과보를 해로운 과보라고 알면서 몸의 문을 통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는 것을 말한다." (AA.iii.145)
³⁶⁰⁾ 주석서는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짓는 업(asampajāna-kamma)의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부모님들이 하는 대로 해야지 하면서 탑에 예배를 하고 꽃을 공양하고 비구 승가를 공경한다. 그들은 이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유익한 것이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손으로 부모를 때리고 비구들에게 손을 치켜들고 막대기를 들고 욕을 하는 것은 알든 모르든 해로운 업이라고 알아야 한다." (Ibid)
3. "비구들이여, 스스로가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지으면..."
4. "비구들이여, 스스로가 마노로 의도적 행위를 지으면..."
5.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은 무명의 영향을 받는다.³⁶¹⁾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할 때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몸이 없으며(필자 주 - 몸으로 짓는 의도적 행위)³⁶²⁾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말이 없으며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마노가 없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터전(필자 주 - 업)이 존재하지 않고... 기반(필자 주 - 업)이 존재하지 않고... 장소(필자 주 - 업)가 존재하지 않고... 이유(필자 주 - 업)가 존재하지 않는다."³⁶³⁾
³⁶¹⁾ "이러한 의도라는 법(cetanā-dhamma)들은 무명을 반연한 것이다. 무명은 의도라는 법들에게 함께 생긴 조건(sahajāta), 의지하는 조건(upanissaya)이다. 이와 같이 무명은 윤회(vaṭṭa)뿐만 아니라 윤회의 뿌리라고 알려주시는 것이다."(AA.iii.146)
³⁶²⁾ "번뇌 다한 아라한도 탑전을 청소하고 보리수나무 주위를 청소하고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하는 등의 몸으로 짓는 행위를 한다. 몸의 문에서는 20가지 과보의 법이 아닌 의도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몸이 없다'고 했다. 몸의 문을 통해서 생긴 의도(cetanā)가 여기서는 몸과 동의어이다. 이것은 말과 마노에도 적용이 된다."(Ibid)
즉 여기서 몸이 없다는 말은 몸의 문으로 일으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라고 분명이 밝히고 있다.
³⁶³⁾ "여기서 '터전(khetta)' 등은 모두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의 이름이다. 업은 과보(vipāka)를 자라게 하는 장소라는 뜻에서 '터전'이라 하고 확립되게 한다는 뜻에서 '기반(vatthu)'이라 하고 원인이라는 뜻에서 '장소(āyatana)'라 하고 이유라는 뜻에서 '이유(adhikaraṇa)'라 한다." (AA.iii.147)
- 대림스님 옮김,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pp.373~376, 초기불전연구원(2006)
4)
따라서 아비상카라는
- 업(kamma)의 동의어이고,
- 12연기의 두 번째인 [업]형성(행, saṅkhāra)과 동의어이며,
- 유익한 의도(kusala-cetanā), 해로운 의도(akusala-cetanā), 유익한 의도나 해로운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cetanāsampayutta-dhammā)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업(kamma)을 종합적으로 정의해 보면 업은 유익한 의도(kusala-cetanā)나 해로운 의도(akusala-cetanā), 그리고 이러한 유익한 의도나 해로운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cetanāsampayutta-dhammā)이고 이러한 업은 12연기의 두 번째인 [업]형성(행, saṅkhāra), 즉 업형성의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 Vis.XVII.46)와 동의어이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30, 초기불전연구원(2017)
5)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아비상카라는 '아라한이 되기 전 속행 마음으로 짓는 모든 선·불선 의도'임을 알 수 있다.
44. ...아윗자(무명)가 바로 빳짜야(조건)이기 때문에 아윗자빳짜야(무명을 조건으로)라 한다. 그러므로 '무명(avijjā)을 조건으로(paccayā)'라고 했다. 형성된 것을 계속 형성한다(abhisaṅkharonti)고 해서 상카라들이라 한다. 이것은 두 가지이다. 즉 ㉮ 무명을 조건으로 한 상카라들과 ㉯ 상카라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온 상카라들이다.
이 가운데서 ㉮ 무명을 조건으로 한 상카라들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 흔들림 없는 행위(āneñja-abhisaṅkhāra)의 세 가지와 몸의 상카라, 말의 상카라, 마음의 상카라의 세 가지 - 이 여섯 가지이다. 이들은 모두 세간적인 유익함과 해로움(선·불선)의 의도(cetanā)일 뿐이다.
45. ㉯ 상카라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온 상카라들은 ① 형성된 상카라(saṅkhata-saṅkhāra) ② 계속 형성된 상카라(abhisaṅkhata-saṅkhāra) ③ 계속 형성하는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 ④ 몰두하는 상카라(payoga-abhisaṅkhāra) - 이 네 가지이다.
46. 이 가운데서 ① "참으로 무상하구나, 상카라들은(D.ii.157)" 등에서 설한 조건을 가진 모든 법들을 '형성된 상카라'라 한다. ② 업에서 생긴 삼계의 물질과 정신의 법들이 '계속 형성된 상카라'라고 주석서에서 말했다. 이들은 '참으로 무상하구나, 상카라들은'에 포함된다. 그들이 따로 언급된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③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를 '계속 형성하는 상카라'라 부른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휩싸인 사람이 만일 공덕이 되는 행위를 계속 형성한다면(S.ii.82)"이라는 등에서 그것이 언급된 경우를 발견한다. ④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몰두하는 상카라'라 부른다...
47. ... 상카라는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① 형성된 상카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51. ...상카라들은 계속 형성하는 특징을 가진다. 쌓는 역할을 한다. 의도로 나타난다. 무명이 가까운 원인이다.
알음알이는 아는 특징을 가진다. 앞서가는 역할을 한다. 재생연결로 나타난다. 상카라들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토대(vatthu)와 대상(ārammaṇa)이 가까운 원인이다.²⁸⁾
²⁸⁾ 알음알이의 가까운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2연기의 측면에서 볼 때는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일어나기 때문에 상카라들이 되겠고, '눈과 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라는 측면에서는 눈은 토대이고 색은 대상이기 때문에 토대와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3권 pp.42~46, 초기불전연구원(2004)
참고로 필자에게 잘못을 지적해준 선배 도반께서는 청정도론의 아래 4가지 분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신다.
① 형성된 상카라(saṅkhata-saṅkhāra)
② 계속 형성된 상카라(abhisaṅkhata-saṅkhāra) → ①, ②의 수동적인 상카라는 '상카따 담마(형성된 담마)'인 것으로 보인다.
③ 계속 형성하는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
④ 몰두하는 상카라(payoga-abhisaṅkhāra) → ③, ④의 적극적인 상카라는 형성하는 상카라, 즉 '아비상카라'로 해석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①은 모든 형성된 상카라, 즉 유위법(saṅkhata-dhamma)
- ②는 ① 중에서 업에서 생긴 정신과 물질을 따로 부르는 것, 즉 중생(satta)
- ③은 세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 즉 업(kamma)
- ④는 ③ 중에서 육체적, 정신적 노력이 가미된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굳이 분류해서 표현하자면 강한 의도를 통해 짓는 강한 업)
상카라들(saṅkhārā)
60. 상카라들은 공덕이 되는 행위 등 세 가지, 몸의 상카라 등 세 가지로 모두 여섯 가지라고 위에서 간략히 설했다.(§44)
그러나 여기서 상세하게 설하면 공덕이 되는 행위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³⁷⁾,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해로운 의도이고, 흔들림 없는 행위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의도이다. 이처럼 [처음] 세 가지 상카라들은 29가지 의도들이다.
³⁷⁾ 8가지 욕계의 유익한 마음 등을 모두 여기서는 의도(cetanā)라는 술어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들은 모두 자와나(javana, 속행)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업이 되고 업은 다름 아닌 의도이기 때문이다.
61. 나머지 세 가지 중에서 몸의 의도들이 몸의 상카라이다. 말의 의도들이 말의 상카라이고, 마음의 의도들이 마음의 상카라이다. 이 셋은 업을 짓는(āyūhana) 순간에 공덕이 되는 행위 등이 이 [세 가지 업의] 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설했다.
8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와 12가지 해로운 의도, 이 20가지 의도가 몸의 암시를 일으킨 뒤 몸의 문으로 일어나면 몸의 상카라라 한다.
그들이 말의 암시를 일으킨 뒤 말의 문으로 일어나면 말의 상카라라 한다.
초월지의 의도는 더 이상 [과보로 나타난 재생연결의] 알음알이의 조건이 되지 않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초월지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들뜸과 관련된 의도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생연결의 과보로 나타난] 알음알이의 조건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무명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두 가지 암시를 일으키지 않고 마노의 문으로 일어날 때 29가지 모든 의도는 마음의 상카라라 한다. 이와 같이 이 세 가지는 첫 번째 세 가지 안에 들어간다. 뜻으로는 무명이 공덕이 되는 행위 등의 조건이 된다고 알아야 한다.
62.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카라들이 무명을 조건하여 있다고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무명이 있을 때 상카라들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괴로움 등에 대해서 무명이라 불리는 무지함을 버리지 않는 자는 처음엔 괴로움에 대해, 그다음엔 과거 등에 대해 무지함 때문에 윤회의 괴로움을 행복이라 인식한 뒤 그 괴로움의 원인인 세 가지 상카라들을 짓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해 무지함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이고 갈애의 필수품인 상카라들을 행복의 원인으로 생각하면서 짓기 시작한다.
소멸과 도에 무지함 때문에 괴로움의 소멸이 아닌 [천상세계 등의] 태어날 곳에 대해서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인식하고, 소멸로 이르는 길이 아닌 제사와 고행 등을 소멸의 도라 인식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원하면서도 제사와 고행 등으로 세 가지 상카라들을 짓기 시작한다.
63. 더욱이 공덕의 열매라 불리는 괴로움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 갖가지 위험으로 뒤범벅이 되어있는데 특별히 네 가지 진리에 무지함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 몸의 상카라, 말의 상카라, 마음의 상카라로 분류되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요정을 원하는 자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짓과 같다.
행복이라 여겼던 공덕의 열매의 끝엔 어마어마한 열병을 자아낼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을 보지 못하고 또한 만족이 없음을 보지 못하여 공덕이 되는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공덕이 되는 행위는 그것의 조건이며³⁹⁾, 그 종류는 앞서 이미 설했다. 이는 마치 등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고, 꿀 한 방울을 탐하여 꿀 묻은 칼날을 혀로 핥는 것과 같다.
³⁹⁾ "그것의 조건이란 천상에 태어날 과를 가져올 조건이다. 이것도 결국엔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즐겁고 기쁜 것으로 여겨지는 공덕의 열매는 마치 등불과 같고 칼끝에 묻은 꿀과 같다. 공덕이 되는 행위는 등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칼끝을 핥는 것과 같다. (Pm.593)"
감각적 욕망의 쾌락과 그 결과에 대해 위험을 보지 못하여 행복이라는 생각과 오염원에 압도되어 세 가지 문으로 일어나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변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와 죽으려고 사약을 마시는 사람과 같다.
무색계의 과보에 대해서 형성에 기인한 괴로움(행고)과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괴고)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항상하다는 등의 전도몽상으로 마음의 상카라인 흔들림 없는 행위를 짓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길을 잃은 자가 도깨비 굴을 향해 가는 것과 같다.
64. 이와 같이 무명이 있을 때 상카라들이 있다. 없을 땐 없다. 그러므로 이 상카라들은 무명을 조건으로 있다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알지 못하고 무명에 빠진 사람이 공덕이 되는 행위,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를 행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영지(vijjā)가 나타나면 무명이 사라지고 영지가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짓지 않는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3권 pp.51~55, 초기불전연구원(2004)
공덕이 되는 행위, '뿐나-아비상카라'에 대해서 청정도론은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욕계 유익한 마음 8가지로 표현하지만, 수행으로 생기는 위빳사나의 마음도 욕계 유익한 마음에 해당하기 때문에 '수행으로 생긴'의 뜻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색계 유익한 마음과 무색계 유익한 마음은 수행으로만 생기기 때문에 '수행으로 생긴 유익한 의도(=마음)'라고 표현하고 있다.
붓다고사 스님은 '왜 상카라들이 무명을 조건하여 있는가?'라는 질문에 '괴로움의 성질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상카라를 짓는다'라고 답하고 계신다.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은 무엇인가?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이다.
②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
한편 초기불전의 몇 군데에서는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로서 존재가 괴로움임을 설명하고 있다...
"도반이여,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dukkhat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괴로움의 성질(고고성),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행고성),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괴고성)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이 셋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고성(dukkha-dukkhatā):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괴고성(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끝내 변하고 말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행고성(saṅ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는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라거나 '내 것'으로 취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는 『청정도론』 XVI:35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은 고유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괴로움(고고)이라 한다. ②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괴고)이라 한다. ③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saṅkhāra)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된 괴로움(행고)이라 한다."
즉 첫 번째는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나 즐거움은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마침내 변해버리기 때문에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평온한 것이나 모든 형성된 것은 생멸의 현상에 지배되기 때문에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괴로움임에 사무치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 각묵스님 지음, 『초기불교이해』 pp.95~96, 초기불전연구원(2010)
괴로움에 대해서 괴로움이라 알지 못하고 행복이라 인식하기 때문에 갈애를 일으키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상카라를 짓는다.
무지하기 때문에 공덕이 되는 행위와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와 흔들림 없는 행위를 한다.
감각적 쾌락과 오염원에 지배당하고, 원인에 따른 결과를 보지 못하여 위험을 모르기 때문에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즐거움이 변함에 따라 생기는 괴로움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또 다른 생로병사의 과보를 가져오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짓는다.
끝내 변화하기 마련이고 형성된 것은 '나'라고 취착할 것이 없음에도 항상하다는 전도몽상에 빠지기 때문에 흔들림 없는 행위를 짓는다.
그래서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각자의 무지함으로 인해 공덕이 되는 행위,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를 짓는다.
무명이 사라져 모든 형성된 상카라들의 괴로움을 아는 아라한은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는 물론이고, 과보를 가져오는 공덕이 되는 2가지 행위(뿐나비상카라, 아넨자비상카라) 조차 짓지 않는다.
6)
참고로 우 실라 사야도께 아비상카라에 관해서 문답하는 과정에서 '아비상카라 윈냐나(abhisaṅkhāraviññāṇa)'는 재생연결 시 업을 형성하는 의식을 지칭함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비상카라는 삶의 과정이든 재생연결 시점이든 모든 시점에서의 의도적 행위이자 업형성의 상카라이지만, 아비상카라 윈냐나의 경우 재생연결의 시점에서 자주 쓰이는 듯 하다.
199. ...인식이 없는 중생의 경우에 물질은 업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전생의]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에서 생긴 업을 짓는(abhisaṅkhāra)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다¹¹⁵⁾. 이것은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삶의] 전개과정에서 유익한 마음 등의 순간에 업에서 생긴 물질에도 적용된다...
¹¹⁵⁾ 업에서 생긴 물질은 전생이나 이전에 지은 업을 조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유정이 가지는 물질은 전생의 업을 짓는 알음알이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식연명색이 적용된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3권 p.120, 초기불전연구원(2004)
갈애는 좋아하고 들러붙는 성품이어서 도달한 생에서 자신의 생을 좋아하고 애착해서 즐깁니다. 얻게 된 대상들도 좋아하고 애착해서 즐깁니다. 이렇게 좋아하며 즐기기 때문에 자신의 생,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그대로 존재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대로 유지되게 하려 합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상도 그대로 존재하게 하려 합니다. 그대로 유지되게 하려 노력하고 애써 행합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불선업과 선업이 각각 적절하게 생겨납니다.
그래서 죽음에 즈음해서 어느 한 업이든, 그 업을 행했을 때의 여러 상황이 대상으로 나타나는 업 표상이든, 그 업 때문에 태어날 생의 여러 상황이 대상으로 나타나는 거취 표상이든 어느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이라는 대상을 갈애가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집착합니다.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습니다. 저녁에 산 그림자가 대지에 퍼져 덮어 버리듯이 그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이라는 대상이 마음을 덮어 버리면서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대상을 업형성 의식abhisaṅkhāraviññāṇa이라는 죽음인근maraṇasanna 속행 마음이 마치 잡아 두는 것처럼 집착해서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일 마지막 죽음 순간의 물질·정신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그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만을 집착하고 대상으로 하여 새로운 탄생지, 새로운 생에, 의지하는 물질과 함께 재생연결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그것과 함께 여러 마음부수 정신법들도 생겨납니다. 그 재생연결 마음 이후에도 업의 힘이 있는 만큼 존재요인bhavaṅga 마음들이 평생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에 태어나는 것은 업과 갈애라는 두 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애 없이 업만으로는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에 태어나게 하는 데 있어 갈애가 근본 원인입니다. 그렇게 근본 원인으로서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ponobhavikā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한다’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다음 생이 있다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있음에도 “현재 한 생만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다음 생은 설하지 않으셨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단멸론ucchedavāda과 결부시키려는 목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제멋대로 주장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팔정도를 닦지 않거나, 닦더라도 완벽하게 닦지 않아서 갈애가 다하지 않으면 이 갈애 때문에 새로운 생에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팔정도를 닦아 완벽하게 성취하여 아라한도과에 이르러 갈애가 사라지면 새로운 생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습니다. 다음 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라한이 된 후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이 생이 마지막 생이다, 이제 다시 태어나는 생은 더 이상 없다’라고 반조의 지혜로 숙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담마짝까숫따」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그렇게 숙고하는 모습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렇게 숙고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갈애가 아직 다하지 않으면 다시 새로운 생에 거듭 태어난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 마하시 사야도 지음, 『담마짝까 법문(초전법륜경 해설)』 pp.53~57, 불방일
3.
그렇다면 왜 퓨어담마는 견해가 달랐는가?
주석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선배 도반의 설명을 들은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앞서 1번에서 요약한 퓨어담마의 견해는 아래와 같았다.
- 아비상카라에서 '아비(abhi)'는 ‘더 강한’의 뜻이다.
- 상카라와 아비상카라는 구분된다.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만이 재생연결의 과정을 이끈다.
- 상카라(sankhāra)가 강하게 될 때, 재생연결(윤회)로 이끌 수 있는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한 상카라)로 불린다.
본문 2번에 인용한 여러 주석서 내용에서 살펴본 아비상카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아비상카라는 ‘강한 상카라’가 아니라 '업을 형성하는' 상카라이다.
- 아비상카라는 ① 삶의 과정에서나 ② 재생연결에서나 모두 과보를 만드는 모든 선/불선 의도(마음)을 포함한다.
- 즉, 아비상카라는 일반적인 업(약한 업)을 생성하기도 하고, 재생연결을 결정짓는 업(강한 업)을 생성하기도 한다.
-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그리고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특히 『청정도론』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상윳따 니까야』에서 저자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
필자는 초기불교에 대해 배우면서 초기경의 가르침은 주석서와 복주서의 설명을 토대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배워왔다.
선배 도반의 설명으로는 퓨어담마는 주석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 퓨어담마 사이트 링크가 인용돼 있는데
퓨어담마 사이트에는 일부 맞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잘못된 견해가 많고 빨리어도 원래 의미와 다르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공식적으로 출판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공부의 기준점으로 삼도록 다른 이들에게 권할 만한 곳이 아니라서
참고하시도록 말씀드립니다 _()_
퓨어담마에서는 테라와다 주석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재생연결을 낳을 정도로 강한 업'을 지을 때 '아비상카라'라고 한다고 해서
크게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
퓨어담마에서는 붓다고사 스님이 정리한 청정도론과 주석서의 가르침이
본래의 순수한 가르침(퓨어담마)을 왜곡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에 따르는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교학과 수행이 잘못되었다고 보고요.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가르침으로는 성자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에)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상가는 참된 상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퓨어담마에서는 닛데사 등 부처님 당시에 쓰였다고 보는 (경전에 포함되는) 일부 주석만을 인정하고
경전의 용어를 자신들의 체계에 맞추어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가령 단순히 저 세상(죽은 후에 태어나는 세상)을 뜻하는
para loka를 간답바의 세계로 해석합니다.
빠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경전에서 여러 용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퓨어담마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리랑카는 논장보다 경장을 중시하는 풍토가 있어서
경전의 해석을 주석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 그렇게 엄격하지 않은 편인데
퓨어담마는 그 정도가 심해서 출판금지가 되었지요 ^^;
퓨어담마가 선배 도반께서 설명해주신대로 주석서의 가르침과 테라와다 불교의 교학, 수행 체계를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주석서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고 수행하는 불자들은 이 부분을 명확히 인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스스로 진위를 가릴 능력이 부족하므로 선배 도반께서 일러주신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명을 갈음한다.
인용한 의견들은 선배 도반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니 읽으시는 독자의 판단에 따라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셔도 되겠다.
아래 링크는 위 견해와 관련된 좀 더 자세한 설명이다.
관심 있는 분은 읽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