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청정도론

3권 제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2.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菩提分法)p381~

작성자sucitta여의주|작성시간22.03.18|조회수8 목록 댓글 0

나모-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3회)

Namo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청정도론 3권

 

제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ñāṇadassanavisuddhiniddeso

 

2.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菩提分法)p381~

Bodhipakkhiyakathā

              

(6) 통달지 가지의 역할

Pariññādikocca

 

92.⑥[사성제를] 관통할 때 설한 통달지 등의 역할들을

    ⑦각각의 고유성질에 따라 알아야 한다.(§32)

 

순간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

 

 [위 게송은] 진리를 관통할 때 이 네 가지 지혜의 각각은 한 순간에 통달지(pariññā), 버림(pahāna), 실현(sacchikiriya), 닦음(bhāvana)이라는 통달지 등의 네 가지 역할을 한다고 설한 것이다. 옛 스승들이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등불이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 심지를 태우고,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빛을 발하고, 기름을 소모하는 네 가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도의 지혜도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 네 가지 진리들을 관통한다(abhisameti).

 통달지를 관통하여 괴로움을 관통한다. 버림을 관통하여 일어남을 관통한다. 닦음을 관통하여 도를 관통한다.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 무엇을 말했는가? 소멸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진리들에 이르고, 보고, 통찰한다.”

 

93. 이것도 역시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일어남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S.v.437)” 그러므로 나머지 세 가지 진리들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다시 설하셨다. “도를 갖춘 자의 지혜는 괴로움에 대한 지혜이기도 하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이기도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이기도 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지혜기도 하다.(Ps.i.119)”

 

94. 마치 등불이 심지를 태우듯이 도의 지혜는 괴로움을 철저하게 안다(parijānāti). 등불이 어둠을 사라지게 하듯이 도의 지혜는 일어남을 버린다. 마치 등불이 빛을 발하듯이 도의 지혜는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 등이 되어서 바른 사유 등의 법이라 일컫는 도를 닦는다. 마치 등불이 기름을 소모하듯이 도의 지혜는 오염원이 끝난 소멸을 실현한다. 이와 같이 비유의 적용을 알아야 한다.

 

95. 다른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태양이 떠오를 때 그것의 나타남과 함께 동시에 네 가지 역할을 한다. 즉 그것은 볼 수 있는 형상을 드러내고, 어둠을 가시게 하고, 빛을 보게 하고, 추위를 가라앉게 한다. 이와 같이 도의 지혜고 〮〮〮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 태양이 볼 수 있는 형상을 드러내듯이 도의 지혜는 괴로움을 철저하게 안다. 태양이 어둠을 가시게 하듯이 도의 지혜는 일어남을 버린다. 태양이 빛을 보게 하듯이 도의 지혜는 함께 생긴 조건 등이 되어서 바른 사유 등의 법이라 불리는 도를 닦는다. 태양이 추위를 가라앉게 하듯이 도의 지혜는 오염원이 진정된 소멸을 실현한다. 이와 같이 비유의 적용을 알아야 한다.

 

96.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배는 한 순간에 동시에 네 가지 역할을 한다. 즉 그것은 이쪽 기슭을 버리고, 흐름을 건너고, 물건을 실어나르고, 저쪽 기슭에 이른다. 이와 같이 도의 지혜도 〮〮〮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 여기서도 배가 이쪽 기슭을 버리듯이 도의 지혜는 괴로움을 철저하게 안다. 배가 흐름을 건너듯이 도의 지혜는 일어남을 버린다. 배가 물건을 실어나르듯이 도의 지혜는 일어남을 버린다. 배가 물건을 실어나르듯이 도의 지혜는 함께 생긴 조건 등이 되어 [다른] 도를 닦는다. 배가 저쪽 기슭에 이르듯이 저쪽 기슭인 소멸을 실현한다. 이와 같이 비유의 적용을 알아야 한다.

 

97. 이와 같이 진리를 관통할 때에 한 순간에 네 가지 역할을 하면서 그의 지혜가 일어날 때 네 가지 진리들은 열여섯 가지 방법으로 진실하다는 뜻에서 하나의 통찰을 가진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어떻게 진실하다는 뜻에서 네 가지 진리를 하나로 통찰하는가? 열여섯 가지 방법으로 진실하다는 뜻에서 네 가지 진리를 하나로 통찰한다.

 괴로움의 괴롭힌다는 뜻, 형성되었다는 뜻, 불탄다는 뜻, 변한다는 뜻이 진실하다는 뜻이다.

 일어남의 쌓는 뜻, 원인(nidāna)의 듯, 속박의 뜻, 장애의 뜻이 진실하다는 뜻이다.

 소멸의 벗어남의 뜻, 멀리 여읨의 듯,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 불사의 뜻이 진실하다는 뜻이다.

 도의 출구의 뜻, 원인(hetu)의 뜻, 견의 뜻, 우월의 뜻이 진실하다는 뜻이다.

 이 열여섯 가지 방법으로 진실하다는 뜻에서 네 가지 진리는 하나에 포함된다. 하나의 포함된 것은 동일성(ekatta)이다. 그 동일한 성품을 하나의 지혜로 통찰한다. 그러므로 네 가지 진리를 하나로 통찰한다.(Ps.ii.107)”

 

98.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괴로움 등은 질병, 종기 등의 다른 뜻도 가지는데 무슨 이유로 네 가지만 말씀하셨는가?’라고. 답변한다. 다른 진리들을 봄으로써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괴로움에 대한 지혜인가? 괴로움에 대해서 일어난 통찰지, 꿰뚫어 앎(Ps.i.119)” 등의 방법으로 각 진리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리의 지혜를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일어남도 본다.(S.v.437)”라는 등의 방법으로 하나의 진리를 대상으로 하여 나머지 [세 가지 진리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 역할을 완성하는 것으로 [진리에 대한 지혜를] 설하셨다.

 

99. 여기서 [지혜가] 각각의 진리를 대상으로 삼을 때 괴로움이 고유성질로는 비록 ①괴롭히는 특징을 가지지만 일어남을 봄으로써 그 괴로움의 ② 형성되었다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쌓는 특징을 가진 일어남을 통해 쌓였고, 형성되었고, 덩어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도는 오염원의 열을 녹이고, 아주 시원하기 때문에 도를 봄으로써 [부인인] 순다리가 예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듯이. 변하지 않는 법인 소멸을 봄으로써 ④변한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100. 마찬가지로 일어남이 본성으로는 비록 는 특징을 가지지만 괴로움을 봄으로써 그 일어남의 원인의 이 분명해진다. 마치 부적절한 음식 때문에 병이 일어난 것을 봄으로써 그 음식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듯이, 속박이 없는 소멸을 봄으로써 속박의 이 분명해진다. 출구인 도를 봄으로써 장애의 뜻이 분명해진다.

 

101. 마찬가지로 소멸이 비록 벗어나는 특징을 가지지만 멀리 여의지 않은 일어남을 봄으로써소멸의 멀리 여읨의 이 분명해진다. 도를 봄으로써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 분명해진다.그 수행자는 비롯함이 없는 윤회에서 이전에 도를 본적이 없다. 그 도도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을 갖지 않은 법의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더욱 분명해진다. 고를 봄으로써 불사의 이 분명해진다. 괴로움은 독이고 열반은 불사이다.

 

102. 마찬가지로 도가 비록 출구의 특징을 가지지만 일어남을 봄으로써 ‘이것은 열반을 증득한 원인이고, 이것은 아니다’라고 도의 원인의 이 분명해진다. 소멸을 봄으로써 견의 이 분명해진다. 마치 아주 미세한 물질을 보는 자가 ‘내 눈은 밝다’라고 눈의 밝은 상태가 분명해지듯이, 괴로움을 봄으로써 (16) 우월의 이 분명해진다. 마치 여러 가지 병고로 고통 받는 비참한 자들을 봄으로써 저명인사들의 고상함이 [드러나]듯이.

 

103. 이와 같이 네 가지 진리 가운데서 자기의 특징에 따라 한 가지 뜻이 분명해지고, 다른 진리들을 봄으로써 나머지 세 가지 뜻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각 진리마다 각각 네 가지 뜻을 설했다. 그러나 도의 순간에는 괴로움 등에 대해 동시에 네 가지 역할을 하는 하나의 지혜가 이 모든 뜻을 통찰한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각각 다르게 관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대한 대밥은 논장의 『논사』(論事, Kathāvatthu)에서 설하셨다.(Kv.212-20)

 

 

 

                                

     붓다사 사낭 짜랑 띳타뚜(3회)                           

     (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법이라 불리우는 법과율의 가르침이

     오랜세월 훼손없이 존속하여 머무소서.

 

     Sādhu! Sādhu! Sādhu!

     사~두! 사~두! 사~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