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모-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3회)
Namo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청정도론 3권
제23장 통찰지수행의 이익p399~
paññābhāvanānisaṁsaniddeso
1.여기서는 앞서 설한 Ⅵ 통찰지를 닦으면 무슨 이익이 있는가?(ⅩⅣ.§1)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 통찰지수행은 수백 가지의 이익이 있다. 아무리 긴 시간을 핼애하더라도 그 이익을 상세하게 밝히기는 쉽지 않다.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그 이익을 알아야 한다.
①여러 가지 오염원들을 없앰
②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함
③멸진정에 들 수 있음
④공양 받을만한 자가 됨 등을 성취한다.
1.여러 가지 오염원들을 없앰
nānākilesaviddhaṁsanakathā
2.여기서 정신과 물질을 한정할 때부터 유신견 등의 여러 가지 오염원들을 없애는 것은 세간적인 통찰지수행의 이익이고, 성스러운 도의 순간에 족쇄 등 여러 가지 오염원들을 얿애는 것은 출세간적인 통찰지수행의 이익이라고 알아야 한다.
무섭고 재빠르게 들이닥치는 벼락이 바위산을 부수듯
질풍으로 휘갈긴 불이 숲을 태우듯
광휘로운 원반을 가진 태양의 빛이 어둠을 없애듯
통찰지를 닦으면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혀왔고
모든 불행을 만드는 오염원의 그들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서 [이 수행의] 이익을 알아야 한다.
2. 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함
phalasamāpattikathā
3.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함: 오염원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하는 것도 통찰지수행으로 얻는 이익이다. 성스러운 과란 예류과 등 사문의 과를 말한다. 이 맛을 두 가지로 체험한다. 즉 도의 인식과정과 과의 증득에서 생길 때 [체험한다.] 이 가운데서 도의 인식과정에서 성스러운 과가 생기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ⅩⅩⅡ. Ⅱ.§§15-17)
4. 더욱이 어떤 자들은 오직 족쇄를 끊어버림이 과일뿐 다시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이 경을 인용해야 한다.
“어떻게 [성스러운 도라는] 노력으로 [오염원들을] 가라앉힘에 대한 통찰지가 과에 대한 지혜인가? 예류도의 순간에 본다는 뜻에서 바른 견해가 삿된 견해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은 [삿된 견해를] 따라 일어나는 오염원들과 무더기들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은 [삿된 견해를] 따라 일어나는 오염원들과 무더기들로부터 출현한다. 밖으로는 모든 표상으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은 [성스러운 도라는] 노력으로 오염원들이 가라앉았기 때무에 일어난다. 이것이 도의 과이다.(Ps.i.71)”
이와 같이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네 가지 성스러운 도, 네 가지 사문의 과, 이들은 무량한 대상을 가진다.(Dhs.239)”와 “[색계, 무색계의] 고귀한 법은 무량한 법에게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Pṭn1.ii.227)”라는 구절도 여기서 이 듯을 성취시킨다.
5. 과의 증득에서 성스러운 과가 생기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다음 질문을 제기한다.
(1) 과의 증득이란 무엇인가?
(2)누가 증득하는가?
(3)누가 증득하지 못하는가?
(4)왜 증득하는가?
(5)어떻게 증득하는가?
(6)어떻게 머무는가?
(7)어떻게 출정하는가?
(8)무엇이 과 다음에 생기는가?
(9)과는 무엇 다음에 생기는가?
6. (1)과의 증득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과가 소멸에 안지함(安止,appanā)이 과의 증득이다.
(2) 누가 증득하는가? (3)누가 증득하지 못하는가? 범부들은 누구도 이것을 증득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아직 성스러운 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모두 이것을 증득한다. 왜 그런가? 성스러운 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도에 이른 자는 낮은 과를 증득하지 않는다. 다음 성자의 지위에 도달함으로써 [그 아래의 과는 이미]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아래의 도에 이른 자는 높은 과를 증득하지 못한다. 아직 그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의 과를 증득한다. 이것이 여기서 결정된 것이다.
7. 어떤 자들은 예류자와 일래자는 그것을 증득하지 못하고 오직 위의 두 성자만이 증득한다고 주장한다. ‘불환자와 아라한은 삼매를 완성한 자들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기 이유이다. 그러나 범부들도 자기가 얻은 세간적인 삼매를 증득하기 때문에 그 이유는 적절하지 않다. 사실 이유가 적절한지 아닌지를 고려할 필요도 없다. 성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어떤 열 가지 고뜨라부의 경지들이 위빳사나를 통해 일어나는가? 예류도를 얻기 위하여 일어남과 진행을 ∙∙∙ 절망을 [극복하기 때문에 고뜨라부의 경지이다.] 밖으로 상카라들의 표상을 극복하기 때문에 고뜨라부의 경지이다.
예류과의 증득을 위하여 일어남과 진행을 ∙∙∙ 절망을 [극복하기 때문에 고뜨라부의 경지이다]. 밖으로 상카라들의 표상을 극복하기 때문에 고뜨라부의 경지이다.
일래도를 얻기 위하여 ∙∙∙
일래과의 증득을 위하여 ∙∙∙
불환도를 얻기 위하여 ∙∙∙
불환과의 증득을 위하여 ∙∙∙
아라한도를 얻기 위하여 ∙∙∙
아라한과의 증득을 위하여 ∙∙∙
공함에 머무는 증득을 위하여 ∙∙∙
표상 없음에 머무는 증득을 위하여 ∙∙∙
밖으로 상카라들의 표상을 극복하기 때문에 고뜨라부의 경지이다.(Ps.i.68)”
그러므로 ‘성자들은 모두 각자 자기의 과에 도달한다’고 여기서 결론지어야 한다.
8. (4) 왜 증득하는가?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머물기(diṭṭha-dhamma-sukha-vihāra)위해서다. 마치 왕이 왕의 행복을 누리고 천신이 천상의 행복을 누리듯이 성자들도 ‘성스럽고 출세간적인 행복을 체험하리라’고 기간을 정하고는 언제든지 원하는 순간에 과의 증득에 도달한다.
9. (5) 어떻게 증득하는가? (6) 어떻게 머무는가? (7)어떻게 출정하는가?
[(5)어떻게 증득하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증득한다. 즉, 열반 이외에 다른 대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열반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열반을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에 증득한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도반이여, 표상이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을 증득하는 데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즉 일체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界)를 마음에 잡도리함입니다.(M.i.296)”
10. 이것이 증득하는 순서이다. 과의 증득을 원하는 성스러운 제자는 외진 곳에 혼자 머물러 상카라들을 일어나고 사라짐(生滅)등으로 관찰해야 한다. 그의 위빳사나가 차례대로 진행될 때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뜨라부의 지혜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과의 증득으로 마음이 소멸에 안지(安止)한다(appeti). 여기서 과의 증득으로 마음이 기울기 때문에 유학에게도 과는 일어나지만 [그보다 높은] 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11. 어떤 자들은 말한다. ‘예류자가 과의 증득에 도달하리라고 위빳사나를 시작한 뒤 일래자가 되고, 일래자는 불환자가 된다.’라고.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될 것이고, 아라한은 벽지불이 될 것이고, 벽지불은 부처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될 수 없고 또 위에서 인욕한 경전과도 어긋난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를] 수용해서는 안된다.
오직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유학에게도 과는 일어나지만 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과의 경우 만약에 그가 초선에 속하는 도에 이르렀다면 초선에 속하는 과가 일어나고, 만약에 제2선 등 가운데 어느 하나의 禪에 속하는 도에 이르렀다면 그의 과도 제2선 등 가운데서 어느 하나의 禪에 속하는 과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증득한다.
12. [(6) 어떻게 머무는가?]: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 머물기 위해서는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과 미리 의도함(abhisaṅkhāra)의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M.i.296-97)”라는 말씀 때문에 세 가지 방법으로 머묾이 있다.
여기서 미리 의도함이란 증득하기 이전에 기간을 한정하는 것이다. 어느 시간에 출정하리라고 한정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되기 전까지 그 만큼만 머문다. 이와 같이 그것에 머문다,
13. [(7) 어떻게 출정하는가?]: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함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M.i.297)”라는 말씀 때문에 두 가지 방법으로 출정한다.
여기서 모든 표상이란 물질의 표상, 느낌과 인식과 상카라들의 표상, 알음알이의 표상이다. 물론 수행자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설했다. 그러므로 그는 잠재의식의 대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과의 증득으로부터 출정한다. 이와 같이 그것으로부터 출정한다고 알아야 한다.
14.(8) 무엇이 과 다음에 생기는가? (9) 과는 무엇 다음에 생기는가?
[(8) 무엇이 과 다음에 생기는가?]: 과 다음에는 오직 과가 생기거나 잠재의식(바왕가)이 생긴다.
(9) 과는 무엇 다음에 생기는가?]: 그러나 과는 ① 도 다음에 생기고 ② 과 다음에 생기고 ③고뜨라부 다음에 생기고 ④비상비비상처 다음에 생긴다. 여기서 ①도의 인식과정에 있는 [과거] 도 다음에 생긴 것이다. ② 바로 앞의 과 다음에 생긴 과가 과 다음에 생긴 것이다. ③과의 증득에서 그 첫 번째 [과가] 고뜨라부 다음의 것이다. 수순은 여기서 고뜨라부라고 알아야 한다. 빠타나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경우 수순은 과를 증득하는 데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유학의 경우 수순은 과를 증득하는 데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Pṭn.159)” ④그 과를 통해 소멸로부터 출현할 때 그 과가 비상비비상처 다음의 것이다.
15. 여기서 도의 인식과정에서 생긴 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과의 증득으로 생긴 과라 한다. 이와 같이 도의 인식과정이나 과의 증득에서 과가 일어남으로써,
오염원의 열을 식혔고 불사를 대상으로 가지며 깨끗하고
세속의 비린내를 토해냈고 평화롭고 최상인 사문의 과는]
온갖 자양분을 가졌고 맑고 크나큰 기쁨인
불사의 행복으로 충만하다. 마치 불사를 주는 꿀처럼.
이러한 성스러운 과의 맛인 최상의 행복을
현자는 통찰지를 닦아서 얻나니
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하는 것을 일러
위빳사나 수행의 이익이라 한다.
붓다사 사낭 짜랑 띳타뚜(3회)
(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법이라 불리우는 법과율의 가르침이
오랜세월 훼손없이 존속하여 머무소서.
Sādhu! Sādhu! Sādhu!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