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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47호(대흥사 서산대사 부도)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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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대흥사 일원(사적 및 명승 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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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은 천연기념물 왕벚나무를 비롯하여 상록활엽수인 후박나무·동백나무·비자나무와 물푸레나무·박달나무 등 많은 양의 낙엽활엽수로 구성된 경치가 뛰어난 삼림지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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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는 고려 이전에 처음 지어진 절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서산대사에 의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큰 절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대흥사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의 냇물을 중심으로 절이 남북으로 나뉘어 남원·북원이라고 불리는데, 이 법당들은 나름대로 특징을 지닌 별원의 성격을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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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 부도군 입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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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과 천불전·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원의 구조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대웅전 앞쪽의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현판이 걸려 있다.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탑산사 동종, 대흥사 북미륵암 3층석탑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대둔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따라 우리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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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서산대사 부도(보물 134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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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서산대사부도는 대흥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구비한 석조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부도의 전체 높이는 2.7m이다. 인근에는 서산대사부도의 탑비가 있는데, 귀부·비신·이수를 구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귀부 상면에 배치된 비공(碑空)이 장방형임에 반해 비신 및 이수는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원형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1647년(조선 인조 25)에 건립되었다. 이처럼 탑비가 1647년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부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중대석과 상대석의 동물장식,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과 상륜부의 장엄이 주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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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도는 임진왜란시 승병활동으로 알려진 서산대사의 부도라는 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특수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첫째,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 부등변팔각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옥개석에 표현된 기와골, 내림마루, 암·수막새기와, 겹처마 등의 목조건축의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같은 양식의 부도와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둘째, 중대석 및 상대석에 표현된 각종 동물상의 표현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볼 때 중대석에는 주로 팔부신중 및 공양상이 부조되고, 상대석에는 앙련이 모각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의 중대석 네 면에는 화문이, 나머지 면에는 각각 동물을 양각했는데, 아마도 사자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대석에도 통식의 연화문과 함께 거북과 연꽃·게를 양각했는데, 이같은 조형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일례이다. 특히 게와 조개로도 볼 수 있는 연화문이 표현된 것은 바다가 가깝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조형물에 표현된 것이다. 셋째,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두이다.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옥개석 전각에는 귀꽃이 배치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에서는 1면에는 추정 다람쥐를 나머지 7면에는 용두가 표현되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각에 용두가 배치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같은 구도는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교리적인 배경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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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완전한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부도의 상륜부는 통식의 부도와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방형과 원형의 조화를 통해 안정감을 유지했고, 특히 매우 사실적인 용을 조각함으로써 다른 부도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다섯째, 서산대사가
입적한(1647년 1월) 해에 탑비가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부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서도 가장
선두에 놓일 수 있는 예가 확인됨으로써 이 시기 석조부도 연구에 또 하나의 자료를 보태주고 있다. 더욱이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곡사서부도(1650년) 보다 양식적으로 우수한 면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어 이 계통의 부도는 9세기 중반에
건립된 이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건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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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부도밭에 있는 다양의 부도의 모습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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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서산대사 유물(보물 13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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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에 있는 서산대사의 유물로, 임진왜란때 승군으로 나선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으로 임명한 교지와 정조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친히 적은 서산대사화상당명 총 2점이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을 받아 팔도도총섭이 되어 73세의 노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군 1,500명을 모아 활약하는 등 전쟁에 공을 세웠다. 교지는 임진왜란 초 발급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서산대사의 도총섭 교지를 만력 30년, 선조 35년(1602)에 재발급한 것이다. 서산대사화상당명은 정조 18년(1794)에 해남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지는 것을 계기로 정조가 친히 지은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써서 대흥사에 내려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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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구름무늬 채화가 그려진 담황색 비단에 내용이 적혀있고, 끝부분에는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재(弘齋)'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글의 내용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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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2편에서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