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이란 말 대신에 민간신앙을 뜻하는 무교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교가 정확히 예언을 하고 민간인들의 애환을 들어주면서 한동안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본궤도에서 일탈해 미신으로 치부되는 등 요즘 그 위상이 말이 아닙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은 병이 나면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백성들이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개경 북쪽에 있는 숭산신사(崧山神祠)에 가서 옷과 말을 바치고 기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려시대 무속이 불교나 유교 등을 제치고 융성한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언과 치병 등 무의 본래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속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주는 역할, 곧 불안의 해소와 삶의 이상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종교적 기능을 해왔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해 온 무속
고려 무인집권기 권력자인 이의민은 집안에 당(堂)을 짓고 고향 경주에서 믿었던 두두을(豆豆乙)이라는 나무로 깎아 만든 귀신상을 맞아다가 날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빌었습니다. 그것이 신통했는지 그는 천한 신분임에도 승승장구하여 최고권력자가 됐습니다.
당시 지방관이 임지에 부임하면 그 지방의 유력한 신들을 찾아 인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만약 이것을 어기면 탄핵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나라에 가뭄이 들면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백성들의 경우 무속에 더욱 밀착됐습니다. 개인적인 신당을 갖출 여력이 없어 귀신에게 의뢰할 일이 생기면 명산대천에 있는 신당에 찾아가 빌거나 무당에게 굿을 청하곤 했습니다. 잦은 재해와 전쟁, 그리고 힘 있는 자들 밑에서 시달리며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하던 백성에게는 유교나 불교가 강조하는 정신적 윤리성이나 내세적 구원의식이 자리잡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한민족의 신앙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한국의 무속신앙이며, 외래종교가 유입된 후에도 무속은 민간신앙으로서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으로 전승돼 왔습니다. 한국에 현존하는 여러 종교 중에 불교, 유교 등은 장구한 세월동안 조직적으로 포교를 시도했지만 소수의 지식층을 상대했기에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했고, 기독교는 아직 일천한 관계로 민중의 생활저변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 가면 산신각이나 칠성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해인사의 국사당이나 월정사의 산왕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무속이 절 안으로 들어간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민족의 가슴에 뿌리내리고 있는 무속신앙의 뿌리깊은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속신앙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생활 저변을 흐르는 민중신앙의 자리를 굳게 지키며 의식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생리화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아들이 없어도 무속의 굿을 통해 아들을 낳으려 했고, 병이 나도 굿을 통해 병을 고치려 했으며, 재앙이 있어도 굿을 통해 재앙을 제거하고 행운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의 낙원으로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영생을 누리게 해 달라고 굿을 하면서 빌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까지 사람의 길흉화복 일체를 신에 의한 섭리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굿을 통해 인간의 운명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현재의 제약조건을 제약이 없는 조건으로 바꾸어 영구 지속을 꾀해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