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열반·구원
♛ 육신에 얽매이는 것을 중생(衆生)이라한다. 또한 보고 듣는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을 중생이라 부른다. 차안(此岸)이란, 육신에 대한 잘못된 견해요, 피안(彼岸)이란, 육신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사라진 세계니라. 열반(涅槃)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고 모든 번뇌를 다한 것이니라. 온 세상을 욕심이 얽어매더라도, 마음이 견고한 사람은 얽매이지 않고 해탈(解脫) 하리라. -《잡 아함경》- ♛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 ♛ 해탈이란 무엇인가? 장애물을 넘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것을 해탈이라 부른다. 장애라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이다. 발판이다. 그런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 없다. - 법정《산에는 꽃이 피네》- ♛ 知幻則離 헛것인줄 알았으면 곧 떠나라. 離幻則覺 헛것을 떠나면 곧 해탈이다. -《원각경》- ♛ 誰縛汝(수박여). 누가 너를 묶었느냐? - 숭찬 대사 - ♛ 무엇이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가?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감옥이다. - 오쇼 라즈니쉬《달마》- ♛ 진정한 자유는 자아의 자유가 아니라, 자아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 오쇼 라즈니쉬《반야심경》- ♛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정치· 사회· 종교· 도덕의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오쇼 라즈니쉬《법의 연꽃》- ♛ 필요한 것은 마음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모든 생각의 속박으로부터, 감정과 분위기와 감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그런 것들이 그대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초월한 곳에 하나의 지켜봄이 있다.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이다. - 오쇼 라즈니쉬《달마》- ♛ 붓다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자유, 절대적이고 무조건 적인 의무의 속박뿐 아니라 또한 내부로부터의 자유, 타인뿐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 오쇼 라즈니쉬《법의 연꽃》- ♛ 진정으로 포기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히말라야나 수도원으로 도망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것은 그대의 마음 으로부터 말들을 떨쳐버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고요하게 지켜보는 자, 순수한 주시자로 남는 일이다. 이것을 달마는 해탈이라고 부르고 있다. - 오쇼 라즈니쉬《달마》- ♛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피안(彼岸)이다. - 달마 - ♛ 니르바나(열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다. 니르바나는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운 모든 것을 버림이며, 악의적인 것을 버림이고, 더럽혀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버림을 의미한다. 니르바나는 무덤에서 얻어지는 죽은 평화, 검은 평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평화이며, 영원의 심장 안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는,살아있는 영혼의 행복이다. - 마하트마 간디 - ♛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산자의 입문 식에 있어서 초월이란 죽음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사고와 관점의 대 전환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음의 초월이고 기독교 용어를 빌리자면 죄악과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을 말한다. 구원이란, 과거의 무의식과 어둠(무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달음과 자유의 상태로 인도되는 것이며 ❮주어진 모든 것❯ 으로부터 초월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 ♛ 탄생과 죽음,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세계는 이원(二元)의 세계이며, 우리가 실제 고향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향은 이 세계를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그곳은 빛과 생명의 원천이자 모든 변화를 넘어서고, 그럼으로써 죽음도 넘어선 세계입니다. 그곳에는 오직 자아만이 살고 있습니다. - 에크낫 이스워런 《죽음이 삶에게 보내는 편지》- ♛ 제자들이여!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이 없는 세계가 있다. 그 곳은 끝없는 공간도 아니요, 끝없는 생각도 아니요, 무도 아니요, 생각과 생각 아님(相非相)도 아니다. 그곳은 이 세계도 아니요 저 세계도 아니다. 그곳은 오는 것도 없고(不來), 가는 것도 없고(不去), 머무름도 없으며(不停),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 그곳은 슬픔의 끝이니라. 어떤 상 (對象)에 달라붙으면, 떨어짐이 있지만,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떨어짐이 없다. 떨어짐이 없는 곳에 휴식이 있고, 휴식이 있는 곳에 욕망이 없다. 욕망이 없으면 가고 옴이 없고, 가고 옴이 없으면 죽음과 태어남이 없다. 죽음과 태어남이 없으면 이 세상과 저 세상 또는 그 사이(바르도)가 없나니, 이때 모든 슬픔은 끝나느니라. 제자들이여! 변화하지 않고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 지지 않고, 형상을 갖지 않은 세계가 있느니라. 만일 이런 불변(不變), 불생(不生), 부조(不造), 무형(無形)의 세계가 없다면 변화하고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형상가진 세계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느니라. 그러나 불변, 불생, 부조, 무형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변화하고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형상을 가진 세계로부터의 벗어남이 있느니라. ❮니르바나의 경지를 체득한 고타마 붓다가 제자들에게 한 말. 팔리어 경전, 우다나(自設)8장❯ -《티벳 사자의 서》- ♛ 그대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대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어야 한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살아있게 하는가? 바로 깨어 있는 마음이다.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때, 그대 주위와 그대 안의 모든 것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다. - 틱 낫한《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 붓다의 길은 네티 네티(neti neti : 아니다, 아니다)의 길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는 말한다. 계속 부정하라. 더 이상 부정할 것이 없을 때, 그때가 니르바나의 순간이다.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오직 ❮무❯만이 남았을 때 자유가 일어난다. 그대는 자아와 그 모든 투사 물로 부터 자유롭다. - 오쇼 라즈니쉬《법의 연꽃》- ♛ 다른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나❯가 거기에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는 자유에 대해 말할 때, 그대는 자유로울 것이지만 그대가 거기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 안에 어떻게 ❮나❯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유 안에 ❮나❯가 있다면 거기에는 일종의 구속이 있을 것이다. ❮나❯라는 것 자체가 구속이다. 그대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자유가 있다. 그대가 있으면 자유가 없다. (그대 자신으로부터 의 자유) - 오쇼 라즈니쉬《금강경》- ♛ 비록 그대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 해도,그대는 자유롭지 않다. 사회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대를 조종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는 아이에게 프로그램을 입력하기 시작한다. 사회는 그대를 하나의 컴퓨터처럼 대우한다. 사회는 계속 자료를 공급하며, 그대를 기획하고 있다. 하여, 그대가 약간 깨일 때쯤이면 그대는 이미 기독교인이거나 힌두교인,또는 자이나 교인으로 프로그램화 되어있다. 그대는 이미 고정된 상태에 있다 그대는 이제 유연하지 않고 흐르지 않는다. 그대는 이러한 고정성 속에서,이 강박관념 속에서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주입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뇌 속에 전극을 주입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전혀 모를 테지만 그것은 그대를 조정할 것이다. 그것이 양심이라는 것이다. - 오쇼 라즈니쉬《법의 연꽃》- ♛ 해탈의 길이란 무엇인가? 해탈의 길이란 다름 아닌 최면을 푸는 길이다. 최면에 걸린 마음과 조건화된 마음을 놓는 길이요, 나와 실재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 생각을 내려놓고 실재를 보는 길이다. 욕망의 눈을 내려 놓고 보는 길이요, 아무런 동기 없이 존재하는 길이다. 이것이 요가의 전부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영원 전부터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드러난다. - 오쇼 라즈니쉬《요가수트라2》- ♛ 구원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감사❯ 입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법률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감사❯가 세계를 이끄는 키워드라는 것을. - 에모토 마사루《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자유는 홀로임이며, 하나임이며, 둘이 아니다. 의식 안에 아무런 대상이 없을 때 고요함이 있으며 이것이 자유이다. 만약 그대가 이 세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나’와 ‘너’가 있는 한,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는 내 안에 있는 ‘나’가 네 안에 있는 ‘나’와 같음을 아는 것이다. 이 나는 너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 슈리푼자《그저 고요하라》- ♛ 깨달음은 고요함인 그대의 진성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자유는 매 호흡과 더불어 이것을 아는 것이다. 이 자유는 고요함이며 이원성에 접촉하지 않는다. 이 고요함은 행위자가 아니며 평화의 언어이다. - 슈리푼자《그저 고요하라》- ♛ 지금 안에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없다. 아무것도 존재 한 적이 없는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는가? 텅 빔에서 텅 빔이 비워져야한다. 자유 안에는 할 것도 없고 하지 않을 것도 없다. - 슈리푼자《그저 고요하라》- ♛ 영원한 자유의 상태에 이르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나요? 해탈이란 미래의 어느 때에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영원히 현존하고 있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있는 그대로》- ♛ 참 자아라는 것은 존재차원의 문제이지, 행복의 차원은 아니지 않습니까? 참자아가 행복이며, 행복만이 실재한다. 해탈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혼동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 무엇엔가 구속되어있고, 그래서 자유롭기를 갈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속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만 있다. 이미 그 상태이거늘, 무엇 때문에 영원한 자유니 해탈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가? 해탈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구속은 없다. 그러므로 해탈도 없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 어떤 인도 철학자는 상카라의 가르침을 해설하면서, 해탈한 사람은 죽은 뒤에도 온 인류가 자유로워 질 때 까지 계속 빛의 몸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얻는 해탈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해석일 뿐이지, 상카라의 견해는 아니다. 상카라는 해탈한 사람은 육체를 벗은 후에 ‘물속에 떨어진 물, 기름 속에 떨어진 기름’처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구속된 상태도 아니고 자유로운 상태도 아니다. 다른 형태의 몸을 갖는 다는 것은, 그 몸이 아무리 미묘한 것이라 해도 실재위에 장막을 드리운다는 뜻이다. 그것은 구속이다. 그러나 자유는 절대적이며 변화하지 않는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 상카라는 아무도 구속된 사람이 없고 모두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게서 방출된 불꽃으로서, 근원인 신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온갖 죄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구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진리이다. 참 자아에는 구속이 없다. 그대 또한 결국 근원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말도 진리이다. 하지만 그대가 스스로 죄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한다면, 연속되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를 때린다면 그대는 ‘나는 자유롭다. 때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실컷 때려라.’ 하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면, 그대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못 하면서 입술로만 ‘나는 자유롭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 ‘본래 자유로운데 저희들은 왜 구속되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대들은 이 방안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사막을 헤매고 바다를 건너며 고생스러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것은 모두 마음의 장난, 다시 말하자면 환영일 뿐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 열반은 내려놓음의 후련함이며, 삶의 집착도 저항도 없을 때 경험 하는 본래적 기쁨이다. - 잭 콘필드《깨달음 이후의 빨랫감(아잔 붓다다사)》- ♛ 올바른 행위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나요? 구원 받는 자는 누구이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자는 누구인가? 또 올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아니 행위는 무엇이고 올바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각자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이것은 옳다하고 저것은 그르다 하지만, 실재를 알아야만 옳고 그름에 대한 진리도 알 수 있다. 가장 올바른 길은 구원을 바라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여 에고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 가장 올바른 행위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 선한 행위를 하면 구원에 이르지 않나요? 여러 경전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 경전에 그런 말이 있다. 선한 행위가 그대를 점차 목적지로 안내 하리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선한 행위는 마음을 정화하여 순수한 마음이 되게 해준다. 마음이 순수해지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게 바로 구원이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원을 찾는 참 자아 탐구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만 이런 가르침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위를 하면 마음이 순수해지고, 마음이 순수해지면 지혜를 얻으며, 지혜를 얻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한, 그가 아무리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는 법칙들에 반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해탈을 얻기까지는 여전히 백만 년이라고 하는 기나긴 윤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고사하고 자연의 조화조차 무시한 채, 자연법칙이 가져다주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해치면서 부자연스러운 복잡성을 추구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이 같은 숫자상의 시간이 엄청나게 확장될 수 있다. 그에게는 백만 년의 두 배가 걸려도 오히려 궁극적 해방에는 불충분한 것이다.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요가난다》- ♛ 우파니샤드의 문헌은 영적 진보의 각 단계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싯다(siddha:완성된 존재)는 지반무크타(jivanmukta:살아있으면서 자유를 얻은)의 단계로부터 파라무크타(paramukta: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죽음까지도 정복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의 단계로 나아간다. 여기서 후자의 단계는 마야의 속박과 생사의 윤회로부터 완전히 탈출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파라무크타는 물리적인 형태의 육체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다. 만일 그가 돌아온다면 그는 천상의 축복을 이 지상에 전하기위하여 신의 계획에 따라 마련된 수단, 즉 화신인 것이다. 화신은 자연적인 이법에 순응하지 않는다. 빛의 영상으로 보이는 그의 순수한 육체는 이미 자연으로부터 모든 부채를 청산해 버린 것이다. 화신의 형체는 얼핏 보면 별로 특이한 점이 없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고 땅바닥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어둠과 물질적 구속으로 부터 벗어난 내부의 자유에 대한 외부의 상징적인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리스도나 크리슈나처럼 위대한 예언자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수하고도 커다란 목적을 띠고 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는 대로 즉시 지상을 떠난다.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요가난다》-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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