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김정식
이제야 나는
아버지 나이가 되어
쉰여덟에 서재를 연다.
책장은 없고
하루가 눌러앉다 남긴 굽은 허리 하나.
종이 대신
등목 뒤에 마른 땀과 흙과 쇠의 냄새가
저녁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펼치지 못한 책들 사이로
동란 이후의 날들이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아
다음 장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을.
먹고 사는 일은 늘 먼저 와
문장 앞에 몸을 눕혔고
논어와 중용은 서재까지 가지 못한 채
굳은살 속에 접혀 있었다.
망치는 낮게 울려 몸으로 시간을 세고
쇠 긁는 소리는 내일의 가장자리를 긋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그 모든 소리가 문장이었고
하루는 지워지지 않는 한 줄로
몸에 새겨졌다는 것을.
막걸리는 버텨온 날들의 쉼표,
꽃 대신 내려앉은 검은 꽃가루가
노동의 문장 부호로
손바닥에 남았다는 것도.
기침이 깊어질수록 마른 손의 온기 안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한 권으로 묶어
말없이 내려놓으셨다.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책상 위가 아니라
다음 날을 살아야 할
누군가의 바닥 가까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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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시인
2020년 월간《우리詩》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먼 산』(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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