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새 풍경
"할머니, 제가 화장해 드릴게요."
가족사진을 찍기전에 손녀 시연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오래된 가족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아들 결혼식 날 찍은 사진이다. 아들 부부와 우리 부부, 그리고 딸까지 다섯 식구가 함께한 사진. 결혼한 해 어버이날에 아들과 며느리가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 준 뒤로 16년 동안 우리 집 거실을 지켜 왔다.
그동안 가족은 늘어났다. 사위가 생겼고 손주들도 자랐다. 특히 사위는 가끔 농담처럼 "저는 없는 가족사진이네요." 하곤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언젠가는 온 가족이 함께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 남편과 내가 칠순을 맞았다.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남편 건강 때문에 여행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우리 가족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관에 가서 상담을 받고 의상도 준비했다. 흰색과 베이지색 계열로 맞추기로 해서 남편과 나는 옷도 새로 장만했다.
사진 찍는 날, 시연이가 먼저 집에 와서 나를 화장해 주었다. 신부화장하듯 정성을 들여 하는데. 지루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내게
"할머니, 일반 화장이랑 사진 화장은 달라요. 제가 유튜브 보고 연구했어요."
시연이 말대로였다. 사진을 받아보니 참 곱게 나왔다. 그날 나는 손녀의 정성과 사랑을 오래 기억할것이다.
가족이 많다 보니 사진관에 있는 옷을 고르고 자리를 잡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사진사는 칠순 기념 촬영인데도 가족이 이렇게 많고 손주들까지 훌쩍 큰 경우는 드물다며 보기 너무 좋다고 덕담을 해준다.
엄마와 딸이 함께 찍고 아빠와 아들도 찍고, 원가족 네식구가 찍는 동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느새 나보다 훨씬 커진 손주들과 사진을 찍을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가정을 이루고, 그 곁에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 어쩌면 그것은 대를 잇는 기쁨이고 삶이 맺어 준 가장 큰 결실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뒤 새 액자가 도착했다.
거실 벽 중앙, 오랫동안 걸려 있던 내 그림을 내리고 그 자리에 새 가족사진을 걸었다. 그런데 그 뒤로 낯선 풍경 하나가 생겼다.
남편이 자주 그 사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은퇴 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남편이다. 그런데 사진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사진이 남편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몰래 찍어 가족방에 올렸더니 아들이 댓글을 달았다.
"아버지 그 앞에 의자 하나 놔드려야겠네요. ㅎㅎ"
나는 웃음이 나왔다
결혼 44주년. 돌아보니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기쁨도, 가장 큰 힘도 열한 명의 가족이었다.
올해 1월부터는 손주들과 함께 잠언방을 열어 매일 성경을 읽고 각자 마음에 남는 한구절을 올리고 있다. 다섯 손주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요즘 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고 보람이다.
어제 나는 잠언 22장 6절을 나누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할머니가 이 말씀 때문에 너희와 함께 이 방을 지키는 거란다."
아이들이 잠언을 올 한해 반복해서 읽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면, 그 삶은 분명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차를 수리하느라 장을 보지 못해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이 해 먹은 음식을 올리자 나는 내일은 세상없어도 마트를 가야 한다며 아무 생각 없이 그 사진을 가족방에 올렸는데, 다음 날 며느리가 새벽배송으로 채소며 고기며 과일까지 한가득 보내 주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쓰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랑이 참 따뜻했다.
살아보니 가족은 힘이들 때도 있지만 가장 큰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 집 거실에는 새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사진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남편이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사진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열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수십 년의 세월과 사랑,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살아가게 할 힘이 그 안에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거실의 새 풍경은 말없이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