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 김준혁 지음, 더봄
백성을 사랑한 개혁군주 정조의 리더십
여러 해 전 한 방송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들이 뽑은 청소년들이 알아야 할 인물 1위가 정조였다. 정조가 이렇게 관심을 받는 건 급변하는 시기였던 조선 후기를 르네상스로 이끌었고, 또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신이 강한 군주였기 때문이리라.
개혁군주인 정조는 조선 제22대 왕으로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했다. 본서의 저자 김준혁 교수는 지난 40여년 동안 정조 연구 전문가로 살아온 학자다. 그는 이 책에서 정조의 리더십을 7장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1장 ‘공부하는 군주’에서 저자는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넓히는 정조를 소개한다. “정조는 천성적으로 책을 통해 지식 얻기를 좋아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도 엄청나게 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영조가 감탄할 정도였다.”(15쪽)
조선의 국왕이 된 후에도 정조의 책 읽기는 지속되었다. 정조는 사대부들과 더불어 경전을 논의하고 함께 책읽기를 즐겼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반드시 책을 두 번씩 보았다. 일단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한 번 익히고, 두 번째로는 다시 정독을 해서 내용을 깊이 파악하는 방법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글을 읽을 때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읽었다.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루에 어떤 글을 몇 번 읽고, 어떤 글을 몇 줄 읽는다고 반드시 과정을 정해 놓고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다.”(17쪽)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19쪽)
정조는 신하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독서의 공부에 힘입지 않고도 뜻이 확립되고 이치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20쪽)
2장 ‘시대의 변화를 읽다’에서는 국가 개혁의 이념을 명확히 밝힌 개혁군주로서의 정조를 보여준다. “정조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불평등 관계에 있는 하층민의 소외정책을 개선하고 인권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싶었다. 아울러 기득권층의 특권을 분산시키고 싶었다...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노론 위주의 기득권층을 압박하여 조선의 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47쪽)
정조는 이를 위하여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4대 과제를 제시했다.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네 가지 개혁이다. 이는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 발진의 기반이 되게 하고, 국방을 개혁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4대 개혁 중에서 정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방개혁이었다. 당시 국가 재정의 56%가 군사비용으로 지출되었고 백성들은 군역의 의무가 가장 큰 폐단이었다. “정조는 국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군사 통수권을 장악함과 아울러 군제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조는 필요 없는 병사들을 덜어내어 군제를 갖춘다는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군비 축소를 통해 민간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54쪽)
정조는 탕평을 통한 고른 인재 등용도 적극 추진했다. 그래야만 올바른 인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이렇게 적용한다. “오늘날 우리 리더들은 과거에 비록 허물이 있는 사람이어도 철저하게 반성한 사람들이라면 포용하고 자신과 혹은 조직과 관련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정조처럼 통크게 조직 전체에서 좋은 인재를 찾아내고 그를 활용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큰 기반이 될 것이다.”(57쪽)
백성을 사랑한 정조는 사회복지에도 관심을 가졌다. 1783년(정조 7)에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할 자율전칙(字恤典則)이라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정조는 힘없고 홀로 남은 아이들에 대해 조정과 지방 수령들이 책임지고 기르게 했다. 정조시대 버려진 아이들은 10살이 될 때까지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정조는 가난한 아이들도 나라의 백성이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저자는 정조가 소외 계층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정책을 단행한 점을 부각시키면서 “정조의 복지정책은 시대의 변화와 인간에 대한 존중 의식을 그대로 법령에 투영한 것이다. 기득권보다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더욱 마음을 두고 그들의 삶을 위한 정책을 만든 정조, 그런 마음과 정책 덕분에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3장 ‘인재등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에서 저자는 정조가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을 책임질 핵심인재를 중용하였다고 말한다.
정조는 필요한 인재를 평민들 중에서도 찾아내어 국왕 본인과 나라를 위해서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시대 종기 치료의 최고 의원으로 인정받는 피재길(皮載吉)이다. 피재길의 아버지는 종기치료에 탁월한 고약을 만드는 의원이었는데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피재길은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곁에서 보고 들었던 몇 가지 방법을 피재길에게 가르쳐 주었다.”(101쪽)
피재길은 의서를 읽은 적도 없고 다만 약재를 모아 달여서 고약 만드는 방법만 알 뿐이었다. 아는 것이 없다 보니 모든 부스럼과 상처에 이 약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피재길의 고약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약을 써 보니, 신통하게 병이 나아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1793년(정조 17) 여름, 정조의 머리에 고질병인 부스럼이 났다. 그러자 피재길에게 치료를 받아 완치된 경험이 있는 관리가 정조에게 피재길을 추천했다. 피재길이 웅담을 여러 약재와 섞은 뒤 볶아서 고약을 만들어 정조의 환부에 붙인 뒤 하루가 지나 통증이 잦아들고, 사흘이 지나 부스럼이 없어졌다.
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정조는 그를 내의원의 종6품 침의(鍼醫)로 임명했다. 피재길은 이후 피부병을 고치는 의술을 더욱 발전시켜 백성들의 치료에도 혁혁한 공헌을 했다. 정조의 인재 등용이 조선 사회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정조는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양성했다. 다산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대단했다. 다산 정약용 연구의 최고봉인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정조와 다산의 만남을 ‘백성을 위한 운명적 만남’으로 평가한다.
정조가 다산을 총애한 것은 그가 단지 학문이 높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 정조는 다산을 통해 암행어사와 목민관의 모범을 세우려고 했다. 정조는 자신의 총애를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령들을 다산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고, 백성을 위한 목민관의 역할에 충실하게 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다산으로 하여금 채제공의 뒤를 이어 정승을 삼아 자신과 함께 국사를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 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정조는 인재등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쓰는데 도가 있으니 오직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눈앞에 좋지 않은 사람이 없고 천하에 버릴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4장 ‘강건한 군주’에서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함양하고 성찰한 정조를 조명한다. 또한 개혁저항세력을 과감히 척결한 강한 군주의 면모도 보여준다. 1794년(정조 18) 1월 7일, 정조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윤범행을 파직시켰다. 수원에 새로 지을 성곽 도면을 엉터리로 그려 보냈기 때문이다. 수원에 쌓을 성곽의 도면을 그려 올리는 것은 단지 하나의 성곽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조의 개혁정치를 추진할 혁신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었기에 정조 재위 18년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런데 윤범행이 정조의 명을 우습게 여기고 성곽 도면 전체를 세밀히 그리지 않고 얼렁뚱땅 반만 그려 조정에 올려 보낸 것이다. 저자는 정조가 자신의 개혁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엄벌하거나 처단한 사례들을 소개하였다. 예를 들면, 정조가 국왕으로 등극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인물은 정조시대 군권을 장악한 ‘무종’이라 불린 구선복이었다.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구선복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때 구선복은 뒤주에 들어가는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광경을 11살의 세손이었던 정조는 똑똑히 보았다.”(180쪽)
구선복은 정조를 은근히 능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정조를 시해하려고까지 했다. 정조가 국방의 잘못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조를 시해하기 전에 발각되어 쿠데타는 실패했다. 정조는 구선복 제거 이후 국방 구조조정을 통해 군영을 통폐합하고 무과 제도를 정비했으며, 정예화한 군영 체제로 변화시켜 나갔다. 조선 역사상 최고의 국방개혁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는 정조의 과감한 용기의 결과였다.
5장에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정조를 소개하고 있다. 정조는 자신을 따른 이들을 끝까지 보호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최선을 다했으며, 때로는 진정한 소통을 위해 비밀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저자는 정조의 비밀어찰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바로 ‘소통’이라고 말한다. “국왕이 신하들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정조는 학문과 무예 모든 면에서 신하들보다 월등히 우세했고,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의 기록에서 보듯이 정조가 목소리를 높여 어전에서 신하들을 꾸짖으면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렇듯 정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바로 국왕과 신하, 그리고 관료와 백성들의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의 비밀어찰을 통해 국왕 정조의 모습이 새롭고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258-259쪽)
6장에서는 ‘포용의 정치’를 추구한 정조를 다루고 있다. 정조는 백성들을 존중하고 세심하게 배려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국정 운영체제와 국가 통치 질서가 해이해지면서 관리들은 점점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로 변했다. 가뭄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퍼지면 살아남기 위해 양인의 신분에서 노비로 전락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롭게 삶이 격하된 노비와 기존의 노비들이 주인들의 강압과 성적 학대 등을 이유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이들을 잡기 위한 추노꾼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온 나라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문제를 혁파하여 바로 잡은 이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시행한 가장 빠른 정책이 바로 노비추쇄관(奴婢推刷官)을 혁파하고 도망간 노비를 잡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가장 소외되고 천한 이들의 삶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준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노비들이 발생하지 않게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관리들의 탐학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혁정책을 추진했다.”(283쪽)
조선의 모든 노비를 없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에게 고귀한 인간과 천한 인간의 구분은 없었다. 정조는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고로 마땅히 노비는 혁파되어야 한다.”라며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혁파 기획을 세웠다.
정조는 백성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성이 굶주리면 곧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불리 먹으면 나도 배부르다. 더욱이 흉년의 재해를 구제하여 돌보는 것은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서둘러야 할 일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바이니, 잠시라도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업이나 학문을 막론하고 중도에 그만두어 그전에 이룬 공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283-284쪽)
7장 ‘조선의 진경문화시대를 열다’에서 저자는 ‘활자 주조 활성화’로 문예를 부흥시킨 정조의 뛰어난 업적을 상술하고 있다.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강력한 문화정치를 추구했으며, 여기에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정조는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서적의 신속한 편찬을 위한 기본 작업으로 활자의 주조에 힘을 기울였다.
“정조는 책을 간행하기 위하여 활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앞서의 이야기처럼 활자를 통해 책을 다량으로 간행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11쪽)
저자는 정조가 활자를 만들어 조선의 문화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활성화하였다고 말한다. “요즘말로 하면 한글 보급운동이고 당시 상황으로 이야기하면 언문을 통한 국가 정책 홍보였다. 국왕이 관리와 백성들에게 타이르거나 당부하는 말씀을 윤음綸音이라 했는데, 정조 이전까지는 윤음을 반포할 때 한문으로 작성된 것만을 반포했다. 그러니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윤음과 법령을 반포할 때 훈민정음으로도 써넣어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역시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기층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329쪽)
백성의 교화를 위한 한글문헌의 간행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문헌들은 모두 백성들을 교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 정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다양한 책들이 간행되었다. 특히 정조는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표준 무예를 정립할 수 있는 《무예보도통지》를 간행했다. 조선의 무예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무예를 24가지로 정리한 무예서를 간행한 것이다. 백성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무예도보통지》를 읽을 수 없을 것이므로 백성들이 읽고 무예를 익히게 하기 위하여 언해본을 간행하게 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에 훈민정음을 적극 보급해서 백성들의 지식을 높인 것은 오늘날 최신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백성들의 지식과 정보가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다.”(333쪽)
정조는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한 군주였다. “1786년 정조는 박제가가 올린 서양선교사 수용론을 배척하지 않았다. 정조는 이해 모든 관료들에게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방도 용서할 테니 국가 개혁을 할 수 있는 정책을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성조의 의중을 파악한 박제가는 청나라가 서양 선교사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서양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나라가 발전하고 있음을 역설했다.”(347쪽)
박제가는 정조에게 서양 종교인 서학은 우리나라에 있는 불교와 같은 종교일 뿐이고 이 종교가 국가 운영을 제어할 수도 없고, 유교 사회의 근본 원리를 저해할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학을 두려워하지 말고 서양 선교사들을 적극 받아들여 서양의 기술로 조선을 발전시키자고 했다. 이에 정조는 박제가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정조의 이와 같은 서학 포용과 서양 기술을 이용하고자 한 뜻은 농업과 상업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과감한 개혁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정조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과 문화를 만든 ‘문화 군주’였다.
정조는 급변하는 시기였던 조선 후기를 르네상스로 이끌었고, 또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신이 강한 군주였다.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강한 의지와 지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한 단계 올려놓았다. 개혁군주 정조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이 책은 목회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 송광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