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가지고 있는 구조
현대는 인간 자율, 과학이 발전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런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불트만은 비신화화 하였다. 자기의 사상을 성경의 틀 속에 넣어 버린다.
자유주의자 일수록 만년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하고, 보수주의자일수록 현대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한다.
현재의 내가 전제를 가지고 성경 속으로 들어간다. 자기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또 그 시대의 안경을 끼고 본다. 총신이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강의를 통해서도 안경을 끼게 된다. 신학에서 배운 것이 전제가 되어서 안경을 끼게 된다.
문제는 이 전제를 가지고 자기의 전제를 성경에 들어가서 자기의 전제를 정당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경의 이해로 자기의 전제가 성경적 전제로 화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
전제가 성경으로 들어간 후에 다시 나올 때는 성경의 전제를 가지고 현실로 나와야 한다.
본문을 놓고 1주일 내내 자기의 생활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 가운데서 말씀이 착근(着根)을 하게 된다. 말씀이 着根 되도록 하라.
1>.말씀이 삶의 맥과 연결되도록 하라.
2>.성경은 인간의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이어야 한다. <문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은 쟝르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비유를 놓고
신문기사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복음서를 놓고 전기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복음이라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쟝르를 구성하고 있다. 쟝르를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이 불제자였다'라고 추측하는 것은 복음서의 쟝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3> 근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을 설교할 때, 이 설교를 통해서 하루 밤의 기도로 완전히 천사가 된다고
착각시키는 설교는 하지 말라. 그는 여전히 형 에서 앞에서 아부하였다. 아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1-6절을 설교할 때>, 빌립보 전체를 여러 번 언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설교를 여러 번 뒤집어야 한다.
4> 그래서 원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원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1. 단어에 있어서 부당축의 하지 말라.
자기 의미 아닌 것을 모아서 설명하는 것이 부당축의이다.
예)베드로가 물에 빠져들 때,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에서 '구원'을 설명한다면 부당축의하게 된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부당축의할 수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공부많이 할 사람일 수록 그렇다.
본문에서 무엇을 말할고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부당축의한다.
예)"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계시라는 말을 잡고 섥자가 "일반 계시가 어떠하며, 특별계시가 어떠하다" 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부당축의이다. 여기서 계시는 조명에 대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2.어원화를 주의하라.
어원이 항상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어가 역사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 그 시점에서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를 알아야 한다.
단어에는 통시적(diachronic) 의미와 동시적(synchronic)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단어를 설명할 때,
동시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동시적 분석으로 단어를 분석해 나가야 한다.
3>역사적 맥을 따라야 한다.
그 지명과 그 역사와 그 문화를 이해해서 그 사람들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성서지리학을 해야 한다. 신약배경사와 구약 서론, 신약 서론을 공부해야 한다.
주의할 것은 그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이해하라는 것이다.
큐티는 내 나름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심리화, 영화, 현대화로 착각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는 두 지평의 융합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이 두 지평의 융합이 늘 머리 속에 들어 있어야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있다.
The Cry the Soul
How Our Emotion Reveal Our Deepest Questions about God
느끼도록 설교를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지금은 Emotion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예배는 장례식이 아니고, 축제다. 주로 Emotion에 집착하고 있다.
우리는 지. 정. 의 를 다 포함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흐르다보니 지적인 부분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흐름이 Emotion 으로 흐르기 때문에 롱맨은 그것을 포착한 것이다.
Allpender 와 Longman이 같이 글을 썼다는데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창녀 속에서의 신부의 영성> 현실감각이 뛰어난 일반대학 교수가 분석한 뒤,
그 분석에 대해서 신학교수가 처방전을 내어놓는다면 좋을 것이다.
알렌더는 인간심리를 분석하고 롱맨은 성경을 갖다 대었다. 두 지평의 융합된 것이다.
강해 설교에 있어서도 두지평이 융합되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비판받는 것은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모르는 것에 비판을 받고 있다.
<시편>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시편은 우리의 깊은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찌하여 원수가 많습니까? 영원히 나를 떠나시려나이까? > 갈등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것은 기복이 심하다.
현대심리학자들은 그 감정들이 중립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저자는 이 감정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깊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질문을 표출시키는 것이 때문에 감정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룰 때, 시편중에서 <Psalms of Disorientation>
시73편같은 경우에 자기는 바로 믿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은 너무 잘되고 있다. 세상에 이룰수가 있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고통적인 삶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잘되는 것을 보며 가슴앓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신신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삶은 망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가슴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그래서 감정을 영혼의 울부짖음이라고 한다.
시편을 해석할 때, 상담심리학에서 말씀을 다루어 나가게 되면 감정을 분노,시기, 절망, 멸시,
수치 6개의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분노 중에서도 의로운 분노, 불의의 분노가 있는데, 의로운 분노는 불의한 분노에 대해서 하는 분노이고,
불의한 분노는 기다리지 못해 나타나는 분노이다.
두려움에도 자기를 파괴하는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다.
어두운 욕망>시기와 질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망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 두 지평의 융합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병무 교수의 말 "왜 기장측들이 부흥하지 않는가? 철학적인 설교만 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생활과 관련된 것을 좋아한다. 생활과 연결시키는 설교를 해야 한다.
<데니스레인>
한국교회의 장점> 기도와 헌신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단점)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에는 영국 교회가 한국 교회와 비슷하였다. 한국 교회는 위기다.
말씀이 생활에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에 세상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관련된 말씀이다.
오늘과 관련되지 않으면 그 말씀은 떠 버린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인간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삶이 강조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데니스레인은 모든 삶을 말씀과 관련을 시킨다.
말씀이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면 위기다. 지금 굉장히 번창하지만 이 말씀대로 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왜 줄어들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남비와 같은 신앙이기 때문에, 빨리 식어 버릴 위험이 있다.
심각한 문제는 말씀과 생활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설교자들이 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지 않는다 *
웨스트민스트와 같이 보수적인 학교에서도 이렇게 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실천 쪽에 관심을 가지면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는, 현실을 뒤집어엎는 시도를 해야 한다.
4> 성경의 맥을 잡아라. - 경맥(신학적해석)
성경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6권 성경이 40여저자에게서 1600년간에 걸쳐 쓰여진 말씀인데,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저자이시기 때문이다.
두 말씀을 충돌시키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창세기로부터 계 1600년 까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웅장한 설계자로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각 성경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본문을 설교할 때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신학적 해석이라고 한다.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맥을 잡는 해석인데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병행되는 본문을 통해서
그 본문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이 나올 때, 다른 구절의 단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유의점 1>
주의할 것은 표면상 같은 단어나 구가 실제로 같은 구나 단어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문맥 속에서 같은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콘코던스를 사용하는 자들이 모순에 빠지는 것은 문맥 속에서 단어를 찾아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의 풍부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껍데기만 설교하는 것이다.
표면상의 의미와 병행구가 같도록 해석하라.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잘못 사용하면 교인들은 성경에서 멀어진다.
*<유의점 2>
구약 신학, 신약 신학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신약 신학을 하지 않으면 종말론에 가서 <세대주의적 설교>를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전체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접근 방법>을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구속사란 무엇인가? 창-계 하나님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신약을 이야기해야 한다. 신약을 설교 하면서 구약을 인용해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시각이 없이 구약을 해석하면, 랍비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구약 본문 자체로 보면서도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주제가 발전되면서 계시록에 와서 종결을 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을 이야기하면서 안병무의 이야기를 하였다.
남한을 비판하면서 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가? 안교수는 유대인들을 소외된 계층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와 가나안의 쫒겨난 자들이 하비루를 구성하였는데,
그 제도권에 저항하는 사상을 여호와 유일사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윗이 군인출신으로
여호와가 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사령화하고 성전을 사령화하였다.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 그래서 안교수의 타도대상이 다윗이라는 것이다.
그 타도할 사람이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여호와 유일사상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의 지도자로 사역하였다. 민중의 한을 푸는 자가 예수다.
예수 무당이 민중을 규합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도권이 때리므로 맞았고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저항주의자이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화산맥이 나오고 있고 그것이 주기적으로 분출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태일이 바로 그였다
고 주장한다. 그에게 메시야가 현존했다고 한다. 민중신학이 보는 성경이 맥이 바로 이렇다.
메시야를 죽인 것은 민중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해석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차이는 해방신학은 폭력을 민중신학은 비폭력적이다.
우리는 구원의 역사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모토중에 하나는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라는 것이다.
이 모토 즉,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기 때문에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없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것은 반지성주의적 경향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주장한 종교 개혁자들은 대단한 지성주의자, 학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을 주장했고 그렇게 성경을 해서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루터는 원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원어로 설교했다. 그 실력으로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는가? 헬라어, 히브리어를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중세교회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공부를 해야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책보다도 신학책을 사랑하지 말라. 성경전체를 많이 읽어야 된다.
성경의 내용이 맥으로 잡히고, 체질화 되도록 해야 한다.
5> 영맥을 잡아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숨길이 들어가 있는 책이다.
1>에서 4>까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잡아낼 수 있다.
그러나 영맥 쪽으로보면, 예수 믿지 않는 학자들은 할 수 없다. 성경해석은 깨닫는 것이다.
인격이 부딪혀서 변화되어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짜 깨달음은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듣고 깨닫는 자니,............." 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중생한 사람이라도 성령에 다이얼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다이얼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그
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영맥은 강조했던 반면에, 1>에서 4>에 대해서는 무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성령의 설교를 할 수 있다. 성령의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령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다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막혀 버린다. 회개하여야 한다.
미운 사람을 마음에 품고 성경해석을 할 수 없다. 감정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다.
강단에 설 때, 그러한 부분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노이로제에 걸려서는 안된다. 회개는 고치는 것이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맥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영맥과 연결되는 것이다. 설교자가 어떻게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질이 달라진다. 말씀을 붙들고 깊이 묵상할 때,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설교묵상을 할 때, 1-4번을 확인하고 성도들에게 외치라.
설교가 원고로 준비된 후에 머리 속에 담고 산책하라. 그리하여 산책하며 두번 정도 설교하라.
그리하면 강단에서 설교를 볼 필요가없다. 성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 강단에 서면 위험하게 된다.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라.
성령의 삶과 현실의 삶이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신다.
고난을 통해서 머리에 있던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간다.
고난을 당하면 자기와 관련된 부분이 강하게 다가온다. 맥(脈)을 잡아라.
계속
현대는 인간 자율, 과학이 발전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런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불트만은 비신화화 하였다. 자기의 사상을 성경의 틀 속에 넣어 버린다.
자유주의자 일수록 만년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하고, 보수주의자일수록 현대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한다.
현재의 내가 전제를 가지고 성경 속으로 들어간다. 자기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또 그 시대의 안경을 끼고 본다. 총신이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강의를 통해서도 안경을 끼게 된다. 신학에서 배운 것이 전제가 되어서 안경을 끼게 된다.
문제는 이 전제를 가지고 자기의 전제를 성경에 들어가서 자기의 전제를 정당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경의 이해로 자기의 전제가 성경적 전제로 화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
전제가 성경으로 들어간 후에 다시 나올 때는 성경의 전제를 가지고 현실로 나와야 한다.
본문을 놓고 1주일 내내 자기의 생활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 가운데서 말씀이 착근(着根)을 하게 된다. 말씀이 着根 되도록 하라.
1>.말씀이 삶의 맥과 연결되도록 하라.
2>.성경은 인간의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이어야 한다. <문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은 쟝르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비유를 놓고
신문기사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복음서를 놓고 전기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복음이라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쟝르를 구성하고 있다. 쟝르를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이 불제자였다'라고 추측하는 것은 복음서의 쟝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3> 근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을 설교할 때, 이 설교를 통해서 하루 밤의 기도로 완전히 천사가 된다고
착각시키는 설교는 하지 말라. 그는 여전히 형 에서 앞에서 아부하였다. 아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1-6절을 설교할 때>, 빌립보 전체를 여러 번 언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설교를 여러 번 뒤집어야 한다.
4> 그래서 원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원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1. 단어에 있어서 부당축의 하지 말라.
자기 의미 아닌 것을 모아서 설명하는 것이 부당축의이다.
예)베드로가 물에 빠져들 때,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에서 '구원'을 설명한다면 부당축의하게 된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부당축의할 수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공부많이 할 사람일 수록 그렇다.
본문에서 무엇을 말할고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부당축의한다.
예)"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계시라는 말을 잡고 섥자가 "일반 계시가 어떠하며, 특별계시가 어떠하다" 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부당축의이다. 여기서 계시는 조명에 대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2.어원화를 주의하라.
어원이 항상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어가 역사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 그 시점에서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를 알아야 한다.
단어에는 통시적(diachronic) 의미와 동시적(synchronic)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단어를 설명할 때,
동시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동시적 분석으로 단어를 분석해 나가야 한다.
3>역사적 맥을 따라야 한다.
그 지명과 그 역사와 그 문화를 이해해서 그 사람들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성서지리학을 해야 한다. 신약배경사와 구약 서론, 신약 서론을 공부해야 한다.
주의할 것은 그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이해하라는 것이다.
큐티는 내 나름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심리화, 영화, 현대화로 착각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는 두 지평의 융합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이 두 지평의 융합이 늘 머리 속에 들어 있어야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있다.
The Cry the Soul
How Our Emotion Reveal Our Deepest Questions about God
느끼도록 설교를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지금은 Emotion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예배는 장례식이 아니고, 축제다. 주로 Emotion에 집착하고 있다.
우리는 지. 정. 의 를 다 포함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흐르다보니 지적인 부분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흐름이 Emotion 으로 흐르기 때문에 롱맨은 그것을 포착한 것이다.
Allpender 와 Longman이 같이 글을 썼다는데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창녀 속에서의 신부의 영성> 현실감각이 뛰어난 일반대학 교수가 분석한 뒤,
그 분석에 대해서 신학교수가 처방전을 내어놓는다면 좋을 것이다.
알렌더는 인간심리를 분석하고 롱맨은 성경을 갖다 대었다. 두 지평의 융합된 것이다.
강해 설교에 있어서도 두지평이 융합되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비판받는 것은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모르는 것에 비판을 받고 있다.
<시편>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시편은 우리의 깊은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찌하여 원수가 많습니까? 영원히 나를 떠나시려나이까? > 갈등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것은 기복이 심하다.
현대심리학자들은 그 감정들이 중립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저자는 이 감정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깊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질문을 표출시키는 것이 때문에 감정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룰 때, 시편중에서 <Psalms of Disorientation>
시73편같은 경우에 자기는 바로 믿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은 너무 잘되고 있다. 세상에 이룰수가 있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고통적인 삶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잘되는 것을 보며 가슴앓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신신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삶은 망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가슴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그래서 감정을 영혼의 울부짖음이라고 한다.
시편을 해석할 때, 상담심리학에서 말씀을 다루어 나가게 되면 감정을 분노,시기, 절망, 멸시,
수치 6개의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분노 중에서도 의로운 분노, 불의의 분노가 있는데, 의로운 분노는 불의한 분노에 대해서 하는 분노이고,
불의한 분노는 기다리지 못해 나타나는 분노이다.
두려움에도 자기를 파괴하는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다.
어두운 욕망>시기와 질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망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 두 지평의 융합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병무 교수의 말 "왜 기장측들이 부흥하지 않는가? 철학적인 설교만 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생활과 관련된 것을 좋아한다. 생활과 연결시키는 설교를 해야 한다.
<데니스레인>
한국교회의 장점> 기도와 헌신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단점)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에는 영국 교회가 한국 교회와 비슷하였다. 한국 교회는 위기다.
말씀이 생활에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에 세상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관련된 말씀이다.
오늘과 관련되지 않으면 그 말씀은 떠 버린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인간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삶이 강조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데니스레인은 모든 삶을 말씀과 관련을 시킨다.
말씀이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면 위기다. 지금 굉장히 번창하지만 이 말씀대로 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왜 줄어들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남비와 같은 신앙이기 때문에, 빨리 식어 버릴 위험이 있다.
심각한 문제는 말씀과 생활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설교자들이 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지 않는다 *
웨스트민스트와 같이 보수적인 학교에서도 이렇게 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실천 쪽에 관심을 가지면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는, 현실을 뒤집어엎는 시도를 해야 한다.
4> 성경의 맥을 잡아라. - 경맥(신학적해석)
성경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6권 성경이 40여저자에게서 1600년간에 걸쳐 쓰여진 말씀인데,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저자이시기 때문이다.
두 말씀을 충돌시키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창세기로부터 계 1600년 까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웅장한 설계자로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각 성경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본문을 설교할 때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신학적 해석이라고 한다.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맥을 잡는 해석인데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병행되는 본문을 통해서
그 본문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이 나올 때, 다른 구절의 단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유의점 1>
주의할 것은 표면상 같은 단어나 구가 실제로 같은 구나 단어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문맥 속에서 같은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콘코던스를 사용하는 자들이 모순에 빠지는 것은 문맥 속에서 단어를 찾아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의 풍부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껍데기만 설교하는 것이다.
표면상의 의미와 병행구가 같도록 해석하라.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잘못 사용하면 교인들은 성경에서 멀어진다.
*<유의점 2>
구약 신학, 신약 신학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신약 신학을 하지 않으면 종말론에 가서 <세대주의적 설교>를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전체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접근 방법>을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구속사란 무엇인가? 창-계 하나님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신약을 이야기해야 한다. 신약을 설교 하면서 구약을 인용해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시각이 없이 구약을 해석하면, 랍비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구약 본문 자체로 보면서도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주제가 발전되면서 계시록에 와서 종결을 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을 이야기하면서 안병무의 이야기를 하였다.
남한을 비판하면서 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가? 안교수는 유대인들을 소외된 계층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와 가나안의 쫒겨난 자들이 하비루를 구성하였는데,
그 제도권에 저항하는 사상을 여호와 유일사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윗이 군인출신으로
여호와가 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사령화하고 성전을 사령화하였다.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 그래서 안교수의 타도대상이 다윗이라는 것이다.
그 타도할 사람이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여호와 유일사상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의 지도자로 사역하였다. 민중의 한을 푸는 자가 예수다.
예수 무당이 민중을 규합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도권이 때리므로 맞았고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저항주의자이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화산맥이 나오고 있고 그것이 주기적으로 분출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태일이 바로 그였다
고 주장한다. 그에게 메시야가 현존했다고 한다. 민중신학이 보는 성경이 맥이 바로 이렇다.
메시야를 죽인 것은 민중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해석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차이는 해방신학은 폭력을 민중신학은 비폭력적이다.
우리는 구원의 역사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모토중에 하나는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라는 것이다.
이 모토 즉,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기 때문에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없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것은 반지성주의적 경향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주장한 종교 개혁자들은 대단한 지성주의자, 학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을 주장했고 그렇게 성경을 해서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루터는 원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원어로 설교했다. 그 실력으로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는가? 헬라어, 히브리어를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중세교회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공부를 해야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책보다도 신학책을 사랑하지 말라. 성경전체를 많이 읽어야 된다.
성경의 내용이 맥으로 잡히고, 체질화 되도록 해야 한다.
5> 영맥을 잡아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숨길이 들어가 있는 책이다.
1>에서 4>까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잡아낼 수 있다.
그러나 영맥 쪽으로보면, 예수 믿지 않는 학자들은 할 수 없다. 성경해석은 깨닫는 것이다.
인격이 부딪혀서 변화되어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짜 깨달음은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듣고 깨닫는 자니,............." 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중생한 사람이라도 성령에 다이얼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다이얼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그
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영맥은 강조했던 반면에, 1>에서 4>에 대해서는 무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성령의 설교를 할 수 있다. 성령의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령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다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막혀 버린다. 회개하여야 한다.
미운 사람을 마음에 품고 성경해석을 할 수 없다. 감정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다.
강단에 설 때, 그러한 부분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노이로제에 걸려서는 안된다. 회개는 고치는 것이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맥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영맥과 연결되는 것이다. 설교자가 어떻게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질이 달라진다. 말씀을 붙들고 깊이 묵상할 때,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설교묵상을 할 때, 1-4번을 확인하고 성도들에게 외치라.
설교가 원고로 준비된 후에 머리 속에 담고 산책하라. 그리하여 산책하며 두번 정도 설교하라.
그리하면 강단에서 설교를 볼 필요가없다. 성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 강단에 서면 위험하게 된다.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라.
성령의 삶과 현실의 삶이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신다.
고난을 통해서 머리에 있던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간다.
고난을 당하면 자기와 관련된 부분이 강하게 다가온다. 맥(脈)을 잡아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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