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알랭바디우

8.19.tue. 해. 나는 멘토인가 꼰대인가(데카르트)

작성자헤세드|작성시간25.08.18|조회수55 목록 댓글 0

 

 

어쩌다 보니 인천 외국인청을 세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추방이 확정된 불법체류자에게 '타자의 눈물'을 생각하며 화성 공장에 찾아가 월급(450만)과 기타 물품을 챙겨주었고, 면회를 신청해 여권과 비행기 삯을 지난 8월 14일 영치해 주었어요. 그런데 따로 약 2천5백만 원어치의 금을 보호소에 있는 아이에게 전해주려다 보니, 물품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지 일주일 내내 신경이 어지간히 쓰였어요. 사실 나는 사람뿐 아니라,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일은 좀처럼 믿지 않는 성격입니다.

-

빌려준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갚겠다는 말 따윈 믿지 않고 내 주머니에서 이미 나간 돈은 더 이상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음지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어도 사기를 당한 적도, 떼인 돈도 없습니다. 뭣도 모르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아포리즘을 휴대폰 메인 화면에 깔아두고, 로마서 7장을 공부할 때 인간의 한계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라” ―에 무릎을 꿇기도 했어요.

-

30년이 지나, 이제는 “비판하라”는 데카르트의 사유 앞에 조용한 존 애와 경의를 바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자라기보다 모험가처럼 보입니다. 그는 눈앞의 세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감각은 늘 우리를 속이고, 권위는 쉽게 무너지고, 전통은 때로 진리의 얼굴을 가장한 관습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했어요.  그의 의심은 단순한 부정이 아닙니다. 마치 새 집을 짓기 위해 낡은 기둥을 과감히 헐어내는 행위 같습니다.

-

허술한 지식의 건물을 허물어야만 비로소 단단한 기초가 드러난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철저히 무너뜨린 자리에서 그는 단 하나의 확실성을 붙잡았어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하는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데카르트의 사유는 17세기에 머무르지 않아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권위와 정보, 여론과 관습이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뉴스의 자막 한 줄, 전문가의 한마디, 소셜미디어의 파도 같은 여론이 우리의 사고를 이끌지요.

-

그러나 그것들이 언제나 진실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착시이고, 때로는 거대한 착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옵니다. “비판하라. 의심하라. 그리고 스스로 사유하라.” 무조건 받아들이는 대신 근거를 묻고, 권위에 기대는 대신 나만의 판단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단단한 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도 한 번쯤 모든 것을 무너뜨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

나는 26살에 성경을 붙들고 35년을 살아왔지만, 마침내 35년째 되는 해 신앙인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내가 전부라고 믿었던 신앙에 대해 객관적 비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목소리 덕분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데카르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을 세우기 위해, 지금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가? 나는 에예공에게 멘토일까, 꼰대일까.

2025.8.18.tue.악동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