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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티와 영화

11.20.thu. 나의 첫사랑 <은교>

작성자헤세드|작성시간25.03.03|조회수82 목록 댓글 0

 

 

 

 

 

 

1.

짜장면과 짬뽕 중에 무조건 짜장면(7.000)을 시키는데 왠 일로 짬뽕(14.000)을 시켰어요. 언어학 공부를 하다보니 문자는 독자를 만나지 않으면 죽은 문자일 뿐이란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 자기 생각, 감정, 의도를 담아요. 그런데 글이 완성되는 순간, 그 의도는 작가의 손을 떠나버립니다. 왜냐하면 글은 더 이상 저자의 것이 아니라 ‘텍스트’(글) 자체가 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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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글자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아요. 독자가 자신의 경험-감정-상상력-해석을 가지고 읽을 때, 비로소 시 속 단어들이 의미를 얻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독자가 읽어줘야 시는 숨을 쉬고 살아나는 겁니다. 시인의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자의 해석이 시를 완성한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시나요?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 ‘자기 의도’를 놓고(의도의 죽음), 독자가 읽을 때 그 시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텍스트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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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살려냅니다. 언어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넷플릭스를 뒤져봐도 볼 영화가 없는 가운데 '은교'를 초이스 했습니다. 개봉 때 본(2012) 영화인데 처음 본 것처럼 상큼합니다. "어라 이게 무슨 냄새야" 아뿔싸! 가마솥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네요. 원작 소설(은교, 박범신)을 영화로 만들었으니 스토리가 탄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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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노 '은교'를 청야동 논란으로 몰고 가는 건 옳지 않아요. '은교'는 주요한 세 인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 시대 고은 작가쯤 되는 이적요(박해일)와 그의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여고생 한은교(김고은)입니다. '은교'는 김고은(1991년)의 데뷔작입니다. 이번엔 '파묘'(2024)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엄청 일찍 스타 덤에 오른 것입니다. 워워. 괜찮아 에예공! 커밍순. 어느 날 자신의 집 마루에서 잠든 어린애를 발견하고 강렬한 끌림에 정신 못 차립니다. 오메, 이것이 뭐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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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솔솔 나는 종이 냄새가 노스텔지아를 불러왔고 순간 '중독(2002)'에서 보았던 공방 시퀀스가 쏟아지는 햇빛으로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줍니다. 에예공! 원목 책장을 부탁해!. "맨 끝 줄 소년은 자신의 욕망에 지가 뛰어든 거고, 은교 할배는 상상만 하다 현타 온 거고, 소년은 상상이 곧 현실이 된 거고" 영화의 이해를 위해 세 인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생각입니다. 이적요(박해일)와 서지우(김무열)는 형식상 사제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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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복잡합니다. 겉으로 볼 때 청출어람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화에서 서지우는 이적요를 무척 존경하고 있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서지우가 이적요를 광적으로 시기하고 있음을 뜻하지요. 혹자는 늙으나 젊으나 도둑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엔 이적요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시기하기에 존경이라는 껍데기를 앞세워 이적요 주위를 맴도는 호러 자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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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적요는 ​서지우에게 있어 왜곡된 우상숭배의 대상이자 개인적 성공을 위한 수단입니다. 노 교수 이적요는 기본적으로 고독에 예민한 인물입니다. 누구나 다 외로워요. 인생이 고독인데 외롭지 않으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냥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욕망,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박해일 할배 편을 드는 건 왜일까요? 지금 내가 외로운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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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고독함 속에서 함께 어울릴 경험을 할 때 인간은 진정한 일체감을 느낍니다. 이적요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도 고독함을 참지 못합니다. 그는 서지우의 작품을 대필해 줌으로써 서지우가 계속 자신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이적요에겐 대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방법이 어찌 되었든 늙은(70대) 자신의 고독을 달래 줄 상대가 필요했어요. 이때 한은교라는 여고생이 우르릉~쾅 쾅 우~루~쏴(해에게서 소년에게/최남선) 하며 나타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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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세요. 서지우는 남자. 한은교는 여자. 늙은 이적요에게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본능입니다. 늑대 같은 남자 말고 사랑스러운 여신님. ㅎㅎ 여기서 이 영화의 초점을 노인네가 여고생을 탐욕적으로 바라본 영화라고 생각하면 감동은 거기까지입니다. 병신들, 니들이 사랑을 알아? 에예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참고하시라. 이적요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의 존재 조건이 무엇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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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과 상상력 때문에 자신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음을 인식합니다. 이 분리된 느낌 때문에 어떤 대상과의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면 항상 불안하지요. 이 분리를 진정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은 오직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특정한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적요(박해일)는 시인으로서 어떤 대상이든 감성적인 일체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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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몸부림치던 늙은 이적요는 여고생 한은교를 사랑하게 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은 젊은 은교에 대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키게 하였습니다. 늙은 이적요는 문학을 통해 드디어 젊은 은교와의 일체감을 이루어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 이적요는 여전히 가슴 한편의 아련한 고독을 완전히 치유하진 못합니다. 언제나 짝사랑은 가슴 아프지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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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수채화를 아주 잘했고 나랑 강식이 형을 예뻐했습니다. 내가 낭랑 17세였으니까 강식 형은 19세, 그래봤자 해숙 샘은 20살 밖에 안 됩니다. 누나의 호방한 성격 탓에 대학생 형들이 서브 샘을 자처하고 화실을 들락거렸는데 말수가 없는 동진이 형이 유독 화실에 오래도록 남아서 그림을 그리다 갔습니다. 우리는 동진 형을 어쩔 땐 형이라고 했다가 형이 티 칭을 할 때는 샘이라고 불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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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화실 쪽방에 누워있었는데 해숙 샘이 들어와 나를 재워주겠다면서 끌어안고 토닥거렸습니다. 그때 아카시아 향기가 났고 라텍스 같은 촉감이 볼에 닿는 순간, 나는 꽃사슴처럼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여러 번 나는 누나의 꽃사슴이 되었고 그때마다 여인의 따뜻하고 포근한 가슴에 중독되어갔습니다. 누나는 나의 뮤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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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나랑 꼭 결혼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늦은 시간까지 그림을 그리다 귀가를 했는데 오늘따라 누나가 보고 싶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화실로 달려갔습니다. 강식이 형이 화실 문 앞에 서성거립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더니 동진 샘이 있습니다. "뭐야 이거?"나는 화실을 박차고 나와 달렸습니다. 눈물이 왜 나오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아, 나의 첫사랑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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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이 흥미진진한 것이 절정을 치닫고 있는 모양입니다. 서지우가 우연히 이적요가 쓴 '은교'라는 글을 발견한 것입니다. 서지우는 자신의 왜곡된 우상인 이적요가 여고생 한은교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합니다. 어딜, 노계가 영계를. 동시에 자신의 문학적 성공을 강렬히 열망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서지우는 원고를 훔쳐 '은교'를 문단에 실어버리지요. 그 결과 서지우는 소설 '은교'를 통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며 자신의 거짓된 성공을 스스로 합리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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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적요는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통해 탄생한 순수한 예술을 서지우가 더럽다고 비난하여 분노하였지만 서지우의 이상문학상 수상식에 나타납니다. 그는 시상식에서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은교'보다 더 진솔한 소설은 없을 것임을 얘기하지요. 나는 이 대목에서 울었어요. 늙다리 이적요​가 젊은 한은교를 성욕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진실로 사랑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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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를 서지우가 쓴 것으로 오해하고 자신을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것에 놀라 서지우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적요는 그들이 자신의 서재에서 정사를 나누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지요. 잠깐! 여기서 한은교와 서지우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한은교는 이제 막 사춘기를 겪으며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미성숙한 인물입니다. 인생에서 감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이지요. 한은교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강력한 외로움을 풀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때 서지우가 나타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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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우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자기애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대상은 모두 자기애를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정말 이기적인 인물이지요. 서지우에게 한은교는 우상의 소중한 존재를 파괴함으로써 얻는 왜곡된 쾌락과 텅 빈 자기애를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결국, 그들의 정사는 사랑이 아니라, 단지 각자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포르노와 에로티시즘의 차이를 아시나요? 여기에 충격을 받은 이적요는 서지우를 '죽일 결심'('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 서지우로 인해 짓밟혔다고 느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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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이적요의 살인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이에 분노한 서지우는 이적요에게 복수하러 가다 중앙선 침 범으로 죽습니다. 헐, 사람이 죽었는데 통쾌한 나는 소시오패스입니다. 이 대목(사고 시퀀스)은 너무 짜 맞춘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적요는 서지우를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자기만의 감옥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인생은 술이야. 세월은 흘러 한은교는 성인이 되고 그녀(은교)가 조금 더 성숙해진 뒤 읽은 소설 '은교'는 절대로 서지우가 쓸 수 없는 글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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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안개꽃을 들고 이적요를 찾아가 등을 돌아누운 그에게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았음을 고백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안개꽃의 꽃말은 '사랑'과 '죽음'이 공존합니다. 한은교가 과거에 진실을 알았다면 이적요와 사랑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사실의 떠나간 사랑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2.

짜장면만 먹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짬뽕을 시킨 것처럼, 언어학 공부를 하다가 문득 이런 사실에 번개를 맞았다. “문자는 독자를 만나지 않으면 죽어 있다.” 우리는 글을 쓰며 생각·감정·의도를 넣지만, 글이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저자의 손을 떠난 텍스트는 독자가 와서 읽어줄 때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시를 살리는 것은 누구인가? 시인인가, 독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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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을 안고 영화 <은교>를 다시 보니, 이 작품이 그리는 ‘욕망’의 문제보다 ‘텍스트를 누가 소유하는가’라는 주제가 더 크게 다가온다.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 의도가 죽는다. 독자가 그 시를 읽으며 자신의 기억·상상·경험을 불어넣을 때 시의 언어는 다시 호흡을 얻는다. 그렇다면 영화 <은교>에서 ‘텍스트’는 누구의 것일까? 노시인 이적요의 것인가? 그의 그늘을 쫓는 제자 서지우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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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그 글에 의해 존재를 깨닫게 되는 은교의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능력의 문제”라고 했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느낀 감정은 세간이 말하듯 단순한 ‘노인의 욕망’일까? 아니면 오래된 고독이 마침내 발견한 일체감의 체험일까? 영화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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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의 실패를 어떻게 구원하는가? 현실에서 은교와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이적요는 그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은교'라는 텍스트는 현실의 불가능을 뚫고 나온 순수한 사랑의 증언이 된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서지우의 손에 넘어가 왜곡된 성공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텍스트는 저자를 잃고 방황한다. 이때 다시 떠오른다. “텍스트는 독자가 읽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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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있던 ‘은교’는 훗날 성숙해진 은교가 다시 읽어줄 때 비로소 새 생명을 얻는다. 그녀는 그 글이 서지우의 것이 아니라이적요의 고독한 심장 깊은 곳에서 태어난 것임을 깨닫는다. 은교가 안개꽃을 들고 스승을 찾아가는 장면은 죽은 텍스트가 독자를 만나 부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안개꽃의 꽃말이 "사랑과 죽음"인처럼 그들의 사랑은 이미 죽었지만 텍스트의 사랑은 뒤늦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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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이야기인가, 고독의 이야기인가? 많은 이들이 <은교>를 ‘노인과 여고생의 논란’으로만 읽는다. 하지만 당신이 강조했듯, 이 영화는 결국 고독의 문제이자 일체감의 갈망이다. 외로움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늙은 시인도, 젊은 제자도, 성숙해 가는 은교도 모두 하나의 중심을 향해 손을 뻗는다. 누군가는 대상에게 뛰어들고, 누군가는 상상만 하다 멈추며, 누군가는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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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셋 모두 외로움에서 도망치려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텍스트인가? 박범신이 히말라야의 노새를 보고 울었던 장면처럼, 우리는 자신만의 텍스트를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 나를 읽어주기 전까지 내 마음은 ‘죽은 문자’로 남아 있다. 누가 나를 읽어줄 것인가? 누가 나의 고독을 해석해줄 것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의 텍스트를 다시 살려낼 것인가? 문학도, 영화도, 사랑도 결국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의도는 사라지고, 독해만이 남는다."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독서를 기다리는 텍스트다.

 

2025.11.20.thu.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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