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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물 동맹 - 브루노 라투르

작성자아로|작성시간19.01.15|조회수121 목록 댓글 1


  • 인간 사물 동맹 
  •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인간 사물 동맹 -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


인간과 사물이 맺은 은밀한 동맹을 파헤쳐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서 『인간 사물 동맹』.
이 책에서 소개하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기계 같은 비인간들이 인간처럼 행위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연구자들이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하게, 대칭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세상을 이해하는 힘은 인간이 아닌 사물이 쥐고 있으며, 인간과 사물이 맺은 동맹에 따라서 세상사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행위자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세상읽기를 시작해본다.


출판사 서평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낡은 사회과학에 도전하는 가장 유력한 이론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론이다.
근대성 이론과 그 대안에 해당하는 탈(脫)근대이론 모두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되었으며, 
 칸트, 헤겔, 후설, 하버마스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의 사상체계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평가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새로운 안목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새로운 사회과학을 선도하는 새로운 이론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수상한 사물에 주목하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사회구성주의 과학기술사회학과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지식과 기술 디자인이 사회적 요소의 개입을 통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탐구하던 사회구성주의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가들의 연구가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가들이 고수하던 비인간 행위자라는 개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이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프랑스 철학과 기호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영미철학과 영미사회학의 전통에 있었던 주류 과학기술학계에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더욱 정교한 모양새로 다듬어졌다.
“우리는 근대였던 적이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되는 근대성에 대한 라투르의 작업은
사회구성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를 통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가들은 점차 자신들의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늘려나갔으며, 또 이론의 응용범위를 넓혔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만들어지는 변덕스러운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실패한 기술과 사회적 요소의 관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성과를 냈으며,
불확실이고 유동적인 세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의료사회학, 지리학, 조직이론, 경영학, IT(정보기술)이론, 이론금융학 등으로 점차 확산되어갔다. 최근에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라가려고 했던 사회과학계에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회과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간과 사물이 맺은 은밀한 동맹을 파헤쳐라!
세상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난다.

어느 깊은 산속에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현인이 살고 있다고 하자.
이 현인이 정말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세상과 어떤 소통도 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과 지혜는 현인의 머릿속에서 머물다가 그가 죽으면서 사라져버릴 뿐이다. 
 
지식은 어떤 형태로든 세상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녀야 한다.
주변에 말을 들어주고 옮겨줄 사람이 없다면, 메모장과 펜이 없다면, 책이나 논문 같은 인쇄물이 없다면,
도서관이 없다면, 블로그가 없다면, 인터넷이 없다면 나의 지식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니다. 나도 내가 아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큰 힘을 갖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지식의 힘은 전쟁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영국이 철선(鐵船)을 앞세워 중국을 위협했을 때, 철선은 당시까지 유럽이 축적한 지식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나무가 아닌 쇠로 만든 배가 안정적으로 뜨고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은 19세기 수력학과 조선학의 개가였다.
 그 배의 엔진에서 사용된 증기기관은 기체의 성질에 대한 오랜 연구와 실린더와 피스톤을 깎는 정밀한 기계공학이 없었으면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력적인 포탄은 18~19세기 화학공학의 산물이었다. 제각기 발전해왔던 이런 지식들이 철선에 한데 집적되었고, 수천 년의 문화와 기술을 자랑하던 중국은 철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결국 중국이 굴복했던 것은 서양의 지식이었다. 
 
17세기 과학혁명기 이후 호기심으로 시작된 자연철학 중 어떤 지식은 새로운 기술로 이어졌으며,
그 기술 중 어떤 것들은 다시 새로운 지식 체계와 신기술들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러한 지식과 기술은 그래프, 표, 설계도, 그림, 사진, 샘플, 표본, 표준, 실험기기 같은
 ‘인공물’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지식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게 바뀐 것이다.

이런 ‘인공물’들은 쉽게 이동했고 비교되었으며, 18~19세기에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교재와 실험 지침서에 사용되었다. 비슷한 내용을 교육받은 학생들은 일종의 ‘지식기반’을 공유했으며, 그 위에 더 전문적이고 깊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지식이 권력으로 탈바꿈하게 된 데에는 그래프, 표, 설계도, 그림, 사진, 샘플, 표본, 표준같이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뉴턴이 고민했던 보편중력의 종교적 의미는 두 세대가 지나지 않아 희미해져버렸지만, 뉴턴역학을 이용하여 탄도를 계산한 표와 그래프는 수백 년 동안 실전에서 사용되어온 것처럼 말이다.

브루노 라투르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사회과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프, 설계도, 표본, 표준, 기관, 병균과 같은 ‘비인간’, 사물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개개인의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지만, 비인간과 어떤 동맹을 맺는가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모두 안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을 전달할 매체가 없다면
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증기에 대한 해박한 엔지니어와 정밀한 선반을 제작하는 장인의 지식이 만났을 때, 증기기관의 실린더는 만들어질 수 있었다. 권력을 가진 인간이란 반드시 다양한 사물을 ‘길들여서’ 이들과 동맹을 맺고,
이들의 힘을 빌린 인간인 것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형성되는 네트워크를 주목한다.
사물을 잘 동원해서 네트워크에 편입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으며,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거의 항상 불분명하며 결코 쉽지 않다. 네트워크의 형성을 특징짓는 여러 단계 중에 사물을 ‘길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과학기술이다
 
과학기술, 혹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란 사물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인간의 활동이다. 더 많은 행위자들을 포함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네트워크를 건설한 자가 그만큼의 권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과학기술은 권력을 생성하는 데, 따라서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테크노사이언스의 핵심은 인간-사물로 구성된 세상을 움직이기 쉽도록 표준화된 지식 요소로 바꾸는 작업인 것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기계 같은 사물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위주체성(agency)을 갖고 있으며, 연구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사물을 동등하게, 대칭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학은 아주 전형적인 학제간 분야로서 우리가 과학기술사회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물론, 과학기술인류학, 젠더 연구,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일부, 위험 연구, 과학기술과 법, 기술혁신연구의 일부 등을 포함한다.
첨단 과학기술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21세기에, 서구 사회에서는 과학기술학이 대학에서 교육해야만 하는 핵심적 분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미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논의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고,
따라서 아직 이를 적용한 실증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 
 
국제적으로는 이렇게 활발한 과학기술학이 국내에서 활성화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우선은 기존 학문들 간의 높은 벽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기술학이 과학기술과 인문사회과학을 넘나드는 학제간 분야라는 속성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과와 문과의 벽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역사의 조연이었던 사물을 주인공으로 바라보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조망하는 라투르만의 방법론!


그러나 과학기술과 사회를 가로지르는 노력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사회의 취약성이 커질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와 사회적 인식의 발전 속도가 제대로 맞아 들어가지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임과 동시에 미래의 모습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지금까지의 인문사회학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학기술을 핵심적으로 분석하면서, 지금까지의 철학이 무시했던 비인간 행위자, 즉 사물을 인간 행위자와 대칭적인 존재로 다루고 있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의 사회학이다. 인간은 비인간 행위자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화시키지만, 비인간 행위자 또한 인간 행위자를 바꾸어버린다.

과학이 갖는 ‘인간 중심의’ 합리성도, ‘인간 위주의’ 법칙도 없다. 브루노 라투르에 따르면,
인간과 사물은 동등한 위치에서 대등한 동맹을 맺어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는 모두 하나다! 

 

 지구의 위기를 주장하는 생태주의자와 과학기술을 믿으라는 과학자,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정부와 원자력의 파멸성을 경고하는 운동가 등 오늘날 과학은 논란 속에 있다.


책 속으로


나는 학생들에게 기술의 우회를 고려하지 않는 학문분과들이 흥미로울 수는 있겠지만, 그 학문분과들은 개코원숭이를 다루지 인간은 다루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은근히 나의 다른 동료 교수들을 비판합니다.
 과학기술 없는 인문학은 원숭이 놀음에 지나지 않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편지, 70쪽)

....
이 새로운 존재들은 어디서 옵니까?
물론 시장과 교역의 거대유통에서, 작업장의 혁신에서, 예술가의 작업실로부터 튀어나온 발견에서,
전쟁과 시대의 불행에서, 거의 사방에서 옵니다. 쥐, 세균, 페스트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일부는 우리가 ‘실험실’이라고 부르는 장소에서 옵니다.

17세기 이후로 실험실은 점점 더 중요해지며 도처에서 볼 수 있게 되었지요.
나는 학생들이 특히 이 실험실들에 애착을 갖기 바랍니다. 나는 학생들이 과학혁명의 거창한 이야기에 곧바로 빠져들지 않고 실험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이끌고 싶습니다.

우리가 과학 덕분에 유한한 코스모스에서 무한한 우주로 넘어왔다는 믿음으로부터 해방되어 과학의 쾌거들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게 될까요? 나는 나중에 학생에게 우리가 또 다른 과거를 계승함으로써 어쩌면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네 번째 편지, 136~137쪽)

신문이 인간들의 의회로 대표된 시민들에게 필요한 장비를 갖춰줌으로써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면,
새로운 플랫폼들이 사물들의 의회에서 대표되기를 추구하는 시민들에게 다시금 장비를 마련해줌으로써
기술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의견을 개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기관이 있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다섯 번째 편지, 190쪽)


출판사 서평

모순과 미스터리로 가득 찬 과학의 속살을 들여다보다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통합적 사유의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모순과 기이한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 지구의 위기를 주장하는 생태주의자와 과학기술의 해결능력을 믿으라는 과학자,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정부와 그 파멸성을 경고하는 운동가, 유전자 조작 식품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들…. 우리는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하는 것일까? ..

이 책은 라투르 스스로 자기 사상의 요체를 편지 형식으로 소개한 것으로,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자율적이라는 통념을 뒤엎고 근대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과학과 정치,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과학기술로 둘러싸인 현대 사회의 작동방식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며,
나아가 철학과 자연과학이 그토록 씨름해왔던 인간-자연-사회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아리아드네의 실을 제시한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번역’된다 -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에서 경구피임약의 개발까지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 최초의 전쟁기구를 만든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리적 힘의 강-약 관계를 전복하는 지렛대의 원리는 아르키메데스에 의해 공성전에서 맞선 두 나라의 군사적 힘의 관계를 전복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과학과 전쟁의 이런 친근성은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첫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아르키메데스와 히에론 왕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과학과 전쟁의 관계에 대한 망각, 즉 과학과 정치의 이분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준다.

#1.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하고 몹시 기뻐하며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에게 자랑을 하러 간다.
히에론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그 원리가 실제로 유용한지 증명해 보이라고 하고, 아르키메데스는 성채 공방전에서 쓸 수 있는 전쟁기구를 만들어 시라쿠사를 공격하는 로마 군대를 홀로 격퇴함으로써 히에론 왕에게 과학의 위력을 실증해 보인다. 그러나 3세기 후 이 역사적 일화를 소개한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어떤 실용적 기술에도 관심 없는 고결한 순수과학자로 그려낸다.(26~34쪽 참조)

라투르가 지적하듯이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는 모순과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분명 아르키메데스가 스스로 왕을 찾아가 전쟁기구를 만들고 ‘힘의 전복’을 몸소 실현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정치에 전혀 관심 없는 ‘고결한’ 인물로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플루타르코스의 이분법은 이후 서양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정치와는 무관한 과학의 지고성과 고결성을 웅변하는 통설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라투르는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의 자율성이란 나중에 꾸며진 신화일 뿐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번역’의 방식으로 과학이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은 언제나 정치와 사회 등 여타 삶의 영역으로 ‘우회’하거나 그 영역들과 함께 ‘구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정치라는 서로 무관한 두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얽혀서 작동하는 두 종류의 ‘행위’가 있을 뿐이며, 이 행위들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결합-조립-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페미니스트 운동가 마거릿 생어는 원치 않는 임신에 발목 잡힌 수많은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학자 그레고리 핀커스가 만든 스테로이드 합성물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반면 핀커스는 자신의 발명을 피임약으로 개발할 자금이 없었고, 또 자신의 연구가 여자들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 또한 갖고 있었다. 이 둘의 고민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캐서린 덱스터 맥코믹을 만나면서 해결된다.
이들이 함께 손을 잡으면서 1960년에 경구피임약이 최초로 개발되기에 이른다.(41~44쪽 참조)

경구피임약의 개발 과정은 과학의 사회적 번역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 전 사후피임약 허용 문제를 둘러싸고 의료와 사회문제의 충돌이 있었던 터라 이러한 ‘번역’의 의미는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구피임약의 발명에는 단순히 스테로이드의 과학적 발견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회적 ‘행위’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과학적 발견이 페미니즘 정치와 사업가의 재산이라는 ‘행위자’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경구피임약이 발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근대의 이분법적 구분과는 달리 실제 현실에서는 과학-정치-경제가 뗄 수 없이 붙어 있다. 라투르는 이러한 얽히고설켜 있는 세계를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세계’(코스모스)로 표현하며, 과학적 논란의 미궁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이 공통세계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화의 역사에서 생태화의 역사로 - “과학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들의 인문학일 뿐이다”

과학이 더 이상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면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라투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고 말한다.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물질화는 사회화요, 사회화는 물질화다”라는 모토가 나온 겁니다.”(76쪽)
우리는 자연의 제약조건에서 서서히 해방되는 ‘근대화의 역사’를 거쳐 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는 ‘생태화의 역사’를 거쳐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농업도 유전학 실험실을 거치든가 최소한 종자선별기는 경유하게 마련입니다. 사회학자나 도시계획가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지 않은 도시계획과 고위공무원의 행위가 있을까요. 소아과 논문이나 심리학자의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초보엄마의 육아가 있을까요. 프로이트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랑싸움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75쪽)

이런 점에서 라투르는 우리 시대를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 시대’로 일컫는다.
이런 과학기술적 우회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이 근대의 동역학 없이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과학기술적 우회들을 경유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생명공학이나 원자력공학 같은 새로운 과학의 상당수가 공공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과학기술적 우회들이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인식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후 온난화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기술의 결과는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여기서 인문학적인 조건이 고려되지 않은 과학은 위험하며, 과학 없는 인문학은 원숭이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랄한 비판이 나온다. 라투르가 ‘과학인문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고, 과학과 사회가 더욱 얽히고설키는 우리 시대에서는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 정치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아니라 실험실이 있을 뿐이다 - 예기치 않은 사물과 사회의 변형은 실험실에서 시작된다

이제 라투르는 좀 더 과학의 내부로 들어가서 과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도대체 과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과학으로 정립되는지, 또한 과학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어디에서 탄생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과학적 방법론을 정확히 적용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사물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험실이야말로 과학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사물의 존재를 함께 탄생시키는 용광로라는 것이 라투르의 핵심 주장이다.

세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과학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과학을 단지 ‘인식의 문제’로만 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자연에 숨겨진 과학적 진리를 누가 더 많이 발견하는지, 또는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지만을 물어온 것이 기존 과학이론가들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수많은 반박과 재반박, 무수한 우회와 번역 작용을 통해 실제로 인간과 자연의 ‘실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도착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항상 과학적 문건들을 오페라나 서스펜스 스릴러 감상하듯 읽어왔답니다.”(101쪽)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과학이 가진 야누스의 얼굴 때문인데, 과학은 공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진리’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실험실 속에서 의도치 않은 시험과 실험을 거치면서 끝없는 경합과 협상의 과정을 통과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존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의 탄생과 변형을 ‘인간’과 ‘물질’이라는 행위자들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인문학의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라투르의 또 다른 용어인 ‘기입’의 의미가 밝혀진다.
‘기입’이란 과학 논문 속에 등장하는 기호나 도표, 그래프나 사진 등을 말하는데, 실험실의 실험으로 얻어진 이 기입은 과학적 논문과 담론 안에서 “ ”이라는 따옴표로 적혀 계속 인용되지 않는 한 과학자들의 공동체나 일반 사회 속에서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이런 기입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과학의 진위성을 따지는 지점이며,
황우석 사태에서 보았듯이 기입의 잘못은 과학의 객관성을 뒤흔든다.

이렇듯 실험실이란 과학자(인간)와 온갖 실험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각자 행위의 주체로서 서로를 변형-시험하면서, 과학과 사회의 논쟁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된다. 라투르는 이들을 실재하는 대화자들로 본다.
실험실의 결과가 다시 과학과 사회와 자연의 변형을 만들어내는데 어찌 ‘실재’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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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인식론주의를 넘어라 - 근대 이분법 사고의 극복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실제적, 물질적 모습에 대해 둔감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과학혁명’이라는 허구적 관념에서 비롯되는 어떤 인식론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 라투르의 분석이다.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은 진리가 한편에 있고, 그것을 인식하는(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이 또 한편에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즉 ‘과학혁명’이란 진리에 대한 인식이 획기적으로 가능해졌다(또는 영영 불가능하다)는 오해에서 만들어진 말일 뿐, 그러한 혁명은 실제로는 없었다는 것이 라투르의 설명이다. 

........
라투르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구분이 어디까지나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의 세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윈의 진화론과 야콥 폰 윅스퀼의 움벨트(Umwelt) 개념을 통해 보여준다(214~220쪽).
그리고 그는 인간과 자연의 불연속성을 넘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합의하고 인간과 사물이 함께 공통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이성으로, 사물로, 물질로, 실재론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없이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사랑으로써 과학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162쪽)

과학기술의 민주주의를 향해 - 인간과 사물이 함께 참여하는 세계

오늘날 과학은 현대인의 종교가 되었다. 누구나 과학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신뢰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코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지구 온난화, 원자력, 생명공학 등을 둘러싼 과학적 논란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삶이 걸려 있는 과학적 판단들을 단지 전문가와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은 과학자들이 더 이상 연합전선을 펴지 않습니다. 대중도 토론에 참여합니다. 국제기관들이, 아니 국가정상들까지 관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모두의 이해와 관련된 문제, 나아가 기후 논쟁의 경우가 그렇듯이 ‘온 세상’의 이해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획을 유지하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난장판이 보장되어 있는 셈이지요.”(171쪽)

라투르는 모두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라는 구획을 넘어 우리 모두가 논쟁과 협상에, 세계에 대한 합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투르가 이렇게 과학의 ‘세속화’ 를 강조하는 데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란 것이 이미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과 사물이 이뤄놓은 공동 결과물이라고 보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과 자연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인간 구성원들 모두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데서 현대 과학의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과 인간과 과학이 함께 이뤄내는 민주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런 과학민주주의야말로 과학인문학이 추구하는 목표이자 우리 모두가 당면한 과제이다. 라투르는 그 방법론으로 현재의 디지털 플랫폼들을 내세운다.

“신문이 인간들의 의회로 대표된 시민들에게 필요한 장비를 갖춰줌으로써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면,
새로운 플랫폼들이 사물들의 의회에서 대표되기를 추구하는 시민들에게 다시금 장비를 마련해줌으로써 기술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의견을 개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기관이 있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190쪽)

디지털 플랫폼과 같은 과학기술적 도구가 또한 과학기술의 해방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라투르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술 낙관주의와 같은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공통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그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인간-사물-동맹 - ‘나는 생각한다’에서 ‘우리는 생각한다’의 세계로

“어쨌든 학생이 한 가지만은 납득하기 바랍니다. 사실의 영역과 소란스런 담론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가르는 구획으로는 이 문제들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에서는 아무것도 연역되지 않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요. 하지만 ‘코기타무스’(우리는 생각한다)에서는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계량하고, 계산할 세계를 점진적으로 구성하는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지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고로 우리는 구성해야 할 세계로 함께 들어갑니다.
나는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물들이 정말로 다시금 흥미로워졌다고요!”(199쪽)

이제 비로소 이 책의 원제인 ‘Cogitamus’(우리는 생각한다)의 뜻이 밝혀진다.
‘Cogito’(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관념이라는 유일무이한 세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관념이란 것도 알고 보면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주체들만의 관념이거나 소수 전문가들의 견해가 마치 객관적 사실인 양 치장한 것일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라투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이나, 인간 사회 내부의 전체주의도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고 본다.

라투르는 이런 근대적 세계관의 폐해에 대해 ‘우리는 생각한다’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자연이나 타인을 대상화하는 시각을 넘어 각자의 세계로부터 우리의 공통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각자’란 과학자, 정치가, 시민 등 인간 구성원에서 시작해 사물과 자연의 존재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만들어왔고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공통적인 삶은 이런 구조에서 비롯되며, 이를 인식하고 실천할 때 지구 온난화 문제와 같은 우리 모두의 과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 브뤼노 라투르는 누구인가? - 근대에서 비근대로, 비판에서 대안으로

『르 몽드』는 브뤼노 라투르 특집 기사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라투르는 프랑스 사상이 몰락하고 있다는 미신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 그는 과학기술, 정치학, 법, 종교, 사회 등 모든 분야를 다룰 뿐 아니라,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회과학을 재구축하며 반독단적이며 다원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라투르는 우리 시대의 헤겔이다. 게다가 그는 헤겔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쓴다!
우리는 라투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성적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소개 기사처럼 브뤼노 라투르는 전 방위를 넘나들며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특히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방대해서 그를 인용하지 않고서는 관련 논문을 쓰지 못할 정도이다. 그리고 라투르는 푸코, 들뢰즈, 부르디외 이후 가장 뛰어난 프랑스 사상가로 손꼽히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대안 없는 근대 비판을 “실망한 근대주의”로 보이게 할 만큼 라투르의 사유는 현실적이다. 이런 탈근대주의 사상들도 몰락에 접어든 지금, ‘탈’근대주의라는 형태로 여전히 근대에 매달린 사상들을 넘어 라투르는 “우리는 근대였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비’근대주의라는 독창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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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현과 | 작성시간 19.01.15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는 모두 하나다!
    =인성이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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