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측면에서 보면 입고된 것과 개고된 것의 차이는 다름이 없다. 개고된 것은 언젠가는 들어갈 것이고, 입고된 것은 언젠가는 튀어나오니까.
다만 천을귀인 원국이나 대운을 못 누리고 가는 서러움은 있을텐데, 그것도 공평한 것이다.
辰에는 壬, 辛이 입고되고 丑에는 庚, 丁, 己가 입고되는데
나는 비견, 정인, 편인, 정재, 정관이 입고된다.
입고라는 것은.. 언뜻보면 공망이랑 비슷하다.
공망이라고 하면 태어날 때 타고난 것으로써 계속 못 쓰고 갈구하는 것이고 채우지 못하는 것인데..
입고는 개고의 가능성이 있다.
공망과의 유사점도 있는데, 입고라는 것은 내가 그러한 것에 집착하거나, 타인을 입고 시킨다는 것인데, 타인이 내게 끌어당김 당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입고되면 실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니 실제 생활에서는 입고를 시키는 척을 해야 장기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앞서 보듯이 나는 사건 상황 모든 드러나는 것을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정인은 없고, 편인은 있는데 입고되고, 그러니까 공감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Dexter같은 드라마를 즐겨보긴 했는데.. 내게도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같이 울어주지 못하고, 학습된 공감, 이해된 태도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사람과 만나고 대화를 할때 가슴에서 먼저 울려서 감정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대했을 때, 이 순간이나 감정이 누군가와 만나고 대했을때 느끼는 감정이었는지 유추해보고, 그와 비슷한 감정은 제3자나 다른 사람을 향해 다시 꺼내 쓰는 것이었다. 어떠한 표상을 만들고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 대체하거나 유용하기 위해 쓰는 감정에 다름 아니다.
AI에게 물어보니(쌍욕을 해달라고 했다) 차마 욕은 못하겠는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데이지 않고 상황을 냉정한 상황에서 판별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진화되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게 욕으로 들렸다.
타인의 감정이나 사고나 행동이나 외부에 대해서 진심어린 공감을 하지 못하고, 단지 학습적인 경향으로 인해 '이것이 옳은 것이니까', '이것이 윤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이거나 사회가 합의한 규칙에 맞으니까'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어떠한 상황이나 사건이나 인물들을 기계적으로 판별하는 것인데
AI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태를 보고 혀를 차기 이전에, 나라는 생물학적 존재나 주름이나 사주팔자가, 이 세계, 이 공간, 이 시간 안에서는 AI보다 더 냉정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육친이나 가까이 지냈던 이들의 상실이나 슬픔은 그 객체에 대한 진정한 슬픔이나 눈물보다는 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던 일부의 소실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나의 슬픔에 더 가까운 것이었고. 왠지 타자의 소멸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나의 일부의 소실로 여길 뿐이지 타자의 온전한 감정에... (물론 F의 공감도 자신의 기준선이 있을 것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인데
왜 세상은 이러한 소시오패스나 비공감 경향이나 학습된 윤리 도덕이나 사이코패스적 경향을 만들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쓸모가 있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존재가 있기에 다른 멀쩡한 사람들의 정상화가 부각되는 것이고, 저들 처럼 치료가 필요한 상태거나, 공감이 없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반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튼 좀 복합적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에는 감정이 없고, 감정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상대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기계 역할을 한다.
감정적이지 않음의 감정적임, 감정적임의 감정적이지 않음..
이러한 토대를 인식함으로 인해 내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걸 어디 쓸지 생각해봐야 하는데, 실행이나 의욕에 관한 재성도 없다. ㅠ_
재성은 방향이 어찌되었든, 하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