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연포에 가면
김 광 욱
1
태안에서 11시에 연포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니 10시 30분이었다. 최정진은 차분히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버스터미널 대합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어정거렸다. 대합실 의자엔 몇 사람의 손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끊임없이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매표 창구엔 심심찮게 많은 손님들이 붐볐다.
태안은 조그만 읍이다. 관광지라 그런지 고층건물이 많고 깔끔하게 단장한 모텔들이 눈에 띄었다. 시골냄새가 나면서 시골 같지 않은 곳이다. 버스승강장 마당 한쪽엔 시내버스와 직행버스들이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버스들은 출발 시간이 되면 행선지 표지판이 붙은 승강장으로 나와서 손님들을 싣고 떠났다. 서산과 만리포로 가는 손님들이 제일 많았다.
서산은 정진이 지나왔던 곳이고 꽤 번화한 도시 같았다. 정진은 볼일만 보고 오후에 서산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의 계획이 여의치 않으면 하룻밤을 연포에서 잘지도 모른다. 연포는 숙박료가 비쌀 테니까 태안으로 나와서 어젯밤처럼 곰팡내 나는 여관에서 하룻밤 투숙하면 된다. 그것은 날씨가 변하여 연포에서 노숙이 어려울 때의 얘기다. 정진은 이나연 씨한테 2억원을 받을 돈이 있다. 그 돈을 받으러 간다.
정진은 터미널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 가지고 대합실 의자에 앉아 그걸 먹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매표구에서 차표를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 개의 매표구에서 매표원 아가씨들이 분주히 승차권을 교부해 주고 있었다. 승차권을 산 손님들은 늙은 남자가 앉아 있는 개찰구로 나가서 이미 와 있는 버스에 승차하기도 하고 승강장 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리기도 했다.
날씨가 찌는 듯이 무더워서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그리웠다. 바람은 불지 않고 하늘엔 젖빛 구름이 끼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재미도 없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정진은 일어서서 아이스크림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늙은 남자가 앉아 있는 개찰구로 나갔다. 늙은 남자는 차표만 보고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시내버스는 차표를 사 가지고 아무 때나 타면 된다. 늙은 남자는 이 터미널의 책임자 같았다.
정진은 승강장 위에 걸려 있는 많은 행선지 표지판들을 쳐다보며 ‘연포’라고 빨간 글씨로 쓰인 표지판 아래 의자에 앉아 버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서산행 직행버스들만 자주 출발하고 시내버스들은 뜸뜸히 한 대씩 들어왔다. 연포 쪽 승강장들은 한산했다. 승강장 플라스틱 의자엔 젊은 남자와 아가씨가 각각 다른 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 손님은 몽산포 승강장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고 아가씨는 안면도 승강장 의자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과 버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의 옷 빛깔이 하얀 눈빛이어서 그냥 눈에 띄었다. 하이힐은 하늘빛깔이고 핸드백은 비둘기색이었다.
아까 정진의 앞으로 걸어갈 때 보니까 아가씨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다. 몸집에 비해 애호박처럼 애띤 인상이어서 정진이 관심을 가질 만큼 나이들어 보이진 않았다. 아가씨는 여고생 같기도 하고 대학생 같기도 했다. 신문을 읽던 남자 손님이 버스에 승차하고 승강장엔 아가씨와 정진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직행버스가 있는 곳에서 웅성거리고 정진이 있는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무료해서 눈길이 자꾸 아가씨 쪽으로 쏠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아가씨의 하얀 옷이 정진의 시선을 끌었다. 아가씨가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어서 파마머리에 가려진 파리한 얼굴이 옆에선 잘 보이지 않고 복스런 턱과 오똑한 콧날만 보였다. 나어린 아가씨한테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지만 낯선 곳에 와서 긴 여행에 지친 정진에게 무엇이든지 아름답고 새로운 것은 그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아가씨를 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름답다 새롭다는 생각을.
11시가 돼도 연포행 버스가 오지 않았다. 정진은 그때서야 시계를 잘못 봤단 걸 깨닫고 늙은 남자에게로 가서 다시 찻시간을 물었다. “11시 버스는 정시에 떠났는데요.” 늙은 남자는 왜 그 차를 놓쳤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정진은 12시를 11시로 시계를 잘못 봤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정신은 비정상이었다. 늙은 남자는 승강장 의자 뒤에 붙어 있는 버스 시간표를 보라고 했다. 연포로 가는 다음 버스는 오후 2시에야 있었다.
정진은 황급히 매표구로 가서 매표원 아가씨에게 연포 가는 버스가 오후 2시 차밖에 없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는데요.”하고 매표원 아가씨는 자기 앞의 차시간표를 들여다보더니 “12시 10분에 신진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삼거리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정진은 다행이다 싶어 신진도행 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리다 서해안 해변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내렸다. 길가 외딴집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두 남자에게 연포 가는 길을 물었다. 한 남자가 해변과는 반대 쪽을 가리키면서 잔등길을 넘어가라고 했다. 여자 매표원이 말한 ‘조금 걸어가면 된다’는 말은 엉터리였다.
2
정오를 넘으면서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따가워졌다. 정진은 그리 중요한 물품도 들지 않은 무거운 가방을 들쳐메고 오리 남짓한 아스팔트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걸으면서 과연 돈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의 예감의 신은 받기 어려울 거라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차들이 연포 쪽에서 더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와 그의 옆을 스쳐갔다. 차 기름내가 메스껍게 풍겼다.
잔등을 넘어도 바다는 보이지 않고 들판과 숲만 보였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정진은 남쪽에 바다가 있다는 걸 생각도 못하고 서쪽만 바라보고 바다를 찾았다. 이곳은 서해안이니까 당연히 바다가 서쪽에 있을 거라고. 시원한 푸른 파도가 그리웠다. 돈에 지친 인생에게 낭만은 사치스런 단어다. 그러나 바다는 항상 꿈속에서 손짓하며 바다를 좋아하는 나그네를 부른다. 그는 나그네였다. 가난하고 가련한 나그네.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정진은 돈 걱정 없이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다. 그는 마트에 식품을 납품하는 유통회사 직원이었다. 나연과는 한마을, 같은 골목에 살았다. 나연은 마트의 사장이었다. 혼자서 자수성가한 여장부라고 동네에선 소문나 있는 여자 사업가였다. 구멍가게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형 할인점의 사장이 되었으니 출세 아니겠는가?
나연은 정말 성공한 케이스였다. 서른 살에 과부 되어 다섯 남매를 키우며 이리떼 같은 남자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꿋꿋이 지조를 지켰다. 정진은 그 여자를 존경했다. 납품업체의 직원들에게도 친절하고 대금 결재를 실수 없이 잘해 주었다. 정진이 고기나 식품을 트럭에 싣고 가서 혼자 무겁게 운반할 때 나연이 나와서 꼭 도와 주었다. 그리 큰 도움은 못 돼도 도와 주려고 애쓰는 마음이 고마웠다.
마트에 있는 생필품을 싸 주면서 부인 갖다 주라고 주기도 하고, 식사 대접도 그 여자에게서 많이 받았다. 정진이 식품을 배달하다 점심때가 되면 기어이 붙잡고 밥을 사 주었다. 식사는 단골식당에서 나연과 단둘이 했다. 그들은 상당히 친해졌다. 나연이 어느 날 유혹하는 말을 했다.
나연에게 그런 구석이 있으리라곤 예상 못했기에 나연과 하룻밤 동침하고 그녀를 다른 여자로 보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나연은 정진이 남편의 사후 처음 관계하는 남자라고 했다. 나연과의 동침은 꼭 하룻밤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진이 2억원의 빚보증을 서 준 것은 그 육체의 대가였던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2억원이 그리 큰돈이 아니야. 라고 부채의 의미를 축소할 수도 있다. 나연 같은 여장부와 동침했다는 건 영광스런 일이기도 하다.
정진은 나연이 불경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볼 수 없어 도와 주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나연이 보증을 서 달라고 사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계략이었겠지만 정말 정진에게 보증 서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야윈 얼굴로 고민하는 그 여자가 측은해서 보증을 서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이 육체의 선을 넘은 뒤였다.
육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가장 더럽고 추한 부분 같기도 하다. 정진은 나연에게 사기당한 돈보다도 감쪽같이 그를 속인 그 행동이 괘씸했다. 나연이 빚쟁이들한테 쫓겨 숨어다니고 폭행을 당할 때 정진은 옆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그 여자의 고민이 무엇인지도 안다.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에게 행운의 여신은 등을 돌리고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 아픔을 안다. 시련을 헤쳐 나가려고 고진분투하는 자의 아픔을. 그 여자의 아픔을 정진이 떠맡게 되었다.
나연이 정진에게 한마디만 하고 떠났더라도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으련만, 나연은 그가 보증 대출해 준 그 2억원을 가지고 다 해결될 것처럼 큰소리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대출받은 돈만 챙겨 가지고 줄행랑을 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이름에 사기꾼이란 레텔을 붙였다.
(그 돈 가지고 어디 가서 성공하면 된다.)
정진은 그 여자의 성공을 빌었다. 그의 생활은 무너졌지만, 그리고 아내의 불신을 받고 자식들 얼굴 보기도 부끄럽게 됐지만 나연이 성공하면 갚아 줄 거라고 믿었다. 정진은 수소문해서 나연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나연은 태안에서 술장사를 한다고 했다. 술장사꾼이 됐다는 건 타락을 의미한다. 성공과는 멀어졌다는 얘기다. 술장사해서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연은 그 2억원으로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게 틀림없었다.
나연을 만나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내 돈을 갚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 대답만 들으면 된다. 기왕 돈에 무너진 인생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것인가. 모두 내 잘못, 나의 실수인 것을.
하룻밤 풋사랑은 없는 일로 치자. 나는 정말 네가 좋았다. 존경하고픈 여자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가치 없는 걸 새삼스럽게 들추고 보물찾기하듯 깊은 곳에서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 우리 사이에 그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 이 시점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돈이지 나연의 추억이 아니니까 찾을 것만 찾아 가지고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3
해수욕장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꼭꼭 숨은 연인들의 숨바꼭질같이, 눈을 씻고 찾아도 드러나지 않는 바다. 슬프게도 정진은 연인을 찾아 온 게 아니어서 유감이다. 그는 사기꾼한테 돈을 받으러 왔다. 마을 앞에 아담한 송림의 끝자락이 보였다. 그곳이 바다였다. 연포해수욕장. 그대는 나에게 무슨 아픈 선물을 주려느뇨?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다리의 힘이 빠지며 어디에 주저앉아 푹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연의 행방을 찾다가 지쳐서 그 여자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았다. 목이 타고 가슴이 뛰었다. 정진은 나연의 카페 이름도 알고 있었다. 호화롭게 차려 놨겠지. 그 여자의 배포대로 남자들을 유혹하려고 근사하게 꾸며 놨을 거야.
나연은 태안읍에서 라이브카페를 경영하다가 실패하고 시골이랄 수 있는 연포에 주저앉은 것이었다. 해수욕장은 성수기에 반짝 돈을 버는 곳이다. 한 달 간 장마와 태풍 때문에 별재미도 못 봤다고 상인들은 불평했다.
해수욕장만 아니고 모든 장사꾼들에게 이 여름은 홍역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정진이다. 그의 아내가 시장 노점에서 장사를 하니까. 그가 근무하는 유통회사도 적자였다. 언제 문을 닫을지 알 수 없었다. 월급도 제때 받지 못했다. 월급은 돈을 빌린 채권은행에 압류되어 월급날 다 가져가므로, 그는 월급을 만지지도 못하고 일만 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일한다.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서 출근하고. 그런 삶을 살고 있다.
해수욕장 마을은 관광지처럼 상가로 꾸며져 있었다. 모텔도 있고 큰 마트도 있었다. 주차장 근방이 번화가였다. 주차장엔 승용차들이 절반만 주차되어 있고 태안으로 나가는 버스가 한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그냥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이 평화로운 해수욕장에서 나연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리는 난동을 부리긴 정말 싫었다.
“넌 내 신세를 망쳐 놓은 여자야!”
그 여자를 만나면 첫화두가 그 말밖에 없었다. 나연과 싸우고 소란을 피우긴 정말 싫었다. 정진의 성격에 맞지도 않다. 그렇다고 양처럼 순하게 대하면 그 여자가 바보 취급할 게 틀림없다. 술장사로 닳아진 여자이니 정진이 같은 사내 하나쯤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기 싫은 것이다. 만나서 좋을 일은 없고 피차 상처만 키울 것 같아서다.
그러나 만나서 확답을 받아야 한다. 내가 빚보증 선 돈을 갚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여자에게 2억원이란 돈이 있을 리도 없다. 허탕칠 게 뻔하지만 그 여자의 대답을 듣고 싶다. 죽기 전에 갚겠다고 사기꾼들의 상투용어로 뻔뻔스럽게 나오면 상처만 하나 덧붙이고 돌아가겠지. 혹 떼려다 혹 붙이는 일이 안 생길지 모르겠다. 내가 이성을 잃고 그 여자에게 손찌검을 해서 일이 복잡하게 꼬였을 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이성을 찾아야 해. 구역질나도 신사적으로 인내해야 한다.
근처 어디에 나연의 카페가 있을 것 같았다. 카페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 찾기 쉬울 게다. 정진은 주차장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무거운 가방을 대롱거리며 상가 깊숙이 들어갔다. 상가는 짧고 해수욕 용품을 파는 상점들이 태반이었다. 상가 끝에 해변이 보였다. 바다 가운데 조그만 섬이 보이고 푸른 수평선이 보였다. 해는 중천에 떠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정오가 지나 있었다.
갑자기 바다가 나타나고 백사장이 보이니까 비로소 해수욕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해수욕장에 피서를 하러 온 건 아니다. 나연이한테 돈 받으러 왔지. 나는 연포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태안에 매력을 느끼지 않은 것처럼 어쩐지 싸늘하고 춥다. 땀이 흘러내려도 추워. 나는 왜 하기 싫은 여행을 해야 하는가? 고달픈 인생이여.
정진은 식당 앞을 지나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부드러운 모래가 구두를 감쌌다. 모래는 여자의 육체처럼 깨끗했다. 나연의 육체도 모래처럼 부드러웠다. 그날 밤의 추억은 떠올리기 싫었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으니까 추억은 접어야겠다. 난 하릴없이 연포에 구경 온 게 아니다. 구경 온 게 아니야. 난 지금 죽고 싶다. 정말 죽고만 싶어.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가슴을 쓰다듬고 심호흡하며 백사장의 동쪽 끝까지 걸어갔다. 백사장엔 사람들이 몇몇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 있거나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썰물이어서 바닷물이 사구 아래로 쑥 내려가 있었다. 모래 언덕이 높아서 사구 아래서 마을 쪽을 보면 사막 위에 신기루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연포는 사실 아름다웠다.
4
모래에서 더운 열기가 올라와 구두를 뜨겁게 달구었다. 돌아서 걸어올 때는 물가로 파도를 따라 걸었다. 파도는 투명하게, 속삭이듯 나직나직 밀려와 백사장에 귀여운 그림을 그렸다. 물 가녘은 모래가 단단해서 구두가 빨려들지 않았다. 정진은 양말과 구두를 벗어 들고 바닷물 속에 발을 담갔다. 시원한 한기가 정오의 무더위를 털어냈다.
연포는 태안반도 남쪽에 위치해서 바다의 수평선이 남쪽으로 보였다. 남해안에 와 있는 것 같다.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은 중절모자를 엎어 놓은 듯 점잖게 엎드려 있고 고깃배들은 선착장 한쪽으로 얌전히 비켜서서 정박해 있었다. 선착장은 서쪽의 방파제와 산기슭 안쪽에 있었다. 많은 어선들이 썰물의 모랫벌 위에 멈춰선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연포는 아담하고 아늑하지만 작은 해수욕장이 아니다. 대천이나 만리포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주차장이나 숙박, 화장실 시설이 잘 돼 있어 연인들이 알뜰피서하기에 적격이다. 자연보호도 잘 돼 있다. 백사장은 대천과 만리포에 비할 바 없이 깨끗하다.
청소 차량이 수시로 다니며 해변의 쓰레기를 치우는 광경은 연포의 애착을 깊게 한다. 백사장에서 소리치며 공차기하는 아이들. 비치파라솔 아래서 한가하게 피서를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이 부럽다. 나도 저런 피서를 해 봤으면. 내겐 왜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가.
투명한 해수, 수평선의 흰구름과 속삭이듯 밀려오는 파도는 이곳을 찾은 외지인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정진은 연포에 차츰 이끌리면서 이곳에 오래 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했다가 나연과의 부채 관계를 생각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일만 아니라면 연포는 지상의 낙원인데. 그는 또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슬픔을 느꼈다.
나연을 미워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이 비참한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나연이 연인은 아니라 해도 그 여자를 찾아 이곳에 온 이상 연인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일만 아니라면, 그런 일만 없었다면.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얼굴 붉히며 싸울 일도 없고 또 한 번 하룻밤의 만리성을 쌓지 마란 법도 없다. 나연은 불쌍한 여자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 데 그 돈을 다 썼다면 그렇게 아깝지 않겠다. 그 돈이 다 어디로 갔을까? 바보. 바보 같은 여자.
정진은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도는 낮으면서도 세차게 몰려올 때는 드세게 발목을 후려쳤다. 걷어 올린 바지가랑이가 바닷물에 젖었다. 보트 달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두 군데서 임시 보트 선착장을 차려놓고 피서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보트를 타려는 젊은이들이 임시 선착장 주변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퍽 여유 있어 보였다. 파도를 가르며 달려가는 보트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다시 뜨거운 모래사장으로 올라왔다. 페인트 냄새가 해풍에 실려왔다. 배 옆에 경운기가 멎어 있고 두 남자가 배 위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며 잠시 쉴 때 나연의 카페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정진의 예측대로 주차장 부근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정진은 주차장으로 향해 걸었다.
송림 아래로 와서 양말과 구두를 신고 잠시 돌의자에 걸터앉아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나연이 강경한 자세로 나오면 어쩌나.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선 안 된다. 돈을 한푼도 못 받으면 언제까지 갚겠다는 각서라도 받아 와야지. 그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울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 떨리는가. 왜 이렇게 슬픈가.
정진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발밑에 솔방울들이 수없이 뒹굴고 있었다. 땅 위엔 해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솔방울처럼, 그 해초처럼 많은 생각들이 그의 뇌리에 오고갔다. 나연의 육체를 덮고 있던 수풀이 떠올라서 풀밭에 드러누워 한참 동안 솔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만 쳐다보았다. 수풀은 나연이고 솔방울은 그의 눈물이었다. 나연은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랑해 줄 만한 여자였다. 그래서 더욱 불쌍하다.
(이래선 안 된다.)
정진은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어깨에 멨다. 송림 아래 노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해변 끝에 있는 식당 쪽으로 걸었다. 그 거리가 꽤는 멀었다. 나연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 가까워진다는 건 멀어진다는 의미였다.
송림에서 나오니 강렬한 햇살이 이마를 따갑게 쪼았다. 정진은 비척거리며 어부들이 가르쳐 준 골목을 따라 한참동안 걸었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주차장의 차들이 보였다. 그 골목 한쪽에 이층 카페가 있었다. 정진은 망설이지 않고 카페 이층 계단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음악소리가 들렸다. 카페는 낮 시간이라 그런지 썰렁했다. 의자에 앉아 남자 손님과 이야기하던 나연이 정진을 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진은 무거워 보이는 그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사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예의를 지키려고 애쓸 건 없었다. 카페에선 수평선이 훤히 내다보였다. 아까 정진이 걸었던 백사장이 햇빛 아래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아지랑이에 해변의 풍경이 꿈틀거렸다. 실내를 둘러보았다. 고급스럽게 꾸민 가게치곤 손님이 너무 없어 곰팡이 필 정도이다. 의자에서 곰팡내가 났다.
나연이 물컵을 가져와서 정진의 앞에 공손히 놓았다. 정진은 해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연이 어느 새 옆에 앉아 있었다.
“차 잘 마셨소!”
나연과 이야기하던 손님이(늙은 남자였다) 찻값을 카운터 위에 놓고 나가면서 말했다. 나연은 손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정진의 난데없는 출현으로 얼이 빠져 손님에게 인사할 경황이 없나 보다. 그렇겠지. 내가 찾아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거야. 찻손님은 나연과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인사를 안해도 될 만큼 그 손님과 절친한 사이인지도 모른다. 나연이 술을 팔건 매춘을 하건 정진이 알 바 아니었다. 술장사란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아서 여기에 들어올 때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진은 카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술도 팔고 차도 파는 곳이란 걸 이 카페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카운터 선반엔 울긋불긋한 고급 양주가 예쁘게 진열돼 있고 눈요기꺼리로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진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 년 동안 이 여자를 찾아 헤맨 생각을 하면 이가 갈렸다. 돈도 많이 들었다. 차비, 여관비, 식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찾아 놓고 보니 주먹으로 때릴 곳도 없이 가냘픈 여자였다. 그 여자가 옆에 앉아 있다. 마주앉기가 두려워서일 게다.
“어쩔 거요?”
정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연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화사한 차림새도 아니고 너무 초라하고 너무 가난티가 쭉쭉 흘러서 욕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파리 날리는 카페이다. 성수기인데도 이 모양이니 어떻게 먹고 살까? 장사를 무슨 취미로 하는 모양이다. 건강에는 좋겠지. 연포엔 이런 여자가 있었구나. 이 여자를 찾으려고 그렇게 고생했다니……
5
아무리 살펴봐도 돈이 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저 비싼 양주나 가져갈까? 그러면 장사를 못하겠지. 눈요기감으로 놔둔 견본이니까.
“갚을게요.”
나연이 모기소리로 거의 안 들리게 대답했다. 마트에서 수십 명의 직원을 부리고 호령하던 여장부의 모습은 간 곳 없고 꾀죄죄한 술집 작부가 되어 무서운 채권자 앞에 앉아 있다. 한심해서 눈물이 치밀었다. 이런 여자를 존경하다니. 사기를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흐릿하게 갚겠단 말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언제?”
“살면서 갚아 가겠어요. 월급도 차압당하셨죠?”
“누가 그 걱정해 달랬소? 내가 보증선 돈이나 내놔요.”
“부인께 죄송해요. 나 때문에 집도 경매당하고 월셋방에서 살게 해서 죄송해요.”
“누가 그런 걱정해 달랍디까?”
“우선 천만원 드리겠어요.”
나연은 안쪽에 있는 방으로 가더니 수표를 세어 봉투에 담았다. 그곳이 그 여자의 살림방이었다. 자녀들과는 떨어져 사는지 방학인데도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나연에겐 대학에 다니는 큰딸과 큰아들, 고교생, 중학생 자녀가 연줄연줄 있었다.
“작지만 받아 주세요.”
“필요없소.”
“너무 작아서 그래요?”
“이렇게 파리 날리는 장사를 하는 이유가 뭐요? 남자라도 생겼나?”
정진은 필요없는 말을 주제넘게 지껄였다.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말이라고 스스로 후회했다.
“돈 많은 재벌이라도 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 팔자는 그렇지도 못해요. 남자는 자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니까? 의심나면 조사해 봐도 좋아요.”
“뭐?”
“2억원짜리 오입했다고 생각하시고 기다려 줘요.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어유, 하는 일마다 왜 이리 안 되는지 몰라. 정말 재벌 하나 사귈까 봐. 하긴 늙어서 누가 데리고 살지도 않겠지만. 오늘 여기서 잘 건가요? 저녁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넉살좋은 여자라고 욕해도 좋아요. 점심도 안 드셨을 것 같은데……”
“잔말 말고 각서나 써 주시오. 그걸 보여 줄 데가 있어서 그래요.”
정진은 약간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연이 정말 사랑할 가치도 없는 여자였다면 이 머나먼 고장에 왔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신사적으로 해결하는 게 좋은 방법이다. 그는 지금까지 잘 참고 있다. 나연의 손엔 수표 봉투가 언제까지나 쥐어진 채 주인을 찾아갈 줄 몰랐다. 그걸 주면 밀쳐 버리고 각서만 써 주라고 한다. 각서 쓰기는 쉬운 일이다.
나연은 종이와 볼펜을 가지고 와서 정진이 보는 데서 언제까지 2억원을 갚겠다는 각서를 썼다. 정진은 나연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쓰는 글씨를 관찰했다. 나연의 필적은 아름다웠다. 필적으로 신용을 대신해도 될 것같이 고운 필체였다.
정진은 천만원을 끝내 받지 않고 각서만 받아 호주머니에 담았다. 바지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다 분실할까 봐서 가방에 옮겨 담았다. 가방 속엔 세면도구와 옷가지와 얇은 이불이 들어 있었다. 오늘까지 나연을 찾지 못하면 노천에서 자려고 준비한 물품들이었다. 정진은 목적을 달성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수일 내로 한 삼천만원 만들어서 이자와 함께 부쳐 드릴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연이 수표 봉투를 들고 따라나오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나 정진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여기에 오지도 않을 것이며 돈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엾은 그 여자를 부채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해방이기도 하다. 나 혼자 아픈 건 참을 수 있다. 여자가 아픈 건 정말 볼 수 없다.
정진은 여기에 오면서 그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연이 부채의 사슬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발뻗고 자기를 바랬다. 언젠가 그의 마음을 알 것이다. 하룻밤 몸을 섞었다고 해서 인심쓰는 게 아니다. 그냥 해방되고 싶어서이다. 정진은 마음이 가벼웠다.
정진은 해변으로 걸어오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마음의 더러운 때, 부채로부터 입었던 때를 바닷물에 씻으려고 임시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공차기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모터보트를 타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진은 연포의 정취에 반해서 막차로 돌아가려고, 물이 들기를 기다리며 물가에서 어정거렸다. 조개껍질도 줍고 조약돌도 주우며 거기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나연의 고뇌와 슬픔을 읽었다. 마음을 비우니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그는 소리내어 웃기도 하고 모래 위에 철없이 뒹굴기도 하면서 밀물때를 기다렸다.
밀물은 해질녘에야 든다고 했다. 아마 밀물을 보지 못하고 연포를 떠날 것 같아 섭섭했다. 태안으로 가는 막차는 밤 9시까지 있었다. 그 밀물을 보고 해수욕도 하고 떠나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태안에서 노숙을 해야 한다. 모텔은 너무 비싸고 곰팡내 나는 여관도 비싸다. 나연이 있는 연포에서 잘 마음은 없었다. 그 여자와 두 번 다시 마주쳐선 안 된다. 그 여자와의 관계는 끝났다.
정진은 돈을 아끼려고 태안에서 자더라도 노숙을 하려고 했다. 나연한테 각서를 받아서, 일이 빨리 해결되어 굳이 노숙할 필요가 없어졌다. 각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의미는 다른 데서 찾기로 했다. 나연이 말한 ‘2억원짜리 몸값’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말을 나연이 아직도 정진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것이 각서였다. 거짓 각서라도 충분히 그들의 사랑을 입증하는 증표가 될 테니까.
몸값 이야기는 나연이 정진을 위로하는 농담이었다. 나연이 사기꾼이라면 그 말에 구역질을 느꼈겠지만 정진은 그 여자를 믿는다. 그 여자에게 조그만 진실이라도 있다면 그 진실로 부채와 상계하겠노라.
그것은 정진의 마음이지 나연의 마음과는 별개이다. 그가 생각하고 그가 혼자 판단한 일이니까 나연이야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나연이 허위로 가득 찬 여자라고 해도 ‘진실로 사랑했다’는 그 신념만은 고이 간직하고 싶은 정진이다. 그 여자의 눈빛, 언어에서 그걸 확인했다. 그래서 즐거운 것이다. 2억원은 공중으로 날아갔지만 나연이 잘 살면 되지 않는가? 그것이 그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한 인간을 살려 주는 길이다. 아니 두 인간을.
6
정진이 물가에서 나와 잠시 송림숲에 앉아 있을 때 선착장에 앉아 있는 한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정진은 먹고 있던 음료수 캔을 쓰레기장에 버리고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송림에서 선착장은 가까웠다. 가방과 구두는 송림 아래 그대로 두고 맨발로 아가씨 옆으로 다가갔다. 볕에 달구어진 모래가 뜨거웠다. 아가씨는 뜨거운 모래밭에 앉아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병째로 마시고 있었다. 태안 버스터미널에서 봤던 그 하얀 아가씨였다.
정진은 첫눈에 그 아가씨란 걸 알았다. 아가씨는 정진이 다가가도 소주만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해서 흐느적거리며 저 혼자 낄낄 웃는 아가씨. 하이힐 한 짝이 벗겨져 모래 속에 처박혀 있고 핸드백은 저만치 뒹굴고 있었다. 정진은 핸드백을 집어 아가씨 옆에 갖다 주었다. 아가씨 옆에 앉아 저만치 빠져나간 조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해 주려고 하는데 주제넘은 짓 같아 망설였다. 아가씨는 두 홉들이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병째 마시고 있었다.
“아가씨, 그만 마셔요. 과음하면 몸에 해롭습니다.”
“흥!”
정진의 말에 아가씨는 당신이 뭐냐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흘겨보았다. 눈이 충혈돼 있고 이미 몸을 가눌 수 없이 취해 있었다.
“아저씨, 인생이 뭐예요?”
“인생?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그걸 왜 묻지?”
“전 인생이 없어요. 죽었다구요. 그래서 물어 본 거예요. 아저씨 눈엔 제가 보이세요?”
“보이는데. 상당히 예쁘군.”
“피! 전 인생에 채였어요. 인생에 속고 돈에 속고 희망에 속았어요. 죽고 싶어요.”
아가씨는 정진에게 몸을 기대며 훌쩍훌쩍 울었다. 정진은 벗겨진 구두를 집어 아가씨의 발에 신겨 주었다. 아가씨의 발은 작고 부드러웠다. 스타킹에 술이 묻어 척척했다. 스커트도 젖어 있었다.
정진의 바지는 바닷물에 젖어 척척했다. 젖어 있다는 점이 비슷했다. 정진은 어쩐지 아가씨가 좋아서 한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혀 꼬부라진 말이었지만 아가씨의 말엔 뼈가 있어 정진을 놀라게 했다. 취한 정신치고는 의식이 또렷한 상태였다. 정진은 물었다.
“실연했나?”
“저는 그렇게 멋지게 세상을 살 줄도 몰라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어요. 너무 삶이 힘들어요.”
“헤쳐나가야지.”
“헤치고 저어갈 노가 없는 걸요. 가도가도 넘실대는 푸른 파도뿐……”
“자네가 선장이 되어야지. 노가 없으면 맨손으로 저어야 해.”
“아저씨는 그랬나요?”
“나도 그렇게 못하고 있지. 그러나 노력하고 있어. 난 빚보증을 서서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됐어. 한때는 행복할 때도 있었어. 돌이켜보니까 행복이란 잠시잠깐 눈앞에 스쳐가는 바람이나 구름 같은 거였어. 난 아주 어렵게 살고 있어. 채권자에게 월급을 차압당해서 월급날이 되면 괴롭지. 그래도 일해야 돼. 일하지 않으면 빚도 갚지 못하고 죽으니까.”
“사모님께서 고생하시겠군요.”
“마누라가 벌어서 입에 풀칠을 하지. 자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어. 내 자식들 또래의 아이들이 웃고 즐겁게 학교에 다니는 걸 보면 가슴 아프네. 세상에 근심걱정 없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에 비교하고 황소처럼 묵묵히 걸어가는 거야. 황소는 열심히 일해도 대가가 없어. 대가를 바라지도 않아. 황소의 희망은 주인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거야. 맛있는 여물 주고 편히 잠잘 수 있는 보금자리 마련해 주고……그 작은 기쁨에 감사하며 괴롭고 힘들어도 슬퍼하지 않아. 나는 욕심 없는 그 황소가 부러워.”
“아저씨는 한때 행복한 시절이라도 있었지만 저에겐 그것도 없어요.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자실 건더기가 있겠어요? 아저씨는 행복한 분이군요. 저는 비우고 자실 건더기도 없단 말예요.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끝없는 고통의 함정에 들어박혀 있어요. 그러니 무슨 살 희망이 있겠어요?”
7
고통을 헤쳐나가란 말이 아가씨에겐 통하지 않았다. 고통 뒤엔 고통만 있고 다른 게 없기 때문이다. 정진은 이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건강 생각해서 술을 그만 마시라고 충고하고 송림으로 돌아갔다. 송림은 시원했다. 아름드리 큰 송림이 아니고 사람들이 놀기 좋은 아담한 솔밭이었다. 소나무의 키가 작고 밀집되어 있으니까 햇빛이 차단되어 더 시원한 것 같았다.
청소 경운기가 와서 청소원들이 송림 아래 쌓여진 쓰레기들을 싣고 갔다. 송림에선 야영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근처엔 텐트가 보이지 않았다. 송림 가운데 아늑한 잔디밭이 있고, 잔디밭 안에 조그만 5층 석탑이 있어 거기에 연인과 누워 밀회를 하는 상상을 했다. 그에게 연인이 있다면. 정진은 잔디밭 가까운 그늘에 앉아 아까보다 더 멀리 빠져나간 조수를 바라보았다.
섬은 조는 듯이 햇빛 아래 얌전히 떠 있고 흰 갈매기들이 선착장과 백사장 위를 선회했다. 관리소에서 피서객들에게 위험선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시키는 안내방송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오후 되니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하얀 아가씨는 파라솔도 없이 백사장 위에 앉아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빈 술병이 모래 위에 뒹굴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자꾸 아가씨 쪽으로 향해졌다. 아가씨는 주량이 큰지 흐느적거리면서도 잘 버텼다.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다. 아침도 먹지 않고 아이스크림 한 개로 때웠다. 나연을 만날 생각에 긴장되어 배고픔도 잊어 버렸다가 참았던 공복이 몰려왔다. 정진은 주차장 옆에 있는 중화요리 집에 가서 짬뽕을 사 먹었다. 짬뽕은 담백하고 양이 푸짐했다. 다 먹지 못하고 조금 남겼다. 배가 부르니 졸음이 왔다. 송림에 가서 한숨 자야겠다. 채무 관계를 해결하고 나니 시간이 남아돈다. 직장엔 모레까지 휴가를 냈으니 시간이 넉넉하다.
식당 여주인에게 밀물이 언제 드냐고 물었다. 4시부터 들기 시작해서 밤 10시가 되면 다 들 거라고 여주인이 대답했다. 정진은 연포의 만조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게 아쉬웠다. 정진은 5시 50분 차로 태안에 돌아가려고 했다. 지금 시간은 3시였다.
송림으로 돌아와 선착장 쪽을 보니 아가씨가 보이지 않았다. 빈 술병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술병 옆에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것 같아 그곳으로 가 보았다. 아가씨는 없고 핸드백과 신발만 놓여 있었다. 정진은 두리번거려 아가씨를 찾았다. 해변엔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는가 보다 하고 기다렸다. 십 분, 이십 분이 지나도 아가씨는 오지 않았다.
아가씨를 기다리는 동안 실례인 줄 알면서 핸드백을 살짝 열어 보았다. 혹시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해서였다. 핸드백 안에는 화장품과 손수건과 티슈화장지, 열쇠, 지갑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지갑에 의료보험카드와 현금카드,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서진희. 만 22세. 경기도가 거주지였다.
학생증이 없는 걸로 보아 대학생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그렇게 만취되도록 술을 마실 리가 없지. 삶이 괴롭다고 하던 아가씨의 말이 떠올라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정진은 주차장 화장실로 달려가서 아가씨를 찾았다. 아가씨는 화장실에 없었다. 다시 해변으로 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얀 옷을 입은 아가씨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한 여자가 저쪽으로 갔다고 방파제 쪽을 가리켰다.
방파제는 위험지역이어서 피서객의 수영이 금지된 곳이었다. 고깃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배에 가려 보이지 않을까? 그럴지 모른다.
정진은 옷을 벗고 바닷물로 들어갔다. 배들이 매여 있는 방파제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배 뒤편에서 물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아가씨를 발견했다. 아가씨는 정진이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방파제 끝 깊은 곳으로 자꾸 들어갔다. 관리소에 연락할 틈도 없었다. 정진은 돌아오라고 소리치면서 아가씨를 쫓아갔다. 물이 점점 깊어져 가슴까지 차올랐다. 아가씨의 하얀 옷자락이 물속에 잠기고 까만 머리만 보였다. 파도가 아가씨를 덮쳤다.
세찬 파도에 허우적거리는 아가씨의 두 팔이 보였다. 정진은 파도와 싸우며 아가씨 뒤로 헤엄쳐 갔다. 헤엄이 서툴러서 아가씨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관리소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해상구조요원이 모터보트를 타고 방파제 끝으로 달려왔다. 정진은 힘이 솟구쳤다. 정진이 아가씨를 붙잡으려고 하자 아가씨는 반항했다. 그래서 아가씨를 물속에서 꺼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센 파도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정진이 뺨을 때리고 욕을 하자 아가씨는 반항을 멈추고 순순히 따라왔다.
정진은 아가씨를 껴안고 얕은 곳으로 헤엄쳐 나왔다. 구조요원들의 모터보트가 와서 아가씨를 보트에 실었다. 정진은 보트에 타지 않고 헤엄쳐서 모래밭으로 나왔다. 구조요원들은 아가씨를 부축하여 안전하게 백사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고 내면 안 돼요.” 구조요원들이 아가씨에게 경고했다. 아가씨는 술에 취해 비척거렸다. 머리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가씨를 구경했다.
정진은 옷을 입고 백사장에 앉아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가씨는 핸드백이 있는 곳으로 와서 거기 서 있는 정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자조의 비웃음이었다.
정진은 핸드백과 신발을 아가씨에게 주었다. 아가씨는 하이힐을 신고 고맙단 말도 없이 핸드백을 대롱거리며 송림 쪽으로 걸어갔다. 하이힐 뒷굽이 모래에 빠져 잘 걷지 못하고 두 번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그래도 하이힐을 벗지 않고 걸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정진에게 아가씨는 윙크를 보내고, 흐느적거리며 송림 옆을 지나 해변 식당 모퉁이로 사라졌다. 정진이 처음에 걸어왔던 상가 쪽이었다.
8
정진은 송림 아래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이었다. 밀물 드는 소리가 쏴아쏴아 들러왔다. 해는 서산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 아가씨가 생각나서 선착장 쪽을 보고 식당 쪽을 보았다.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가 또 자살하려고 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오늘 밤을 여기서 샐까? 과연 내가 아가씨를 지킬 수 있을까? 아가씨는 죽지 않을 거야. 정진은 아가씨가 죽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쩐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가방을 들고 송림에서 나와 해변 식당과 반대편 주차장 골목으로 걸어가려다가 송림 그늘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정진은 빙긋이 웃고 아가씨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는 술이 깨어 있었다. 옆으로 가니 아직도 술냄새가 풍겼다. 옷이 마르지 않아 척척했다. 그러나 볼쌍사납진 않았다. 물에 젖은 모습이 더 관능적으로 보였다. 보기 드문 미인임에 틀림없었다. 얼굴이 예쁘니 자존심도 있을 텐데 왜 그 함정에서 헤쳐나오지 못하는지.
“희망이 없다고 했지? 희망을 만들어 봐. 희망은 아무 대가도 없는 거야. 그저 노력하는 기쁨. 그게 우리 인생살이이다.”
정진의 말씨는 빨랐다. 하고픈 말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걸 진희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시간 낭비해 가며 값싼 충고를 하겠는가.
찻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정진이 아는 건 진희의 이름과 나이, 주소뿐이었다. 그것을 선명히 기억한다. 많은 이름 중에 그 이름을 외우기는 너무 쉬웠다.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끼룩거리며 송림 가까운 백사장까지 날아와서 먹이를 찾다가 수평선으로 훨훨 날아갔다.
왜 그 시간에 흰 갈매기가 날아왔는지 신기했다. 갈매기의 날개빛이 아가씨의 옷 빛깔과 똑같은 하얀색이었다. 정진은 그 갈매기가 아가씨에게 무언가 가르쳐 줬다고 생각했다. 자유, 평화, 희망 같은 단어들을.
정진은 팔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찻시간이 5분 남아 있었다. 정진은 아가씨의 생김새가 나연과 닮았다는 걸 알고 가슴이 뭉클했다. 혹시 나연의 딸이 아닐까? 그러나 나연의 큰딸은 서진희가 아니고 다른 이름이다. 그러면 나연의 동생일까? 나연에게 그렇게 어린 동생이 있을라구. 그런 상념을 하는 사이에 시간은 제트기처럼 달려갔다.
아가씨는 풀밭에 의자다리를 하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 핸드백 끈을 만지작거렸다.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까만 눈으로 정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충혈된 눈이 아니고 맑은 바다빛 눈이었다. 그 눈 속에 수평선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는 죽지 않아요.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죽지 않는다구요. 믿어 주세요.
“다시는 죽으려고 하지 마, 아가씨. 부탁한다.”
그가 말했지만 파도소리 때문에 아가씨에게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정진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콧물을 훌쩍 삼켰다. 정진은 그가 기대서 있는 소나무에서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상가 골목으로 걸어갔다. 진희가 일어서서 어깨를 추스르며, 빨리 움직이는 그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진이 웃으며 돌아보았다. 옷이 젖어서 진희의 키가 장승처럼 커 보였다. 진희는 키가 큰 아가씨였다. 그리고 무거웠다. 정진만이 알고 있는 그 삶의 무게.
“그 용기를 삶에 갖다 부으란 말이야!”
정진이 소리쳤다. 정진은 주차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태안행 버스가 떠나려고 주차장에서 천천히 달려나오고 있었다. 정진이 손을 흔들어 차를 세우자 차문이 열렸다. 버스는 정진을 태우고 태안 쪽 도로로 우회전하여 속력을 높였다. 주차장 건너편 마트 앞에 진희가 우뚝 서서 달려가는 버스를 바라보았다.
정진은 마음이 편안해져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잘 있어 아가씨. 힘있게 살아야 하는 거야. 정진은 마음속으로 아가씨에게 소리쳤다. 진희의 하얀 자태가 조그마해지더니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수평선으로 훨훨 날아가던 흰 갈매기와, 진희의 하얀 모습이 어쩜 도형처럼 하나로 합쳐져 정진의 가슴에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이 연포의 추억을 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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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최정진(45)……유통회사 직원, 빚을 받으러 연포에 온다
이나연(43)……카페 주인, 정진에게 큰 부채를 안겨준 여자
서진희(22)……세상을 비관하는 아가씨
늙은 남자(터미널 사장)
카페 손님
여자 매표원
중국식당 여주인
선착장 어부들
구조요원들
피서객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