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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글마루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eo): 체휼(體恤)​

작성자남상경|작성시간26.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0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eo): 체휼(體恤)

누군가 “나는 네 마음 다 안다”라고 말할 때, 묘하게 기분 나빴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말에는 은연중 우월감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너는 그저 힘든 상황에 처한 가련한 존재구나”라는 식의 관조적 태도 말이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내 고통을 분석하는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같이 울어줄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설명하며 꺼내 든 체휼(體恤)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꽤나 충격적이다. 이 단어를 파헤치다 보면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단어의 함정’부터 마주하게 된다. 흔히들 헬라어 어원을 추적할 때, 현대 영단어(英單語)의 의미를 거꾸로 소환해서 원어에 덮어씌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예를 들어보자. 히브리서 4장 15절에 쓰인 체휼(體恤)의 헬라어 원어는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eo)다. 이게 영어 sympathy의 어원이라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체휼(體恤)을 현대 영어의 동정이나 연민쯤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오늘날의 동정은 팔짱 끼고 멀리서 “어구, 저런, 안됐네”라고 말하며 혀를 차는, 지극히 제3자적인 감정이다. 여기엔 거리감이 있다. 고상한 척하지만 결국은 남의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2천 년 전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eo)의 날 선 의미는 그런 미지근한 위로가 아니다. ‘함께’를 뜻하는 Syn과 ‘고난을 겪다’라는 파스코(πάσχω, pascho)가 합쳐진 이 말은, 말 그대로 고통의 한복판에서 함께 뒹군다는 뜻이다. 멱살 잡히고, 배고프고, 배신당하는 그 진흙탕 싸움에 같이 휘말려 있다는 얘기다. 현대 심리학 용어로 치면 오히려 공감(Empathy)에 가깝겠지만, 그마저도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eo)의 처절함을 다 담아내진 못한다.

 

여기서 잠깐 성경 번역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가 지금 보는 개역 개정 성경은 이 단어를 동정(同情)이라고 번역했다(히 4:15). 솔직히 말해 아쉬운 대목이다. 체휼(體恤)이라는 한자어가 요즘 세대에겐 낯선 고어이고 어렵다는 판단이었을 테지만, 쉬운 말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동정(同情)이라고 하면 왠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굽어보며 베푸는 시혜적인 뉘앙스를 지우기 어렵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쉽다. 반면 옛 단어인 체휼(體恤)에는 비록 투박할지언정, 쉬운 단어들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땀 냄새와 흙먼지가 배어 있다. 의미의 총량으로 따지자면 가벼운 동정(同情)은 묵직한 체휼(體恤)을 따라가기 힘들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건 복잡한 신학 지식이 필요 없다. 우리네 삶의 웃픈 현실만 봐도 답이 나온다. 수능 만점 받고 명문대 간 친구가 재수학원 앞을 지나가며 “재수생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외친다고 치자. 그게 위로가 될까? 아마 염장 지르는 소리로 들릴 거다. 하지만 노량진 학원가 뒷골목에서 싸구려 컵밥을 먹으며 눈물 젖은 삼수를 해본 형이, 말없이 건네는 캔 커피 하나는 다르다. 거기엔 “나도 그 텁텁한 기분 안다”라는 무언의 주파수가 흐른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군 복무 경험이 없는 사람이 “국군 장병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고마운 예의지만, 강원도 철원의 살이 찢어지는 칼바람을 맞아본 예비역이 “야, 오늘 춥겠다. 뺑이쳐라(고생해라)”라고 놀리는 것 같이 툭 던지는 한마디와는 질감이 다르다. 전자가 매너라면, 후자는 전우애다.

 

아파본 사람도 똑같다. 의사는 차트를 보고 질병을 분석하지만, 똑같은 수술을 받고 회복한 환자는 그 아픔의 결을 안다.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 천장의 형광등이 얼마나 차갑게 느껴지는지, 마취 깰 때의 그 메스꺼움이 얼마나 서러운지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체휼(體恤)은 바로 이런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그 공통의 경험이 만드는 연대감이다. 예수가 대단한 건,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기꺼이 재수생이 되어 보았고, 이등병이 되어 보았으며, 환자가 되어 보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하늘의 수석 입학자가 아니라, 이 땅의 낙제생들이 겪는 비애를 몸소 겪은 선배다.

 

히브리서가 예수를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體恤)하는 대제사장이라고 선언할 때, 그 근거는 예수의 전지전능함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라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다. 하늘 보좌에서 빅데이터로 인간의 고통을 검색하신 게 아니라, 직접 육신을 입고(Incarnation) 내려와서 인간의 한계라는 좁아터진 옷을 입어보셨다는 것이다(히 2:14).

 

그래서 한자어 번역인 체휼(體恤)은 소름 돋게 적절하다. 몸 체(體)에 구휼할 휼(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겪어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예수는 배고픔이 위장을 쥐어짜는 느낌이 뭔지, 친구가 등 돌릴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뭔지 몸으로 배웠다(히 5:8).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학습한 게 아니라 체험했다는 것, 기독교의 위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폭발력을 가진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쓴다. 하지만 예수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위로는 해결책이 아니라 접속이다. “내가 다 해결해 줄게”라고 으스대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그거 얼마나 아픈지 내가 안다. 나도 찔려봤거든”이라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형님 같은 존재다. 이것이 관조를 넘어선 공감,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eo)의 실체다. 개역 개정이 동정(同精)이라고 번역했을지라도, 우리는 그 행간에서 기어이 체휼(體恤)을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조차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의 먼지를 뒤집어썼는데, 하물며 우리가 너무나 가볍게 타인의 고통을 이해했다고 착각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미르바 던은 “고통에서 얻는 아주 중요한 선물 중의 하나는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더 민감해진다는 점이다(One of the very important gifts we get from pain is that we become more sensitive to everyone who suffers.)”라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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