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직장공파 내력(1파)
직장공파 내력
순흥안씨 직장공파(直長公派)는 판서공(諱 從約 9세)의 三子이신 수(諱 琇 10세)公을 파조(派祖)로 모시는 판서공파의 한 갈래이다. 동방의 대현(大賢)이신 문성공(文成公 諱 珦) 선조의 6대손으로 일찍이 직장(直長 從七品) 벼슬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셨기에 직장공파(直長公派)라 이름 한다.
판서공과 정부인(貞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의 셋째아들로 1390년(庚午 공양왕2년)에 서원별서(瑞原別墅 파주농장)에서 탄생하셨고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군자감(軍資監)의 직장이 되셨다. 어버이가 모두 돌아가시자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기를 구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지난 난(亂)에 몸을 굽혀 벼슬하였던 것은 바로 부모님을 영화(榮華)롭게 봉양(奉養)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은 무엇 하러 그것을 하겠느냐? 또한 우리 가문은 세업(世業)이 유과(儒科)이고 일세(一世)에 밝게 빛났는데 어찌 ‘서리를 밟으면 단단하게 얼음이 언다.’는 경계(警戒)가 없을소냐?”라고 하시고는 오직 경적(經籍)만을 즐기고 연구하며 거문고와 술잔을 즐거움으로 삼으시다가 수(壽)를 다하셨다.
장지(葬地)는 수원에 있다고 하나, 여러 번 난(亂)을 거치면서 실전(失傳)하고 함안(咸安) 입곡(入谷)에 사단(祀壇)을 모시니, 공(公)의 장자(長子)인 창공(昌恭)의 묘역(墓域)이며 매년 10월 상순(上旬)에 세사(歲祀)를 모신다.
배(配)는 단인(端人) 하음봉씨(河陰奉氏)로 부(父)는 판중추부사(中樞府 判事) 유검(由儉)이고 증조부가 금자광록대부 벽상삼중대광 도첨의정승과 하음부원군으로 봉해지신 문겸공(文謙公 天祐)으로 명문갑족(甲族)의 따님과 혼인, 사이에 아들만 셋이니 곧 창공(昌恭 校尉公) ․ 창렴(昌廉 감찰공) ․ 창직(昌直 부솔공)이다.
<직장공 단소>
<이상 직장공 19대손 오원 安在弘 지음>
◆ 교위공(校尉公 諱 昌恭)파
직장공(直長公)의 장자(長子)로 충순위 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 종6품)를 지냈다. 직장공의 세 아들이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을 거치는 동안 직접적인 화를 당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정황으로 보아 서울에 거주하던 이들은 기묘명현들과 교유관계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종질인 안당(瑭 정민공)과 그 아들들의 죽음은 이들이 한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교위공(창공)은 동생 감찰공(창렴)과 함께 가솔(家率)을 이끌고 처향(妻鄕)인 경상도 함주군 산익면 모곡리(慶尙道咸州郡山翼面茅谷里 지금의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포덕산(飽德山) 밑으로 이주하였다.
교위공의 탄생년도는 알 수 없고 졸년(卒年)은 중종 갑오(甲午 1534년)이다. 묘는 입곡리 안현간좌(鞍峴艮坐)에 쌍영(雙塋)이고 시향일(時享日)은 매년 음력 10월 10일이다.
배(配)는 재령이씨로 개지(介知 贈 吏曹參判)의 여(女)로 조부는 고려 말에 급제한 성균관 진사 모은(茅隱) 오(午)이고, 관찰사를 지낸 맹현(孟賢)의 여동생이며 함안의 명문가였다.
이후, 함안조씨와 함께 재령이씨 우리 순흥안씨는 함안의 대성(大姓)을 이루니 곧 ‘趙 ․李 ․ 安’이라고 하여 함안의 삼 대(三大) 명문가로 이름났다.
교위공 후손들은 창원(마산) ․ 김해 ․ 함안에 세거(世居)하여 대족(大族)을 이루어 인구가 대략 3,000 명으로 추정된다.
▼ 사적
추모재(追慕齋) ; 경남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에 있다. 직장공(諱 琇)의 영단(靈壇)을 비롯한 입향조(入鄕祖)인 교위공과 내손(來孫)까지 6대 조상님 묘소의 세사나 시제(時祭 陰10월10일)때 거처와 종회, 우천(雨天)시 봉사(奉祀)하기 위한 재실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두릉서원(여항산자락 두곡 가장동 소재)의 재목과 기와 등 자재를 옮겨서 1905년(고종 乙巳)에 건립하였다. 기문(記文)은 후손 교열(敎烈)이 지었다. 1950년 병화로 소실(燒失)되어 1954년(甲午)에 중건(重建)하였다.
추모재는 ‘순흥의 영모암을 계술(繼述)한다’는 뜻으로, 도덕은 회헌 선조를, 훈덕과 문행은 문순공(휘 于器)과 문숙공(휘 牧) ․ 문혜공(휘 元崇)과 경질공(휘 瑗)을, 충효와 절의는 모헌공(휘 愍)과 장암공(휘 信甲), 문장과 행의는 죽계공(휘 熹)을 따르고, 선조님을 경모하고 추앙하며 영원히 추모하고자 하는 뜻이다.
-사진 별첨-
교위공 구거지비(舊居之碑) ; 산인면 신산리(모곡리 板橋上)에 있다.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이 찬(撰)한 구거비가 있다.
모헌공 순절유적비 ; 직장공의 현손(玄孫)으로 참의공(參議公 諱 公軫)의 장자인 모헌공(諱 慜)의 유적비가 김해시 불암동에 있다.
모헌공은 1539(中宗 己亥)년 모곡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남평문씨(贈 淑夫人 南平文氏)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우다 1592(壬辰)년 4월 23일 김해(금릉) 立石江(선바위)에서 순절(殉節)하셨으며, 일명 용백장군(舂百將軍)이라 한다.
초사(初仕)에 습독(習讀 종9품)이 되셨고 1591(宣祖 辛卯)에 사헌부감찰(정6품)로 승진하셨다. 임진년 봄 하향(下鄕)하여, 감로사(金海 甘露寺)에 있는 문성공 회헌 선조(先祖)의 시판(詩板)이 오상(汚傷)되어 장차 경신(更新)하고자, 사찰(寺刹)을 방문(訪問)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갑자기 왜침을 만나, 김해(金海城)가 함락된 것을 알고 감로사(甘露寺)의 승려(僧侶) 100여 명으로 의병을 자원(自願)하여 읍성으로 향하였다. 왜장(黑田長政)이 이끄는 적병(賊兵)이 몰려오자 굴복하지 않고 왜적을 꾸짖고 전투를 벌이다가 입석강(立石江 현 김해와 부산 경계지)위에서 순절(殉節)하셨다.
왜적이 충의(忠義)에 감복, 충신(忠臣)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순절(殉節)하신 선조(先祖의 품안에서 각패(角牌)를 확인, 나무에 ‘조선국 충신 안민 사(朝鮮國 忠臣 安慜 이곳死)’라고 쓰고 각패를 걸어 놓은 후, 포대(布帒)로 시신(屍身)을 덮고 나무를 세워 표시(標識)해 놓았다.
공(公)의 장자(長子 壯庵公)는 왜적이 날뛴다는 소문이 있어 감로사로 달려가니, 노승(老僧)으로부터 모헌공께서 적에게 변(變)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입석강(立石江) 위를 찾아 살피니, 표식이 있어 확인 후, 시신을 수습하여 함안의 선영(先塋)에 장례(葬禮)를 지내고 적수(賊手)들의 만행에 통분하였다. 묘는 교위공 묘소(塋右麓 艮坐 雙塋)옆이다.
배(配)는 숙부인(全州崔氏)은 형조판서(贈 刑曹判書 云哲)의 여(女)이며, 역시 임란(壬亂)에 창의(倡義)하여 공훈(功勳)을 세운 의병장 의숙(소계공 최강), 의민(소호공 최균)의 여동생이다.
3자3녀를 두셨는데 長子는 장암공(諱 信甲)으로 정유재란 때 산청 환아정(換鵝亭)에서 순절(殉節)하니 무후(无后)하고, 次子는 호군공(諱 明甲)이고, 季子는 영갑(諱 英甲)으로 무후(无后)하다.
부사(府使) 성제 허전(性齋 許傳) 선생께서 지은 묘갈(墓碣)과 강고(江皐) 풍산 유심춘의 행장(行狀)이 있고, 함안 두릉사(杜陵祠)상향문(常享文)과 김해읍지와 영지요선(嶺誌要選)에 자세히 적혀 있다.
장암공 정려각 ; 산인면 신산리(板橋上)에 있다.
장암공은 직장공의 오대손(五代孫)이며 모헌공의 장자(長子)로 휘(諱)는 신갑(信甲)으로 1564(명종 갑자)년에 태어나, 왜란 때에 왜적과 싸우다가 1597(정유再亂)년에 34세로 산음(산청)의 환아정 깊은 물에 투신 순절하셨다.
강직(剛直)한 용맹(勇猛)으로 소시(小時)에 의용(義勇)으로서 소문이 나, 천거(薦擧)되어 선전관(宣傳官)을 제수(除授) 받았고, 전보(轉補)되어 지방으로 나아가 (行)초계군수(종4품)에 이르렀다.
왜란으로 김해(금릉)에서 모헌공이 순절하시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했다. 외가(外家)인 고성에서 의병장 외삼촌들(崔堈, 崔均)과 이종사촌(李達), 숙부 죽계공과 함께 倡義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기 전 창원(昌原 熊川城)전투와 이후 고성 ․ 함안 ․ 사천의 왜적 방어에 나서 별장(別將)으로 활약하며 ‘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수차례 큰 공(大功)을 세웠다.
정유년(1597)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재차 침략을 해오자, 병속(兵屬)들에게 산음(山陰 현山淸지방)의 ‘황석산성은 영 ․ 호남 요충지로 굳게 지켜서 변란(變亂)을 막아야 한다‘며 당부하고 산음(山陰)으로 전지(前進)하여 부대(분대)의 전술을 취하기도 전(前)에 엄청난 왜적을 만나 전투를 벌이게 되니, 끝까지 대항(對抗) 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힘은 다하고 화살도 떨어져 병속(兵屬)들에게 이러기를, ’나라의 치욕을 씻고 아버지의 원수도 갚지 못하게 됨에 차라리 자결(自決)함이 굴복(屈服) 당하는 것보다 낫다‘하시며, 갑옷을 입고 칼을 짚어 환아정(換鵝亭) 깊은 연못에 투신 순절(殉節)하셨다.
함주지(咸州誌)와 산서록(山西錄)에는, ‘당시 남도(南道)에 날쌘 효장(孝將) 2인이 있었는데 정기룡(鄭起龍)과 안신갑(安信甲)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난(亂)이 끝난 후 이 사실이 조정과 임금에게 알려져, 선조(宣祖)는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정3품)로 추증(追贈하고, 장군(將軍)의 충효(忠孝)를 후세에 전하고자, 어필(御筆)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를 씻었으니 충신(忠臣)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한다‘하시며 하교문(下敎文)과 정려(旌閭)를 내리셨다.
정려(旌閭)는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板橋) 위에 있었으나 철도(鐵道) 때문에 현재의 장소로 병자년(1936)에 이건(移建) 중수(重修)하였으며, 정려기문(記文)은 분성 김병린(盆城 金柄璘)께서 지었다.
선조(宣祖38년)는 1605년 4월 26일, 도승지 신흠경에게 ‘왜란(倭亂)에 무공(武功)이나 공적(功績)이 있는 사대부와 천민(賤民)도 책훈(策勳)토록 하여, 그 공(功)을 후세에 전하여 영광을 누리도록 하라’는 왕명을 교시(敎示)하였다, 이에 장암공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에 등차(等次) 되셨고, 품계(品階)도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되셨다(宣武原從功臣錄卷 敎書참고). 또 2000년 9월 개관된 울산광역시 충의사에서 임진왜란 ․ 정유재란에 충절을 바친 선무원종공신의 위패를 봉안, 매년 봄 ․ 가을에 제사를 봉행한다.
배(配)는 정부인(贈 貞夫人) 고양전(高陽全)씨 춘령(春齡)의 여(女)이다. 묘는 고조하(考兆下 艮坐 雙塋)이며, 무후(无后)하여 동생 호군공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성재(性齋 許傳)께서 묘갈(墓碣)을 지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 임진전란사, 선조실록, 용사일록, 쌍충실기, 중흥지, 함주지, 산서록, 교남지 외. 특히 쌍충실기국역추진위원회(전주최씨 1994년 3월 발행) 235, 257~260, 278, 294쪽과 경상대학교 김준형 교수 저 경남문화연구 진주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등)
퇴산서당(退山書堂) ; 임진왜란에 김해 입석(立石 선바위)강에서 왜군(倭軍)과 싸워 순절한 모헌공과, 정유재란에 산음(산청) 황석산성의 환아정에서 순절한 장암공, 보종(保宗)하시고 입창조(入昌原祖;창원입향조)이신 호군공 등, 삼부자(三父子)의 충효(忠孝)를 기리고 봉향하기 위해 1652년(효종3년)에 봉림 구지에 사우(祠宇)로 건립되었다. 충효(忠孝)를 이념으로 한 서당(書堂)으로 이용하였으며, 1854년(哲宗5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할 수 없이 1865년(高宗2년)에 퇴촌서재(書齋), 상림서재(書齋)로 양립 교육을 해 왔다. 해방 후 1957년 복원(復元)하여 서당과 재실(齋室)로 사용 되었으나 도시 계획에 따른 이주(移住)로 철거되었다. 1990년에 다시 서당부지(書堂敷地)를 분양 받아 현재의 자리(창원시 사림동 71-1)에 중건(重建)하였다. 모헌공의 향사(享祀)와 삼부자(三父子)의 유지(遺志)를 숭모하고, 유업(遺業)을 받들어 충효(忠孝)정신을 기리고, 종회(宗會)와 향사(享祀)를 봉행하는 재실(齋室)이니, 근세 퇴촌마을에서 3명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것은 이를 증명한다. 퇴산서당기(退山書堂記)는 광주(光州 盧根容)께서 찬(撰)하였다.
입창조(入昌祖)로부터 15대손, 400여 년간 집성촌(集成村)을 이루어 오순도순 살아온 정병산 아래 퇴촌마을의 세거지(世居地)가 도시계획에 따른 창원시의 탄생으로 1980년 이주(移住)하게 되었으니 이주 당시 약 140호(인접 상림, 상촌마을 포함)인구는 8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일부는 타 지방으로 떠나는 아픔도 있었다.
현재는 입창조(入昌祖 諱 明甲)의 팔대손(八代孫)인 두철(斗喆)공(公)의 주거지 ‘창원의 집’과 ‘퇴산서당’, 세거비 ․ 유지기념비(遺址紀念碑) 그리고 고목이 남아 있다. 당초 세거지(世居地)의 가까운 곳인 창원시 사림동 이주단지(移住團地)에 약 4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이상 직장공 18대손 겸 교위공파 종손 潤永 지음>
두릉서당(杜陵書堂) ; 함안군 여항면 두릉리 여항산자락에 있다. 죽계공(竹溪公 諱 憙)의 향사(享祀)를 봉행하는 재실(齋室)이다. 본디 두릉서원은 1832년 창건되어 죽계공과 그의 형 민(慜 모헌공)과 그 아들 신갑(信甲)을 기리기 위한 문중 사우(祀宇)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된 후 1930년에 그 터에 두릉서당을 건립하였고, 1984년 중건하였다. 지금도 현판은 ‘두릉서당’이라고 남아 있으나 재실로서의 성격만을 갖고 있다.
죽계공은 직장공의 현손(玄孫)으로 교위공의 증손이며 참의공(參議公 諱 公軫 13대)의 차자(次子)로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 댁(宅)의 여(女)다. 모헌공(諱 慜 14대)과 이복형제로 교위공이 낙남한 후 관직과 거리를 두던 후손들은 참의공의 두 아들 곧 민(慜)과 희(熹) 대에 이르러 활기를 띠게 되었다.
죽계공은 1551년(명종 辛亥)에 함주군 산익면 모곡리에서 출생,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수학하여 1576년(선조 丙子) 진사(식년시 진사2등), 1585년(선조 乙酉) 문과 (별시 병과1위)로 급제, 승문원정자 · 성균관전적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에서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뒤에 형조정랑 · 어모장군(禦侮將軍) · 장단부사 · 단양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1608년(선조 戊申) 대구도호부사에 임명되어 재직 중 1613년(광해군 癸丑) 관사에서 별세하셨다.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대학》과 숙마(熟馬)를 하사 받았고 군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언제나 충효(忠孝) 두 글자를 내세워 모든 사물에 결부시키는 실천 위주의 학문을 하였다. 1824년(순조 24)과 1832년에는 지방사림에 의하여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와 함안의 두릉사(杜陵祠)에 각각 봉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집》 4권이 있다.
죽계공 종가에 보관되어 전해지던 수많은 전적(典籍)들이 두릉서당(재실)로 옮겨져 관리되던 중,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전문위원 안승준)에서 1995년에 정리(분류와 목록화, 촬영을 위한 평판작업 및 보존처리 등)하여 ‘古文書集成(고문서집성) 81 -咸安 杜陵 順興安氏篇(함안 두릉 순흥안씨편) -’으로 출판되었다.
두릉 순흥안씨 가문의 자료들은 두릉재실로 되돌려져 관리되던 중, 1997년경에 모두 도난을 당했다. 현재 원본 고문서는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존되고 있는 마이크로필름만이 사실상 원본 구실을 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 감찰공(監察公 諱 昌廉)파
직장공(直長公)의 차자(次子)로 충순위 감찰(忠順衛監察 정6품)를 지냈다. 처음 벼슬에 나가 감찰이 되셨으나 백형 교위공(휘 창공)과 함께 한양을 떠나 함안으로 이주하였다. 띠풀을 베어 집을 짓고 다시는 한양 가는 길을 묻지 않으니, 구름과 물을 벗 삼고 거문고와 책을 즐거움으로 삼는 은둔자의 삶을 살고 가셨다. 장지는 함안군 대사동(大寺洞) 자좌원(子坐原)이다.
배(配)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존인(存仁)의 여(女)로 조부는 판서 호성(好誠 靖武公)이고 증조는 병조판서 영선(寧善 贈 兵曹判書)이다. 함안지역의 성산이씨는 상당한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이는 감찰공이 백형 교위공과 함께 함안으로 이주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삼 남(三男)을 두셨으니 장자는 환(環)으로 충순위(忠順衛), 차자는 담(琰 ‘염’字이나 예로부터 ‘담’으로 읽었다)은 성균관 생원, 계자는 종(瑽)으로 충순위(忠順衛)였다.
환(環)의 후손들은 경기도 여주를 근거지로 해서 이천․화성․용인․양평지방에 세거 하고 있으니 그 수가 500명에 이른다. 교위공과 감찰공이 함안으로 이주할 때에 여주 입향조(入鄕祖 環)는 아들 공의(公義)의 처가(이천서씨)가 있던 여주로 낙향하였다. 공의 손자 희정(希禎)은 단성문씨(문익점의 후손)와 혼인하여 여주에 세거하게 되었다(15대손 淳榮). 후손들은 을유(乙酉1765)보에 처음 입보되었다.
담(琰)의 아들 경지(敬之)의 후손은 함안 대사동 지역, 처순(處順)의 후손들은 강원도 원주 매호리에서 4대를 살고 횡성 옥동에서 2대가 있었고 다시 홍천으로 이주하였으니 모두 을유(乙酉1765)보에 입보되었다. 특히 강원도의 대표적인 순흥안씨 마을인 홍천은 300년을 이어온 집성촌으로 한 때는 100여 호가 살았었고 지금도 30여 호가 가까운 곳에 모여 사는 마을로 입향조(入鄕祖 處順 14세)로부터 모든 산소를 보존 관리하고 있다. 재실은 흥덕재(興德齋)로 동면(東面 옛 이름은 詠歸美面) 노천리에 있다.
梅湖里 落鄕祖 諱 處順의 記文(行狀) - 中宗 己卯士禍와 貞慜公 辛巳誣獄 時에 一族으로 매도되어 朝廷의 安門이 여러 분 연류 되었는데 處順 公도 예외일 수 없었다. 夜밤에 父母 손을 잡고 南大門을 빠져나와 피난길에 올랐다가 부모와 길을 잃었다. 当時 十二세의 遍髮로 홀로 渡水逾山하야 原州 地定面 梅湖里에 定着하여 杜門不出 隱居하였다. 士禍平定後 四十七年에 門中에서 公을 찾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아예 漢陽을 등지고 바라보지도 않고 살았다. 그후 成(世昌 강원도관찰사 역임) 判書라는 분이 ‘문성공의 후손이니 홀대하지 말라.’라고 하여 많은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草夜에 묻혀 餘生을 마치고 뒷산에 묻히시니 梅谷艮坐이다. 以上은 代代로 口傳된 事實이다(14대손 璟煥).
종(瑽)의 후손들은 진주 연산지역에 세거하여 번성했으니 오늘날 진주 도통사가 유지 관리 되는 것은 이들의 힘이다. 후손들은 을유(1765)보에 입보되었다.
순흥안씨 최초의 족보 병오(1546년)보와 두 번째 기해(1659년)에는 직장공의 손자인 환(環) ․ 담(琰) ․ 종(琮)까지 보이다가 세 번째 족보 을유(1765년)보에 후손들이 입보되었고 네 번째 정사(1797년)보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대체로 보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정사보 까지를 청보(淸譜)로 보는 바, 경상남도 함안 ․ 창원 ․ 진주 그리고 강원도 홍천과 경기도 여주에 세거한 직장공파 계보는 대체로 깨끗하다 할 것이다.
▼ 사적
금양재(琴陽齋) ; 감찰공(휘 昌廉)을 모시는 재실이다. 공의 11대손 맹홍(孟洪)이 산내면 대사동 북쪽에서 산소를 확인하고 봉분을 수축하여 비석을 세우고 12대손 휘철(彙喆)이 종족들과 의논하여 1914년에 재실을 지었다. 자손들이 산소에 오르고 재실이 처할 때, 여항산에서 발원한 금천(琴川)이 넘실거림을 보듯 선영을 상상하고, 금천수의 무한함을 보듯 자손이 창성을 예측할 것이라고 이름 지은 재실은 금천의 북쪽에 있다. 경인(1950)년에 병화를 입어 6년 뒤인 1956년에 중건하였다. 세사는 음력 10월 11일
흥덕재(興德齋) ; 홍천군 동면 노천리에 있는 재실로 1982년 창건. 입향조의 산소가 매호리에 보존되고 있고 적으나마 위토(位田)도 있으나, 처순(諱 處順)공과 배위(配位)이하 제자손(諸子孫)배위를 합사(合祀)하고 있다. 세사는 음력 10월 7일. 재실이 위치한 덕우(德隅)부락은 순흥안씨 집성촌으로 직장공파의 강원도 성지 역할을 한다.
효자(孝子)사철(思喆)정려(旌閭) ; 동면 노천리 재실 흥덕재 옆에 있다. 문성공 18대손 사철의 정려각, 공의 부(父)는 효범(孝範)이고 비(妣)는 단양장씨. 고종(高宗 乙酉)때에 사림(士林)의 추천으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사헌부 감찰(贈 通訓大夫)로 특별 정려 되었다. 경인년(1950)에 소실되어 1984년에 중건하였다. 방6대손 暻煥이 지은 기문(記文)이 있다.
◆ 부솔공(副率公 諱 昌直)파
직장공(直長公)의 계자(季子)다. 조선 성종 때 부솔(副率)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학을 연구하며 일생을 마치셨다.
직장공의 삼 형제 중, 교위공(昌恭)은 동생 감찰공(昌廉)과 가솔(家率)을 이끌고 처향(妻鄕)인 함안으로 이주하고, 막내 창직(昌直)공은 춘천에 남았다고 전한다. 부솔공의 춘천 이주 역시 사화가 배경은 되겠으나 확실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배(配)는 안동권씨 동몽교관(童蒙敎官) 지중(知重)의 여(女)다.
아들은 순(珣)으로 1492(성종 壬子)년에 태어나서 학문을 통달하여 1518(중종 戊寅)년에 학사로 임명되었다가 재종(再從)간인 정민공(諱 瑭)이 화를 당하매 홀연히 수춘(壽春)의 향교동으로 은둔하여 자손들에게 ‘과거에 나아가지 말라’고 훈계하고 생을 마치셨다.
대대로 전하는 말이 있다, ‘학사공 순(珣)은 기묘사화 때 한양에서 문성공(諱 珦) 영정을 품에 안고 야반도주하여 춘천 월곡리에 모시고 수년간 제를 올리고 은둔하였다. 중종(中宗)이 추적 끝에 알게 되고 공로를 인정하여 월곡리 일대 임야 400 정보를 하사하고 영정은 소수서원에 모시게 되었다. 하사 받은 임야는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국유지가 되었다. 만약에 학사공(珣)이 문성공 영정을 모시고 춘천으로 도피하지 않았으면 지금 국보 111호로 지정된 문성공 영정은 소실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월곡리에는 ‘영당말’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영당을 모셨던 주택(터)도 있다(15대손 肯淳).‘
배(配)는 강릉김씨 류(瑠 이조참의)의 여(女)로 아들 처충(處忠)을 두었다. 아들 처충(處忠)은 유일로 참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부솔공의 묘소가 경기도 광주에 있고 학사공의 묘소는 향교동에 있었다고 하나 모두 실전하여 단(壇)을 모으니 이를 덕곡단(德谷壇)이라 하고 음력 10월 상순에 시향을 모신다.
부솔공 후손들은 강원도 춘천과 인근지역, 경기도 양평과 광주지역에 퍼져 있다.
▼ 사적
원모재(遠慕齋) ; 춘천시 동면 월곡리에 있다. 2007년에 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어디서> http://blog.chosun.com/ahn5one/647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