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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 명현(己卯名賢)-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

작성자치워니|작성시간11.10.22|조회수143 목록 댓글 0

해동잡록 1 본조(本朝)

 

기묘 명현(己卯名賢)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언보(彦寶)다.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2년)에 나서 나이 2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1세가 되어 성종 1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소탈하고 정직하여 바른 것을 지켜 요동하지 않았다. 연산(燕山) 때에 오랫동안 간원(諫院)의 관직을 혁파하였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날에 특별히 공을 대사간으로 삼으니 그른 것을 탄핵하여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였고, 4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과 대사헌으로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켰다. 이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 벼슬을 경쟁하는 습속을 철저히 개혁하고, 모든 효행으로 공천된 사람은 행실을 표제(標題)하여 전형(銓衡)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경(經)에 밝고 의(義)를 행하는 선비들은 품계나 직급의 순차에 구애 받아서는 안 되오니, 등급을 무시하고 선발하여 등용하십시오.” 하였다. 그 당시 명망 높은 사람들 중 조광조(趙光祖)ㆍ김식(金湜)ㆍ박훈(朴薰) 같은 이들에게는 특별히 6품직을 제수하였다. 김안국(金安國)ㆍ김정(金淨)ㆍ송흠(宋欽)ㆍ반석평(潘碩枰) 등은 다 어진 대부(大夫)들이라 하여 역시 천거 발탁하기를 청하였다. 또 직언(直言)을 하는 언관(言官)을 죄줄 수 없다고 힘써 말하니, 왕은 법도 밖의 건의라고 책하고, 대간에서는 나라를 그르치는 짓이라고 탄핵하였으나, 공은 태연히 흔들리지 않고 어진 선비를 선발하며 탁한 것을 쳐내고 맑은 것을 드높이는 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았다. 을해년 이후부터 재상 이장곤(李長坤)과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과 서로 이어 이조의 전형을 맡아서 ‘기묘의 밝은 임금과 훌륭한 신하들의 만남[己卯明良際會]’을 열었다. 당시의 명현들은 임금의 총애를 받아서 거의 큰 정치가 흥성할 듯했으나 신진 제현(諸賢)들이 일해 나가는 데 용감하여, 과격한 흠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정승이 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힘써 대체(大體)를 가지고 억제하고 진정시켰다.

 

○ 공의 아들 처겸(處謙) 등 세 사람은 모두 천과(薦科)에 합격하여 좋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자기의 영화가 가득 참을 경계하고 시세를 살펴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기묘년 11월 15일 밤 5경에 의정부 서리(胥吏)가 와서 영상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갔다고 말하므로, 공은 깜짝 놀라 대궐로 달려 들어갔다 영의정 정공(鄭公 광필)이 홀로 빈청(賓廳)에 앉아 있기에 공이 그 사유를 물으니, 정공은 눈물을 뿌리고 머리를 흔들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치죄할 기구를 궁전 뜰에 갖추어 놓았다는 말만 할 따름이었다. 공은 드디어, 정공과 함께 힘써 청하여 조정에 모여 죄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에 명령하여 참의 이상을 소집하니, 모두가 함께 죄인(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하여 구제할 것을 상계하였다. 12월에 대간(臺諫)에서 명현들[淸流]에게 죄를 더하고자 탄핵하여 30여 명을 귀양 보내는데, 공을 우두머리로 삼았거늘 정광필(鄭光弼)이 극간하여 구제해서 관직만 떨어졌다. 신사년 가을에 심정(沈貞)이 몰래 집의인 윤지형(尹止衡)을 사주하여 공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아들 처겸(處謙) 등이 당시 재상들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넘어졌다. 즉시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상달하려 하였더니, 사림의 화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로 돌아가서 말썽을 없애고자 했는데, 어찌 뜻하였으랴, 친애하고 믿은 자가 칼을 어루만지며 눈을 흘기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공은 평생에 생산을 돌보지 않았다. 기묘년 여름에 부인이 갑자기 일을 치를 길이 없어서 돈을 꾸기까지 했다. 성품이 또한 강직하여 오직 현재(賢才)만을 선발하여 쓰고, 힘써 간사한 의논을 배척하였으며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여 꾸민 옥사를 구하려 하였으므로,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가 감정을 품어 옥사를 일으켜, 두 아들이 함께 극형을 받았고, 자신도 또한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통코 애통하구나.

 

○ 공의 아버지 사예공(司藝公) 돈후(敦厚)는 늙은 나이에 상처를 하고서 형인 감사(監司) 관후(寬厚)의 계집종 중금(重今)을 첩으로 삼았는데, 중금에게 감정(甘丁)이라는 여식이 있었다. 돈후가 집에 데려 왔는데 살기 전에 낳은 애였다. 성질이 교활하여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하므로, 사예공은 그가 이간질을 할 징조가 있음을 노하여 발바닥을 몹시 매질하여 배천(白川) 외가로 보내었다. 사예공이 별세한 후에 감정은 배천 송린(宋麟)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사련(祀連)을 낳았는데, 공의 온집안이 사련을 친자식 같이 보았다. 당시 간흉들이 정권을 잡아 나라 형세가 날로 위태하였다. 공의 아들 처겸은 항상 분개하여 시사에 언급하면 일찍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연히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 시산정의 자)과 권질(權礩) 등과 더불어, “심정(沈貞)과 남곤(南袞) 등이 전적으로 권위와 복록을 맘대로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귀머거리를 만드니, 이 무리들을 제거하여야 국세를 붙잡고 사림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사련은 이것을 듣고 공의 부인이 죽었을 때의 조객록(弔客錄)과 발인 때의 역군들의 명부를 가지고 고변(告變)을 하여 드디어 신사년 옥사를 이루었다.

 

○ 나중 병인년에 손자 윤(玧)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한때 연좌된 이는 다 서용함을 받았는데, 오직 조부만이 신설을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구천의 원한이 되오리다.” 하였다. 명종(明宗)은 특별히 불쌍히 여겨 직첩을 돌려주었고, 만력(萬曆) 3년 을해년(선조(宣祖) 8년)에 선조가 정민(貞愍)이란 시호를 주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順興人。字彥寶。生於天順辛巳。年二十中司馬。二十一我成廟十三年登第。天性簡直。守正不撓。燕山時。久革諫院之官。中廟反正之日。特以公爲大司諫。彈枉歸正。四館都憲。振起頹綱。乃判銓曹。痛革奔競之習。凡孝行公薦之人。標題行實而銓注之。又啓曰。明經行義之儒。不可拘循資級。請擢授不次。當時聞望之士。如趙光祖金湜朴薰。持除六品職。金安國金凈宋欽潘碩枰。皆賢大夫也。亦請薦拔。力陳求言而不可罪言事之人。上以法外建白責之。臺諫以誤國劾之。公則晏然不撓。以甄拔賢士激濁揚淸。爲己任焉。自乙亥以後。與李相長坤申文節鏛相繼典選以啓。己卯明良際會。當時名賢荷遇寵眷。庶幾大猷之盛。而新進諸賢勇於敢爲。不能無過激之疵也。及登台府。與鄭領相光弼。務持大軆。裁抑鎭定。○公子處謙等三人。皆中薦科。而俱列淸顯。公戒盛滿察時勢。欲退而不能。己卯十一月十五日夜五更。府胥來言。領相承召詣闕。公驚駭詣闕。首相鄭公獨坐賓廳。公問事由。鄭公揮涕掉頭不忍語。但道器械已具於殿庭云耳。公遂與鄭公力請。會朝庭議罪。乃命召參議以上。共啓伸救。十二月。臺諫欲加罪淸流。追劾竄逐三十餘人。以公爲首。鄭相極諫營救。止落職焉。辛巳秋。沈貞陰嗾執義尹止衡。削公官爵。是冬公聞子處謙等。觸時宰語。驚駭仆地。卽欲上達以其言語無實事。又恐惹起士林之禍。率歸外鄕。欲使消沮。而豈意所親信者按釼瞋目而相待耶。公平生不顧生產。己卯夏。夫人暴逝。無以爲措。至於假貸。性又剛直。唯將甄拔賢才。力排邪議。庶救忠良誣枉之獄。權奸畜憾成獄。二子俱被極刑。身且不免。痛哉痛哉。○公之父司藝公敦厚。年老喪耦。以兄監司寬厚之婢重今爲妾。重今有女。曰甘丁。乃家畜前所生也。性狡黠。多爲不道之語。司藝公怒其有離間之漸。大杖足掌。送于白川外家。司藝下世後。甘丁嫁白川宋麟。生子祀連。公之一家。視祀連如親子。時奸兇執政。國勢日危。公之子處謙。常懷憤惋。言及時事。未嘗不涕隨言零。偶與詩山正正叔權礩等語曰。沈貞南衮專擅威福。俾上聾瞽。除去此輩。則可以扶國勢保士林矣。祀連聞之。以公夫人初喪時弔客錄。及發靷時役軍簿。上變告。遂成辛巳之獄。○後丙寅孫玧上書言。一時緣坐。皆蒙收敍。而惟祖父未蒙伸雪。誠爲九泉之冤。

明廟特憐愍。還賜職牒。萬曆三年乙亥。宣廟贈謚曰貞愍。 東閣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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