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용원 수필/시사

벼룩간

작성자어슬렁김용원|작성시간26.06.09|조회수22 목록 댓글 0

#1142,화요산문(56)/벼룩간/김용원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아침마다 사용하고 있는 중랑천 강가 인라인스케이트장인데, 비 때문에 물기가 그대로 있었다. 그런 곳에서 커브를 돌다 미끄러졌다 하면 찰과상은 물론 어딘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강가에 이어진 자전거 도로는 대부분 보송보송한데, 습기와 유난히 관련이 깊은 인라인스케이트장인데도 그제껏 군데군데 물기가 있어 엣지를 걸면 미역국 건더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듯 미끌미끌 중심을 앗아간다. 누가 공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외과병원과 인연이 있지 않았는가 의심이 간다. 많이 자빠져 많이 다쳐 돈을 벌도록 배려를 한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물기가 마르지 않게 만드는 기술도 기술은 기술이겠다.

    그래도 시민 건강을 위해 그만한 장소를 마련해 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되도록 커브를 돌지 않고 직선으로만 인라인을 지쳤다. 그러고 있는데 그곳에서 자주 만나는 인라쟁이가 강 너머 쪽 인라인스케이트장은 아무리 비가 왔어도 이튿날이면 바짝 말라 있다며 장소를 옮긴다고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날 마침 쉬는 날이라서 큰맘 먹고 인라질 가방을 걸머지고 졸랑졸랑 그를 좇았다.

    훨씬 넓은 공간인데다 말마따나 풀먹인 홑이불처럼 뽀송뽀송 말라 있었다. 어려서 멱감을 둠벙 앞에 도착했을 때처럼 약간 긴장되면서 가슴이 콩콩 뛰었다. 순전히 남을 의식하는 데서 나온 버릇이었다. 그만큼 인라쟁이들이 많았고, 그만큼 그늘 끝에 쉬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만큼 구경꾼이 많았다. 나는 물론 모든 인라쟁이들은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저 사람은 우리에게 어떤 재밋거리를 구경시켜줄까, 나보다 한수 위일까 아래일까, 차림새 하나는 봐줄 만한데 과연 외양값 할까 등등 은근히 살펴보기 마련이다.

    원래 내 스타일대로 레이 찰스의 블루스곡을 헤드폰으로 들으며 서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천천히 인라질을 했다. 그러고 나서 차양 그늘 밑으로 왔는데 눈에 튀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짙은 녹색 고글을 쓴 그는 키는 작달막했지만 완벽한 근육질에 잘 훈제된 통닭처럼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다 옆머리는 파랗게 밀어버리고, 골뚜껑에는 크낙새처럼 머리를 부르르 세운, 범상치 않은 헤어스타일이었다. 그의 앞에는 그이보다 덩치가 곱은 됨직한 삭발의 젊은이와 도끼눈에 매섭게 생긴 깡마른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사뭇 조신스런 몸짓으로 그 의문의 사내 앞에서 아붓기가 뚝뚝 떨어지는 미소를 흘리며 얼찐거렸다. 뭔가 걸쭉거리고 움츠러들게 하는 인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런 인상이어서 주눅든 채 경계발령을 내려놓고 있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60대 중반쯤의 늙은이가 그 의문의 젊은이에게 다가가 굽신 인사를 했다. 의문의 젊은이는 묵묵히 고개만 까딱했다. 세상에! 늙은이는 제 아들뻘 되는 젊은 녀석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녀석은 고개만 까딱 인사를 받고 있지 않는가!

    그제부터 그 젊은이에 대한 상상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녀석은 틀림없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그 동네 조폭 왕초이겠다. 조직의 위력과 주먹을 앞세워 기생하는 부류로 자못 내 행동이 눈 밖에 나면 그땐 쥐도 새도 모르게 해코지를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저 늙은이도 새파랗게 젊은 저 녀석에게 다가가 굽신대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이 들어 무슨 창피를 당할지 모른다. 그렇다. 난체하지 말자. 시비 걸지 모르니까 가까이 가지도 말자. 그간 이 나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그런 경우를 어디 한두 번 당했던가. 그러저러한 계산을 하며 나는 인라질을 하고 쉴 때면 그 젊은이가 앉은 자리에서 반대쪽인, 멀리 떨어진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면서 가능하면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외로 꼬곤 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제껏 인라인 장비만 옆에 놓고 있을 뿐 도대체 인라질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상상력은 또다시 가동되었다. 그래, 근육질이지만 똥배가 꽤 나왔군. 그 똥배를 없애려고 인라질을 해보겠다 이거겠지? 그런데 초보자라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니 저렇게 노닥거리고만 있겠지. 그래, 혹시 그가 인라질을 하더라도 비웃음을 머금거나 눈길을 줘서는 안 되겠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이 지나고 나서 의자에 앉아 좀 더 오래 쉴 요량을 대고 있는데, 마침내 그 의문의 사나이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러자 그이보다 덩치가 큰, 연신 아부성 미소를 보내던 젊은이들 둘이 갑자기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 젊은이 앞에 섰다. 의문의 젊은이가 말했다.

    “어제 배운 기초동작 다시 해 보세요.”

    그러자 덩치 큰 빡빡머리와 도끼눈 사내가 허리를 굽히고 인라질 자세를 취했다. 젊은이는 열심히 그들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덩달아 근방에 있던 초보자들이 모두 일어나 그들이 하는 동작을 여기저기서 따라했다.

    “하나, 둘, 뻗고, 셋 넷!”

    그 젊은이는 인라인스케이트 강사였다. 그제서야 나는 내 자신이 벼룩간 소유자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인라인스케이트#인라쟁이#조폭왕초#

/어슬렁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