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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구] 이상교 시인에게 듣는다((《동시마중》 제11호, 2012년 1·2월호)

작성자아니눈물|작성시간26.06.12|조회수144 목록 댓글 4

이바구

이상교 시인에게 듣는다

(《동시마중》 제11호, 2012년 1·2월호)

 

정리_이안

사진_김환영

 

날짜 : 2011년 12월 8일

곳 :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 카페

 

 

이안 선생님, 지난 4월 연희문학창작촌 목요낭독극장 ‘봄 마중 동시마중’ 때 뵙고 처음 뵙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이상교 건강은 괜찮아요.

이안 전에 달팽이관 때문에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상교 오른쪽 귀 달팽이관 때문에 6, 7, 8 , 9, 10월 고생했는데, 재발은 가끔 해도 이젠 괜찮아. 며칠 전에도 재발했었는데, 이게 약간은 스트레스하고 과로가 겹치면 재발하더군.

이안 재발하면 증상은 어떤가요?

이상교 걸을 때 어찔어찔 어지러워요. 어지럽다는 기억을 지울 수 없어 더 재발되는 듯해. 재발되면 좀 쓸쓸해요. 그리고 왼쪽 무릎이 관절염 비슷하게 안 좋고. 나이가 들어서 그러려니 해야지.

이안 따로 운동은 안 하셔요?

이상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파트 한 바퀴 돌고 허리 돌리는 운동기구에 올라서서 100번가량 돌리기, 그 다음에 고개 돌리기 운동. 그게 달팽이관 이상에 좋다고 해서.(웃음)

이안 요즘 어떤 일을 하며 지내시는지요?

이상교 한 삼 년 전부터 주말 되면 농장에 가지. 내가 농사짓는 건 아니고 구경하는 거지. 씨앗 뿌리는 거 구경하고, 풀 자라는 거 구경하고. 그러면서 동시의 소재도 건지기도 하고. 그리고 주말농장에서 일하는 선생님들하고 밭에서 뜯은 상추쌈 해서 술 한 잔 하고. 그 재미가 꽤 괜찮아요.

이안 주말농장을 임대해서요?

이상교 임대한 건 아니고 그 사람들이 그냥 오라니까. 이상교 선생님은 김 안 매도 된다고, 그냥 오시기만 해도 된다고 그래서요. 내가 원래 잘 떠드니까, 와서 떠들어달라는 것 같아. (웃음)

이안 어디 근처인데요?

이상교 양주 근처. 여기서 멀지 않아요. 1호선 타고 가면 의정부에서 네 정거장 더 가나? 녹양이라는 데서 내려서 버스 갈아타면 금세예요.

 

 

이안 《소년》 지에 동시 추천을 마치신 게 1973년,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이셨나요? 셈해 보니, 저는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더라구요.(웃음) 등단 햇수로 따지면 38년, 곧 40년이 다가오는데요, 느낌이 어떠셔요?

이상교 40년 아닌가, 곧 40년이 가까워졌구나. 난 40년인 줄 알았어요.(웃음)

이안 습작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상교 습작기라고 할 것은 별로 없고,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를 잘한 편이었어.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교내 백일장에서 시부 장원을 하고. 처음엔 시 공부를 했어요. 《풀과 별》이란 잡지도 보았고 《시문학》, 《현대시학》, 《시조문학》이란 잡지도 있었고. 하여튼 아주 여러 가지 잡지를 다 봤어요. 몇 가지를 정기구독한 거지.

이안 그게 언제쯤이죠?

이상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집에만 박혀 있을 무렵. 시를 좋아했던 거지. 처음에는 시를 열심히 읽고 응모도 해보려고 했지만 시 부문으로는 시도해 보지 않았어요. 아, 동시가 아닌 걸 보내 봤던 건 《샘터》라는 잡지였어. ‘독자시단’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다 원고를 보내봤지. 〈창〉이란 제목의 시조 단수였는데 선자의 평이 좋았어. 그래서 ‘아, 소질이 있긴 있나 보구나.’ 했지. 《소년》에 동시를 보내놓고 기다리고, 떨어지면 또 써서 보내고. 그게 습작기라고 할 수 있겠지. 잠을 설치며 거의 새벽 네 시까지 쓴 적이 많았어요. 자고 깨면 머리맡에 원고지 구겨놓은 게 가득이었어. 내 나름대로 되게 노력을 했던 거죠. 특별히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이. 외로웠지요. 잡지에 실린 평을 중심으로 공부한 거지요. 다른 사람이 쓴 시에 달린 심사평, 내 시에 달린 심사평 보고 ‘아, 이렇게도 쓰는구나!’ 한 거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외로운 습작기였어.

이안 여덟 살 때 강화도로 이사를 하셨다고요? 몇 살까지 사셨는지요?

이상교 중학교 2학년까지. 여덟 살이 아니고 일곱 살 때 강화로 이사한 거였어. 아버지가 간척 사업을 하셨거든. 몇 해가 걸릴지 모를 장기 출장이어서 온 가족이 다 이사를 한 거지. 초등학교 1학년 때 전학 가서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다시 전학을 온 거예요. 간척사업 공시가 끝나서.(웃음)

이안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상교 형제가 좀 많지요. 동생이 여섯, 언니가 하나. 사남사녀 중에 둘째딸이야.

이안 어렸을 때 살림은 어떠셨어요?

이상교 살림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어요. 아버지가 국가공무원인 셈이었으니. 토지개량조합연합회라는 데였어요. 강화도로 이사 갈 때는 밑에 남동생까지 해서 딸 셋, 아들 하나. 사남매가 갔는데, 강화에서 넷을 더 얻은 거지. 쌍둥이 동생이 있어요.(웃음) 살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집에는 늘 일을 돕는 사람이 있고, 농사를 짓지 않으니 나는 늘 들판으로 나가 노는 게 일이었지. 몸이 약해 엄마가 ‘저거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 걱정이 끝없었지. 시력도 좋지 않아, 고도근시에. 책을 못 읽게 했어요. 산으로 들로 갯벌로 개울로 눈만 뜨면 나가 놀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논 것이 자연을 가까이 하게 된 첫 놀라움 아닌지 싶어. 뒤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만든 계기가 된 것도 같고. 아주 다행이야.

이안 지금도 가끔 강화도에 가시겠어요.

이상교 가끔 가요. 그래서 〈외포리에서〉라는 시도 썼고. 강화도 온수리에 모교인 길상초등학교가 있거든. 37회 졸업생이야. 살던 데는 초지리이고 학교까지는 이십 리가 넘었어요.

이안 초등학생이 걸어다니기엔 만만한 거리가 아닌데요?

이상교 만만한 거리가 아닌데, 오가는 길은 마음에 들었어요. 길을 가다 가장 많이 만나는 건 뱀이었는데 그것도 재미있었어요.(웃음)

이안 근데 선생님 작품에 뱀은 없던걸요.

이상교 동화에는 썼어요. 강의 다니면서 뱀 얘길 많이 써먹었고. 길을 가다 보면 뱀이 풀섶 길을 가로질러 가는 거였어. 그거 말고 개울에 가서 물고기도 숱하게 잡았어요.

이안 물고기는 냇가 물고기인가요? 주로 어떤 물고기인가요?

이상교 냇가 물고기였지. 송사리, 버들치, 미꾸라지. 물고기라든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신기했어. 그런데 그게 나는 놀라웠어요. 서울 살 때는 차만 보다가 개울이란 게 있고, 맑은 물이 있고. 밑바닥에 돌멩이들이 다 들여다보이고, 그리고 물고기라는 이쁜 게 헤엄쳐 다니는 게 정말 신기했어.

이안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 그러니까 개발이 아직 진행되지 않았을 때니까 무척 아름다웠을 것 같아요.

이상교 그렇지. 공기도 맑고 깨끗하고. 길 가에 노란 붓꽃이 가득 피어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이쁜 꽃들이 누가 가꾸지 않는데도 길가에 피어 있을까, 했지. 키가 크고 초록잎이 미끈한 꽃이 말야. 창포꽃 비슷했는데 노란 꽃. 그때부터 노란색을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몰라.

이안 자연을 대하는 감수성이 그때 다 길러진 것이로군요.

이상교 그래. 그런 것 같아. 아주 좋았으니까. 지금도 꿈을 꾸면 그 시절이 보여. 내 생애 중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강화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술집 주인이 됐을지 몰라.(웃음)

 

 

이안 그것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웃음) 강화도에서 나오고 나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올 때 섭섭하셨겠어요.

이상교 섭섭한 것보다 서울 가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되었어요. 지금은 소심해보이지 않지만 그때는 상당히 소심했어요. 애들이랑도 별로 친하지 않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몸이 정말 가늘가늘했어요. 체육시간에 아무것도 못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게 된 것 같아. 햇볕 아래에서 막 뛰어다니는 애들이 참 부러웠어. 그렇지만 선생님이 “이상교는 그늘에서 쉬어.” 그러니까 그늘에 앉아 뻐꾸기 소리나 듣고 그랬던 거지. 지금 돌이켜 보면 혼자 있기 좋아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그런 아이였던 것 같아. 오히려 요즘이 나아진 거지.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반 아이들 사이에 ‘이상교는 글짓기 잘하는 애’로 알려지게 되었어요. 그 뒤부터 스스로도 ‘나는 시를 잘 짓는 아이’ 인가 보다 했지요.

이안 학교 선생님 중에 ‘상교, 너는 나중에 시인이 돼라.’ 이러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았어요?

이상교 계셨지요. 중학교 이 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왔는데, 그때 첫 담임선생님이 누구냐 하면, 소설 《마그마》를 쓰신 이정호 선생님이셨어요. 담임이시면서 문예반 담당 선생님이셨는데, “너, 글짓기 잘하는 애로구나.” 그러시면서 교지에 실을 산문을 써 오너라 하셨지. 제대로 썼을 리 없지.(웃음) 그런데 나중에 교지에 실린 내 글을 보니, 제목만 같고 내 글이 아니었어. 선생님이 거의 다 손을 대 고쳐 주신 거였어. 그게 부끄러운 한편, 글은 이렇게 쓰는구나 싶은 용기를 내게 주었던 거야. 선생님은 그 뒤에도 가끔“글 열심히 써라.” 말씀하시곤 했어. 그리고 한 해 뒤인 중 3때 교내 백일장에 나갔는데 차상이었어. 제대로인 글짓기 상이라면 그게 첫 번째 상인 거지. 책은 노느라 읽을 사이가 없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땐가, 한국문학전집 전 32권을 모두 읽었지. 초등학교 때 개인 문집을 만들어 시, 수필, 희곡, 소설을 썼고. 문집 이름이 ‘초롱문집’이었고 호도 ‘정인’ 이라고 장했지요. 한자로 ‘正人’ 말예요. 한자는 그 두 자 밖에 몰랐으니.(웃음)

이안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문학전집을요?

이상교 예. 아버지가 장식용으로 사다 놓으신 거였죠. 어느 날 들여다보니 죄 한글로 돼 있더라고. 보니까 소설이었어. 김유정이니 나도향이니 닥치는 대로 읽었지. 뜻도 모르면서. 그렇게 읽어 나가는 동안, 한권 다 읽고 난 뒤 앓고, 또 한 권 읽고 앓고. 시며 소설, 희곡까지 다 읽었어. 그 영향을 받아서 ‘초롱문집’을 만든 걸 거예요. 소월 시에 나오는 ‘잊었노라’만 살려 표절시를 쓰기도 하고.(웃음)

이안 문학적으로 되게 조숙하셨네요?

이상교 조숙하다기보다 유치하단 쪽이 맞지요.(웃음)

이안 그러니까 그때 그 재밌던 놀이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네요.(웃음) 문집 스타일은 그 당시 읽은 전집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겠군요?

이상교 그러니까 나로선 첫 번째 작품집인 셈이지요. (웃음) 지금도 그걸 펼쳐보면 시, 소설, 희곡 다 있다니깐. 연필로 써서 흐려지고 지워지고 그랬지만. 삽화도 그려 넣었어요. 여자아이가 머리 쩜매고 앉아 있는 그림인데,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걸로 안 볼까봐 화살표 표시를 해놓고 ‘앉아 있는 거’ 그렇게 써 놓고.(웃음) 그런 기억이 나요.

이안 그때처럼 지금도 여러 갈래 글을 쓰고 계시고 그림도 하시고.

이상교 그렇죠. 그 전부터도 그림은 좋아했던 것 같아요. 체육시간에 그늘에 앉아서 나뭇가지로 새도 그리고 물고기도 그리고 그랬으니까. 반 애들이 ‘그림 잘 그리는 애.’ ‘키 큰 애.’ ‘글짓기 잘하는 애.’ ‘공깃돌 놀이 못 하는 애.’ ‘고무줄 못 하는 애’ ‘걸핏하면 잘 우는 애.’ 그렇게 불렀어요.

이안 중2때 서울로 와서 소설가를 담임선생님으로 만났으니 그것도 또 행운이지 싶어요.

이상교 예. 그 선생님께선 지금도 생존해 계시지요.

이안 고등학교 때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상교 공부는 안 하고 주로 딴 짓만 했어요. 중2때부터 초등학교 아이들 과외를 가르쳤어요. 원래는 언니가 알바를 하겠다며 모아놓은 애들이었는데 고등학생인 언니가 자주 늦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가르치게 된 거였지. 큰 남동생이 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 다섯 명을 가르친 거였어요. 고등학교 갈 무렵 아버지는 직장 그만두고 함석가게를 하셨는데 얼마 안 가 망했어. 그러니까 여덟이나 되는 형제들의 학비며 생활비가 늘 모자랐지. 공부에 원래 취미도 없고 이래저래 실업계 고등학교엘 가게 됐어요. 공예과엘 가게 되었는데 원래 그림을 좋아해 학교생활이 재미없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고3때 아버지 권유로 진학반을 가게 되었는데, 별로 안 하고 싶은 얘기긴 한데, 교내백일장에서 두 번이나 장원을 했어. 그래서 모 대학 국문과 특기생으로 갈 판이었는데.

이안 교내 백일장인데도요?

이상교 그때는 교내 백일장도 인정이 됐던 것 같아요. 하필 교장 직인이 없었다는 거야.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래서 대학에 못 갔어요. 그 참에 눌러앉아서 애들이나 가르쳤어요. 언니는 미대 재학 중이었고 큰 남동생은 의대를 갔네. 그러니까 누군가는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돼. 엄마와 손아래 여자 동생이 양품점을 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더 생활을 돕지 않으면 안 되었지. 그때 아이들을 가르친 일이 뒤에 아동문학을 하는 데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안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를 하신 게 아니고 동시로 데뷔 준비를 하신 거군요?

이상교 《소년》이라는 잡지를 계속해서 보는 동안, 시 말고 ‘동시’ 라는 장르가 있는 걸 안 거지. 그땐 물론 ‘장르’ 라는 말도 몰랐고. 뭐,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렇게 지내는 동안 《소년》에 동시를 보내서 3회 추천 완료가 되었고. 추천 완료된 이듬해 197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가작 입선되었어요. 제목이 〈달맞이꽃〉인 동시였지요. 그 전해 12월에 천료가 됐는데 바로 며칠 상관으로 신춘문예에 동시가 입선된 거였지. 기뻤어요.(웃음)

 

 

이안 《소년》의 독자층은 주로 어떤 연령대였나요?

이상교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다 보았어요. 아동문단에 《소년》 출신 작가들이 꽤 돼요. 3회 추천이라서 등단이 쉽지 않았지. 그래도 난 그게 좋았어요. 안 됐어도 실망되지도 않고. 작품 보내놓고 기다리는 일이 정말 기대 만빵이었지. 이번에는 심사평에라도 올려졌을래나, 만약에 떨어졌으면 뭐라고 평이 쓰여졌을래나. 안 됐어도 속상하지가 않았어요. 아, 다음에 잘 써봐야겠다 했지. 만일 지금까지도 안 되었다면 계속 투고, 투고를 거듭하고 있겠지.(웃음)

이안 그때 추천을 맡으신 선생님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셨는지요?

이상교 박경종, 박화목, 이원수, 윤석중, 박경용, 조유로 그런 선생님들이셨던 것 같은데 두 분씩 조를 지어 번갈아 심사를 맡아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이안 쟁쟁하신 분들이었군요.

이상교 그렇지. 쟁쟁한 분들이었지.

이안 그 당시 아동문학 잡지가 《소년》 말고 또 있었나요?

이상교 《소년》밖에 없었을 거야. 아니다, 아동문학가를 발굴해내는 잡지로 또 하나는 《월간문학》이 있었어요. 참, 《소년》에 천료된 다음, 《월간문학》 16회 동시 부문에 당선하기도 했네요.

이안 《소년》은 언제 폐간이 되었나요?

이상교 폐간되긴? 지금도 있어.

이안 이름이 바뀌었나요?

이상교 아니, 그냥 《소년》이야. ‘가톨릭 소년’ 이라고도 하고.

이안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언제 서울 큰 서점 가면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이상교 성당에서 나오는 거라 알려지지 않은 건가. 약현성당이라고, 서울역 뒤 서부역 근처에 있어요. 《소년》 출신들이 꽤 됩니다. 강정규 선생님, 하청호 선생님도 그곳 출신이신 것으로 알아.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에는 아주 괜찮은 잡지였어요.

이안 동시집하고 시집, 그림책, 동화책 다 합치면 지금까지 책을 몇 권이나 내신 거죠?

이상교 어떤 도서관 사서 분이 살펴봤다며 알려주었는데 대략 167권인가? 그렇다고 하던데요. 전집에 들어간 건 빼고. 전집에 들어간 것까지 더하면 200권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책 많이 낸 게 대수인 건 아니고.

이안 동시집이 열한 권인데, 그 중에서 《1학년을 위한 동시》(지경사 1999 ), 《빈집》(미세기 2007 ,한병호 그림 신동일 음악), 《소리가 들리는 동시집》(토토북 2010, ), 《곤충 만세》(미세기 2011,) 이 네 권은 일종의 기획동시집이라고 할 수 있고, 본격 동시집은 모두 일곱 권이죠? 그런데 이 가운데 《나와 꼭 닮은 아이》(현암사 1996, 이상교 그림)하고 《먼지야, 자니?》(산하 2006, 이상교 그림)는 선생님이 직접 그림을 하셨잖아요? 작품전도 하셨죠? 2007년 11월인가요?

이상교 예. 2007년 11월에 하고, 2009년 11월에 하고. 개인전은 그렇게 두 번. 올해 11월에도 할까 했는데 못 했어요. 그래서 내년 봄에나 할까 그러는 중예요. 그룹전도 두 번 했고 초대전은 한 번. 그때 그림 좀 팔아먹었지.

이안 그림이 더 돈이 되지 않으세요?(웃음)

이상교 돈 좀 됐었어요.(웃음) 처음에는 한 팔백 됐나? 수지맞았어요.(웃음)

이안 동시집 한 권으로 팔백 하기 어렵잖아요.

이상교 근데 팔백이라도 대관료 빼야죠. 뭐, 돈보다도 내 그림이 돈이 된다는 게 기뻤어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돈 주고 사기도 하데요.(웃음) 김환영 씨 그림도 돈이 안 되는데 난 돈이 되고 있으니 대단한 거지.(웃음) 또 할 거야. 이제 천이백 벌 생각.(웃음)

이안 직접 그림까지 하신 동시집은 더 각별할 것 같아요. 어떤 게 더 많이 나가나요?

이상교 내 글에다 내 그림을 넣으면 훨씬 정이 더 많이 가요. 그림 그리기도 재밌고. 두고두고 보기도 좋아요. 그리고 장사도 더 잘된다는 사실이야.(웃음)

이안 독자들 반응도 더 좋단 말씀이시죠?

이상교 예. 특히 《먼지야, 자니?》는 꽤.

이안 그게 산하에서 나온 건가요?

이상교 예. 산하에서 나온 건데, 그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에요. 나도 내 그림이 들어가선지 정이 더 가고. 막 기뻤어요.

이안 첫 번째 작업하신 《나와 꼭 닮은 아이》보다 그림이 더 좋단 느낌을 받았어요.

이상교 맞아. 점점 더 좋아질 작정이에요.

이안 열한 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시는 건?

이상교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나와 꼭 닮은 아이》. 왜냐하면 그게 첫 번째 동시집인 셈이라서. 물론 《우리 집 귀뚜라미》(대교문화 1988, 하원언 그림)가 첫 번째 책인데, 이건 너무 빨리 절판시키는 바람에 안 팔리게 돼가지고. 내 동시집 뿐 아니라 전부 절판을 시켰어요. 천 원짜린데, 다 요만 한 크기로 냈어요. 꽤 괜찮았는데 왜 절판시켰는지 몰라. 근데 지금도 이 동시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해요. 어디서 복간 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 없네.

이안 그런 출판사가 있던데요? 박혜선 시인 첫 동시집을 이번에 다시 출간했더라고요.

이상교 아, 크레용하우스. 내가 먼저 말 꺼내기도 그렇고.

이안 《우리 집 귀뚜라미》에 실린 작품들이 공이 꽤 많이 들어간 것 같던데요? 두 번째 동시집 《나와 꼭 닮은 아이》에서부터는 지금 동시 패턴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우리 집 귀뚜라미》에 실린 작품들은 달라 보였어요. 몹시 공을 많이 들이셨구나, 시를 쓰려고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교 맞아. 아주 초기 작품이 좋은 듯해요. 특히 표제작인 〈우리 집 귀뚜라미〉 같은 작품은 막 슬프려고 그래요. 셋집 살 땐데, 친정 갔다가 어린 딸아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깜깜한 집 안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어. 북향이라서 사계절 내내 햇볕이 들어오지 않던 반지하의 방 두 개짜리 허름한 집 안에서 말야. 그때 쓴 시야. 깜깜한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주 맑았어요, 눈물이 쑥 나올 듯.

이안 또 〈봉숭아 꽃물〉도 저는 좋았어요. 〈밀밭인 게지〉도 분위기가 독특하게 다가왔고요.

이상교 그 무렵엔 시가, 동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막연하지만 이것이 시 아닌지, 그러면서 쓴 것들이라 더 정도 가고 좋을지 몰라요. 꾸민다거나 뭐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멀었을 테니까.

이안 외람되지만 언어의 밀도가 높은 작품이 많았어요. 굳이 말하자면 시와 동시의 경계에 있는 느낌을 준다고 할까요? 시인이 시어의 묘한 맛에 많이 빠져 들어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동시의 중심에 어린이 독자가 놓인 것이 아니고 시인 자신이 놓여 있다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이상교 맞아. 그랬을 거야. 좋게 봐주어 고마워요.(웃음)

이안 그런데 첫 동시집이 《소년》지 추천을 완료하고 15년 만에 나왔단 말씀이에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이상교 되게 뭘 몰랐던 때였지. 아무하고도 교류가 없었어요. 등단을 하고 단체에도 소속돼 있었는데 동시집을 어떻게 내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어요. 알 생각도 하지 않았고. 초등 아이들 가르쳐 친정 형제도 살펴야 했고 나도 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까 경황도 없었어. 그러다 대교출판에서 동시집을 내주겠다 하니까 ‘아, 이런 일도 있구나!’ 그래서 원고를 준 것이 《우리집 귀뚜라미》지요. 돌이켜 보면 외롭고 쓸쓸했던 날들이었어. 누군가한테 지도를 받았더라면 나았을까? 아니, 아무한테서도 지도를 받지 않아 다행이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이안 결혼은 몇 살에 하셨어요?

이상교 스물아홉. 그때 스물아홉이면 늦은 거였어요.

이안 살림에 대한 책임을 지느라 늦어지신 건가요?

이상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안 그런 것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로 내가 계속 동생들을 가르쳐야 했으니까. 신문에 실린 내 글을 본 어떤 이가 계속 만나자고 연락해왔으나 나가지 않았지. 그가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집에 온 사람을 내칠 수 없다며 차도 내주고 밥도 내주고 했어요. 그렇게 오가던 그가 어느 날 결혼하자고 해서 ‘에라, 잘 됐다!’ 결혼했어요. 아주 맘에 들어서 한 결혼은 아니었고.(웃음)

이안 팬이랑 결혼하신 거네요.(웃음)

이상교 응. 결혼을 하는 쪽이 내게 유리했던 거지.(웃음) 엄마는 결혼하지 말고 엄마하고 같이 살자 그러는데, 나는 싫었어요. 계속 동생들 치다꺼리하면서 산다는 게 지루했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치다꺼리를 해왔으니까. 어찌 생각하면 남편은 은인이었던 셈이지. 그렇게 결혼하고 나서, 동시는 청탁도 잘 오지 않고 그래서 동화로 다시 등단을 했어요. 그 시절 나는 동화를 쓰려면 또다시 동화로 등단을 해야만 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해에 동화 여섯 편을 써가지고 신춘문예에 냈지. 한국일보 두 편, 동아일보 두 편, 조선일보 두 편. 동아일보에서 당선 연락이 오고 다음날 조선일보에서 입선 연락 오고, ‘큰일 났구나. 내일이면 한국일보 연락 오겠구나!’ 했지. 왜냐하면 한국일보에 내 딴에는 젤 나은 걸 보냈거든. 각각 다른 작품들이긴 하지만 이렇게 세 군데에서나 당선이 되면 무효가 되지 않을까.(웃음) 한국일보는 그때 텔레비전을 곁들여 줬어요. 부상으로.(웃음)

이안 처음 동화를 써서 당선되신 거잖아요? 그것도 두 군데씩이나.

이상교 그래서 한때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나는 무엇을 써도 될 것이다, 하는 발칙한 생각. (웃음)

이안 문재도 있으시지만 문운도 있으신 거죠.

이상교 그렇지. 문운도 있는 거지.

이안 문운도 사실 중요하죠.

이상교 그래요. 그러니까 점점 허파에 바람이 들기 시작한 거야. ‘내가 소설 쓰면 소설도 당선할 것이다.’(웃음)

 

 

이안 두 번째 동시집부터는 선생님 동시의 패턴이 거의 만들어진 것 같아요. 첫 번째 동시집 내시고 8년 만이죠? 시간이 또 오래 걸렸어요.

이상교 동시 쓰기를 아주 접은 건 아니지만 그때는 청탁 온 동화를 썼던 것 같아. 결혼 뒤, 먹고살아야 하니까. 전집류 리라이팅 등 많이 했어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동시집을 누가 내준다 했겠어? 자비 출판이란 건 엄두도 못 내지. 돈이 없는데. 그렇게 해서 못 내다가 현암사에서 동시 원고 줘봐라 해서 낸 것이 《나와 꼭 닮은 아이》야. 그때까지만 꽤 애써 시심이 살아 있도록 쓰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내가 느끼기에도 시를 지나치게 단정하게 쓰려고 노력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어느 때 보면 너무 깔끔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듯 여겨지고. 그게 스스로도 좀 답답해요. 특히 동시는, 쓰는 일은 재미있는 쪽인데 좋은 동시가 되기는 너무 어렵단 생각이 들어요. ‘내가 썼지만 좋은 동시네!’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아요. 내가 쓰고 있는 동시에 대해서 믿음이 안 가는 거지. 나는 남호섭 시인의 동시를 특히 좋아해요. 남호섭 동시, 또 이정록 동시, 정완영의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문학동네 2011), 그이들의 동시는 정말 좋거든. 뭐라고 할까, 자연스러우면서도 걸림이 없고 어떤 한 부분이라도 마음에 와 닿고. 그리고 싱겁지 않은 동시. 내 시는 ‘참 싱겁구나.’ 생각이 들 때가 잦아요.

이안 제가 이번에 선생님 동시집을 다 읽었는데요. 선생님 동시의 맛이 어떠냐 하면, ‘물맛’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갈하고 깨끗하다, 시인이 시에 참 욕심이 없구나. 어떻게 보자면 《우리 집 귀뚜라미》에 실린 작품들은 욕심이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으로 시인이 뭔가를 이루고자 한다는 느낌요. 그런데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시인이 시를 통해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읽히지 않는 거예요. 무욕(無欲)하다고나 할까요? 이러면 독자로서는 재미가 좀 덜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말에 되게 예민하고, 고요하고, 정적이고.

이상교 그래. 선(禪)에 가까운 느낌이야. 어떤 것은 선시 같기도 해. 내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너무 삶에 지치지 않았나, 사는 일에 지쳐 평화롭고 조용한 것을 그리워하다 못해 동시가 이리 되었나 싶기도 하고. 사실 늘 조용한 것을 추구하긴 해요. 조용, 정갈, 단정, 단순. 일종의 결벽증이라고나 할까.

이안 그러니까 그게 타고난 것 같아요. 그게 선생님 색깔이고 맛이란 생각도 들고요.

이상교 그래요, 그런 영향 탓인지 요즘은 유년시를 좀 넉넉히 쓰는 편이야.

이안 유년시란, 어떤 것 말씀이세요?

이상교 그러니까 《소리가 들리는 동시집》 같은, 유치원 어린이를 독자 대상으로 삼는 시라고 해야 할까. 의성어와 의태어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시인데, 그러면서도 시의 느낌이 들어 있는. 동시 〈꼴뚜기〉 같은 유머러스한 시, 아니면 〈눈물〉 같은 시, 시 안에 지은이인 내가 들어 있는 시지 뭐. 얼마 전에 쓴 〈내가 이쁠 때〉처럼 말예요.(웃음)

이안 저는 선생님 작품 가운데 묘사가 아주 탁월하게 이루어진 것에 마음이 끌리더라고요. 〈물수제비〉하고 〈햇빛 밝은 날〉 같은 작품요. 그런 것은 장면을 아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앞에 말씀하신 유년시 같은 것은 그렇게 다가오지가 않더라고요. 아이들이 이런 걸 좋아하나? 싶기도 하고요. 유년시는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 수준에 맞춰서 작업을 하시는 거죠?

이상교 그렇지요. 그러니까 유치원 애들.

이안 비룡소에서 내는 ‘동시야 놀자’ 시리즈가 기획동시집인데, 그것도 좀 보셨어요?

이상교 그것도 좀 봤는데, 나는 그렇게 마음이 가닿지는 않았어요.

이안 그 시리즈 중에서 신현림 시인이 한 게 의성어 의태어였어요.

이상교 근데 신현림 씨 동시도 최승호 씨 동시도 그렇게 눈여겨지지는 않아. 뭐랄까, 어린이들에게 많이 읽히는 동시집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노력을 기울이기로 한다면 써질 것도 같은 편편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저래 배도 좀 아프고.(웃음) 그래서 더욱이나 마음 기울여 안 읽어본 것 아닌지 싶어. 다시 얘기지만 남호섭 시인의 동시들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음미할 만한 시였으면 더 좋을 텐데 싶은 아쉬움이 든 거겠지. 남 시인의 어떤 시든 지면에서 맞닥뜨리면 ‘역시 남호섭이야,’ 할 때가 많아요.

이안 이번 《창비어린이》(2011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도 좋았죠?

이상교 예. 그러니까 그런 시를 쓰고 싶은 거지. 속상해. 좋은 시를 쓰고 싶다, 좋은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의욕만 무성하지. 그래서 더 안 써지는 거야. 요즘은 거의 못 쓰고 있어요. 큰 일 났다 싶어.

이안 마음이 그러면 더 정말 잘 안 되실 것 같아요.

이상교 잘 안 되지. 한 가지 위안은 여기서 조금만 잘 넘어가게 되면 좋은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노력중이야.

이안 정완영 선생님 작품은 저도 좋아하는데, 정완영 선생님 작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셔요?

이상교 뭐랄까. 어려운 건 묻지 않는 게 좋은데.(웃음) 언어의 느낌도 근사하고 억지라든지 하는 느낌이 안 들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마음에 와서 착 앵겨. “사비약 사비약”이라는 말도 말야. 사람의 가장 부드러운 심성을 어쩌면 이리 잘 건드릴 수 있을까 싶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몰라. 여튼. 많은 편수의 동시들이 다 그랬어요. 정완영 선생님의 기왕의 시조집들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안 그 전에 사계절에서 나온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2007)도 참 좋았죠?

이상교 그것도 좋았어요. 그리고 나는 또 안학수 동시가 좋더라고요. 이번에 나온 《부슬비 내리던 장날》(문학동네 2010)인가? 그것도 좋았고, 그 먼저 ‘갯벌’인가? 그것도 좋았어요.

이안 《낙지네 개흙 잔치》(창비 2004)요. 그 책 나올 무렵에 창비어린이에서 좌담이 있었어요. 김제곤 형이 사회를 보고 선생님하고 이준관 선생님, 그리고 제가 동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이상교 아, 그때. 그런데 안학수 시인은 어떻게 그처럼 시어로 딱딱 맞는 말을 잘 가려 쓸 수 있는 걸까. 그가 쓴 소설(《하늘까지 75센티미터》 아시아 2011)도 봤는데 그것도 좋았어요. ‘이야, 시도 좋더니 소설도 잘 썼네. 누가 써준 것 아닐까?’(웃음)

이안 안학수 선생 시도 가락이 있죠? 7․5조 가락을 타는 작품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상교 그렇죠. 나는 그런 시, 그러니까 만들어진 느낌보다 자연스럽게 나왔다라는 느낌 있잖아요. 그런 동시가 마음에 들고, 나도 그렇게 쓰고 싶어. 근데 그게 안 써져서 마음이 늘 초조해지는 거지.

이안 시력이 40년이 다 되셨는데도 신인 같은 고민을 하시니까 여전히 현역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상교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은 아직 철이 덜 든 거고.(웃음) 근데 이제 얼마 안 지나 좋은 작품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남들 좋은 시를 보면서 말야. 이안 씨 《고양이와 통한 날》(문학동네 2008)도 봤고 이정록 것(《콧구멍만 바쁘다》 창비 2009)도 보고 송찬호 것(《저녁별》 문학동네 2011)도 보면서, 이렇게 좋은 시들 보면 ‘나도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아, 나도 쓸 수 있었는데! 한발 늦은 거야.’(웃음)

이안 저도 그래요!(웃음)

이상교 지금의 나하고 똑같이 그래? 어쨌든지 이정록의 능청스러움이랄까, 그러면서도 슬픔이랄까 잔잔함이랄까? 갑자기 그가 보고 싶네요.(웃음) 뭐, 다 좋아요. 앞으로 점점 더 좋은 글, 좋은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레임 하나를 믿고 사는 중이지. 지금 내 가방에 시를 습작해놓은 것이 많아. 글씨를 못 알아보게 휙휙 휘갈겨 쓴 것들이. 일부러 갈겨쓰는 건 아니고 빨리 쓰지 않으면 시상이고 뭐고 다 달아나버리기 때문이지. 뒤에 다시 보면 후두두둑 써놓아 알아볼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라도 건지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고 마니까. 또 한 가지, ‘너는 니 눈에 비친 것은 모두 시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를 잊지 않는 거야. 아주 몹쓸 자만감이지.

이안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 동시집에 쓰신 산문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자주 나오더라고요. ‘이 세상은 동시로 가득하다.’ 이런 거요.

이상교 그렇지. 그러면 ‘니가 시인이어서 니 눈에 보이는 건 다 시라고 생각하는 건 대단한 착각이야.’ 하고 스스로 또 반성을, 돌이키는 거야. 그러니까 얼마 전에도 감자에 싹이 난 걸 봤거든. 근데 감자 싹이 퍼레가지고는 꼭 산돼지 발톱처럼 생겼더라고. ‘야, 얘네들이 깜깜한 데다 가둬놔서 화가 났구나. 밝은 데 나가기만 해봐라. 내가 튀어나갈 것이다. 두두둑 두두둑 ― 튀어나가려고 산돼지 발톱을 달고 있구나.’ 이거 시감이다. 물론 공책에 옮겨 놓았지. 내게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남들 눈에 싱거운 것 아닌지. 그래,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시인인 내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 시일 리 없지. 이건 다른 얘기지만, 지지난해 전 모 출판사와 동시집 계약을 했고 원고를 넘겼는데 보통 초조한 게 아냐.

이안 언제 넘기셨어요?

이상교 한 한 달 됐어. 근데 얘기가 없어.

이안 한 달이면……?

이상교 충분히 검토를 했을 텐데. 편집자는 이렇게 얘기하긴 했어. ‘선생님 다른 동시집에 좋은 시들이 모두 들어가 있던데요?’ (웃음) 왜냐하면 내가 딴 데 들어간 것, 신작을 가리지 않고 보내서야. 그래 하는 수 없이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시가 나올 거다.’ 그렇게 말했지. 지금 아홉 편을 또 써놨거든. 근데 그 아홉 편에 대한 믿음이 또 안 서는 거야. 좋은 작품이라고 써 놓고는 또 믿음이 안 가. 그러니 어째?(웃음)

이안 시인의 색깔이, 개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은데요?

이상교 맞아. 색깔 바뀌기 쉽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시이면서 동시, 시와 동시의 경계를 허문 작품을 쓰고 싶고, 그게 《우리 집 귀뚜라미》에 든 작품들이 아닌가 싶은 거예요.

이안 그러니까 선생님 첫 동시집은 시와 동시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써졌던 것 같아요. 어떤 게 더 낫다고는 못 하겠지만요.

이상교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그때로 돌아가긴 더 힘들어. 내가 너무 멀리 온 거지.

이안 자기 패턴을 못 버리는 것, 자기 동시관을 자기도 모르게 움켜잡고 있는 문제도 있을 것 같고요.

이상교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은, ‘어쩌면 이제까지보다 동시를 조금 더 잘 쓸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야.

이안 저번에 김용택 선생님 이바구 할 때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나는 동시를 잘 쓸 것이고, 시를 잘 쓸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말씀을 아주 여러 차례 하셨어요. 근데 그게 저한테 어떻게 들렸냐 하면, 아주 큰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왔어요. 이렇게 선배님도 저 연세에도 저런 고민을 하고 계시는구나, 간절한 꿈을 갖고 계시는구나. 저도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상교 나 또한 스스로 위로하는 꼴인 거지.(웃음) 스스로 미흡함에 대해서 변명할 말이 없어. 그림책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그래. ‘잘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씻지 못하는 거지. 여전히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있는 건 동시거든.

 

 

이안 동시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크신 건, 아주 오랫동안, 특히 동시를 전문으로 써오신 까닭도 있겠지만, 다른 장르와는 다른 동시만의 매력 때문이 아닌가도 싶은데요?

이상교 매력이라고 하면 뭘까? 일단 동시 쓰는 일은 괴롭지 않고, 뒤에 가서 실망을 하는 수는 있어도(웃음) 처음에는 ‘이렇게 잘 쓰다니, 대단해.’ 쓰고 났을 때 그런 만족감이 있어요. ‘이 시를 누군가 보면 너무 잘 썼다고 말하지 않을까?’ 싶은.(웃음) 오래전, 내가 좀 더 철없을 때는 한 후배에게 틈만 나면 전화 걸어서 읽어줬어. ‘야, 나 동시 너무 잘 쓴 거 있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읽어주곤 반응을 기다리지. ‘진짜 좋은데요.’ 그러면 ‘그래, 성공이지!’그러다가 ‘별로예요.’소릴 듣게 되면 기가 팍 죽어. 동화는 길어서 읽어줄 수도 없잖아. 동시는 청탁을 받아도 괴롭질 않아. 물론 괴롭기도 하지만 그 괴로움이 즐거운 괴로움이지. 아끼고 싶은 괴로움이지. 싫은 괴로움이 아닌 거야. 어딘가 동시를 주어야 하는데 참으로 좋은 동시를 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지. 늘 그래. 문제야.

이안 아까 선생님 말씀 중에 정완영 선생님이나 남호섭 시인이나 이정록 시인의 동시가 좋다고 하셨는데, 정완영 선생님 작품은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시조라는 형식을 타면서도 형식에 갇힌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 정도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일 테고, 이정록 형 동시 같은 경우 능청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유머가 있고요. 남호섭 선생은 진정이 갖는 힘, 그런 것일 텐데, 선생님이 작품을 보시고 ‘에이, 이건 별로네.’ 이러시는 작품, ‘별로’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이상교 별로인 시들의 유형도 많아. 회고조의 동시도 그렇고, 억지로 만들어진 동시들도 덜 좋아. 그러니까 만들어진 감각이라고 할까? 그런 동시는 아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지. 그런 억지가 보이는 시, 또 이미 다른 사람이 썼는데 그 동시의 모방작 또는 연작 같은 느낌의 동시, 그러니까 감각을 흉내 낸 느낌이 드는 동시. 부자연스러운 거. 그런 류의 동시들은 거부감이 들어요. 신인의 첫 번째 작품집인데 누구 시랑 비슷해서 이름을 가리면 그 사람 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싶은 동시, 문법적으로 따져 말도 안 되는 동시, 말이 되긴 하되 너무도 쉽게 써진 듯한 동시, 들쭉날쭉 수준이 고르지 않은 동시들을 모은 동시집. 만일 독자들이 질문을 해 온다면 대답이 가능할까 싶은 동시들도 꽤 많지요. 문법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시라고 해도 적어도 말은 되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생활해 나가는 동안의 체험을 그대로 쓰는 게 다 시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부디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들보다 나은 어른들이라는 시인들의 공허한 말장난이 좋은 동시로 가름되지는 않길. 적어도.

이안 좋은 말씀입니다. 잠깐만 쉬었다 갈까요? 힘드시죠?

이상교 그래요. 힘들지는 않아요.

 

 

이상교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이안 예. 이제 고양이 이야기를 좀 들어야죠. 고양이가 언제쯤부터 동시집에 등장할까 하고 찾아 봤더니, 《살아난다, 살아난다》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이상교 아, 그랬구나.

이안 그리고 고양이 동시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고양이가 나 대신》(창비 2009, 박성은 그림)이고요. 거의 한 부 가까이가 고양이 동시던데. 어떻게 해서 고양이에 이렇게 푹 빠지게 되셨어요?

이상교 고양이를 기르거든. 두 마리나 길렀지. 주워온 거였어. 처음에 한 마리를 길렀는데, 걔가 자꾸 나를 고양이로 아는 것 같아서(웃음). 왜냐하면 애기 때 데려와서 자기 같은 고양이를 본 적이 없는 거야. 저랑 비슷한 놈을 본 적이 없는 거지. 그래서 나를 쳐다보면서 ‘저 고양이는 왜 저렇게 길어?’ 그러는 거야.(웃음) ‘나, 고양이 아니거든.’ 안 되겠더라고. 고양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저 같은 고양이 놈을 한 번 보여주어야겠다 싶었지. 딱해서 한 놈을 또 데려 왔어. ‘이렇게 생긴 애가 너 같은 고양이라는 거란다.’ 둘이 잘 놀았어. 원래 고양이 쪼끄말 때 데려와 ‘쪼꼬미’라고도 부르고. 큰 다음에는 ‘쭈꾸미’라 불렀지.

이안 ‘쪼꼬미’는 동시에 나오더라고요.

이상교 그래. 원래 있던 애, 걔야. 쪼꼬미 친구 삼게 데려온 애가 ‘핑코’. 쭈꾸미는 병으로 지난해 12월에 죽고 말았지. 핑코는 지금 있고. 쭈꾸미는 특히 내게 많은 위안을 줬던 고양이야.

이안 고양이 동시가 나오기 전에는 강아지 동시가 두 편인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고양이 들이시고 난 뒤엔 강아지 동시가 안 보였어요.

이상교 가끔 강아지 동화를 쓰긴 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야기 속 동물은 고양이였는데, 강아지로 바꾼 거였어요. 어린 독자들이 아직 고양이에 대한 정보가 덜할 것 같아서요. 많이 팔려고.(웃음)

이안 그런데 생태가 다르잖아요.

이상교 그래요, 《댕기 땡기》(시공주니어, 2005)라는 동화를 썼거든. 이쁠 때는 ‘댕기’, 미울 땐 ‘땡기’. 그런데 그게 실은 바로 고양이 얘기였어요.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드무니까. 그러니까 고양이를 강아지로 바꿨을 뿐이야. 잘 팔아먹으려고. 강아지가 오줌 누고 제 발자국을 돌아본다는 동시가 있어요. 아, 그건 강아지였어. 어쨌든 고양이 동시는 아직도 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고, 아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맛있는 건 아끼고 싶은 것처럼 말야. 야금야금 먹고 싶고, 뒀다 먹고 싶고 그런 심정. 고양이에 대해서 현재 그래요. 고양이 책, 고양이 동시, 고양이 그림. 그리고 허투루 쓰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고양이에 이렇게 빠질 줄은 나도 몰랐다니까.(웃음)

이안 그런데 시인이 대상에 이렇게 너무 빠져 있으면, 그 느낌을 자기는 너무나 선명하게 잘 알지만, 그 선명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독자에게는 잘 전달이 안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독자도 자기처럼 느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상교 맞아. 잘 지적해줬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웃음) 아니, 그럴 확률이 진짜 커.

이안 저도 고양이 동시를 좀 쓰는 편이에요.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나는 고양이를 몰라서 그 느낌을 모르겠다.’ 그 소리를 들으니까 ‘나는 고양이가 가까이 있는 것으로 느끼지만 고양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느낌에 닿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상교 맞아. 고양이에 너무 푹 빠져 있으면 그럴 확률이 커. 내 친정 동생은 강아지 기르고 나는 고양이 기르거든. 동생은 제 강아지 얘기를 한참 하고 나는 고양이 얘기를 한참 해. 동생이 지네 강아지가 아무리 이쁘다고 말해도 나는 절대 수긍이 안 돼. 듣기도 싫고.(웃음) 누가 뭐래도 절대로, 절대로 우리 고양이가 더 이쁘거든. 강아지는 이쁘지 않아.(웃음)

이안 《고양이가 나 대신》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것보다도 니가 더 이쁘다.’(웃음) 우연히 데려오게 되신 거예요, 아니면 무슨 계기가?

이상교 처음에는 우연히 데려왔고, 그다음에는 매력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또 데려오게 된 거지. 이야기하려면 이틀 밤 걸려도 모자랄 거야.

이안 고양이가 독립적이고 자존감이 강한 동물이죠? 이런 것에 사람들이 매혹되고요. 그래서 고양이랑 같이 사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고양이의 종이다.(웃음) 선생님도 그런 과세요?

이상교 거의 그래요. 아침에 깨서 맨 먼저 하는 일이 고양이 화장실 청소야. 그리고 고양이 먹이 그릇 깨끗하게 부셔서 놓아 주고. 고양이 화장실 주변에 모래가 흩어져 있잖아. 그거 깨끗이 쓸고. 그런 게 하루 가운데 맨 첫 번으로 하는 일이거든. 요새는 덜한데, 전에는 어디 가면 가장 궁금한 게 고양이의 안부였어요. ‘고양이는 집에 남아 잠이나 쿨쿨 자는 것은 아니다. 쿨쿨쿨 자면서 집을 본다. 쿨쿨 자면서 건조대의 빨래를 말린다. 어쩌고…….’ 고양이가 쓸데없이 잠이나 자는 게으름뱅이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이게 시가 된다면 재미없겠지요? 그렇지만 난 재미있는 걸.(웃음) 그것이 늘 나의 문제야.

이안 그런데 그게 시인의 맛인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남호섭 시인이 선생님 같은 작품은 절대로 못 쓸 거고요. 그 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상교 그러니까 고양이가 ‘네용~’ 하고 우는데 입을 쪼꼬맣게 벌리더라고. 그러더니 크게 울 때는 입을 크게 벌려. ‘어, 몰랐는데.’ 얼마나 싱거운 시야. 그렇게 써놓고는 나는 그게 아주 신기하고 새로웠거든. ‘야, 이거 놀라운 시야.’ 그런데 문제는 그게 번번이 놀랍다는 거야. 그 당연한 것이. 문제라니까.(웃음)

 

 

이안 등단하실 무렵으로 잠깐 돌아가서요. 당시 어린이문학 문단이라고 할까요, 동시 문단은 어땠는지요?

이상교 그 당시엔 동시로 등단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쉽게 등단한 거겠지.(웃음) 처음에 내가 신춘문예에 냈을 때 본심에서 떨어지고 이문석이라는 이가 됐는데, 그때 내 작품에 대한 이원수 선생님 평이, ‘수려한 모국어의 수용.’ 그 말이 아직도 인상에 남아 있어. 그때 나는 거의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놀라기도 하고 아주 혹해 있었지. 지금도 그럴 수 있다면.

이안 그런 데 많이 빠져 계셨던 것 같아요. 요즘도 그러시긴 마찬가지 같은데, “갸우스름” “갸우숙하다” “자차분하다” “쪼빗” “쏭당쏭당” “조촘조촘” “갉죽갉죽” “올각볼각” “옴속옴속” “울멍술멍”, 또 “빼쪽하고 살몃하고 말깃한 귀” 이런 거요. 이런 게 되게 많았어요. “길쑴하다”는 말도 있네요. 이런 건 선생님이 만드신 말 아니에요? 그런 데 많이 빠져 계시는구나.

이상교 응. 그래. 그리고 그 말에서 모습이 그려지는 거야. 그래서 그림도 좋아하는 것 아닌가 싶어. 그런 말에서 그림도 그려지고.

이안 “좀, 좀, 좀, 좀이 쑤신다”나 “비둘기 / 발 / 발 / 발” 이런 것도 그런 말의 뉘앙스에 주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비둘기 발이 발갛고, 맨발이고. 이렇게 하나의 말이 연상시키는 범주를 하나의 시 안에서 통일적으로 종합해내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상교 또 하나는 그 시어의 놓임, 행과 연 가름 등에서 어떤 형상을 그려주고 싶어하는 거야. 아무렇게나 놓고 싶어하지 않는 거지. “좀, 좀, 좀, 좀이 쑤신다”처럼, 행을 가르는 일이나 연을 가르는 일에서도 어떻게 놓는 것이 가장 작절할는지 따지는 거지요. 시의 내용과 글자, 행, 연의 놓임이 전체를 놓고 볼 때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한 마디로 속이 좁은 거예요.(웃음)

이안 1970년대 선생님 등단하실 때랑 현재의 어린이문학 문단, 특히 동시 문단을 견줘봤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시인들을 둘러싼 객관적인 여건도 좋겠고요. 더 나아진 점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보시기에 이 판이 어떤 식으로 흘러온 것 같은지.

이상교 너무 어려운 질문이야.(웃음)

이안 지금 동시 문단은 어떠셔요? 동시가 창작되고 유통되는 방식이라고 할까요?

이상교 그때 비하면 지금은 훨씬 활발한 거지. 대단히 활발한 거지. 그때는 지금처럼이 아니었어요. 동시를 쓰는 이들끼리 교류 같은 것도 거의 없었고. 각각 숨어서 쓰는 것처럼 말예요. 새로 낸 동시집을 우편을 통해 서로 주고받기는 했지요. 동인 활동도 있긴 했어요. 지금과 같은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이니 그런 것은 구경할 수도 없었고. 기껏해야 《월간 문학》에 동시 발표하는 거랑 《소년》지 발표, 그리고 《월간 문학》에서도 아동문학 부문 수상작들을 뽑았지. 하지만 교류는 지금보다 덜했어도 정은 오히려 더 끈끈했던 것도 같아요. 작품을 먼저 보고 사람은 몇 해 뒤에나 만나는 경우가 흔했지요.

이안 어떤 한 덩어리로 형성되는 것이 없었다고 하면 될까요?

이상교 그런 게 없었어요. 지금이 훨씬 바람직하지. 근데 그때는 그런 대로 각자마다 또렷한 자기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할 거예요.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비슷하게 쓰는 이들이 많다고 그랬잖아. 무엇인가 유행을 따르는 듯한 느낌. 현재는 그런 것도 문제 아닌지 싶어.

이안 지금은 동시집을 의욕적으로 내겠다는 출판사들이 많이 생겼어요. 또 동시를 쓰는 시인들도 크게 늘었고요. 2000년대 들어 동시단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는데, 이런 흐름을 좀 더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이상교 글쎄, 그게 나도 가끔 걱정스럽더라고. 근데 그렇게 쉽게 끊어질 것 같진 않아요. 앞으로 태어날 어린이들도 그렇고 오히려 독자 폭은 더 넓어지는 것 아닌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청소년, 어른들까지도 좋아할 동시가 앞으로 계속 써질 테니까. 어떻게 보면 시보다도 동시 쪽이 더 많이 읽혀질 수도 있겠다는, 바람직스러운, 보람직스러운 생각이 들어요.(웃음)

이안 독자층이 시보다 훨씬 넓다는 것이 동시의 가능성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읽을 수 있는 시니까요.

이상교 그리고 20대 청년들까지 보게 된다면 문제는 커지지요. 좋은 쪽으로.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좋은 동시를 써야겠지. 근데 좋은 동시라는 것이 다양성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 같아. 개성도 있어야 될 것 같고. 그러면서 동시가 문학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지. 너무 가벼워진다든지, 재미만 좇는다든지, 흥미 위주라든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그것이 힘들다는 거야. 문학성도 유지하면서 재미있자면 참으로 힘들어. 거기다 한 가지, 시인이 양산되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왜냐하면 격이 떨어지는 동시집을 내는 경우들이 많아서야. 동시인만 해도 아마 천 명은 넘지 않을까 싶어. 아직 아니라면 곧 그렇게 될 것이고. 좋은 동시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반대일 경우도 생길 것 같아서지. 그런 저런 이유들로 널리 읽히기 전에 실망하는 일도 생길 테고. 이건 내가 내게 갖는 염려스러움이기도 해요.

이안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동시에 대해서 ‘문학’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동시를 쓴다는 것을 하찮고 수준이 떨어지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시인들 중에서도 그딴 유치한 걸 뭐 하러 쓰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고요.

이상교 근데 그들 성인 시인들이 정작 동시를 써보기로 한다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거야. 지난 호에서 김용택 선생님도 같은 얘길 하셨더고만. 동시이면서 시인 게 좋지 않나. 그게 힘들긴 하지만 독자층이 넓어질 수 있는 길이라고 봐.

이안 그 둘이 합쳐지면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이상교 맞아요. 우리 숙제가 많아. 시이면서 동시이기가 쉽지 않다는 거. 그걸 풀어나가야 해.

이안 동시를 포함해서 아동문학이 갖는 힘이 희망이나 긍정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근데 시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날카롭게 진입해 가는 경우도 있고, 그 때문에 오히려 시인이 아플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동시 때문에 시인이 병들 것 같진 않단 말씀이에요.

이상교 그러니까 동시, 어린이문학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 나 아닌지. 이안 씨가 보기에도 그렇잖아?(웃음) 아픈 걸 못 견뎠을 테니까.

이안 동시의 여건이랄까요? 아무래도 전체적인 환경이 좋아진 것처럼 보이니까 동시를 쓰려는 분들이 늘어난 것 같아요. 대학에 문창과도 많이 생겼고요. 또 대학의 문창과 교수들 중에서도 시인인데 동시를 쓰는 분들이 적지 않다 보니까, 제자들한테도 동시 쓰기를 권하는 것 같더라고요. 동시를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들한테 조언을 해주신다면?

이상교 일단 좋은 동시집을 많이 찾아서 읽고, 그다음엔 뭐가 좋을까? 그렇지, 아주 좋은 동시는 필사해야지. 베껴 쓰기를 하고. 또 습작을 많이 하고. 내 경우는 읽기보다 습작을 많이 했거든. 근데 남의 뛰어난 시를 읽다 보면 간혹 우울해져요. 나이가 많은 탓이겠지.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좋은 시는 써지지 않고. 그러니까 초조해져. 어떡하지? 좋은 시를 쓰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데, 동화도, 동시도, 그림책도 써야 되는데. 하여튼 동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꾸준히 쓰고 읽어라’야. 쓰기만 해도 소용이 없거든.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좋은 동시는 어떻게 쓰였는지 알고, 그러면 제 동시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 되거든. 아, 그래. 특별히 어떤 방법을 권하기보다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택하되, 좋은 작품을 좀 더 많이 읽는 것이 도움이 되겠군. 근데 나는 나쁜 시도 많이 찾아 읽거든. 왜냐하면 위안 삼으려고.(웃음) ‘아이구, 드럽게도 못 썼네. 그래도 난 이 시보단 낫게 쓰지 않아?’ 이런 거.(웃음) 문제가 많은 거지? 하여튼 좋은 시를 읽고 베껴 쓰고 그러면서 어떻게 행을 갈랐는지, 어떻게 표현을 했는지, 전체적인 느낌이 어떤지. 좋은 시를 많이 읽어라. 그거지, 뭐.

이안 좋은 시를 많이 읽어야 시를 보는 안목이 트이고 그래야 자기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상교 또 그래야 자기 시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지. ‘아, 이건 시도 아니었네.’ 하는 나처럼.(웃음) 동화도 마찬가지야. 남이 잘 쓴 동화를 보면 아주 절망에 빠져. 내가 쓴 건 동화도 아니었구나 싶은 거. 요새 그러니까 동시도 그렇고 동화도 그렇고 그림책도 그렇고 내가 아주 돌아가시려고 해. 근데도 여전히 쌩쌩한 것은, 잘 쓸 것이라는(웃음) 가능성!

이안 저희 《동시마중》은, 받으면 다 읽어 보셔요?

이상교 우선 동시만 먼저 찾아 읽어요.

이안 창작자는 동시를 먼저 읽고 연구자들은 비평 글을 먼저 읽는다고 해요.

이상교 그리고 바쁠 때는 시인 이름 보고 그것 먼저 읽고.

이안 저도 다른 잡지 볼 때는 그런 식으로 봐요. 제가 눈여겨보는, 좋게 읽은 시인 작품 먼저 읽고, 그다음부터는 이것저것 읽게 되더라고요.

이상교 그렇지? 그리고 머리맡에다 두고 자기 전에 얼마간 읽어. 요새는 책이 많이 오니까 못 읽는 책도 많고. 그래도 《동시마중》은 두껍지 않고 재미있으니까 거의 다 읽게 돼요. 또 내가 좋아하는 동시 이야기니까. 《어린이와 문학》도 응모 동시, 응모 동시 평은 다 읽게 돼요. 여전히 그런 게 나한테는 도움이 많이 돼요.

이안 저도 응모 동시에 뽑힌 작품하고 심사평은 가장 먼저 읽거든요. 다른 시인들은 어떤 관점에서 동시를 읽어내는지 보게 되더라고요. 선생님도 평을 쓰시죠? 선생님 평을 응모자도 그렇고 독자들도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교 모르겠어요. 가끔씩 개인적으로 동시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난 못하지요. 내가 쓰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쓰는 법을 일러줄 것 같아서. 이상교 동시란 게 뻔하거든. 안 하고 싶어.

이안 《동시마중》에서 이런 건 좀 다루었으면 좋겠다, 이런 기획이 있으면 괜찮겠다 싶은 것 혹시 없으셔요?

이상교 그런 것 아직 없는데. 그런 건 저번에 물어봤어야지. 미리 생각해 주세요, 하고.(웃음)

이안 나중에라도 생각나시면 꼭 말씀해 주시고요. 선생님,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이걸로 이바구는 마치겠습니다.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교 제대로 못한 것 같아. 괜찮았어요?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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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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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또바기나 | 작성시간 26.06.12 귀한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작성자반야 | 작성시간 26.06.12 귀한 이야기 잘 듣고 보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작성자제니손 | 작성시간 26.06.13 이렇게 선생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남아 있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작성자촘촘하게 | 작성시간 26.06.13 그리운 이상교 선생님.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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