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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내 말을 모른다 / 허수경

작성자케이크|작성시간26.06.22|조회수55 목록 댓글 1

토끼는 내 말을 모른다

허수경

 

 

  사과가 떨어진다

  차가 지나가면서 사과를 뭉그러뜨린다

  들판에서 토끼들이 새끼를 낳고 있다

  다가올 겨울을 어떻게 보내려고

  가을 문턱에 새끼를 낳는단 말인가, 라고 말하려다

  토끼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내 말 따위를 들으며

  토끼는 새끼를 다시 자궁 속에 집어넣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에게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를 인내할 시간이 없다)

 

  명랑한 바람은 없을 것이다 명랑한 토끼가 없는 것처럼

  명랑한 나뭇잎이

  없는 것처럼

  명랑한 내가 없는 것처럼

  나는 가끔 토끼들이 들판에서 걸어서 하늘로 가는 것을 본다

  하늘에도 들판이 있다는 걸 믿는 토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 자유다 자연이 날 배반한 만큼 나도 자연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파멸로 가더라도 파멸로 가서 나라는 종을 지울지라도)

 

  언제나 하늘에는 구름만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는 하늘만 달려 있다

  토끼는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한다

  그 말을 알아듣고 싶어서 운 적도 있었다

  별들이 하는 말을 알기 위하여 멀리까지 가버린 이들을

  나는 기억한다 돌아오지 않았다

 

  생선을 먹는 오후에 바람이 불어왔다

  복숭아를 먹는 오후에는 비가 왔다

  이웃집 개가 토끼 사냥을 하는 것을 바라보던 오후도 있었다

  그 오후를 기억하는 것이 신기하다

  왜 그 오후를 기억하는가 하필이면 그 폭력의 오후를,

  아무도 폭력을 폭력이라 여기지 않는 오후를!

 

  토끼는 목덜미를 개에게 내어주고 아직은 퍼런 엉겅퀴 밑에서 떨었다 그런데도

  나라는 인간, 

  가을이 가득찬 토끼의 온몸을 기억한다

  토끼의 언어를 해독할 수 없는 내 몸을 기억하는 것처럼

 

  (아, 즐거운 가을이라서 썩은 달 옆에서 토끼를 안는다, 우물거리며 나를 먹어치우는 나를 안는다)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난다,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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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케이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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