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허수경
이 시는 어느 지붕을 그리워하는 오전 3시 20분에 시작된다
이 시는 난만한 곡선을 가진 지붕 위에 덮힌 눈이
햇살에 간지러워하며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오전 11시 21분에 시작된다
눈이 물이 되면 지붕은 다시 난만한 곡선으로 남을 거라는 당연한 생각에
어떤 얼굴이 떠오르고
그 얼굴이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새의 얼굴이었던 느낌에
어느 마을을 폭격하던 드론의 얼굴이라는 느낌에
그 얼굴을 지우려고 청소를 하던 오후 2시 56분
지워지지 않아 오래된 양말을 골라내어 버리던 오후 4시 7분
오후 5시 정각의 뉴스에서는 네가 우리를 떠났다 하고
너를 데리고 가던 고장난 차는 눈을 맞고 있었는데
네가 살던 도시에서는 오래된 빵집의 화덕이 소리 죽여 우는데
그곳에서는 눈이 녹지 않아 당분간 지붕의 곡선을 볼 수 없을 텐데
저녁 8시 5분, 저기 저 전쟁의 도시에서 아이들은 눈 속에서
언 오렌지 껍질을 줍고 있었고
저녁 9시 46분, 나는 숲의 목을 조르는 바람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새의 얼굴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처럼 이상했다
드론을 발명한 인간들의 얼굴처럼 이상했다
그리고
이 시는 끝나도 얼굴은 사라지지 않는 오전 3시 10분에
이 시는 다시 시작된다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난다,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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