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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요약(원시사회-근대사회)

작성자하루하루|작성시간12.01.12|조회수1,122 목록 댓글 0

제1부 원시 고대사회

 

제1장 원시사회와 고조선

1 원시사회의 전개

 

1) 인류의 등장과 농업의 시작

• 원시시대의 구분 : 사용한 도구에 의해 구석기신석기로 분류한다.

• 구석기 시대

① 시기 : 200~300만 년 전. 인류사의 거의 모든 시간을 차지한다.

② 생활 : 수렵채집에 의존, 동굴이나 바위그늘에 거주

③ 도구 : 뗀석기(타제석기)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도구(골각기) 사용

④ 문화 : 의사소통 발생, 자연의 불을 이용함

⑤ 인류 : 현생인류와 직접 연결이 되는지는 인류학적으로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음

⑥ 유적 : 공주 석장리, 상원 검은모루, 덕천 승리산, 연천 전곡리

 

• 신석기 시대

① 시기 : 한반도는 기원전 6000년 경 시작

② 생활 : 신석기혁명, 농업혁명

농경 - 원시농경, 생산력이 낮아 수렵과 채집 등으로 보충함, 신석기 후기 가축사육

정착생활 - 움집 형태의 주거지. 움집은 화덕과 저장구덩이를 갖추었음

신석기 주거지는 주로 강변이나 해안海岸지역에 분포

③ 도구 : 간석기(마제석기), 토기(빗살무늬토기), 돌보습, 돌삽, 돌괭이, 돌칼

④ 문화 : 모계혈연 공동체 기반의 씨족사회 → 원시공동체사회(공동노동·공동분배), 신앙발생

․ 농경은 채집을 담당하던 여성에 의해 시작 → 신석기시대는 여성이 경제생활 주도

신앙발생 : 토테미즘 (특정 동물을 씨족의 기원으로 신앙. 단군신화의 곰, 범)

샤머니즘 (영적 매개자인 무당과 주술을 신봉)

신앙 유물로는 조개껍데기 가면, 동물을 새긴 조각물, 골각 장신구 등

⑤ 유적 :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두만강 유역 및 서남해안 도서지방

 

2) 청동기의 사용과 원시사회의 해체

 

• 청동기의 시대적 지표 : 금속 발견(청동),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유물 발견

① 시기 : 기원전 10세기경 중국 요령지방에서 한반도로 이동

② 생활 : 농경중심의 경제생활, 주거지는 지상가옥 형태로 발전.

․ 농경 - 조, 피, 기장, 수수 등의 작물 재배

․ 주거지 - 하천과 들판을 앞에 둔 야산기슭이나 나지막한 언덕(구릉)지대

③ 도구 : 청동기와 개선된 석기, 민무늬토기(무문토기) 사용

․ 청동기 :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한국식동검)

․ 발달된 석기(돌도끼, 턱자귀, 괭이, 반달돌칼<반월형석도>)사용 → 농업생산력 발달

④ 문화 :

농업생산력 발달 → 인구증가와 사유재산 빈부격차 발생 → 계급분화 → 원시공동체사회 붕괴

→ 가부장적 계급사회 출현(부계상속 등) → 고대국가 등장

․ 고인돌 : 청동기 사회가 지배․피지배계층으로 분화된 계급사회였음을 증명해 주는 지표.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와 무덤 규모에서 많은 인력 동원이 가능했던 당시 사회집단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암각화 :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사냥과 어로漁撈 등 당시 생활상과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기원을

표현. 고령 바위그림의 기하무늬는 농경사회의 태양숭배와 풍요를 비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다양한 건축물 : 주거용 외에 창고, 작업장, 공동 의식의 장소

⑤ 인류 : 예맥족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추정

 

2 고조선의 형성과 발전

1) 단군신화와 고조선 <교재 pp. 12~14>

• 고조선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이다. 대략 기원전 1000년경에 국가형성

• 건국신화 : 일연의『三國遺事』에 실린 단군신화 → 청동기시대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고대국가

성립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① 곰과 범 - 토착 선주민 집단인 곰 집단은 환웅 집단과 혼인관계로 연합. 범 집단은 배제됨

② 환웅의 무리 - 천손天孫이라는 우월의식을 내세우며 지배층으로서 농업생산과 사회전반을 주도

③ 천부인天符印 - 지배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기 장식물이나 도구로 추정

• 고조선은 이주민인 환웅 집단과 선주민인 곰 집단의 연합으로 형성된 국가

• 지배체제 : 제정일치 사회. 지배자인 단군왕검은 단군(무당)+왕검(추장)의 의미

• 기록 : 중국의 고대 문헌들은 고조선이 기원전 7~6세기에 존재하였음을 확인. 고조선은 춘추전 국시대 제나라와 교역, 기원전 4~3세기에는 연나라와 겨룰 정도로 상당한 세력 형성

• 유물 : 요동 일대와 한반도 서북부에서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 고인돌, 토기는 청동기 대표적 유물

 

2) 고조선의 발전

• 고조선은 점차 요동지역으로 진출, 전국시대로 중국의 혼란기였던 기원전 4~3세기는 고조선 강성기

•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후반 연과 대립, 기원전 3세기 초 연이 침공하였으나 후에 요서지역 회복

위만조선

① 연왕 노관의 부관 위만이 투항하자 고조선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 변경지대를 주어 다스리게 함

② 위만은 기원전 194년 한漢나라 침입을 구실로 왕건성에 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

③ 위만은 토착 고조선인과 이주민 모두를 지배세력에 참여시킴 → 정치적 안정 도모

④ 지방에 일정한 지배권 부여, 국사國事는 귀족회의에서 결정함

• 고조선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고, 한반도 중남부의 소국들과 한나라의 중계무역으로 이익 차지

 

3) 고조선의 지배체제와 사회 <교재 pp. 15~17>

• 고조선의 정치형태

① 초기 국가성립 주도세력과 여러 부족들의 느슨한 결합형태 → 중앙정부의 지배체제로 정비

② 기원전 4세기말 국가기구, 관료제도, 군사력 보유

③ 기원전 2세기경 위씨왕조에 <박사, 비왕, 상, 경, 대신, 장군> 등 관직 등장

․ 비왕 - 종래 지역 군장이 군사권을 그대로 지닌 채 중앙정부에 편입된 존재

․ 대신 - 국왕의 직속관료․ 장군 - 최고의 무관 작위

④ 기원전 3~2세기경 고조선은 중국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주변지역을 지배

⑤ 다만 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편입된 집단들이 이탈하기도 함. 예) 예군 남려, 니계상 삼 등

 

8조법금

① 고조선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법치法治를 하였다는 증거. 현재 3조만 전함

② 인간생명 중시, 사유재산 보호와 아울러 노예제도와 차별이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노예는 고대국가가 타 집단을 정복하여 그 성원을 노예로 삼은 데서 시작하였으나, 8조법금의

경우, 동일 집단 내에서도 형벌․채무의 사유로 노예가 되었고 그 소유권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 계급분화

① 한 집단 내에서 노비, 귀족, 일반 평민으로 분화

② 귀족 :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예를 부리며 생활

③ 평민 : 하호下戶. 지배계급에 예속. 신분상 평민이나 노예와 다름없음. 기본적 생산 담당계층

④ 노예 : 상당수 존재. 고대 로마의 라티푼디움과 같은 대규모 노비 경영은 미발달

 

4)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 고조선 내외 정세

① 한나라는 고조선이 적대관계에 있던 흉노와 연결되는 것을 경계. 양국 간 긴장고조.

② 세력의 이탈 : 기원전 128년 예군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 재상 역계경이 진국에 망명.

③ 한무제의 침공 : 한무제는 외교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기원전 109년 고조선을 침공

• 고조선의 멸망

① 지배층 분열 : 한나라는 고조선 지배층을 매수하여 분열 책동 → 고조선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양분

② 조선상 노인과 상 한음은 한나라로 도주, 니계상 삼 우거왕 살해 후 한나라에 항복

③ 대신 성기와 왕검성 주민들 한나라에 대항 →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

• 고조선 사회의 해체와 토착민의 저항

한사군漢四郡설치 : 낙랑·진번·임둔·현도군, 한인 태수와 현령 파견 통치

② 고조선 주민들은 읍락단위로 한의 군현에 예속

③ 8조법금도 60여 개 조로 증가

④ 한사군의 통치는 낙랑군 중심으로 수행. 낙랑군은 한나라와 한반도 소국간의 중계무역 기지 역할

⑤ 토착주민의 저항 : 진번·임둔(20년 만에 폐지), 현도(고구려에 의해 퇴각), 낙랑(313년 멸망)

→ 토착민의 결합과 정치력 발전 계기 → 고구려, 옥저, 동예, 진국 등 초기 고대국가로 발전함.

 

 

제2장 삼 국

1 삼국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

• 고구려의 성립

①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교통의 요충지)에 살고 있던 맥족이 세운 국가

→ 고구려는 평야지대로 진출 꾀하고, 대륙세력의 침략에 맞서면서 성장

② 초기 고구려는 ‘那·奴’(소국)집단의 연맹체로 구성된 국가

․ 초기 각 나 집단은 연맹체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집단 간 각축이 심하였음

․ 초기 소노消奴 집단이 우세했으나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의 계루桂婁 집단이 연맹 주도권 장악

• 고구려의 발전

① 국가체제정비

․ 계루 집단의 주도로 나 집단을 5개의 부로 정리 : 계루·소노·절노·관노·순노

→ 고구려왕은 계루부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점차 중앙집권통치를 강화시켜 나감

․ 중앙 - 무역, 외교, 군사 등 국가의 대외적 업무 관장.

중요 국사는 왕과 대가들의 귀족회의에서 논의

․ 지방 - 부 집단에 일정한 자치권 인정했으나 중앙의 통제 강화로 점차 약해짐

→ 5부의 이름도 후에 동·서·남·북·중의 5부로 바뀜.

태조왕 : 1세기 후반 고대국가체제 확립, 정복전쟁.

․ 왕의 姓 해씨에서 고씨로. 중앙통제 강화. 5부 족장을 중앙 귀족으로 편제. 관등조직.

․ 현도군을 구축하고, 낙랑군을 고립시킴. 압록강·동가강 유역, 옥저·동예 정복, 청천강 유역 진출

→ 대륙 침략에 맞설 후방기지 확보

③ 고국천왕

․ 2세기 말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왕권 강화.

진대법 실시 : 가난한 농민 보호와 공적 백성으로 확보하기 위한 대책

․ 왕비를 절노부에서 받아들여 왕비족과 연합하여 왕권을 강화함

④ 산상왕

․ 제도변경 :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형사취수兄死取嫂혼 풍습이 사라짐

․ 요동진출 기도 : 요동은 중국에게 동방 진출 근거지이고, 고구려에는 외적 방어의 요충지

⑤ 미천왕과 고국원왕

․ 4세기 중국은 5호 16국 혼란기. 미천왕은 낙랑·대방 병함하고, 요동진출하여 서안평과 현도 공격

․ 고국원왕은 선비족이 수도 환도성 침략. 백제 근초고왕이 공격한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

소수림왕

․ 고구려의 통치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

율령 반포, 태학 설립, 불교 공인, 관료체계 확립

⑦ 광개토왕

․ 남방 정복 : 백제공격 임진강 일대 차지, 거란 원정, 신라 복종시킴 → 남방 위협 제거

․ 북방 정복 : 북위와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과 요서 점령. 동북방 부여와 말갈 병합

⑧ 장수왕

․ 남하정책 : 427년 평양 천도하여 체제정비, 기존 귀족세력 약화시켜 왕권 강화 의도.

․ 나제동맹 : 장수왕의 남하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

․ 백제의 천도 : 아차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개로왕 전사 후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 함락.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함.

․ 고구려의 남쪽 경계선 : 고구려는 5세기 후반 죽령, 조령일대 ↔ 남양만 이르는 선까지 확보

• 고구려의 평화와 쇠약

① 고구려는 남북조의 여러 나라, 유연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장기간 평화를 유지함

② 문화적으로도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이고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이룩함

③ 고구려의 쇠약 : 6세기 중반 왕위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분쟁 결과 대대로를 3년마다 선임 하는 귀족연립체제 형성하여 정치 운영. 왕권은 약화

 

2) 백제 <교재 pp. 30~33>

• 백제의 성립

①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많은 이주민과 철기문화 유입 → 삼한三韓이 성립됨

② 삼한 : 마한(50여 개의 소국 구성), 진한과 변한(10여 개의 소국 구성) → 지배자는 신지·읍차

③ 백제는 마한의 소국으로 시작. 부여·고구려 계통 이주민이 주도하여 성립

④ 미추홀의 비류와 위례의 온조, 비류세력이 온조에 합류, 목지국 등 주변 소국 정복해 나감

⑤ 백제 지역은 한반도 중서부의 요지로 비옥한 땅과 바다로 진출하기 쉬운 하천과 해안에 위치

※ 특히 백제가 자리 잡은 한강 유역은 중국과 해양으로 진출하던 거점으로서, 이곳을 차지하였던 백제가 삼국 중 전성기를 가장 먼저 누렸으며(4세기 근초고왕), 한강 유역을 점령한 시기의 고구려와 신라도 강성기였다.(5세기 장수왕, 6세기 진흥왕)

• 백제의 발전

① 국가체제정비

․ 1세기 후반 마한 지역 진출, 2세기 무렵 고구려, 신라와 경쟁

② 고이왕

․ 3세기 후반 통치조직 정비 : 6좌평과 16관등 제도 마련, 공복제정, 지방세력 중앙귀족으로

편입, 율령 반포 등으로 집권적 고대국가체제 형성

근초고왕

․ 4세기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 : 대대적인 정복사업, 왕권 강화(형제상속→부자상속),

왕비족도 진씨로 고정, 평양성에서 고국원왕 살해

․ 경기·충청·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황해 일부 차지

․ 중국·왜와 활발히 교류, 중국 요서지방 점령, 남조의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중국 동부에 거점 마련

• 백제의 중흥

① 5세기 초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대항했으나,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웅진으로 천도하게 됨.

②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538년 성왕 대에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

③ 중앙통치 22부를 두어 재정비하고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자 하였음

④ 백제와 신라는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2년 후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를 신라에

빼앗기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함.

※ 이 사건 이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3) 신라

• 신라의 성립

① 신라는 진한 12개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

② 박혁거세의 건국설화 : 신라는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고조선 멸망 후 철기문화를 지닌 유이민이 경주에 유입, 동해안 지역의 탈해세력과 김알지

의 김씨 세력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함.

③ 사로국은 주변 소국, 울산과 동래의 지역의 소국을 정복 → 일본·중국과 연결 통로 확보

• 신라의 발전

① 국가체제정비

․ 왕위계승 :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진 신라는 초기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며 왕위에 오름

13대 미추왕이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이 되었고, 17대 내물왕 이후 김씨가 왕위 계승

골품제 :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도. 지배층의 권위를 보장

화백 :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한 왕족들의 회의

② 내물왕

․ 4세기 말 집권체제 정비, 왕위계승 변경(형제상속→부자상속), 중국과 교류 시작

․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왕에게 원병을 요청하면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게 됨

③ 신라는 6세기 초, 농업생산 발전(농기구 개량, 우경牛耕시작), 경주에 장시 개설

지증왕

․ 순장殉葬 금지 →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

․ 국호를 신라新羅(503)로 새로 정하고, 왕명도 마립간麻立干에서 중국식의 ‘’으로 변경

※ 신라 최고 지배자의 시대별 호칭과 변천

거서간 : 居西干, 1대 박혁거세, 사로 6촌을 대표하는 부족장 의미

차차웅 : 次次雄, 2대 남해, ‘무(巫)’의 뜻. 제정일치적 사회의 모습 반영

이사금 : 尼師今, 3대 유리, 확대된 연맹체의 정치기반을 상징. ‘임금’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마립간 : 麻立干, 17대 내물, 4세기 중엽, ‘마루’의 지배자, 으뜸가는 지배자라는 뜻 → 강화된 권력 상징

왕 : 王, 22대 지증왕 → 불교식 왕명, 23대 법흥왕 → 유교식 왕명, 29대 태종 무열왕

․ 주변 지역 정복, 우산국(울릉도) 예속

법흥왕

․ 율령반포, 불교공인 → 국가의 기본 법령 완비와 사상적 통일 → 고대국가체제 확립

⑥ 진흥왕

․ 정복사업 : 가야 소국 정복으로 낙동강 유역 확보,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 공략,

백제에게 한강 하류 탈취, 강원과 함경 해안까지 진출 → 순수비巡狩碑 건립

․ 진흥왕은 스스로 제왕이라 칭하며 ‘개국’이라는 독자적 연호 사용, 화랑제도 정비

 

4) 가야 <교재 pp. 35~37>

• 가야의 성립

① 가야는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성립. 낙동강 서쪽 지역 10여 개 소국 존재

② 가야의 건국설화 : 6개의 알에서 태어난 사내들이 6가야의 왕이 되었다 함

• 가야의 발전

전기 가야연맹

․ 초기 가야 12 소국은 김해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정치적 연맹체 형성.

․ 김해의 가야국은 해상교통의 중심 : 가야지역의 풍부한 철을 중국·일본에 교역

․ 가야의 중계무역 : 낙랑↔가야↔일본, 여러 소국의 교역으로 중계이익을 얻음

․ 전기 가야연맹은 강력한 고대국가로 통합·발전하지 못하고, 313년 낙랑의 멸망으로 중계교역에

타격을 입은데다가 400년 광개토왕이 지원한 신라와 전쟁에서 패하여 해체되고 말았다.

후기 가야연맹

․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자극을 받아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 소국들이 결속

․ 대가야는 중계교역보다 농업생산과 무력을 중시. 중국 남조에 사신 파견

․ 6세기 강대해진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가야의 소국들은 하나씩 멸망하여 세력 약화됨.

결국 신라의 침공을 받아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 가야의 역사적 의미

① 우수한 철기문화 : 풍부한 철 생산, 우수한 철제 도구 제작

② 신라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③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기여 : 가야의 일부세력이 일본에 진출

※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리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가 아닌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비록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고대국가 발전이라는 통상적인 범주에 들지 못한 관계로, 제외되기는 하였지만 가야의 역사가 600여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그만큼 당시 한반도에서 가야의 위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가야의 역사가 더욱 많이 발굴되어 풍부한 고대 한반도의 역사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2 지배체제와 사회경제

1) 삼국의 지배체제 <교재 pp. 37~39>

• 고대국가의 형성

① 철제 도구 보급과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강력한 소국이 주변 지역을 통합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이에 해당한다.

② 초기 고대국가는 공동체적 관계나 유습이 잔존했으나, 삼국이 국가체제를 확립해 가면서 지방 세력 등을 지배귀족으로 편입하였다.

예) 고구려의 대가大加들은 국왕처럼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두고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③ 삼국 중반기에는 소국이나 읍락을 지방통치조직으로 편성, 백성의 공민화, 통제와 수취를 강 화하기 위해 통치조직 정비 및 관리 수를 늘려갔다.

• 삼국의 통치조직

① 고구려

․ 왕 밑에 상가相加 등 10관등 마련 → 14관등 체제로 정비

․ 형 - 지방의 지배세력의 관등, 사자使者 - 수취를 담당하는 관리, 처려근지․도사 - 지방파견관리

② 백제

․ 중앙 - 6좌평과 16관등

․ 지방 - 전국을 5방으로 구분하여 방령이라는 지방관 파견, 중요 지역에는 담로 파견

③ 신라

․ 6세기 통치조직 확대·정비. 17관등 구분. 지방에는 외위外位마련.

․ 지방 소국과 읍락은 주나 군으로 재편하고 지방관을 파견

• 삼국의 신분제도

① 고구려

․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고분벽화를 통하여 귀족들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다.

② 백제

․ 관등체제에 반영되어 있고 3등급으로 나뉜다.

․ 제1관등은 솔류, 제2관등은 덕류, 제3관등은 무관 계열

․ 의복에 의한 관등 구분 : 자색(1.좌평~6.내솔), 비색(7.장덕~11.대덕), 청색(12.문독~16.극우)

→ 지배층 내부에서도 엄격한 신분 구별이 있었다.

③ 신라

․ 골품제도 : 골과 품으로 신분 구분

․ 17등급의 관등체계에서 최고 관등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진골뿐 이었다.

․ 의복에 의한 관등 구분 : 자색(1.이벌찬~5.대아찬), 비색(6.아찬~9.급벌찬),

청색(10.대나마~11.내마), 황색(12.대사~17.조위)

 

2) 농업의 발달과 백성의 생활

• 삼국의 농업장려정책

① 5~6세기 철제 농기구(도끼, 낫, 따비, 쟁기)의 사용 :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생산성 증가

② 우경牛耕시작 : 인력과 노동시간 감소

③ 수리시설 확충 : 김제 벽골제, 제찬 의림지 재건, 경북 영천의 청제(법흥왕)

④ 벼농사(백제·신라), 조농사(고구려)

• 삼국의 농업 상황

① 철제 농기구와 소 등 생산수단은 주로 권력자와 부자들만 소유할 수 있었다.

② 삼국은 토지와 백성의 확보를 위해 전쟁을 벌였다. 승리하면 귀족들은 땅과 노비가 생겼지만,

백성들은 전쟁을 위한 물자마련, 축성공사 등 조세와 부역의 부담이 막중하였다.

③ 농경 발달과 생산량 증가는 조세 부담을 증가시켰다. 고구려는 인두세로 베 5필과 곡식 5섬

을 수취하였다. 또 집집마다 등급을 나누어 세금을 부과했다.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④ 조세부담과 흉작으로 농민이 유망하는 등의 일을 방지하기 위해 조세 경감, 곡식 대여 등도 하였다.

고구려 재상 을파소가 실시한 진대법도 그러한 제도의 하나이다.

 

 

3 삼국의 대외관계

1) 고구려의 발전과 대외관계 <교재 pp. 42~43>

• 1세기 - 고구려는 옥저, 동예, 양맥, 숙신 등을 정복하고 조공형태로 지배

• 3세기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와 통교,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으로 한때 위축

• 4세기 - 중국 5호16국 시대. 고구려는 낙랑을 멸망시키고 중국과의 무역로 장악

백제는 한강의 이점을 활용하여 중국 요서 지방 및 일본에 진출

• 5세기 - 남하정책, 신라에 영향력 행사, 북부여·동부여·만주지역과 요하 상류까지 복속

• 5세기 중반 - 고구려는 중국 남북조와 유연 등과 다변적 외교정책, 북위 견제

동북아시아의 독자적인 세력권 형성하며 장기적인 평화를 유지하였음

 

2) 삼국의 각축 <교재 pp. 43~44>

• 신라

① 4세기 후반 전진前秦에 사신 파견, 4세기말 고구려의 군사지원을 받음(광개토왕의 낙동강 원정)

② 눌지왕 때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433년 나제동맹 체결

③ 6세기 중반 고구려의 왕위계승내분을 틈타 고구려를 공격, 한강 유역 획득

④ 고구려 서북부에서 돌궐이 등장하자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어 남부 국경선의 안정을 도모

⑤ 이에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를 탈취함 → 100년간 지속된 나제동맹이 깨어짐

⑥ 신라는 가야를 복속하고, 고구려의 영역인 함흥 일대까지 진출

• 백제와 신라가 다투는 동안 신흥세력 돌궐과 현상유지로 위기를 넘긴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의 회복을 시도, 이후 삼국 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3) 수․당의 침략의 물리친 고구려

• 수나라의 등장과 멸망

① 300여 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자국중심의 세계질서 수립을 위해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 부정 ↔ 고구려도 수나라 중심의 세계질서 부정하고 다원적 국제질서를 유지하고자함.

② 살수대첩 : 을지문덕은 612년 113만 대군으로 침략한 수양제의 별동대 30만을 살수에서 격퇴

③ 수나라는 전쟁과 토목사업 등으로 인한 국력 소모 및 내란으로 멸망하였다.

• 당나라의 등장과 고구려와의 대립

① 당은 초기 고구려에 유화정책을 폈으나 곧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② 연개소문 : 대당 강경파인 그는 영류왕과 일부 귀족을 죽인 후 보장왕을 세우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신라와의 화평을 거부하고 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③ 당의 침입 : 645년 당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빌미로 고구려에 침공하였으나 안시성 전투에 패해 퇴각하였다. 그러나 당은 소규모 병력으로 지구전을 전개해 고구려의 국력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4 불교의 수용과 삼국의 문화

1) 불교의 공인

• 삼국시대 불교의 역할 : 정복전쟁 등으로 확대된 영토와 백성들을 일원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불교 수용 공인. 불교는 정복전쟁 정당화, 왕 중심의 일원적 지배질서 수립에 기여

• 삼국에 불교의 전래

① 고구려(소수림왕 2년<372>), 백제(침류왕 원년<384>) ※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공인한 시기에 아울러 율령반포와 통치체제를 갖추어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

② 신라(법흥왕 14년<527>). 신라는 귀족들의 반발로 지연되다가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었다.

③ 불교의 수용에 왕실은 적극적이었고 귀족들은 반대하였으나 곧 귀족들도 받아들였다.

④ 왕과 귀족들이 대규모 불교사원을 많이 건립, 경주 황룡사, 익산 미륵사 등이 그러하다.

 

2) 유학과 도교, 풍류도

• 유학 : 국왕중심의 통치체제는 충성과 신의를 강조. 삼국은 유학교육기관 설립.

고구려(중앙-태학, 지방-경당), 백제(박사 제도), 신라(진흥왕순수비, 임신서기석)

• 도교 : 도교는 전통사상과 비슷해 순조롭게 도입됨. 백제(신선사상), 고구려 말기(교단조직)

신라(풍류도, 풍월도라는 고유사상으로 유·불·선을 포괄 → 화랑도에 영향 끼침)

 

 

제2부 중세사회

 

 

제3장 통일신라와 발해

1 신라의 삼국통합과 발해의 건국

1) 신라와 당의 연합 <교재 pp. 59>

• 7세기 중반 동북아시아의 판도: 동서연합(신라-당)과 남북연합(왜-백제-고구려-돌궐)의 대립

• 백제의 신라 공격

①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를 계속 공격하여 신라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음.

②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쳐서 신라-당나라 간 연결로를 끊어버림.

• 신라와 당의 연합

① 신라는 대야성(합천)이 백제에 의해 함락하자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죽령 이북 한강

유역을 반환하라는 고구려의 요구를 거절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②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군사를 파견하고, 신라는 당에게 패강(대동강)이북의

땅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신라와 당은 동맹을 맺는다.

→ 당의 의도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복속시키려는 것이었다.

 

2) 백제의 멸망과 유민의 항전 <교재 pp. 60>

• 의자왕의 실정

① 640년 즉위. 왕권 강화, 민심 수습,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 획득

② 반대세력 탄압, 아들들에게 좌평의 벼슬과 식읍 하사, 귀족들의 내분, 백성들의 생활궁핍.

• 백제의 멸망

①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에게 패배. 백강을 통해 당군은 사비성을 함락.

②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고 직접 통치하려 함.

• 유민의 항전

① 주류성(충남 한산)에서 661년 복신과 승려 도침이 왕자 부여풍을 맞아 부흥군을 조직

② 임존성(충남 예산)에서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이끌고 저항

③ 백제 부흥군의 항전은 내분 등으로 인해 끝이 났으나 3년간 지속되었다.

 

3) 고구려의 멸망 <교재 pp. 61~62>

• 신라의 당의 협공 : 신라는 남쪽에서 당은 북서쪽과 바다 양면으로 고구려를 협공

• 고구려의 내분 : 연개소문 사망 후 그의 아들들 권력 다툼,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 평양성 함락 : 연남생을 앞세운 당의 50만 대군은 평양성을 함락한 후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4) 고구려 유민의 항전과 나당전쟁

• 고구려 유민의 항전

① 보장왕의 아들 안승과 검모잠은 각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신라로 들어왔다.

② 검모잠은 안승을 한성에서 왕으로 세우고 신라에 제후국이 되기를 청하였다.

③ 신라는 고구려 재건을 적극 지원 → ∵ 검모잠과 같은 고구려 세력이 당의 침략을 막아주니까

④ 안승과 검모잠이 다투다 검모잠이 살해당하면서 고구려 항전군이 약화되자,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전북 익산)으로 옮겨 보덕국왕으로 봉하였다.

• 나당전쟁

① 신라는 당나라가 백제에 웅진도독부,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심지어는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통치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고, 고구려의 항전을 도우면서 당과 전쟁을 벌였다.

② 672년 : 신라와 고구려 항전군은 백수성에서 당-말갈 연합군을 격퇴

③ 674년 : 당 고종은 김인문을 왕으로 삼는 등 신라의 내분을 획책하고 신라 침략

④ 675년 :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을 무찌르고, 대동강~원산 이남 영토를 확보

 

5) 발행의 건국 <교재 pp. 64~65>

• 696년 거란족이 독립을 선포한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은 만주 동북으로 이주하여 말갈족을 규합하며 세력을 늘렸다.

• 698년 대조영은 만주 동모산 기슭에 진국(震國, 振國)을 세움. 713년 발해(渤海)로 바꾸었다.

• 발해의 주민구성 : 고구려인(소수, 지배계층)+말갈족(다수, 피지배계층)

• 발해의 역사적 의의 : 고구려 후손이 옛 고구려 땅에 나라를 세워 그 문화를 계승·발전시켰다.

 

 

2 통일신라의 지배체제와 사회

1) 통치체제의 정비

• 왕권강화

① 왕명 변경 : 통일 전의 불교식 왕명에서 유교식 왕명으로 바꾸고 유교정치이념을 내세웠다.

※ 유교를 공식적인 국가통치이념으로 천명한 조선뿐 아니라 그 이전의 고려나 통일신라도 왕권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활용하였다.

② 왕위 계승 고정 : 이후 무열왕계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③ 왕명을 집행하는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 중앙 통치 기구

① 집사부

․ 왕의 직속기관이며 국정 운영의 중심, 그 장은 시중(중시).

․ 국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행정을 집행,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

② 집사부 예하 기관

이 름

직 무

이 름

직 무

병 부

군 사

이방부

사법 및 형벌

위화부

관리의 인사

예작부

토목공사

창 부

조세 및 재정

공장부

관청수공업 관리

예 부

교육, 외교, 의전

• 지방 통치 조직

9주 : 지방에 9주를 설치(주의 장관은 도독), 주(도독)-군(태수)-현(현령) 체제로 정비

② 향·부곡 :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어 현이 될 수 없는 지역에 설치

③ 5소경 : 지방특별행정구역. 중앙 귀족 일부와 고구려, 백제 귀족들을 거주하게 함.

서라벌이 국토 동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지방세력의 성장을 견제하는 역할.

• 군사 조직 : 9서당과 10정

① 9서당 : 중앙군. 신라, 백제, 고구려, 말갈, 보덕국인으로 구성. 복색을 달리함.

② 10정 : 지방군. 각 주에 1개씩 배치하고, 한산주에만 2개를 배치

 

2) 통일신라의 경제와 백성의 생활

• 토지지급제도

① 통일이후 지배층의 권력 기반으로 토지소유의 중요성이 커졌다.

식읍(食邑) : 문무왕이 전공을 세운 귀족에게 새로 얻은 땅과 백성을 나누어준 것.

녹읍(祿邑) : 귀족들에게 등급별로 지급.

④ 관료전 : 신문왕 7년(687년) 문무관료에게 차등을 두어 지급.

녹봉 : 녹읍을 폐지하고 대체한 것. 관리가 직접 조세를 거두는데서 발생하는 폐단 방지 목적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경덕왕 16년(757년) 녹읍이 부활되었다.

정전(丁田) 지급 : 성덕왕 21년(722년) 농민들에게도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였다.

⑦ 불교사원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지배층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 백성의 생활

① 귀족 :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림. 금입택과 사절유택 소유

② 백성 : 수확량의 절반을 귀족에게 바치고 공물·부역·군역도 부담해야 했다.

③ 향·부곡민 : 포로나 반역죄인들을 격리한 지역. 농·목축·수공업에 종사. 백성보다 무거운 부담

④ 노비 : 귀족들의 농장·목장 등에서 사역, 때로는 귀족의 사병으로 전투에도 참여함

신라장적

① 촌을 단위로 한 민정문서로 3년 단위로 다시 작성

② 가호 수, 인구, 토지면적, 가축의 수, 과일나무의 수 등을 통계하여 기록. 인구는 남녀 구분하여

연령별 6등급으로 기재

③ 목적 : 국가는 장적을 바탕으로 조세와 각종 부담을 부과하였다.

 

3) 통일신라의 대외관계

• 대당對唐관계

① 국교정상화 : 성덕왕(713년)때 신라왕으로 인정받음. 2년에 1회 정도 당나라에 조공

② 신라-당의 교역

신라

수입품 : 비단·불경·서적·서화·자기·칠기

수출품 : 금·은·구리·인삼·해표피·과하마

• 대일對日관계

① 문무왕 8년(668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공동대처할 것을 모색

② 일본이 율령국가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도움

③ 8세기 중엽에는 공식 외교관계보다 일본과의 사적 교역이 활발해짐

④ 신라-일본의 교역

신라

수입품 : 풀솜과 견직물

일본

수출품 : 놋쇠 기물과 모직물

• 신라의 중계무역 : 당에 있는 신라인들이 당과 일본을 중계. 당나라에 신라방 형성.

• 장보고의 청해진

① 장보고는 9세기 서남해안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교역을 주도하였음

② 신라에서 청해진대사의 직함을 받고 재당 신라인사회까지도 조직·통솔함

 

4) 신라 말 사회 동요

• 중앙의 반란 : 진골귀족들의 권력다툼 → 이긴 자가 왕위를 차지함

① 혜공왕 4년(768년) 각간 대공의 반란 이래 숱한 반란이 일어나 혜공왕 사후 155년간 20여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② 780년 선덕왕 즉위 이후 무열왕 직계자손의 왕위 계승은 무너졌고 왕위쟁탈을 둘러싼 귀족간의 내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지방의 반란 : 822년 김헌창의 반란, 846년 장보고의 반란

• 개혁 시도 : 원성왕(독서삼품과 설치), 애장왕과 흥덕왕(법령 개정, 인사제도 개혁 등)의 개혁은

귀족들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5) 신라 말의 호족과 농민

• 지방 호족

① 호족 구성은 낙향한 진골, 6두품, 지방관리, 촌주, 초적과 도적을 이끌던 세력 등 다양

② 중앙 진골귀족들의 권력다툼, 지방 통치 이완을 틈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사병 양성

③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하고, 농민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해나감.

• 농민 봉기

① 원인 : 왕의 실정과 재해, 막중한 조세 부담을 거부하며 봉기하게 됨.

② 주요 봉기 : 원종과 애노(사벌주), 기훤(죽주), 양길(북원), 붉은바지부대(백제지역) 등

③ 농민봉기가 전국을 휩쓸면서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했다.

• 후삼국

① 궁예는 기훤, 양길의 휘하에 있다가 독자세력 형성, 송악 호족 왕건의 항복을 받음

스스로 칭왕하고(901년), 국호를 후고구려-마진(904)-태봉으로 바꾸면서 신라를 공격

② 견훤은 서남지역을 차지하고 무진주·완산주를 중심으로 후백제 건국(900)

③ 후백제와 태봉은 신라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후삼국의 패권을 쥐기 위한 전쟁을 벌임

 

 

3 발해의 발전과 사회

1) 해동성국 발해

• 발해의 외교

① 대당관계 : 711년 당은 건국축하 사신을 보내 발해를 회유. 733년 정식 수교 → 동북아 평화유지

② 대신라관계 : 발해-신라는 초기에 적대적이었으나, 발해-당 관계가 개선되면서 사신 왕래

③ 대일관계 : 727년 일본과 수교. 790년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 중단 후 발해는 당과 일본의 중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 발해의 발전

① 2대 무왕 : 독자적 연호 사용, 국가체제 정비, 흑수말갈 등 여러 부족 정복

② 3대 문왕 : 수도 천도(동모산→상경)

③ 9대 선왕 : 흑수말갈 등 말갈세력 복속. 요동지역 지배 → 고구려의 故土 대부분을 회복

사방 5000리의 대제국을 이루며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 발해의 통치기구

3성 6부제

․ 3성(정당성, 중대성, 선조성)과 6부(충·인·지·예·신·의)

․ 기능 : 중대성(왕명초안), 선조성(왕명선포), 정당성(왕명집행), 6부(인사·재정·교육·군사·사법 등)

․ 특징 : 정당성 밑에 중대성·선조성을 두고, 정당성이 6부를 관장하며 행정을 총괄하는 독특한 구조

5경 15부 62주 : 경(京, 주요 중심지), 부(府, 큰 지방행정구역)밑에 주-현을 두어 행정구역 정비

③ 군사조직 : 중앙군은 10위로 편성, 지방군은 농사지으며 비상시 대비, 국경에는 독립부대 배치

• 발해의 도로망 : 영주로(중원), 조공도(바닷길), 신라도, 일본도, 거란로 → 사신·상인들이 왕래

•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 발해는 727년 일본과 수교하면서 보낸 국서에 ‘고려’와 ‘고려국왕’이라는 칭호를 써서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표방하였다.

 

2) 발해의 사회와 문화

• 발해의 주민구성

① 고구려계(지배층) + 말갈계(피지배층) = 공동체 의식이 약하였음

② 지배층 : 문무 9품의 등급, 복색 구분, 궁·후·백·자·남의 작위 수여

③ 피지배층 : 백성과 천민, 말갈족과 타 종족, 고구려 피지배층 후손. 농업과 목축, 군역에 종사

• 발해의 문화

① 혼성문화. 고구려, 당, 말갈의 토착문화가 복합됨

② 발해의 고분 → 발해의 복합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3대 문왕의 딸 정혜공주의 무덤 : 돌방무덤(석실분)으로 고구려 전통

․ 3대 문왕의 딸 정효공주의 무덤 : 벽돌무덤(전축분)으로 당나라 영향

 

3) 발해의 멸망

• 내외적 요인

① 내적 요인 : 9세기 중반 지배층 내분발생, 말갈족은 발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독자적 행동

② 외적 요인 : 당의 쇠퇴를 틈타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916년 황제를 선포하고 발해를 공격

• 발해의 멸망

① 지배층 분열과 피지배층인 말갈족이 이탈하면서 거란 침입 20일 만에 발해는 순식간에 멸망

② 세자 대광현은 수천 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

 

 

4 통일신라의 유교정치이념과 불교

1) 유교정치이념

• 통일신라는 왕권강화와 제도정비하며 유교이념을 내세웠다.

① 설총의「화왕계花王戒」: 왕에게 유교이념에 따른 정치를 하도록 권유하는 우화

② 충담의「안민가安民歌」: 군신을 부모에, 백성을 자식에 비유하여 각자의 역할을 노래한 것

③ 유학자들의 활동 : 강수(외교문서), 설총(이두 제작), 김대문(『계림잡전』,『화랑세기』)

④ 국학 설립

․ 신문왕 2년(682년) 박사, 조교를 두어『논어』,『효경』등과 한문학 강의

․ 15~30세까지의 6두품 출신들이 입학 →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 양성

⑤ 독서삼품과 : 원성왕 때 설치한 관리임용시험제도

• 6두품의 좌절

① 골품제 하에서 국학과 독서삼품과를 거친 6두품은 제 아무리 뛰어나도 정해진 한계 이상으로

출세할 수 없었다. 고위관직은 오로지 진골귀족의 전유물이었다.

② 사회적 제약에 불만을 품은 6두품들의 당나라 유학이 증가하였다. 이들은 당나라에서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의 관리가 되기도 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이다.

 

2) 불교학과 불교문화의 융성

• 원효의 정토신앙

① 대·소승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여 많은 저술 남김. 예)『대승기신론소』

② 정토신앙 :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누구나 극락왕생 →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

• 화엄종과 법상종

① 화엄사상 : 모든 사물은 현상적으로 차별이 있으나 본질은 다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

② 유식사상 : 법상종. 현상의 모든 차별과 변화는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

③ 대표적인 인물 : 의상과 태현

• 유학승 : 통일기 무렵부터 많은 학승들이 당에 유학. 혜초(『왕오천축국전』-서역 여행기)

• 통일신라의 불교예술

① 많은 절과 탑, 불상 등 조성: 불국사, 석불사, 다보탑과 석가탑, 성덕대왕신종 등

②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1966년 석가탑 수리할 때 발견. 현전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 선종禪宗의 도입

① 교학 연구 중심의 교종과 달리 선종은 참선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불성을 깨닫는 것을 중시

② 왕실귀족의 후원을 받던 교종과 달리 지방호족들과 백성들에게 호응을 받아 널리 퍼짐

③ 선종은 개인의 수행에 대해 스승의 인가를 받음. 스승-제자의 계보를 중시(스승의 부도탑과 탑비를 건립하고 추모)

 

 

제4장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합

 

1) 고려의 건국

• 태봉은 후삼국세력 가운데 가장 강하였으나 왕인 궁예는 전제적이 되었다. 918년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 왕건은 국호를 고려(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 수도를 송악으로 옮겨 개경이라고 함

• 왕건의 정책

① 민심수습과 민생안정에 주력 → 조세와 요역 줄임, 양인이었던 노비 회복, 유랑민 정착

② 버려졌던 평양지방 개척 → 서경 건설

③ 호족연합정책 : 지방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우대하여 연합. <※ 참고로 왕건의 부인은 총 29명>

2) 후삼국의 통일 <교재 pp. 92~93>

• 후삼국의 세력 판도 : 아래 그림 참조.

경쟁

고 려

신 라

후백제

① 고려-신라의 관계

․ 920년 신라의 대야성(합천), 진례(김해)지방에 후백제가 침공하자

고려는 신라를 지원하여 후백제를 물리침.

․ 924년 후백제가 고창(안동)지방을 침범하자 고려가 물리침.

이 때 신라의 여러 장군과 성주들이 고려에 투항

② 후백제-신라의 관계

․ 925년 후백제는 경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왕으로 세움

․ 고려는 이에 군사를 일으켰으나 공산(대구)전투에서 후백제에 패함

• 후삼국통일

① 후백제 : 왕위다툼 발생 →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 → 견훤은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

② 신 라 : 경순왕은 귀족들과 상의하여 고려에 항복, 고려 태조는 경순왕과 신라귀족을 대우함

③ 936년 후삼국 통일 : 고려는 신검의 후백제군을 일선군(선산)에서 완파하고 후백제를 굴복시킴

 

2 고려의 지배체제와 사회

1) 호족 억압과 중앙집권화

• 태조 : 호족을 우대하는 한편 기인제도 등을 통해 호족을 억눌렀으나 호족은 여전히 강하였다.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겨 국가 통치질서 수립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 광종 : 호족을 꺾고 왕권강화. 노비안검법과거제 실시,

칭제건원<※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준풍峻豊이라는 연호 사용>

• 성종 : 최승로의 시무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이념에 의한 통치 시행

 

2) 통치체제 <교재 pp. 95~98>

• 중앙 통치 기구

3성 6부제이나 중서문하성을 둔 독자적인 운영방식을 취함.

중서문하성 : 장은 문하시중. 최고의 정무기관. 국가정책을 결정

․ 상 서 성 : 6부(이호예병형공)가 속해 있으며, 중서문하성의 정책을 시행

② 중앙 주요기관 : 중추원(군사기밀과 왕명출납), 삼사(재정회계), 어사대(관리감독)

③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대관은 언론을 담당 : 간쟁, 부정과 비리 규찰·탄핵

도병마사 : 고려 독자 기구. 중서문하성(재신)과 중추원(추신)의 회의로 국방·군사문제 논의, 결정

⑤ 식목도감 : 도병마사와 같은 구성.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 등을 정함

※ 고려 관료제도는 겸직이 가능하여 소수의 고위 관료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자손대대로 권력을 누리며 문벌을 이루었다.

• 음서蔭敍제도 : ≒문음門蔭. 5품 이상 관리의 경우, 그 아들·동생·조카·사위도 관직을 얻는 혜택.

음서는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는 제도였다.

• 지방 통치 기구

① 현종 때 정비 : 나라를 개경과 경기, 남쪽지방, 북쪽 변경지대의 세 부분으로 나눔

․ 북쪽 변경지대 : 외적 방어를 위해 양계(북계동계)를 설치. 병마사 파견.

․ 기타 지역 : 도로 나누고, 도 밑의 중요지역에는 도호부·목·경 등을 설치

․ 도에는 안렴사나 안찰사가 1년 중 몇 달 동안 순회하며 지방 관리들을 감시하였다.

․ 일반 업무는 군·현에서 모두 이루어졌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곳은 속군·속현이라 하였다.

․ 지방의 행정 실무는 그 지역 토착세력인 향리가 담당하였다.

• 군사제도 : 중앙(2군6위), 국경지대(주진군-외침대비), 지방(주현군-방범·반란 대비)

 

3) 경제제도

• 전시과田柴科

① 모든 관리에게 품계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 전지(농경지)와 시지(수풀 척박한 토지)를 지급

② 전시과의 개정-경종대(976)부터 시행되고 몇 차례 개정을 거쳐 문종대(1076) 최종 제도 마련

․ 처음에 중앙과 지방세력은 그 정도에 따라, 관리는 벼슬등급에 따라 지급하다가, 점차 관리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급하는 토지의 양은 줄이고 현직관리 중심으로 지급.

③ 전시과의 종류

․ 지급대상에 따라 궁원전(왕실), 양반전(문무관), 군인전(군인), 공해전(관청) 등이 있고

양반전과 군인전의 비중이 컸다.

․ 양반전은 문무양반의 18등급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주었다.

공음전 : 5품 이상 관료에게 양반전 외에 지급한 토지.

※ 공음전은 세습이 가능한 토지로, 음서와 함께 귀족의 특권을 보장하는 장치.

• 수취제도

① 수조권 : 관리들은 자신이 지급받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수확의 1/10을 거두는 수조권을 받았다. 관리들은 그 수조권을 자기 소유 토지에 받아 자신들이 내야할 전세田稅를 면제 받았다.

② 농민 : 생산의 1/10을 전세로 부담, 요역의 의무와 함께 공물(베나 특산물)도 부담했다.

③ 조세와 공물은 조운漕運(한강과 서·남해안 수로를 이용)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 조창漕倉이 관리.

그밖의 국가 기관의 필요 물품은 관청 장인 또는 소(특정물품 생산지)에서 생산 조달.

 

4) 신분제도

• 지배층

① 문반가문>무반가문>하급 관직의 가문

② 귀족들은 귀족 및 왕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문벌을 형성하고 가문의 품격을 높였다.

③ 문벌귀족 : 가문단위로 정치세력을 형성, 대토지 소유, 중앙 고위직을 장악하여 세력 강화

④ 지방호족 : 집권체제의 확립에 따라 지방 향리로 편제. 호장, 부호장. 과거로 중앙 진출.

⑤ 향·소·부곡 : 향과 부곡민(농사에 종사), 소의 주민(공납 물품 생산에 동원)

⑥ 역·관·진 : 역(교통 요지), 관(숙박시설), 진(강변 주요 나루터)의 주민들도 천시

⑦ 노비 : 공노비(관청 소속)와 사노비(개인 소유),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거주 형태)

 

 

3 대외관계

1) 고려 초 나라 밖의 정세 <교재 pp. 102~103>

• 고려 건국~후삼국 통일 시기 중국은 5대10국(907~960)의 분열기였다.

• 요 건국 :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916) 발해를 멸망시키고(926) 요나라 건국(947)

• 송 건국 : 후주後周 절도사 조광윤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송을 건국

• 고려는 서북변경에 성을 쌓고 30만의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 침입에 대비하였다.

 

2) 거란의 침략과 서희의 담판

• 거란의 제1차 침입(993)과 서희의 강동6주 획득

① 993년 소손녕이 침공했으나 청천강 하류 안융진에서 격파하였다.

② 요는 회담을 제의, 서희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강동6주를 고려의 땅으로 인정받았다.

③ 강동6주 :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흥화진, 용주, 철주, 귀주, 통주, 곽주

• 거란의 제2차 침입(1010)

① 거란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

② 고려의 강력한 저항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점거하였으나 식량보급로가 끊기고 포위 위협으로

회군하였다. 이후 고려와 요는 화친을 맺었고, 송나라는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3) 강감찬의 귀주대첩

• 거란의 제3차 침입(1018)

① 거란은 고려왕이 직접 조공하지 않고, 강동6주를 반환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침공

② 고려의 강감찬은 귀주에서 소배압의 10만 군사를 격멸하였다.

③ 거란을 물리친 뒤 1세기간 평화 유지, 고려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4) 여진의 침략

• 여진의 발흥과 금 건국

① 11세기 말 여진의 완안부 세력이 고려 변경을 위협하며 1세기 동안의 평화가 깨어졌다.

② 1115년 아골타가 금을 세우고 요를 멸망시키고 송의 수도를 함락하자 송은 남쪽으로 이전

• 윤관의 별무반과 동북9성

별무반 : 여진에 대항하기 위한 기병부대. 윤관의 건의로 편성. 농민·승려·상인·노비도 참가

동북9성 : 1107년 동북변경지대의 여진을 몰아내고 9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함

 

5) 대외교역

• 고려시대는 대외교역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대이다.

• 대송對宋 교역 : 광종 13년(962)에 송과 공식 무역 시작. 거란과의 관계로 공무역은 단절과

재개가 반복되었으나 민간무역은 계속 활발하였다.

벽란도 : 예성강 어귀에 위치하여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 거란, 여진, 일본, 사라센과도 교역

• KOREA의 유래 : 1024년(현종 24) 100여명의 사라센 상인이 와서 교역을 하는 등 대외 교역 범위가 넓어지면서 고려는 세계에 코리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4 고려 전기의 사상과 문화

1) 정치이념과 유학

• 고려에서도 유학은 정치이념의 기능을 하였다.

과거제(광종) : 시험으로 관료를 선발하여 통치체제 강화

시무28조(성종) : 최승로는 유학이념에 따라 통치할 것과 체제정비를 위한 정책 건의

• 교육기관 설립

① 공적교육기관 : 국자감향교 설치 (→ 유학을 배우고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나아감)

② 사적교육기관 :

․ 12개 학당(12공도)이 있었다. 최충이 세운 학당은 문헌공도 또는 9재학당이라 함.

․ 고위관료 또는 지공거 출신 인물들이 사학 설립 → 귀족 자제들이 사학으로 몰려들었다.

학벌형성 : 좌주(시험관)와 문생(급제자)은 부자관계와 같이 출사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 행사

•『삼국사기』: 1145년 왕명으로 편찬, 김부식 주도.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 역사를 기록한 사서.

2) 불교와 대장경 <교재 pp. 109~111>

• 불교는 고려시대에 국교로 숭앙되었다. 태조의 훈요10조에서도 가장 먼저 불교를 강조한다.

• 풍수지리설 : 신라 말 도선이 체계화. 송악을 중심으로 전국을 재편성한 새로운 인식.

도참설과 결부되어 묘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많이 이용되었다.

• 고려의 불교예술

① 고려초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대규모 불상이나 석탑 등이 조성되었다.

② 은진미륵(논산 관촉사), 미륵불(파주 용미리), 안동 제비원 석불 → 자연암석 이용, 소박한 모습

③ 연등회와 팔관회 : 가무유희로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④ 불상 조성, 탱화 봉안, 불경 사경寫經 등 불사가 귀족들 사이에 성행하였다.

• 고려 불교

① 광종의 불교 정책

․ 사원과 승려들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국가에서 통제

․ 승과 :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시험, 입격자에게는 전시과 지급.

승직도 여러 등급으로 나누었고, 맨 위에 왕사와 국사를 두었다.

② 교선일치 : 고려중기 대각국사 의천은 교학연구와 수행을 같이 할 것을 주장하고 천태종 개창

③ 대장경 : 대장경 판각 시작(현종, 거란침입) → 초조대장경 완성(선종4, 1087년, 몽골침입으 로 소실) →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몽골침략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조성)

속장경(의천이 불교연구서 수집하여 간행, 몽골침입으로 소실)

 

 

제5장 고려의 후기의 사회변화

1 귀족사외 동요와 무인의 집권

1) 귀족들의 다툼과 이자겸의 난

• 외척 이자겸 가문의 왕실 관계

왕실

이자겸과의 관계

왕실

이자겸과의 관계

11대 문종

조부 자연의 사위 (고모부)

14대 헌종

자겸의 5촌 조카

12대 순종

자겸과 처남-매제지간

16대 예종

자겸의 사위

13대 선종

자겸과 사촌 처남-매제지간

17대 인종

자겸의 사위

① 이자겸은 왕실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용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 숭덕부 설치 : 이자겸의 사설 재산관리기관.

․ 금나라에 대한 사대 :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의 사대요구 수용.

․ 도참설(李씨가 왕이 된다는)을 퍼뜨리고 인종을 독살하려함 → 척준경에 의해 제거됨

 

2) 개경 귀족과 서경 귀족의 싸움

• 이자겸의 난 이후로도 문벌귀족은 계속 세력 강화 : 김부식 형제, 이수 부자, 정안 임씨 등

• 서경西京세력과 묘청의 난

① 개경 문벌귀족에 불만금나라에 대한 사대 반대가 원인으로 작용

② 서경 출신 정지상, 묘청, 백수한 등이 서경 천도를 주도하였으나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

③ 묘청은 1138년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라 하고, 황제국을 선포 → 김부식의 토벌군에

맞서 서경 백성과 군인들 1년간 저항하다 진압됨

 

3) 무신의 난

• 고려는 문신 중심의 문벌귀족사회

① 문신이 군대의 최고 지휘권까지 장악. 서희, 강감찬, 윤관 등도 문신

② 상대적으로 무신(무반)은 지위도 낮고 차별대우를 받음. 무반 최고직인 대장군도 3품

③ 거란을 물리친 뒤 무신은 문신의 호위병에 시중을 드는 처지로 전락함

• 무신의 난

① 1170년 보현원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문신을 살육하고 의종을 내쫓고 권력 장악

② 반 쿠데타 : 동북병마사 김보당, 서경유수 조위총 등이 군사를 일으켜 무신에 대항하다 진압됨

③ 무신정권의 변천도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중방

도방

중방

도방

정방

1170

1179

1183

1196

1219

1249

1258

1258

1268

1270

․ 무신정권은 약 100년간(1170~1270)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 중요사건으로는 최우 집권기에

몽골의 침입이 있었다. 강화도로 천도하며 몽골에 항전한 무신 정권은 결국 왕실과 몽골에

의해 붕괴되었다. 몽골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환도하고 권력을 되찾은 고려 왕실은 이후 100여

년간 몽골에 예속되어 자주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자초하였다.

․ 무신의 난은 무인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서 비롯되었으나,무신집권 시기는 소수의

고위 무신들과 일당(가문)이 정권을 농단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과정이었다.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병사病死한 경대승과 최충헌 가문, 임연 부자를 제외하고는 정권 변천과정이 동 료를 살해하고 권력을 탈취하는 형태가 대부분일 정도로 집권세력으로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4) 최충헌 가문의 60년 집권

• 최충헌의 정권 장악

①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기에 앞서 문신들과도 관계를 개선하였다.

봉사10조 : 최충헌의 개혁방안. 무신들이 설치한 기관을 줄이고, 향리 견제, 기강 확립 등

→ 봉사10조의 시행은 최충헌이 자기 정치발판을 마련하는 장치였다.

③ 1인 독재체제 강화 :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 아우 최충수를 죽이고 독재체제 강화

도방 강화 : 경대승이 만들었던 사병집단인 도방을 강화함

교정도감흥녕부 설치 : 교정도감(국내 정보 수집·인사·세금 징수), 흥녕부(개인재산 관리)

• 최우 집권

삼별초(호위부대), 정방政房(인사·행정), 서방書房(사설정치자문기구) 설치

② 1230년 몽골이 침입하자 최우는 항쟁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실상은 정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 최씨 정권과 무인집권의 종식

① 최씨정권은 최의가 1258년 김준, 임연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4대 60여 년에 걸친 장기집권이 끝났다.

② 몽골과 화의를 맺은 고려 왕실이 1270년 임유무를 척결함으로써 무인집권 100년은 막을 내렸다.

 

5) 농민과 노비들의 봉기

• 농민봉기

① 무신의 난 이후 지방 통제가 약해지자 서북지방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② 서북지방 : 창주·성주·철주 봉기(1172), 조위총의 난에 농민봉기(1174), 최광수(1217)

③ 중부지방 : 망이·망소이(1176, 공주 명학소), 전주봉기(1182)

④ 남부지방 :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군 봉기(1193)

• 노비봉기

① 노비 출신 이의민이 최고 권력에 오른 것에 자극받은 노비들은 신분해방의 열망으로 봉기

② 만적(1198, 최충헌 가노家奴) : 노비의 봉기를 계획했으나 사전 발각되어 예성강에 던져짐

• 의의 : 농민과 노비들은 70여 년간 지배세력에 대항했으며, 몽골 침입 이후로는 침략군을 막으 면서 지배세력에 대항하였다.

 

 

2 몽골의 침략과 항전

1) 몽골의 침략

• 13세기 동북아 정세

① 13세기 초 몽골 부족을 통합한 테무진은 칭기즈칸이 되어(1206) 서하와 금을 공략했다.

② 몽골과 고려 : 고려는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군과 연합하여 함락시켰다.

③ 저고여 피살사건 :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던 몽골은 이 사건을 빌미로 단교하고 침략

몽골의 1~6차 침입

침략

내 용

주요전투

1차 (1231)

• 살리타이徹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

개경 및 서북면 40여개 성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두고 철수(1232)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 결심

귀주성(박 서)

2차 (1232)

• 다루가치 살해건과 강화도 천도를 문제 삼아 살리타이가 재침략

• 처인성에서 살리타이 사살 → 몽골의 2차 침략 저지에 결정적인 기여

• 대구 부인사 대장경 소실

처인성(김윤후)

3차 (1235)

• 2차 침략 패배에 대한 보복성 공격. 탕구唐古가 침입

• 각지의 산성에 방호별감 파견하여 대비. 몽골은 전라-경상도까지 약탈

• 대장경 조판사업

죽주성(송문주)

4차 (1247)

국왕친조와 개경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구실로 아무간阿母侃이 침입

• 황해도·평안도 지역을 노략하다 황제(정종)가 사망하자 철수

5차 (1253)

• 4차 침입 때의 조건을 압박하였으나 고려가 버티자 야굴이 침입

• 충주성의 빛나는 전과도 있었지만 전국이 쑥대밭이 되고 백성 고통 극심

• 원종의 동생 안경공 창이 입조하면서 철수

충주성(김윤후)

6차 (1254)

• 몽골에 항복한 관리를 처형한 것을 빌미로 1254년 자랄타이車羅大가 침입

강화도를 압박하기 위해 철저하게 내륙을 유린, 포로20만·많은 사망자 발생

• 1258년 김준·임연이 최의 제거함. 개경환도와 태자 입조를 약속하여

1259년 무력충돌 종식

각지 백성들과

야별초군의 항전

[참고문헌]『역사의 현장을 찾아서』(송찬섭, 방송대출판부, 2005)·『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 강화 천도와 대몽 항전

※ 상기 도표 몽골의 2차~5차 침략 참조.

 

3) 고려와 원의 강화

• ※ 상기 도표 몽골의 6차 침략 참조.

• 1259년 왕위에 오른 원종은 몽골과 강화를 맺고 몽골군을 끌어들여 무신세력을 제거하였다.

• 1270년 개경으로 환도, 몽골제국은 1271년 국호를 원으로 바꾸었다.

 

4) 삼별초의 난

• 삼별초 : 초기에는 치안과 방범을 위한 사병으로, 최우가 설치한 야별초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숫자가 증가하여 좌·우별초신의군으로 확대되었고, 활동범위도 전국으로 확대

• 무신정권 붕괴, 몽골과 화의, 개경환도 등 상황의 변화로 삼별초를 해산하려하자 배중손·노영희 등이 몽골에 대한 결사항전을 명분으로 강화도를 장악했다.

• 근거지 이전 : 강화 → 진도 → 제주

•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전라·제주 등 서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여 세력을 형성,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 토벌군이 출정하였으나 삼별초에 패배함(1270).

•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의 조운漕運을 장악하여 조정의 재정에 피해를 주었다.

• 진도를 기습당한 삼별초는 큰 피해를 입고 김통정이 지휘하여 제주로 근거지를 옮겼다(1271).

• 1273년 4월 연합 토벌군에 의해 3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끝이 났다.

 

3 원 간섭기의 고려사회

1) 원의 간섭

• 원의 고려 속국화 정책

① 고려왕은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 원의 부마국이 되고, 제후국으로 격식을 낮추었다.

고려전기에 외교상 송나라에 제후국을 청했으나, 실제로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② 왕실에서 몽골어를 사용하고 복장과 머리도 몽골식으로 하였다. 몽골풍 유행.

정동행성征東行省 :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기관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고 이를 통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고 직접 통치하려고 하였으나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④ 원의 고려 영토 직접 지배

쌍성총관부 : 동북변경지대에 설치

동녕부 : 자비령 북쪽 60여 개 성을 빼앗아 설치

탐라총관부 : 삼별초를 토벌하고 제주에 설치. 일본과 남송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으나

고려의 요청으로 되돌려 주었다.

 

2) 권문세족과 농장

권문세족

① 원 간섭기의 지배세력

② 전기의 문벌귀족은 ‘가문의 지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나, 권문세족은 오랜 정변과 전쟁을

거치면서 ‘관직과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여 살아남은’ 경우(정안 임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또는

무신집권기에 관리가 되었거나 원과 결탁한 자 등 다양한 경로로 권문세족이 되었다.

도평의사사 : 도병마사를 상설기관화, 그 구성원 수도 70~80명으로 늘어났다.

④ 권문세족은 문벌귀족처럼 고위관직을 독점하고 왕실 또는 다른 권문세족과 혼인하며 원과

결탁하여 세력을 공고히 하였다.

⑤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농장)

․ 권문세족은 전후 버려진 토지, 황무지 개간, 타인의 땅을 횡탈하는 방법으로 토지를 늘렸다.

사패賜牌 : 일정 지역의 토지와 백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로서 권문세족들은 사패를 사칭

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토지를 빼앗았다.

․ 농장 경영 : 대규모 토지를 농장으로 경영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고, 농민들도 농장에 소속시켜

부역에서 제외시키는 등 노비처럼 지배하였다. → 재정과 국력 약화 초래

 

3) 백성의 처지

• 고려-원 사이에서 큰 고통을 받은 백성들

① 일본 정벌을 위해 배를 건조하고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제공해야 했다.

② 원에 바칠 많은 공물을 감당해야 했다.

③ 원이 요구한 공녀와 내시도 바쳐야 했다. 공녀 출신 중 기씨와 같이 황후자리에 오르는 등

복락을 누린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기피하는 바람에 조혼풍습이 생겼다.

④ 농민의 조세 부담은 증가했고 관리와 향리의 수탈도 더 심해졌다.

⑤ 권문세족의 토지겸병과 수탈이 심해지면서 땅을 잃고 권문세족의 농장으로 들어가는 농민이 증가

→ 인구와 생산량은 늘었지만 조세와 부역을 바치는 자작농은 계속 감소했다.

 

4) 반원 개혁운동

• 충선왕의 개혁

① 권문세족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관리의 임명을 개선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② 한림원을 사림원으로 고치고 개혁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 원과 권문세족의 대응

① 원과 권문세족은 개혁 시도를 압박하고 방해하며 세력기반을 지키고자 하였다.

② 원과 권문세족도 지나친 백성 수탈을 일부나마 시정하려 하였다.

• 공민왕의 개혁

① 자주성 회복(몽골식 복장과 머리를 버림), 권문세족의 토지 침탈과 부당한 인사 관행 시정,

덕망 있는 학자 기용.

② 반원정책(1356)

․ 친원파 축출, 원의 연호 폐지, 관청명 복구, 정동행성 폐지, 쌍성총관부 공격 철령 이북 수복

③ 2차 개혁 추진(1365)

․ 승려 신돈 기용하여 왕권 강화

․ 군사조직 재편성, 근무기간에 따라 관리 승진 → 권문세족 견제·왕권강화 목적

전민변정도감 :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농장의 백성도 양인으로 회복

․ 성균관 중건 : 신흥사대부들이 진출할 공간 마련 → 이색, 정몽주, 권근 등 신인이 관직 진출

․ 명과 수교 추진

• 개혁의 중단 : 권문세족의 반격 → 신돈을 반역 혐의로 처형(1371) → 최영 등 권문세족 재집권

→ 공민왕의 죽음으로 개혁 중단

• 신흥사대부 : 권문세족에 맞서면서 새로운 정치세력화. 친명외교 표명. 사회제도의 개혁 추진

 

4 고려 후기의 불교와 성리학의 수용

1) 불교 결사와 고려대장경

• 고려 중기의 불교

① 교종(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천태종과 조계종)이 주도

② 왕실이나 귀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대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세력을 확장

→ 무신정권에 의해 귀족가문과 연결된 사원들은 탄압을 받고 크게 위축되었다.

• 선종의 결사結社

① 보조국사 지눌의 수선사 결사

․ 정혜쌍수定慧雙修(참선과 지혜를 같이 닦음)를 실천하는 정혜결사 팔공산 거조암에서 시작

․ 수선사 : 길상사(순천 송광사)에서 지식인 중심의 결사 계속. 왕실과 최씨정권의 후원

․ 교선 대립문제 해결 → 지눌에 이르러 한국 선 사상의 전통 확립

② 백련사 :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강진에서 승려 요세가 시작. 염불수행 강조, 백성들 호응

• 대장경 판각사업

① 몽골 침략 중에 대장경 등 불교문화재 소실. 최우는 대장경 판각사업을 추진

②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 1236년부터 16년 동안 8만대장경판을 다시 판각

③ 강화도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조선 태조 때 합천 해인사로 옮김)

 

2) 문화 교류와 성리학의 수용

• 고려양 몽고풍의 유행

신부가 연지곤지 찍는 것, 수라水刺 등 왕실 용어, 여인들이 귀에 구멍을 뚫어 귀고리를 하는 것, 남녀가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장사치>, <갖바치>처럼 말끝에 치를 붙이는 언어 습관 등

• 의생활의 변화 : 문익점이 목화 전래, 면포 생산

• 농업 : 거름 이용하여 상경전 증가, 황무지 개간, 새로운 벼 품종 재배,『농상집요』재간행

•『향약구급방』간행, 화약과 화포 개발(최무선)

• 역사서 : 몽골 침략과 원 간섭기에 오랜 역사와 고유 문화전통 강조하는 역사서『삼국유사』,『제왕운기』,「동명왕편」등 저술됨.

• 성리학 : 13세기 후반 원나라에서 도입. 새로운 학문으로 신흥사대부의 정치적·사상적 토대

• 신흥 사대부

① 불교의 폐단 공격, 성리학에 입각한 제도 개혁 주장

② 대외적으로 배원·친명외교, 대내적으로 폐단이 많은 농장을 개혁하여 국가 경제기반 강화 및 민생안정 주장

과전법 시행 : 토지제도와 수취체제의 개혁

 

 

제6장 조선사회의 성립과 발전

1 조선의 건국과 국가 운영

 

1) 건국 과정

조선의 건국 세력 = 신흥사대부+신흥무장세력

신흥사대부 : 역성혁명 외에 대내적으로 농장의 폐단 때문에 농민저항이 발생했고, 지배층 내부도 갈등이 표출하여 사회개혁이 필요했다. 대외적으로는 원·명 교체기에 고려도 원의 지배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신흥사대부들은 정치세력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신흥무장세력 :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면서 성장. 이성계는 동북면 지역에서 독자적인 무력기반을 형성,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 이성계의 즉위와 천도

①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성 수창궁에서 추대형식으로 즉위

② 초기에는 궁궐에 거처하지 않고 국호도 그대로 두었으며 자신을 감록국사(권서국사)라 칭함.

③ 그 뒤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1394).

 

2) 정치 동향

• 태조

① 반대파와 고려 왕족을 몰아내고 통치 구조를 개혁

② 개국공신을 주축으로 한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통치, 권한이 더욱 강해짐

• 태종

① 왕자의 난(1차 1398, 2차 1400)을 통해 방석·방간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 도평의사사 혁파

② 육조직계제를 통한 왕권 강화, 사병 혁파

• 세종

① 유교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국가의 문물제도 정비

② 집현전 : 국가의 중요한 제도 마련, 다양한 도서 편찬사업을 주도

③ 의정부의 권한 강화, 왕권과의 균형 유지

• 문종 :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국왕, 일찍 죽는 바람에 정치적 혼란을 촉발시켰음

• 세조

① 수양대군은 계유정난(1453)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단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름

② 사육신 등 반대파의 저항이 발생하자 세조는 더욱 공신과 종친을 중용하고 친위군을 늘렸다.

→ 훈척세력의 영향력이 후대에까지 끼침. 세조는 강력한 왕권강화. 다시 육조직계제를 실시

• 성종 : 훈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 사림은 주로 경연과 언론을 담당하였다.

• 태조~성종 기간은 정치기구 정비와 양반계층의 정치적 참여가 확대되는 과정이었다.

•『경국대전』: 조선 500년의 기본법전으로 성종 대에 완성(1481)

 

3) 중앙과 지방의 행정

• 중앙 행정기구의 기본체계 : 국왕-의정부-육조-육조 속아문

명 칭

역 할

국 왕

최고 권력자로 정치와 행정에 관여하며 각 관서의 의사를 모으고 조정하는 존재

의정부

국가의 정책을 의논·합의 하는 최고 기구

• 정승들은 예문관, 홍문관, 승문원 등 중요 관청의 최고 책임자까지 겸하였다.

육 조

•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기구, 국가의 행정사무를 분담

• 중요 정책회의에 정승과 함께 참여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일컬음. 권력을 견제, 언론을 담당,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림

승정원

• 왕명을 출납하는 왕의 직속기구

의금부

• 죄인을 취조

• 지방 행정

① 일원적인 통치체제로 개편 : 향·소·부곡 폐지, 속군·속현 폐지, 군현 통폐합하여 330여 개로 정비

군현

․ 지방행정단위는 ‘도-부․목․군현’로 이루어졌고 모든 군현에는 지방관을 파견.

수령 : 행정·사법·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 수령칠사(농업진흥, 인구증식, 학교진흥, 군대정비, 공정한 부역과 세금징수, 공정한 재판, 치안확보)

향리 : 고려 때 독자적인 지위를 누렸으나 행정실무자로 지위 격하

면리

․ 군현 밑에 행정체제

․ 권농관, 면임, 이정 등을 두어 행정사무, 촌락의 자치적 사무를 담당

․ 관찰사 파견, 지방군현을 지휘·감독, 지방군현의 사정을 중앙에 보고·의견을 개진하는 업무

• 군사제도

① 중앙 : 5위, 오위도총부에서 통솔

② 지방

․ 육군 : 도 단위로 1~3개 병영 설치. 병영 밑에 거진을 두어 주변의 군현 병력 통솔

․ 수군 : 바다를 접한 도마다 1~3개 수영 설치. 수영 밑에 포진·포를 두어 통솔

․ 병영과 수영의 장 : 관찰사가 각각 1개씩 겸임하고, 나머지는 병사와 수사가 운영

진관체제 : 병·수영 단위로 독립적으로 운영하여 한 개의 주진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진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군사조직

 

2 조선 초기의 사회경제구조

 

1) 과전법과 전세제도

• 과전법 - 조선 건국세력이 고려 말 사전개혁을 단행하면서 시행한 토지 분급제도

① 주요 분급 대상 : 중앙 거주 관인과 지방 유력자

② 토지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을 지급, 경기지역에 한하여 사전 분급

③ 18등급으로 분급, 지방의 품관은 5~10결의 군전 지급, 수조율은 1/10로 제한

④ 사전을 제외한 토지는 공전으로 국가가 농민에게 직접 수조하는 토지

• 사전 개혁

① 사전주의 폐단과 세습을 막기 위해 세조 12년 과전을 물려주는 법을 없애고 현직자에게만 분급

관수관급제 : 수조권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관에서 직접 조세를 걷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

③ 과전법의 전세제도 : 토지수확량 1/10 기준으로 공·사전 관계없이 1결당 30말

• 공법貢法 실시

전분6등법 : 논밭의 비옥도에 따라 1결씩 면적의 차이를 두고 1결당 20말 거둠

연분9등법 :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조정하여 부과

③ 공법의 폐단 : 지주 토지는 실제보다 낮은 등급을 농민 토지에는 높은 등급을 매기는 폐단이 있음

 

2) 역역과 공물제도

• 역역力役

①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여 조달. 양인 장정은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

신역 : 사회적 신분에 따라 지는 특수한 역. 16~60세의 양인 남자의 군역이 대부분이다.

보법 : 정군(직접 군사 활동)과 봉족(비용을 대는 자)으로 구분. 세조 대 시행(1464)

2정을 1군호로 편성(토지 5결을 1정으로 간주), 노비도 보인에 포함

대토지와 많은 人丁을 가지고 있던 관인, 지방 세력가를 통해 군액의 증가를 꾀한 것

방군수포제 : 과중한 군역 부담으로 농민의 유망, 지방 세력가와 대지주의 반발이 일어났다.

군역 대신 베를 거두는 방법. 정병이 소수가 되어 관군은 유명무실하게 됨

요역 : 1년에 며칠씩 강제로 일하는 것으로 1년에 6일 이내의 일을 하도록 정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고, 힘없는 백성이 강제로 요역에 동원됨, 식량과 도구도 스스로 부담

• 공물제도

① 지방의 특산물이 공물대장에 한 번 등록되면 생산 여부에 관계없이 바쳤어야 했다.

방납의 폐단 : 토지세 보다 과중하였고 중간 이익을 취하는 상인 또는 하급관리 출현

③ 이이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어서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자는 제안하였다.

→ 17세기 대동법으로 전환되었다.

 

3) 신분제도

• 인구제도

① 호적 : 3년마다 작성. 기재사항(호주의 주소, 본인 지역, 성명, 나이, 사조四祖, 처의 성씨· 나이 및 사조, 자녀의 성명·나이, 노비 및 고공雇工의 성명·나이)

② 오가작통법 : 누호, 협호를 방지하고 호적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상호 감시 및 연대책임 장치

③ 호패법 : 16세 이상 남자에게 착용케 함. 조선 후기에 정착

• 양천제

양반

• 많은 땅과 노비를 소유한 계층.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이 목표. 문무관직을 의미하는

양반이 사회계층의의미로 고정됨. 양반끼리 통혼하여 지배층으로서 신분과 지위를 공고히 함.

중인

• 기술관(천문·지리·율학 등 전문지식을 갖고 관청에 근무), 아전·향리(관청에서 행정실무)

평민

• 대부분 농민이나 상인, 수공업자도 있음. 조세와 공물을 바치고, 군역·요역을 부담함

천민

• 대부분 노비(공노비·사노비), 공노비(납공노비·선상노비), 사노비(솔거노비·외거노비)

• 조선 초기에는 노비의 비율이 높았으며, 공노비보다 사노비가 더욱 어려웠다.

• 법적으로 양인이었으나 천대받는 층 : 조졸, 수능군, 목자, 봉수군, 염간

 

 

3 조선 초기 대외관계 : 사대교린체제의 형성

1) 명과의 사대관계

• 조선-명은 사대관계 : 천자-제후의 관계를 맺고, 새 왕의 즉위 때마다 천자의 승인을 받음

• 사대는 조선이 취한 자기보전을 위한 현실적 대응이었다. 명이 조선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요동정벌을 계획하거나, 4군6진 개척 때도 사대관계를 이용해 피해갈 수 있었다.

조공무역 : 토산품을 명에 바치고 회사回賜받는 형식의 실질적인 공무역으로 조공하는 것보다 회사받는 액수가 더 커서 실리외교로 평가할 수 있다.

 

2) 일본과 여진에 대한 교린정책

• 조선-일본·여진은 교린관계 : 교린은 사대와 대비되는 외교정책이다.

• 일본

① 당시 일본은 남북조 혼란시기였으며,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한반도 해안지역에 출몰하였다.

② 세종의 대마도 정벌(1419) : 이종무가 왜구 소굴을 소탕하였다.

③ 계해약조 : 삼포개항(내이포·부산포·염포), 왜관 설치, 세견선과 세사미의 규정을 체결

④ 왜와의 교역은 조공형식이었고, 일본 국왕, 대마도주 등 다원적인 통교체제를 취하였다.

⑤ 사행使行 : 경제적 교역이 주된 목적. 조선은 외교 임무 수행하였고, 일본은 교역이 더 컸다.

조선은 정부에서 파견하였으나 일본은 다양한 교역자들을 파견하였다.

• 여진

① 회유와 응징을 적절히 이용한 교린정책 구사 → 적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② 함경도 경성·경원에 무역소 설치 : 여진(모피, 약재), 조선(쌀, 옷감, 소금, 농기구 등)

③ 4군6진 개척 : 세종 대에 4군(최윤덕), 6진(김종서)을 개척하여 삼남의 농민을 이주시켜

압록강·두만강 이남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 유구, 타이, 인도네시아

① 유구(오키나와)와는 17세기까지 조공무역 관계유지

② 동남아산인 소목과 후추는 왕실과 양반 관료층이 주요 소비층이었다.

③『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태종 때 제작. 당시 조선의 세계인식을 알 수 있다.

 

4 새 왕조를 빛낸 문화와 기술

1) 한글 창제

• 한글창제는 조선 초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성과였다.

• 목적 : 우리말을 글자로 쉽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과 지배층이 백성을 교화하는 훈민정책

• 보급

①『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삼강행실도』등을 한글로 간행

② 국왕도 언문 교지를 내리거나 궁중 여성들도 내간內簡(언문편지)을 썼다.

③ 한글 창제 이후에도 양반은 한문을 관청 서리는 이두를 계속 사용하였다.

한글은 평민이나 여자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④『동국정운』이라는 음운서가 발간되었다.

 

2) 과학기술의 발전

• 천문기상학

① 천문도 제작(태조), 간의대 설치(세종)

② 이천·장영실 : 대소간의(천문 관측), 혼천의(천체운행관측), 앙부일구, 측우기, 자격루 제작

③ 정흠지·정초 :『칠정산내외편』편찬(1442). 내편-서울을 표준으로 작성, 외편-회회력으로 참고용

• 의학 :『향약집성방』(노중래),『의방유취』(김순지) → 향약의술 발달 →『동의보감』(허준)

 

3) 농업기술의 정리

• 시비법 개발(지력 향상), 파종법 개선(다모작 가능)

• 수리시설 정비 : 매년 상경전이 늘고, 수전의 비율도 높아졌다. 북부지역에도 수전 설치

• 농서보급 :『농사직설』(정초)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금양잡록』(강희맹) 개인 편찬 농서

 

 

 

제7장 조선 전기 사회변화와 외세 침략

1 훈척사림의 대립과 사화

 

1) 훈구와 사림

• 훈구파

① 건국 초기~성종 초기까지 중앙권력을 장악했던 세력, 공신으로 책봉된 자들이 주축

공 신

연 도

내 용

해 설

개국開國

1392

조선왕조 개창에 공을 세운 신하

조선시대에는 총 28회의 공신

책록이 있었다. (1392년 개국

공신~1728년 분무공신)

옆은 조선 초기 훈구파들이

책록 되었던 공신목록이다.

정사靖社

1398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신하

좌명佐命

1401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신하

정난靖難

1452

세종·문종 때의 총신 제거에 공을 세운 신하

좌익佐翼

1455

세조의 등극에 공을 세운 신하

적개敵愾

1467

이시애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운 신하

익대翊戴

1468

강순·남이의 옥사에 공을 세운 신하

좌리佐理

1471

성종의 등극에 공을 세운 신하

② 훈구파들은 왕실과 결합하여 고위직과 지방의 유향소도 장악하였다.

③ 고위관직(정치)과 대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고(경제), 방납이나 대외무역을 통하여 이익을 올렸다.

④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로는 훈구파의 독점·비리가 노골화되기도 하였다.

• 사림파

① 조선건국과정에 참여치 않은 재지사족의 후예 →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

② 지방에서 마련한 경제·사회적 기반과 성리학적 가치질서를 체현하면서 성장한 관인세력

③ 삼사와 같은 곳에서 언론을 맡아 도덕정치를 구현하며 훈척세력의 독주·비리에 비판적 입장

 

2) 사화(士禍)의 시기

• 조선 초기 4대 사화

사 화

연 도

내 용

오사화

연산 1495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 사림 처벌

자사화

연산 1504

연산군이 폐비 윤씨 죽음을 알게 되면서 발단. 훈척·사림 처벌

묘사화

중종 1519

훈구세력이 조광조 등 신진세력 제거

사사화

명종 1545

왕실 외척의 싸움(대윤·소윤) 윤임 세력 제거 와중에 사림도 처벌

① 사화는 사림세력이 중앙정치에 참여하면서 훈척세력과 빚은 정치적 산물이었다.

이는 단순히 권력투쟁만이 아닌 사회·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다툼이었다.

② 결국 사림은 훈구세력을 구축하고 선조 초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를 열었다.

• 서원書院

① 사림 성장에 중요한 역할. 지방 지식인의 사설 교육기구였던 서재書齋를 발전시킨 것

② 백운동서원 : 국내 최초의 서원(1453). 이황의 건의 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음(1550)

③ 사화를 당하면서도 사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서원과 같은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④ 조선 후기에는 서원은 남설濫設과 당쟁의 근거지로 작용하는 등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 농민의 저항

① 지배층 내부의 정쟁 격화로 왕권 약화와 기강이 문란해진 틈에 양반들의 과다한토지 겸병과

과도한 수취는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② 조선 전기 최대 농민 저항인 임꺽정의 난(1559~1562)도 이러한 상황에서 촉발된 것이다.

 

2 도성과 향촌사회

1) 도성의 운영

• 계획도시 한양

① 좌묘우사·전조후시 배치 : 종묘와 사직을 경복궁 좌우에 배치하고, 경복궁 앞에는 ‘육조거리’라고 불리는 관청가를 형성

② 도성을 축조하고 도성에 4대문과 4소문을 두었으며 동대문과 남대문을 잇는 종로거리를 건설

종로 도로 양편에는 시전市廛 형성, 시전상인 외에 좌상이나 행상도 허용하였다. 선상이 출현

하면서 도성을 중심으로 한 상품교역이 확대되었다.

③ 수천 명의 장인匠人들도 서울에 거주하며 관청에 물품을 제조·공급하였다.

• 한양의 행정체계

① 한성부 아래 5부를 두고 그 밑에 여러 개의 방을 두었다.

② 신분별 거주지 : 관료양반층(북촌), 아전(관청주변), 상인과 군인(종로·개천), 가난한 양반(남촌)

③ 도성 내의 토지는 사유가 인정되지 않고 한성부에서 분양하였다.

④ 성저십리城底十里 : 도성 밖에 해당하지만 한성부 관할 영역. 사산금표 설치, 땔감과 채소류 공급

⑤ 한양은 치안을 위해 통금제도가 시행되었고, 소방에도 주의하였다. 금화도감(1426), 수성금화사(1481)

 

2) 향촌사회의 운영

• 조선 전기 향촌사회 : 면리제로 편제, 수령권의 통제 하에 일원적으로 편입

• 향촌사회 구성원 : 재지 사족과 향리, 농민

• 사족들의 향촌사회 지배

① 사족들은 향안(사족 명단)을 작성하고 향회를 열어 사족들의 결속을 다졌다.

② 유향소를 설치하여 수령보좌, 향리감독, 풍속교화 등을 시행하였다.

③ 향약 등을 만들어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려 하였다.

• 향약鄕約

여씨향약 : 11세기 후반 송나라 여대균 형제들이 농촌자치규약으로 창안

② 중종 대에 여씨향약이 전국으로 보급. 비교적 사림의 영향력이 강한 경상-전라도에서 시행됨

③ 사림파의 향촌 안정책 : 수령의 수탈방지, 토호의 횡포 통제, 사족의 수탈 절제 → 농민 보호

④ 기묘사화 발생 후 훈구파는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을 해체하려 향약을 금지하였다.

⑤ 선조 즉위 후 사림의 중앙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향약 실시 주장이 제기되었다.

→ 각 지방의 형편에 맞게 융통성 있게 규약을 적용, 개별적으로 시행하자는 것. 이이의 해주향약

• 향약은 농촌사회가 동요하고 사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고 농촌의 질서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컸다. 결국 향약의 기본 목적은 농민에게 유교적 규범 공동체의 틀 속에 결속하여 지주-전호 사이의 대립을 무마하는데 있었다.

 

 

3 동아시아의 정세와 왜란․호란

1) 일본의 침략과 7년간의 전쟁

• 임진왜란 발발 전 상황

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戰國시대를 평정하고 전국을 통일

② 도요토미는 세력간 갈등과 교역문제를 군사적인 침략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③ 이미 일본은 삼포왜란(1510), 을묘왜변(1544) 등을 일으켜 조선에서도 긴장이 조성되었다.

④ 침략 준비 : 일본은 사전에 조선 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과 서양 총포술을 도입하여 무장하였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① 정명가도征明假道 : ‘명을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 조선이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침략

② 1592년 4월 침공 → 부산진·동래성함락 → 신립의 탄금대 전투 패배 → 선조 몽진蒙塵

③ 육지의 패배와는 달리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격파 왜군의 작전과 보급로를 무너뜨렸다.

④ 의병 활동

․ 전국 각지에서 전직 관료, 사족, 승려 등이 주도하여 의병부대를 조직

․ 의병은 지형지물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왜군의 연락망과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의병 활동

인 물

지 역

인 물

지 역

김천일·우성전·홍계남

경기도

정문부

함경도

곽재우·정인홍·김면

경상도

조헌·영규

충청도

고경명·최경희

전라도

서산대사·사명당

묘향산·금강산

• 명의 참전(1593) -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확대

①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중국도 일본의 침략에서 안전할 수 없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정유재란

․ 1593년 휴전 제의가 3년 만에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다시 침략하였다.

․ 충청도 직산에서 패한 일본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버텼다.

․ 명량해전에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듬해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이 철수하면서 종전

• 임진왜란의 후유증 - 전쟁터였던 조선의 피해가 가장 컸고, 국제정세가 바뀌게 되었다.

① 조선

․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컸다. 국토의 황폐화, 인구감소, 문화재 파괴 및 약탈, 조선인 포로 발생

․ 선조의 뒤를 이어 전란 극복에 공을 세운 광해군이 등극하고 정권을 잡은 북인세력이 독주

② 중국

․ 명 :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소진한데다가 내란으로 인해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게 됨

․ 청 : 여진족 누르하치는 만주를 통일하고 조선을 진압한 후 중원을 점령하였다.

③ 일본

․ 도요토미 사후 일본에서는 다이묘 간에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강한 전투력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쇼군의 칭호를 받고 에도막부를 연다. 일본은 이후 200여년의 평화를 유지한다.

 

2) 청의 침략

• 후금 :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정복·통합하여 후금을 세웠다(1616).

• 조선은 명-후금의 대립판도에서 신중한 중립외교정책을 폈다.

• 인조반정 : 조선은 ‘친명배청’ 정책을 펴고, 후금도 주전론자인 태종이 즉위하였다.

• 정묘호란 : 1627년 후금은 명을 치기에 앞서 조선을 침략했으나 강홍립의 중재로 강화

• 병자호란

① 후금은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거절,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칭제건원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②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농성하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곡하며 치욕적인 항복

③ 청의 침입은 왜란에 비래 기간은 짧았으나 극심한 약탈과 조공액수 증가로 큰 피해를 입었다.

 

 

4 조선의 지배 사상, 성리학

1) 성리학의 발전

• 조선 성리학은 중국의 것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조 대에 이르러 <사칠논변>,

<인심도심논쟁>등을 거치며 송대의 성리학을 뛰어 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성리학자

업 적

정도전·권근

성리학을 현실 정치에 적용. 정도전의『조선경국전』은『경국대전』의 기초가 됨

조광조

중종 초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하여 개혁정치 추진

조 식

北人. 경敬과 의義를 강조하는 실천적 학풍 → 임란 당시 의병활동 인물 중 상당수가 북인

서경덕

주기론의 선구적 존재로서 기를 이보다 앞서는 존재로 설정. 이이 등에 영향

이언적

주리론의 선구자. 조선 주자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임. 이황 등에 영향

이 황

영남학파. 도덕적 실천의 근거인 이理의 능동성 주장. 주리론의 입장.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 이

기호학파. 사회문제 개혁 등 현실 참여적. 주기론의 입장.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영남학파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 김성일, 정구 이후 허목, 허적 등으로 전수

기호학파

이이의 학우인 성혼, 제자인 김장생 이후 김집, 송시열 등으로 전수

 

2) 성리학과 문화

• 유교 이념의 보급 - 조선의 사회제도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왔다.

① 교육 :『소학』을 가르치고 삼강오륜에 의거 충·효 교육 강화. 집집마다 가묘家廟 설립

② 반상제, 부계중심 친족제, 동성불혼, 친영례, 자녀차등상속제(이전에는 균분상속),

장자봉사(이전에는 윤회봉사) 등 성리학의 영향으로 바뀐 것이다.

③ 성리학 서적 보급

․ 수신 교과서 :『소학』,『성학집요』(이이),『성학십도』(이황) 등

․ 아동용 :『동몽선습』(박세무),『격몽요결』(이이)

․ 중종 대 도입한『주자대전』은 국내 성리학에 자극.『주자서절요』(이황)는 일본에 큰 영향

․ 역사서 :『동국사략』(박상) - 개국공신을 비판하고,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을 칭송

④ 문학 :「도산십이곡」(이황),「면암정가」(송순),「관동별곡」,「사미인곡」(정철)은 가사문학의 백미

 

 

제8장 조선 후기 경제 발전과 사회 동향

1 붕당의 확대와 당쟁

1) 붕당정치의 전개

• 선조~현종 시기의 붕당 전개

사 건

시기

내 용

동서분당

선조

이조정랑 임명권을 둘러싸고 심의겸의 기성사림(서인)과 김효원의 신진사림(동인)으로 분열

남북분열

서인 정철의 치죄를 둘러싸고 동인북인(강경한 입장)과 남인(온건한 입장)으로 분열

북인집권

광해

왜란 중 의병활동. 광해군 즉위하자 북인집권. 전후 복구사업과 중립외교정책

인조반정

명분은 廢母殺弟이나 실은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합세하여 일으킨 쿠데타

남서공조

효종

인조-효종 시기에는 서인(송시열·송준길)과 남인(허적·허목·윤선도)간에 큰 갈등이 없었다.

예송논쟁

현종

1차 예송 : 효종 차자설을 주장한 서인 승리, 2차 예송 : 효종 장자설을 주장한 남인 승리

환국정치

① 숙종은 45년간 통치하면서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정계를 개편할 수 있는 왕의 고유권한)을

이용하여 붕당을 자주 교체하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권력이 교체되는 상황을 환국換局이라 한다.

② 붕당 초기에는 상대 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였으나, 환국기에는 철저히 상대 당을 부정하였다.

③ 환국정치가 가능했던 것은 국왕이 정국의 흐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④ 그런 의미에서 숙종 시기는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 양전사업, 호포제 논의 등 영·정조시대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환 국

집권

내 용

경신환국

(1680)

서인

• 남인 허적의 유악帷幄 남용사건,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남인이 대거 축출됨

노소분열 : 서인 남인 탄압을 둘러싸고 강경한 노론(송시열)과 온건한 소론(윤증)으로 분열

기사환국

(1689)

남인

• 희빈 장씨의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반대한 서인은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

• 서인 송시열 등이 사사賜死 당하고 남인은 서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로 온건한 탁남

강경한 청남으로 나누어짐

갑술환국

(1694)

서인

(소론)

•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하던 서인을 탄압하려던 남인이 오히려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함

•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 상황으로 전락하였고, 집권한 소론도 무고의 옥으로 축출됨

 

 

2) 영․정조의 왕권 강화 <교재 pp. 195~198>

영조의 탕평책

① 신임옥사(1721~1722)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과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노론 4대신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을

죽인 사건. 4년 후 경종이 죽고 영조(연잉군)가 즉위하면서 노론은 다시 재기하였다.

이인좌의 난(1728)

이인좌는 소론과 남인을 규합하여 경종 독살설을 주장하며 무장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③ 탕평 실시

․ 극렬한 당쟁으로 왕권조차 위협받자 영조는 각 당파를 고루 등용하여 왕권을 세우려 하였다.

․ 일부 탕평파는 인척관계를 통해 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가문이 벌열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균역법

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군포를 베 1필로 통일하였다.

② 재정결손은 선무군관포, 결미, 어염선세, 은여결세, 이획 등으로 충당하였다.

• 군영 정비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로 정착

•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여 정비하였다.

※ 영조는 역대 조선 군왕 중에 하천정비사업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군주이다. 영조는 1760년 준천사를 설치하여 태종이 개천(청계천)을 준설한지 약 300여 년 동안 방치된 청계천을 준설하고 제방 석축 등을 보수하였다.

• 정조의 탕평책

①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파(완론탕평)를 내치고 이들을 비판했던 계열(준론탕평)을 등용하였다.

②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며 각 정치세력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탕평책의 한계

① 정치세력의 참여 기반이 좁아 졌으며,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은 새로운 논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② 정치는 보수화되었으며 벌열·외척 등이 정치세력으로 팽창하였다.

특히 정조는 즉위년에 잠시 부활되었던 전랑권을 폐지함으로써 탕평이라는 미명 하에 대신·외척 세력이 발호하는 것을 간과하였다. 원래 전랑권은 이조의 5품관인 정랑과 6품관인 좌랑이 각 사의 당하관 인사권을 갖는 것으로 이는 대신들의 인사권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생겼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하면서 전랑권의 확보는 각 당파의 세력판도와 직결되는 사안이 되었다. 선조 때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것도 바로 이 전랑권이 원인이었다. 따라서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잘 아는 숙종-영조-정조는 당연히 전랑권을 폐지하였지만 또 다른 적폐가 발생하게 되었다.

• 정조의 정치

규장각 : 1776년 학술과 정책연구 기능, 인재 발탁(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목적으로 설치

장용영 : 대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각 군영의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 일원화, 왕권 보위의

군사적 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1785년 설치된 장용위를 발전시킨 군영

신해통공 : 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

수원 화성 축조 : 서양식 공법 이용,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⑤ 대민접촉 : 정조는 화성행차를 기회삼아 대민접촉을 시도했다. 격쟁상언을 통해 백성의 의견을 청취

• 편찬사업

① 법전류 :『속대전』,『대전통편』

② 전서류 :『동국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만기요람』

③ 지도류 :『여지도』,『해동지도』

④ 중요 기관 서적 :『탁지지』(호조),『춘관통고』(예조),『추관지』(형조)

⑤ 기타 :『일성록』(정조의 일기),『무예도보통지』(군사훈련),『동문휘고』(대청 외교서적)

 

 

2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

1) 농업의 발전과 지주전호제

• 조선 후기 농업의 발전

① 논농사 : 수리시설 확충으로 이앙법이 전국 확산되어 이모작도 가능해졌다. 농업 생산력 증가

② 밭농사 : 그루갈이(한 해에 두 번 농사짓는 일)와 견종법(고랑에 파종하는 방법) 확대

③ 상업적 농업 : 의류작물·특용작물·가내수공업 제품 판매. 면포(진주), 모시(한산), 명주(성주) 등

• 지주전호제의 변화

① 농업 생산성 증가로 농민 중에 부농이 발생하였고, 상품작물로 많은 이득을 얻기도 하였다.

기타 상업·광업·수공업으로 부를 쌓은 상민들도 지주가 되었다.

② 양반 지주-전호 농민의 기본 틀의 변화 → 농민이 예속된 존재에서 경제적 관계(소작농)로 바뀜

③ 지주제의 확대로 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소작농 또는 임노동자층으로 전락하였다.

 

2) 수공업과 광업의 발전

• 수공업의 발전

공인貢人 : 관청수공업이 쇠퇴하고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

점촌店村 : 수공업자들이 모여서 물품을 만드는 마을. 수철점(철제품), 옹점(옹기), 유기점(놋제품)

③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성장 : 도고都賈(매점매석상인), 위탁생산, 직접고용생산, 분업·협업

• 광업의 발달

① 수공업에 원료를 공급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수공업과 함께 발전

② 은광과 동광 개발 : 대내적으로 동전 유통, 대외적으로는 은이 무역결제수단

③ 관영 광업이 쇠퇴하고 잠채(사적 채굴)나 정부의 허가를 얻은 광산 개발 증가

④ 상인들은 높은 수익성으로 광산 투자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⑤ 광산운영형태 : 소유(물주)와 경영(덕대)의 분리,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분업과 협업으로 채굴

자본-임노동 관계는 18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시작. 홀동 금점(수안), 고진동 광산(갑산)

 

3) 상업의 발전

• 18세기 장시와 상업도시

① 18세기 전국에 1,000곳이 넘는 장시와 원산, 강경, 마산과 같은 상업도시 형성

② 전문상인집단 : 경강상인(쌀), 개성상인송상(인삼), 의주상인만상·동래상인내상(무역)

③ 대동법으로 인한 시장경제 발달 : 공가貢價로 주어진 쌀·베·돈이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 새로운 유통체계

① 대자본을 가진 상인에 의해 특권을 가진 공인이나 시전상인 중심의 특권적 상업체계가 붕괴

② 서울 3대 시장(종로시전, 칠패시장<남대문>, 이현시장<동대문>), 송파장시, 누원점(고양)

• 대외무역

① 중국 : 의주 중강, 중국 봉황의 책문을 중심으로 관무역과 사무역. 사행使行에서도 무역에 간여

② 일본 : 기유약조(1609)체결로 부산 초량에 있는 왜관을 통해 무역 진행

수출품 : ·종이·인삼·명주·가죽

조 선

은·비단은 중계무역

수입품 : ·구리·유황·후추

일본

수입품 : 비단·당목·약재·보석·문구

수출품 : 인삼·쌀·무명·비단

• 화폐 유통

① 상평통보 : 17세기 숙종 대에 지방장시 발달로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음

② 쌀과 베는 여전히 교환수단으로 통용, 15~6세기에는 추포麤布(거칠게 짠 베) 사용

③ 화폐는 저장수단으로 차익을 노리고 감추는 바람에 부족현상 → 불법적인 사주私鑄 발생

 

4) 자본 임노동 관계의 형성

• 임노동자층 형성 : 조창, 경강 주변의 하역 노동자, 관부의 토목공사 및 잡역 등 고용노동에 종사

모군募軍 : 종래의 징발역군이 아닌 응모하여 품삯을 받고 관청공사에 종사

화고和雇 : 근대적 의미의 고용계약.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합의하여 노동력을 매매하는 형태

쟁고爭雇 : 계약에 따라 품삯이 매겨지더라도 고용자-피고용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

→ 화고와 쟁고는 초기 임노동자들의 소극적·개인적 차원의 생존권 투쟁이다.

• 임금 : 초기 쌀, 베와 같은 현물로, 18세기에는 화폐로 지급. 수요공급의 형편에 따라 품삯조절

 

 

3 대외관계의 변화

1) 청 문화의 수용

• 반청숭명

① 조선 후기 집권세력은 청과 굴욕적인 수교를 맺은 뒤 반청숭명하며 북벌론을 주장

② 효종은 군비를 확충하였으나 그의 사후 북벌론은 서인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는 명분으로 사용

③ 숙종 대에 명 멸망 60주년을 기념하여 대보단(1705), 만동묘(1703) 건립

→ 성리학의 교조성과 존명 사대주의에서 나타난 정책 → 소중화 곧, 조선중화의식으로 발전

• 소중화론의 변화

① 실학자 : 성리학적 소중화의식을 비판하며 청나라도 중화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② 홍대용 : 저서『의산문답』에서 주장하는 지전설, 무한우주론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듯이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며 중화주의 부정. 또 역외춘추론은 화=이임을 주장

 

2) 일본에 다시 통신사를 보내다

• 임진왜란 이후 1607년 일본과 다시 통교

• 조선 통신사 : 1607~1811년간 12회 파견하여 평화 유지 및 일본문화에 영향을 끼쳤음

• 통신사들의 기록 :『해유록』(신유한),『동차록』(강흥중),『해차일기』(조엄) → 일본의 재침략 경계

• 일본으로부터 담배·고구마 도입

• 안용복은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승인 받았다(1696).

 

3) 서양과의 만남

• 서양문물의 도입

① 17세기 초반 서양이 소개되기 시작함. 정두원, 소현세자 등이 서양문물을 들여왔다.

② 시헌력 채택 : 서양식 천문학 지식을 이용한 동양식 역법

③ 천문학 : 지구구형론과 지구회전설 제시, 지리학 :「곤여만국전도」,「곤여전도」 근대적 지도 수용

수 학 :「기하원본」(유클리드 기하학), 정약용은 서양기술을 받아들여 거중기 등 토목장비 제작

• 천주교의 전래

① 조선 지식인들은 신앙보다는 학문적 호기심에서 서학서를 탐독하였다.

② 이익의 제자들 중에 서학을 수용하는 계열(성호좌파)이 생겼고 신앙으로 나아갔다. 예) 권철신

③ 천주교는 유학사상에 맞지 않았고(제사금지), 황사영백서 사건 등은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는

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천주교의 탄압으로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도 감소하게 되었다.

 

 

4 실학과 사회개혁론

1) 실학사상의 흐름

• 성리학은 조선 후기 사회변화에 대처할 유연성을 가지지 못했고, 이에 조응하는 새로운 학문

풍조를 실학이라 한다. 실학의 중심적인 인물은 유형원이며『반계수록』을 남겼다.

성호학파 [18세기 초반, 기호남인 중심, 경세치용]

이 익

『성호사설』『곽우록』 이가환·이중환·안정복 등 성호학파 형성. 정약용이 집대성

정약용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신서』. 신유사옥(1601)으로 강진 유배생활 중 저작

북학파 [18세기 중엽, 노론 낙론洛論계열, 이용후생]

홍대용

『의산문답』을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비판

박지원

『열하일기』를 통해 청의 문물 소개

박제가

『북학의』를 써서 상공업의 육성과 통상무역을 강조. 서자 출신

19세기 실학자

서유구

『임원경제지』을 편찬하여 농학을 집대성

최한기

『신기통』『농정희요』등. 기철학을 계승·발전한 ‘운화기 이론’에 자연과학적 세계관 확립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방대한 백과사전을 편찬

 

2) 사회개혁론

농업과 토지제도 개혁 : 실학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분야였다.

유형원

균전제『반계수록』에서 고대 정전제의 정신을 살려 농민에게 토지 균분을 주장

이 익

한전론『곽우록』에서 토지 소유상한선을 두어 토지 겸병을 방지하자고 주장

정약용

여전제 (공동소유-공동분배/공동농장 형태) → 정전제 (자영농 경영)로 전환

정치제도 개혁

① 이익과 정약용은 과거 횟수, 합격자를 줄이고 실용학문을 시험하여 능력자를 기용할 것을 주장

② 정약용은 농업경영에 뛰어난 농민들을 지방·중앙의 관리로 뽑아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 상업발전과 대외무역이 생산을 자극하고 선진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므로 국가가 상업발전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 북학파는 청의 문화 도입을 주장하며 화이론적 명분에서 탈피하였다.

 

3) 국학에 대한 관심

• 독자성에 대한 인식

① 조선 전기 : 조선은 중화의 여러 제후국 중 하나라는 사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② 조선 후기 : 명·청 교체 후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 강화, 북학론에서는 화이를 구분하는 소중화론을 거부했다.

• 국학분야의 발달

17세기 역사서 편찬

한백겸

『동국지리지』고대 지명을 새롭게 고증하여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제공

허 목

『동사』단군·기자·신라를 중국의 삼대에 비견, 우리나라의 자연환경·풍속·인성의 독자성 강조

홍여하

『동국통감제강』서거정의『동국통감』을 취사하여 가정용 교재로 편찬

18세기 역사서 편찬

이긍익

『연려실기술』수많은 야사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

안정복

『동사강목』조선 후기 최고의 역사서. 단군조선~고려 말기까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신경준

『강계고』상고~조선 중기까지 국경·위치·산천·섬·교린·외침 등을 기록한 역사지리서

유득공

『발해고』발해사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으로 체계화

지리지와 지도 편찬

영조 대

『여지도서』간행 전국 지리지

유형원

『동국여지지』

이중환

『택리지』인문지리서

신경준

『도로고』,『산수경』우리나라 지리와 도로 정리,『산경표』조선의 산맥 체계를 정리

정상기

『동국지도』백 리를 1척으로 정확하게 만들어서 지도 제작 수준을 한 단계 높임

未詳

『해동지도』고을별로 채색한 지도

김정호

『대동여지도』,『청구도』최고 수준의 지도

예 술

산수화

정선이 진경화법을 써서 우리나라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 <인왕재색도> <금강전도>

풍속화

김홍도와 신윤복이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서 예

김정희가 추사체를 개발하였다.

 

 

제9장 사회 모순의 심화와 농민항쟁

1 세도정치와 지방사회의 실태

1) 세도정치의 모습

• 세도정치

① 19세기는 세도정치의 시기였다.

② 세도정치는 근본적으로 17~18세기 당쟁의 결과물이었다. 당쟁을 통해 정치기반이 극도로 축소,

노론, 그 중에 외척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③ 19세기 이후 급격한 사회변동에 대하여 보수지배층은 반동적 권력구조로 정치를 재편하였다.

비변사로의 권력 집중

․ 원래 비변사는 조선 초기, 변방 수비(국방)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구였다.

․ 임진왜란 이후 조직과 기능이 강화되어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최고 권력기구로 기능

․ 반면에 의정부는 의례 정도만을 담당하거나 육조는 비변사의 결정을 집행하는 역할로 축소

⑤ 외척들은 호조, 선혜청(재정)과 훈련도감 및 각 군영(무력)도 독점하여 장기집권의 토대 구축

• 부정부패의 만연과 국가재정 빈곤

① 세도정치 기간 관직(특히, 수령직)매매 성행하였고, 매직을 한 관리(지방관)들은 투자 금액을 회수하기 위하여 백성들에 대한 탐학과 온갖 비리가 성행하였다.

② 상품화폐경제발달은 백성들의 소비생활 향상, 지배층의 사치욕구를 자극하여 국가재정 지출이

증가하여 만성적인 국가재정 빈곤을 초래하였다.

③ 세도정권은 재정확보를 위해 대동미 중앙 상납분과 환곡의 총액을 늘리고 주화의 질을 떨어 뜨려 화폐발행의 이익을 늘리는 행위도 상습적으로 늘렸다.

 

2) 지방사회의 운영실태

• 향촌사회에서 지방 사족의 영향권 약화와 신향新鄕의 등장

① 19세기 지방사회에서는 재지 사족(구향舊鄕)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신향으로 대체되었다.

신향新鄕

․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새롭게 성장한 부민층으로 수령과 결탁, 세도정권과 연결하여 구향舊 鄕을 압박하였다.

․ 구향과 신향의 대립으로 향회의 주도권마저 수령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향청이 수령 에게 종속되면서 향임, 좌수, 별감 등의 자리도 신향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③ 향리

․ 향리는 고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계층으로 조세와 관련된 분야에서 수령, 신향 등과 결탁 하여 백성들에 대한 수탈에 앞장섰다.

④ 많은 전통 사족들이 지배권을 상실하고 이들조차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갔다.

• 수탈의 강화와 삼정의 문란

① 중앙과 지방관청은 재정조달과 지배층의 개인적 착복을 위해 수탈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

② 삼정의 문란, 각종 잡세의 부과(민고의 설치), 고리대가 성행하였다.

삼정문란의 원인 : 만성적 국가재정위기를 농민수탈을 통해 모면해 보려는 정책에서 발단

• 농민의 저항

① 초기에는 정소운동呈訴運動 등 합법적인 반대운동을 하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

② 지방관들의 탄압으로 저지되자 좀 더 새롭고 적극적인 형태의 투쟁으로 전화하였다.

 

 

2 사회모순의 심화와 농민생활

1) 농민과 토지

• 19세기 농촌 사회구조의 변화

토지의 집중 : 활발한 토지매매로 소수에게 토지가 집중하고 반면 소작농이 증가하였다.

병작반수제 : 소작의 대가로 수확의 반을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수취방식. 지주-작인 간 계급대립 발생

③ 도조제 : 지대를 정액으로 수취하는 방식. 조선 후기에는 병작제에서 도조제로 이행하는 경향

• 항조투쟁

① 병작제이든 도조제이든 지대가 높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항조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상업적 농업의 발전도 지대 수탈에 대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③ 지방사회에서 지대 수탈의 근간이었던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농민들의 항쟁이 거세어졌다.

 

2) 농민과 삼정

조선 후기 삼정의 현황

전정 : 본래의 전세에 대동법, 결작, 삼수미까지도 모두 토지에 부과. 토지 부과세 40여 항목

군정 : 양인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군포 징수 행정. 양인 농민 수 감소로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 등 폐단 발생

환곡

․ 기능 : 흉년에 농민 구휼과 군량미의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꾸는 기능이나 조선 후기 조세화.

․ 환곡의 증가 : 환곡은 원곡의 절반만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나 모두 내어줌으로써 농민의 부담 증가. 관청이 고리대 형태로 농민을 수탈하는 것으로 당시 폐단이 가장 심각

• 삼정의 징수형태

① 전결세 : 쌀이나 면포에서 화폐 징수로 변화. 결가結價를 수령·서리들이 농간하여 농민수탈

도결

․ 전결세, 군역 부족분, 환곡 부족분도 토지세로 일괄 징수하는 것

․ 도결은 수납이 편리, 삼정·잡역세의 토지세화로 중간 수탈을 없애고 금납화하여 제도적으로는 발전된 형태이었다.

․ 그러나 결가의 상승은 농민에게 전담되었고, 농민항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조세 수취의 편중 :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민 지주나 부농층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조세 부담 에서 벗어났고, 이들이 내야할 조세까지도 빈농층이 부담하게 되었다.

 

3) 농민층 분화와 농민조직

• 부농과 빈농으로 분화 - 농업생산력 증대와 화폐경제 발달이 원인

① 부농 : 생산력 증대로 부를 늘려나가면서 기존 사족 지배에 저항하며 지배층으로 상승 시도,

② 빈농 : 토지로부터 유리, 각종 조세 부담 → 계급적 이익 자각하며 조직화 → 촌계, 두레

․ 촌계 : 자연촌을 단위로 한 자치조직. 사족 중심의 동계에서 이탈하여 만든 농민 나름대로의 조직

․ 두레 : 이앙법의 발전으로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자작농, 소작농

․ 사회 세력화 : 조선 후기에는 촌계·두레 등이 사회세력화 하여 잘못된 부세운영에 적극적으로 저항

 

 

3 농민항쟁의 시대

1) 항쟁이 일어나기까지

• 다양한 투쟁 형태 - 19세기는 민란의 시대

① 소극적 저항 : 유망流亡(농촌에서 이탈), 경제적 파탄과 조세면탈을 위해 자신의 기반 포기

② 간접적 저항 : 와언訛言과 괘서掛書

․ 와언 : 수령과 이서의 탐학을 규탄하거나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내용을 말로써 퍼뜨리는 것

․ 괘서 : 글로써 여론을 선동하는 것. 1801년 8월 경상도 하동과 창원의 장시사건이 대표적

․ 와언과 괘서는 공중이 모이는 장시를 중심으로 발생. 농민 직접 저항은 아니지만 사회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담당

직접적 저항 : 정소, 격쟁, 횃불시위 → 집단적 저항으로 발전 평안도농민전쟁(1811), 농민항쟁(1862)

 

2) 평안도 농민전쟁

• 조선 후기 평안도의 상황

① 청과의 대외무역 등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발전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중앙에서 소외

② 구성원 : 지역차별정책으로 사족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임노동자층도 농촌에서 몰락하여 유망한 자들로 지배층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① 다양한 계급적 구성 : 홍경래(양반), 우군칙(서얼), 이희저(역노), 김사용(빈농), 김창시(양반)

② 광산노동자 모집을 구실로 유민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봉기를 준비

③ 박천 송림전투(남진군), 곽산 사송야 전투(북진군)에서 관군에 패배, 1812년 4월 정주성 함락으로 종결

④ 의의 : 뚜렷한 정치적 목적하에 면밀한 계획과 장기간의 준비를 거쳐 전개된 조직적인 무장봉기

⑤ 한계 : 부호층에 가해진 수탈을 막는 것이 목적. 농민층을 흡수할 개혁안이 없었다.

그러나 농민층이 봉기의 원동력이 되었고, 마지막 정주성 농성에서도 농민이 적극적으로 참여

 

3) 1862년 농민항쟁

• 1862년 경상도 단성의 농민봉기로 촉발 - 사족과 고을민이 환곡의 폐단에 항의하며 관아 공격

진주농민항쟁

① 원인 : 진주 목牧의 도결과 우병영의 통환결정 등의 환곡 폐단이 원인

② 진행 : 수곡집회(62.2.6), 수청가집회(62.2.13)을 거쳐 덕산장시에서 항쟁시작(62.2.14)

농민들은 목과 병영의 서리를 처벌하고, 문서 소각, 양반과 부호를 공격 → 반봉건 항쟁

• 농민항쟁의 확산 - 1862년 3~5월 삼남 일대로 확산

① 특히 상주, 개령, 선산, 함평, 익산, 공주 등지에서는 대규모의 항쟁 발생

② 수령 축출, 악질 향리 공격, 고을 무력 장악, 수령-이서와 결탁한 양반과 부호도 공격

• 조정의 대책 - 회유와 탄압의 양면정책 구사

① 회유 : 안핵사 등을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수령을 문책하여 파면하기도 하였다.

② 탄압 : 봉기가 전국으로 퍼지자 위협을 느낀 조정은 탄압을 강화하였다.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설치 : 삼정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조세개혁을 목적으로 설치. 그러나 조세제도의 골격은 그대로 두고 환곡을 토지세로 바꾸는 미봉책에 그침. 지배층의 반대로 무산됨

농민항쟁의 재발 : 소빈농을 중심으로 제주도, 함흥(함경), 광주(경기), 신녕, 연일, 창원, 남해(경상) 등지에서 발생 → 조세제도 시정, 통치체제 비판을 골자로 새로운 조세제도를 요구하는 반봉건운동

 

4 서민생활과 문화

1) 서민문화의 발생

• 조선 후기는 서민문화의 시대

① 계층 : 평민과 양반 신분이지만 관직에서 배제되었던 계층까지 포함

② 배경 : 서민의식성장(신분제 동요, 잦은 사회저항 등), 사회경제발달로 서민들도 부를 축적,

양반의 허위의식에 저항하는 능력향상

• 통속소설 :『홍길동전』(허균),『사씨남정기』,『구운몽』(김만중) 등

국문소설 : 18세기 이후 등장.『장화홍련전』,『콩쥐팥쥐전』,『심청전』,『흥부전』,『춘향전』

→ 애정문제와 권선징악이 주요 소재. 특히 사회문제를 다룬『춘향전』이 인기.

기타『임경업전』,『임진록』등 군담소설도 인기가 많았다.

• 노래, 굿, 놀이 - 탈춤, 인형극, 판소리 등으로 발전한 민중에게 가장 친근한 문화예술

․ 탈춤 : 봉산탈춤(황해), 하회탈춤(안동), 산대놀이(양주), 오광대(통영) : 양반사회를 풍자하고 조롱

․ 판소리 : 19세기 전후 신재효에 의해 12마당 정리 <춘향가·박타령·심청가·가루지기타령 등>

 

2) 다양한 민간신앙

• 민간신앙 발생원인

① 조선 유교는 지배계급의 전유물로서, 민중은 민간신앙 등을 통해 성리학적 세계관 부정하였다.

② 민간신앙은 기존의 가치질서가 붕괴하는 시대적 상황과 사회 변동분위기에 맞물렸다.

• 다양한 민간신앙 발생 - 후천개벽사상, 예언사상, 미륵신앙

① 예언사상의 대표적인『정감록』은 조선의 왕조를 부정하는 가장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② 미륵신앙은 석가의 시대가 끝나고 미륵이 세상을 구제한다는 신앙. 민중의 현실인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의의 : 민간신앙은 민중들에게 새 세상을 열기 위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고양하였다.

한계 : 사회 모순에 신비적인 해결방안을 내놓아 민중이 사회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 개인·구복신앙의 증가

① 무속신앙은 관 주도의 군현행사가 개인이 주도하는 마을 단위의 종교행사로 분화하였다.

② 여성들의 참여 :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들의 소극적 도피처로 활용

③ 천주교의 확산 : 주자학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빈틈으로 전파. 다양한 계층이 참가

 

 

제3부 근대사회

 

 

제10장 개항과 근대변혁운동

1 문호개방과 사회경제적 변화

1) 구미 열강의 군사침략과 쇄국정책

• 19세기 중엽 국내외상황

① 국내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길어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증가

② 국외 : 구미 열강이 중국을 침범하면서 대외적 위기의식 고조, 이양선이 출몰하여 뱃길측량·

정세 탐지·직접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 대원군의 쇄국정책 - 외국 선박과 통상금지, 해안수비 강화, 서학(천주교) 탄압

병인양요 : 1866년 1월 천주교 금지령과 병인박해 → 1866년 9월 프랑스 극동함대 강화도 점령

→ 프랑스 신부 살해자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요구 →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격퇴

→ 프랑스는 강화도의 행궁과 외규장각에 방화하고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② 제너럴셔먼호 사건 :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관민의 공격으로 침몰한 사건(1866.7)

→ 미국은 조선 정부에 배상금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 조선 연안을 탐사

③ 남연군묘 도굴사건 : 미국인 젠킨스와 독일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1868.4)

신미양요 : 1871년 1월 미 태평양 함대 로저스가 강화도 침공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점령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부딪쳤다. → 대원군은 종로와 전국에 척화비 건립

 

2) 대원군의 내정개혁

• 대원군의 개혁

① 정치 : 비변사 폐지·의정부 부활, 남인과 북인을 등용, 삼군부 설치(국방력 강화)

② 경제 : 호포법 실시(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사창제社倉制 - 고리대로 변질된 환정을 정부가 출연하여 중간 수탈을 억제, 매점행위 금지, 관세 징수 강화.

③ 기타 : 서원정리. 1871년 지방 토호세력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던 전국 서원을 사액서원 가운데

47개만을 남겨 놓고 모두 철폐하였다.

• 대원군 내정개혁의 효과와 한계

① 긍정적 효과 : 이전 시기에 비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만들었다.

② 부정적 효과

․ 양반의 반발 : 서원 철폐와 호포법 실시

․ 백성의 반발 : 경복궁 중건(원납전·사대문 통행세 징수, 부역과 물자 강제 징발, 당백전 유통)

③ 한계 : 대원군의 개혁은 봉건사회의 모순의 구조적 해결보다는 왕권을 회복하여 왕조국가를

유지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3) 강화도조약과 문호개방

• 강화도 조약 체결(1876)

① 대원군 실각 후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 북학파를 계승한 인사들이 문호개방에 적극적이었다.

②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단행(1860), 대만침공(1874) 후 조선을 강제 개방하는 준비에 착수

③ 운요오호 사건(1875.5)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1876.2.27)

④ 강화도 조약의 의의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불평등 조약이었다.

․ 일본인들은 개항장에서 치외법권, 면세특권을 누렸고, 부산·인천·원산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 기타 국가와의 조약체결

조미수호통상조약 :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청의 중계로 미국과 체결한 통상조약(1882.5)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 조선은 청의 속국 확인, 치외법권 확대, 내지內地통상권 허용(1882.9)

③ 기타 통상조약 체결 : 영국·독일(1883), 러시아(1884), 프랑스·오스트리아(1886)

• 의의

① 조선은 아무 준비없이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② 조선은 구미 자본주의 열강에 입은 경제적 손실을 만화하기 위한 청과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4) 서양문물의 유입과 무역구조의 변화

• 서양문물의 유입 : 제일 먼저 들어온 전신 등은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개항 : 조선사회의 대외무역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882년 내륙통상 허용으로 1890년 무렵

부터 청·일 상인은 국내 객주나 농촌 소상인까지 장악해 나갔다.

미면교환체제 - 수입품(면제품)↔수출품(곡물과 금, 소가죽 등)

수입품 : 약 70%가 면제품으로서, 청과 일본은 영국제 면제품을 비싸게 팔아 곡물과 금을 싼 값에 사가는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남겼다. 면제품은 1887~82년 수입총액의 80%, 1893년 조선 전체 수요의 25%를 차지함으로써, 국내 면포 수공업자는 물론 가내 부업으로 면포를 생산하던 농민들도 몰락하였다.

수출품 : 곡물이 70% 안팎으로 산업화 단계에 있는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조선은 곡가가 상 승하여 민중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방곡령을 실시했으나 일본 측의 방해로 실패했다.

③ 의의 : 미면교환체제는 원료와 자본제 상품을 교환하는 식민지 무역과 비슷했다.

④ 일본은 조선의 해관세 특권을 차지(1882년 제일은행), 일본 돈 유통으로 화폐제도 문란, 농촌에서 일본 상인들이 고리대를 놓는 지경까지 침투했다.

 

2 개화파의 개혁운동

1) 개항정국과 임오군인봉기

• 조선의 개화정책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 개화정책의 중심기관으로 1880년 설치

② 군사제도 개혁 :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개편, 신식군대인 교련병대(별기군)설치

③ 서구 문물 시찰 : 일본에 수신사(1876), 신사유람단(1881), 청에 영선사(1881) 파견

④ 개화파는 고종의 개화정책에 참여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개화파의 활동 :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을 습득, 외국서적 소개,『한성순보』를 간행

•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① 유생을 중심으로 ‘문호개방=조선파멸’이라며 반대, 최익현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개항반대

②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소개한『조선책략』이 유포되면서 위정척사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 예안 유생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등 상소운동이 일어났으나 정부는 위정척사파를 탄압

임오군인봉기(임오군란)

① 원인 : 개화정책에 반발한 구식군인들의 봉기(1882.6). 신식군대와 차별대우, 체불이 1차원인

② 반일투쟁으로 발전한 군인 봉기

․ 군인들은 부정부패한 민씨 일당을 공격하였고, 일본인 교관 살해, 일본공사관 습격함.

․ 일본 쌀 수출로 쌀값이 폭등하여 생활고에 처한 서울 시민, 왕십리·이태원의 빈민도 가담

③ 청의 개입으로 1882년 8월 구식군인들을 학살, 대원군 납치 등으로 봉기 진압하고 민씨 정권 복귀

‘제물포 조약’과 ‘수호조규속약’ 체결(조선-일본), 조청상민수륙장정(조선-청) → 청은 조선을 속국화

→ 청의 영향으로 개화정책이 주춤해졌고, 이때 청·일간 체결한 톈진조약은 1894년 농민전쟁

당시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근거가 되었다.

 

2) 갑신정변

• 원인 : 민씨 정권이 일본을 경계하고 급진개화파를 밀어내며 보수화하자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

• 배경

① 개화파는 민씨정권과 달리 당오전 발행 반대, 외국 차관 도입으로 국가재정 충원하려함

② 안남문제로 청-프랑스 전쟁(1881)으로 일시 조선 내정에 대한 청의 간섭 약화

③ 김옥균 등 독립개화당은 이를 기회로 정변을 준비하였고, 일본은 지원을 약속

• 우정국 사건(1884.10.17) : 개화파는 자체 무장역과 일본군을 동원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 장악

• 개화파의 14개조 개혁정강

① 정치 : 청에 대한 사대외교 폐지, 입헌군주제적 정치구조 도입

② 경제 : 지조법 개정, 재정기관 일원화, 혜상공국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발전 도모

③ 사회 : 인민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으로 정치참여의 기회 확충

• 삼일천하

① 청이 반격으로 3일 만에 끝남(10.19)

② 일본의 지원 철회와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상인과 빈민들도 강한 적대감으로 개화파를 공격

• 갑신정변의 한계와 의의

① 부르주아적 사회계층의 미성숙과 외세(일본)에만 의존한 조급성으로 민중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위로부터 조선사회를 낡은 봉건체제에서 근대사회로 발전시키려한 최초의 시도였다.

 

3 1894년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1) 농민전쟁의 배경

• 원인과 배경

① 개항 뒤에도 삼정문란과 농민에 대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② 빈농, 영세상인, 수공업자는 몰락한 반면 지주·부농·대상인은 더욱 부를 쌓았고, 지방관과

이서배들의 탐학도 기승을 부렸다.

③ 1890~1893년 반봉건항쟁 : 소농·빈농층이 주도하여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나 전국적 수탈에 맞설 공동투쟁을 벌일 이념과 전국적 조직이 마련되지 못했다.

동학

① 농민항쟁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 - 동학조직은 농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

② 교조신원운동 : 1892~93년 간 상소운동.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 → 척왜척양斥倭斥洋 구호 등장

고부 농민봉기

․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고부봉기의 직접적 도화선으로 작용 : 만석보 수세 강제 징수(1892)

․ 전봉준과 농민군은 고부관아 점령, 조세장부 등 문서소각, 죄수 방면, 양곡 몰수 및 반환,

만석보를 부수었다.(1894.1.10)

․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 : 봉기를 조사하면서 책임을 동학군에게 돌리고 수탈과 학살 자행(3.2)

 

2) 제1차 농민전쟁

보국안민輔國安民

①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이용태의 만행에 전라도 무장에서 재봉기(1894.3.20)

② 구호 : 보국안민輔國安民

③ 농민군은 백산에 진을 치고 호암창의소 조직(전봉준-창의대장, 손화중·김개남-부관령)

황토현 전투 : 전라감사 김문현이 파견한 감영군을 야간 기습하여 승리

황룡촌 전투 : 전주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유인하여 격멸

→ 이 두 전투의 승리로 전국으로 항쟁의 불길이 퍼져 나갔다.

• 전주화약과 청일전쟁

①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 아산만 상륙(5.5), 톈진조약을 구실로 일본도 인천에 상륙(5.6)

② 전주화약 :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중앙에 보고·시행하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는 내용(5.8)

③ 개혁실시 : 농민군은 각 군에 도소都所설치 후 폐정개혁을 요구하며 개혁을 실시·감독

④ 청일전쟁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아산해전 시작으로 청일전쟁 발발(6.21) → 정세 급변

⑤ 집강소 설치 : ‘관민상화’원칙에 따라 치안을 유지하는 데 우선했으나 농민군의 주력이 하층

민과 빈농으로 바뀌면서 급진적인 개혁으로 선회

 

3) 제2차 농민전쟁

• 친일 갑오정권의 등장

① 일본은 평양성 전투(8.17)에서 청에 승리하자 갑오정권을 내세워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② 갑오정권은 일본군에게 농민군의 토벌을 요청(9.16)

• 농민군의 패배와 체포

① 김개남의 재봉기 결의, 손화중과 최경선의 방어 대비, 전봉준의 설득으로 남북접 연하부대 형성

우금치 전투 : 수십 회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패퇴(94.11.14)

③ 공주와 논산 금구에서 거듭 패배한 농민군은 흩어졌고, 일본군·관군·민보군은 이들을 철저히 탄압

④ 김개남(12.1)은 전주에서, 전봉준(12.2), 손화중(95.1.6)은 1895년 3월 말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 갑오농민전쟁의 한계와 의의

① 한계

․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과 친일 개화파, 양반 유생층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 봉건체제를 뛰어넘지 못한 지도부의 정치사상적 한계와 농민군들의 공조가 부재한 것이 실패 원인

② 의의

․ 갑오개혁의 추진력으로 작용하였고, 대한제국기의 농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19세기 3대 농민전쟁<태평천국혁명·세포이 농민항쟁>의 하나로서 20세기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을 올린 근대민족운동의 선구자였다.

 

4) 갑오개혁

• 갑신정변 이후 개화정책의 추진

① 갑신정변 이후에도 정부는 정권유지 차원에서 개혁정책을 수행

② 온건 개화파와 신진 개화관료가 실무를 담당

③ 근대 산업기술 도입(전환국·기기창), 농업기술개발(농무목축시험장), 서구문물교육(육영공원)

→ 개화정책은 봉건적 수탈에 시달리는 농민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었다.

• 제1차 갑오개혁

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갑오정권이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추진한 개혁(1894.6.2.1)

궁내부 설치(왕실의 정치개입 배제 목적)하고 육조에 외부와 농상을 더해 8아문으로 개편

→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의도

③ 과거제 폐지 및 새로운 관리임용법 마련, 신분차별과 노비제도를 폐지하여 신분제 철폐

→ 양반의 반발로 관리임용에서만 신분철폐로 축소

④ 재정기관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 은본위 화폐제도 실시, 도량형 통일

⑤ 의의 : 갑신정변 정강,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상당히 반영하였으나, 토지제도 개혁안이 없어

농민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는 개혁이었다.

• 제2차 갑오개혁

① 일본의 평양전투 승리로 개혁내용이 변질되었다. 일본은 조선보호국화정책 적극 추진.

② 군국기무처 폐지.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구성, 일본은 정부에 일본인 고문관을 배치

홍범 14조 : 청의 간섭과 왕실의 정치개입을 배제하기 위해 일본이 고종에게 발표하게 함

④ 제2차 갑오개혁은 입헌군주제적 권력구조로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 하여 탁상공론에 그쳤다.

• 갑오개혁 이후

을미사변 : 삼국간섭과 고종의 반발로 일본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반일적 태도를 취하던 민왕후(명성왕후)를 살해한 사건

단발령과 의병운동 : 을미사변을 덮으려던 김홍집 내각의 조치였으나 전국적으로 의병 거병

아관파천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1896.2), 갑오정권은 붕괴하고 개혁 중단.

• 갑오개혁의 한계와 의의

① 의의 :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지주층 중심의 부르주아 개혁

② 한계 : 외세(일본)의존한 자주성이 없는 매판권력으로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유생 및 지방 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좌초하고 말았다.

 

 

4 근대의 변혁사상

1) 위정척사사상

• 연원 : 숭명반청·존왕양이의 화이론을 계승, 의리와 도덕성 강조 유교를 正으로 청을 오랑캐로 규정

• 주장 : 모든 외세(청·일본·구미)를 배격, 서학(서구문물)은 물론 동학(민중)까지도 배격

• 발전

① 1866년 병인양요 이후 급격히 고양. 이항로(경기)·기정진(호남)이 주전론을 주장

② 반개항·반개화운동의 이념적 지주 : 개항 이후 최익현, 유인석 등 재야 봉건유생층의 호응

• 위정척사사상의 의의와 한계

① 의의 : 조선 봉건체제를 강화하고 외세의 침략을 배타적으로 저지하려는 반침략적 입장

② 한계 : 봉건지배층의 계급적 이익을 앞세웠음. 외세의 침탈을 봉건체제의 위기에 결부시켜 인식

 

2) 개화사상

• 연원 : 북학파의 중상주의사상을 적극 계승

• 주장 : 조선을 개방하여 세계의 추세에 대응하는 정치적 혁신과 서구문물도입으로 부국강병을 꾀하는 부르주아 개혁을 추진

• 발전

① 1850년대 박규수와 오경석, 유흥기 등이 중요한 역할

② 1870년대 청년 지식인들이 발전시킴 (김옥균·박영효·박영교·홍영식·서광범·김윤식 등)

③ 개화파의 분열 - 외세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의 방법에 차이가 발생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

인 물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주 장

점진적 개혁

민씨 일족과 타협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구의 과학기술문물을 받아들여 개혁 추진 주장

급진적 개혁

민씨 일족 타도· 청과의 사대외교 종식 주장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고, 서구의 사상, 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 주장

특 징

청의 양무론(중체서용)과 비슷

청의 변법자강운동과 비슷

• 개화운동의 의의와 한계

① 의의 : 부르주아 개혁을 지향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

② 한계 :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깨닫지 못하였고, 반봉건 개혁에서도 민중을 배제하였다.

 

3) 동학사상

• 연원 : 1860년 4월 경주지방의 몰락한 양반출신 최제우가 창시

• 실천적 주장 - 운동으로서

반봉건 :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인내천 사상

→ 봉건적 신분제 부정은 신분제에서 벗어나려던 민중의 염원을 반영한 것

반외세 : 보국保國-반외세, 안민安民-반봉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 교의적 주장 - 종교로서

① 궁극적으로 후천개벽시대에 모든 인간이 신선이 되는 지상천국이 온다는 교의

→ 동학의 지상천국과 같은 현세주의적 특징으로 농민들에게 급속히 전파·수용

② 무위이화無爲而化 : 개인적 기도와 종교적 수양 강조.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폭력적 방법을

제어하는 동학의 보수적 측면. 동학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관념체계.

※ 3대 변혁사상 비교

위정척사사상

개화사상

동학사상

봉건

친봉건

반(半)봉건

반(反)봉건

외세

반외세

친외세

반외세

정체政體

봉건 조선•왕권 강화

입헌군주제

신분제 철폐•만민평등사회

사상적 기반

숭명배청•존왕양이 주자학

북학파의 중상주의적 실학

인내천

계승

반일의병활동(대한제국기까지)

민족개조론•실력양성론•친일

반제국주의투쟁, 독립투쟁

 

 

제11장 대한제국기 열강의 침탈과 개혁운동

1 구미 열강의 세력균형과 이권 침탈

1) 러시아의 남진과 세력균형

• 러시아의 조선 진출

① 러시아는 1850년대 크림전쟁의 패배로 극동 아시아로 남하정책을 추진

․ 블라디보스토크 설치 : 베이징조약(1860) 주선으로 청으로부터 획득. 남하정책의 전진기지

․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1890년대)

② 조선에서의 일시적인 세력균형 형성

․ 삼국간섭 뒤 러시아는 만주 진출에 주력

․ 일본은 삼국간섭 뒤 불리한 정세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 독립’을 러시아와 공동담보로 하여

‘조선 내정’을 공동 감독하는 것을 목표로 러시아와 외교적 타협 모색.

․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교관·재정고문 파견, 차관제공계획, 한러은행 설치와 절영도 조차 요구

③ 러시아의 군사·경제적 침략에 영국·미국·일본이 가장 크게 반발했다.

․ 영국 : 거문도 점령으로 재정고문 브라운의 원상회복을 주장하며 무력시위

․ 미국 : 러시아가 만주의 관세장벽을 강화하려 하자 만주를 통한 대륙진출하려던 미국이 반발

․ 일본 : 대한해협을 봉쇄하며 러시아에 대항. 로젠-니시협정(1898.4)으로 러-일 간 긴장관계 해소

• 일본의 군사력과 동맹강화

①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력 강화, 특히 의확단 사건으로 일본은 위상 강화함

② 영·미·일 간 제국주의 군사동맹 - 러시아의 남하정책 견제가 목적

제1차 영일동맹(1902.1), 1900년 친일반러 정책으로 선회한 미국도 일본의 조선 차지를 인정

 

2) 구미 열강의 이권 침탈

• 대한제국 시기의 이권 침탈

① 최혜국 조항은 구미 열강이 이권을 침탈하는 중요한 구실로서 상당히 불평등한 조항이었다.

② 이권 침탈은 지하자원교통·통신에 집중되었고, 자본수출의 본격화가 시작되었다.

③ 나약한 황실은 열강에 경제적 이권을 넘겨주고 그들의 보호를 받아 나라를 지키려고 했다.

미국(금광채굴권·철도·전기·전차·수도)과 러시아(광산개발권·삼림채벌권)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⑤ 구미 열강의 이권 침탈은 조선 산업의 발전을 가로 막았고,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였다.

• 조선에서 일본의 철도 부설 -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

① 일본은 미국의 주선으로 경부철도 부설권을 사들였고, 미국인 소유의 경인철도부설권도 사들였다.

② 일본은 철도를 놓으면서 조선인을 노역에 강제 동원하였고, 철도부지 명목으로 땅을 빼앗았다.

• 무역의 증가 : 대 조선무역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일본은 조선에서 원료를 값싸게 수입하고 기계제 상품을 조선에 파는 무역구조를 굳혔다.

 

2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

1) 대한제국의 성립 <교재 pp. 279~281>

• 대한제국 성립 전사前史

을미사변(1895) → 친일내각의 단발령 시행 → 위정척사운동·을미의병/삼국간섭 → 아관파천(1896) → 친일내각붕괴·을미의병중단 → 조선에 일시적 세력균형 → 덕수궁 환궁(1897) → 대한제국 수립

• 연호 제정(1897.8),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 및 대한제국 수립 선포(1897.10.12)

 

2) 광무개혁

• 목표 : 구본신참舊本新參을 원칙으로 전제군주권을 강화하여 위로부터 근대국민국가를 이루는 것

• 개혁의 주된 내용 - 국방력 강화와 재정, 상공업 육성

① 국방력 강화 : 원수부설치(1899), 중앙 - 친위대와 시위대 신설, 지방 - 진위대 대폭 증강

② 재정

․ 탁지부와 농상공부에서 관리하는 광산, 홍삼, 철도 수입을 황제가 직접 장악

․ 황실은 상납금을 받는 대가로 대상인과 기업에 영업 독점권 부여

․ 전환국(조폐기관)도 황실직속기구로 편입, 궁내부 내장원 수입으로 군대양성, 공장·회사·학교 등을 건립, 황실행사 등에 사용

③ 근대적 토지소유권 확립 : 조세 수입 확충을 목적으로 1898년 양지아문 설치하야 양전지계 사업을 실시, 토지 소유주에게 근대적 토지증서인 지계地契발급

④ 과학기술과 상공업 육성 : 각종 기술학교 설립, 민간회사 설립 지원, 재판소·광혜원·전보사 설립,

철도부설 준비(서북 철도국과 철도원), 금본위제 화폐제도 시도.

• 한계 : 위로부터의 보수적 근대개혁인데다가, 구미 열강의 이권침탈과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 근대적 기업 설립 노력

① 김덕창 직조공장(1902), 종로직조사(1899), 종로직뉴회사, 조선유기상회 등 정미업, 양조업,

성냥 제조업 분야에도 등장

② 자본투자 : 한성은행(1899), 대한천일은행(1899), 대한철로주식회사(1899) 등

③ 근대적 유통체계나 금융제도 등이 갖추어지지 않아 이들 기업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기업들은 황실 또는 외래자본과 결탁하여 농민과 소상인을 수탈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 개항장과 객주조합(황실에 상납조건으로 특권보장), 보부상과 시전상인들도 상무사나 황국중앙 총상회와 같은 단체를 만들어 정부와 결탁 → 반면 소규모 수공업자, 행상, 소규모 상인은 몰락

 

3 독립협회의 운동과 민중의 저항

1) 독립협회 운동

• 설립 : 1896년 7월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자 개화파는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 결성

• 활동 : 자주독립과 근대개혁을 지향하며 독립문과 독립관 건축,『독립신문』발행

• 사상 : 지주 중심의 서구식 근대화(경제),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치(정치)의 부르주아 개혁 지향

• 초기 광무정권에 협조, 1897년 러시아의 내정간섭 이후 친미·친일 인물 중심으로 광무정권과 대립

• 만민공동회

① 독립협회의 공개 정치토론회 : 러시아의 침략 규탄과 자주독립을 주장

② 독립협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을 경계하면서도 영·미·일의 이권침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에 만민공동회는 독일이나 일본의 경제침탈을 비판하며 대중 시위를 벌여 독립협회와는

인식을 달리 하였다.

• 기타 독립협회는 자주국방의 중요성 부인, 하의원 설치 반대하며 반관반민半官半民 의회 설치운동

등 스스로 반관반민反官反民적·특권적 속성을 드러내었다. 이후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헌의6조를 제출하였으나 공화정을 획책한다는 모함에 걸려 해체되고 말았다.

• 한계 : 독립협회의 부르주아적 개혁은 민중을 불신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여 자주독립과 근대적 개혁에 이르지 못하였다.

 

2) 민중의 반봉건․반침략 항쟁

• 항조·항세운동(1898) : 고율 소작료 인하와 부당한 세금 징수에 항의하는 투쟁이 전국에서 발생

• 농민무장대 - 동학당, 영학당 등 정부의 탄압을 피해 계 조직이나 기독교 등 종교조직을 이용 활동

가가지의 농민 무장집단은 1900년 전후로 사라지면서 활빈당에 흡수되었다.

• 노동투쟁 - 외래자본이 침투한 광산, 철도부설지, 개항장 등에서 초보적 노동자의 반침략투쟁 발생

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 투쟁으로 시작하였으나 반제국주의·반침략운동으로 발전

• 활빈당의 활동

① 대표적 반봉건·반침략 민중항쟁으로 각 지역별로 독자적 활동을 하면서 연합하기도 하였다.

② 대한사민논설13조 : 토지균등분배, 방곡령 실시, 열강에 경제이권 공여 반대, 외국상인 활동 금지 요구 등을 천명하였다.

③ 활빈당은 봉건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민중의 입장에서 활동하였다.

④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부는 의병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4 근대의 풍경

1) 근대화의 상징, ‘도깨비불’

• 근대화의 상징 전등불

① 전등 :1887년 3월 경복궁 안 건천궁에서 점등식 - 전기는 근대의 상징

② 전차 : 미국인 콜브란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1898)는 서울 내 전등·전화·전차사업 주관하며 1898년에 서대문-청량리 구간에 부설한 전차는 서구 근대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③ 전화 :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보급. 1902년 서울-인천 구간 공중용 전화 설치

• 전기는 철도와 함께 개항 이후 근대의 상징이었고, 전통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꾼 근대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제국주의 자본이 도사리고 있었다. 예컨대 철도는 전통적

수로운송체계를 붕괴시켰고, 철도 주변의 새로운 상권과 마을은 제국주의 침투 경로가 되었다.

 

2) ‘마마귀신’과 ‘호열자’를 내쫓은 근대 의학

• 갑오개혁(1894)

① 근대의학이 국가적 차원에서 도입됨. 위생국과 경무국 신설하여 국가차원의 환경위생사업 추진

② 제중원을 대신할 근대적 병원 설립과 의학교를 세워 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③ 근대적 보건위생에 어긋나는 조혼금지, 가정폭력금지, 내시 금지,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

• 대한제국기

① 근대적 보건위생과 의료체계를 정립하려는 노력을 더욱 강화

② 위생국(보건의료행정) 설치, 위생경찰제(보건의료 단속업무), 전염병관리, 대민의료기관 설치, 의학교 설립 추진

③ 보건위생과 근대 의학 도입은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의 일환 → 건강한 국민으로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1904년 러일전쟁 뒤 무산되었다.

 

3) 개신교는 문명의 척도

• 개신교의 전파와 문명적 이미지 각인

① 개신교는 1882년 조미통상조약 이후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② 개신교는 우상숭배금지·정치적불간섭 원칙을 지키며 세계의 문명 부국은 모두 개신교를 믿는

나라라는 것과 특히 개신교는 미국의 종교이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다.

③ 서구적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지향했던 이들은 개신교의 수용을 문명개화로 인식하였다.

• 한말 개신교의 역할

① 국권 침탈 속에서 국가와 지배층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민간인들이 의지할 피신처 기능

②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개신교를 통해 미국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 개신교에 대한 한국 이미지의 왜곡

① “게으름이 한국인의 민족성”이라는 등의 백인 우월주의에 입각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생산한

그릇된 정보는 미국의 대한정책 및 미국인들이 한국(한국인)을 비우호적으로 인식하는데 기여했다.

 

 

제12장 을사조약의 체결과 국권회복운동

1 일제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화 정책

1) 을사조약의 체결과 민족의 분노

• 을사조약 체결 전후의 사건

연 도

사 건

내 용

1904.2

러일전쟁 발발

조선 전역을 군사적으로 이용. 조선 주둔 일본군을 조선주차군으로 개명.

함경도 지역 군정 실시(4월), ‘군사경찰훈령’으로 조선의 치안권 강탈(7월)

1904.8

제1차 한일협약

고문정치 -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각 부에 두어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

1904.9.5

포츠머스조약

러일전쟁 마무리. 러시아가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조치에 불간섭한다는 내용

1905.7.29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는 것을 승인

1905.8.12

제2차 영일동맹

영국은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아준 대가조선의 보호국화 승인

1905.8.18

일진회 결성

일제는 송병준, 이용구 등을 이용하여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선전

1905.11.17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조선의 외교권 박탈. 통감정치 시작(초대 통감 이등박문)

1907.6

헤이그밀사 파견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철을 파견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

고종은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강제로 폐위 당함

1908.3

스티븐슨 처단

전명운과 장인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처단

1909.10.26

이등박문 처단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총살

 

2) 통감정치하의 식민지화정책

정치 -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체결

내정內政 장악 : 통감은 법령 제정, 중요 행정 처분, 고위 관리 임명 등을 갖는다.

차관정치 실시 : 통감은 각 부의 차관에 일본인 관리를 임명, 고문정치를 폐지하고 차관정치 시작

군사·외교·사회

① 군사 : 대한제국 군대 해산(1907.8) → 일부 해산 군인들은 의병활동에 합류

② 사회 : ‘보안법’, ‘신문지법’ 등으로 언론 통제

③ 외교 : 독도를 일본 시마네 현에 편입(1905), 간도협약(간도를 청에 넘기고 철도부설권 획득 1909)

경제

식민지화 정책

연 도

내 용

화폐정리사업

1905-1909

일본의 화폐만 사용토록 하여 조선의 화폐·금융체계를 일본경제에 예속시킴

한성은행 등 조선금융기관 몰락하고 제일은행 등 일본 금융기관이 금융권 장악

호구조사

토지기초조사

1906

1907

징세제도를 개선한다는 구실로 재정정리사업 추진. 세금 부과 대상을 늘리고,

징세가 가능한 모든 곳에 세금 부과(가옥세, 연초세, 주세 등) → 소상인 몰락

황무지개간규정

국유미간지이용법

토지가옥증명규칙

역둔토·궁방전 편입

1906

1907

1908

1908

농업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갖가지 악법을 만들어 토지를 약탈

황실소유지를 강탈하여 황실의 경제적 기반까지 약화시킴

육지면 재배와

양잠 강요

일본은 싼 원료를 공급받고, 조선에는 면제품을 수출하는 식민지 무역화

일본에서 대량생산된 면제품의 수입으로 조선 면포수공업은 몰락하였다.

교통·운수체계 장악

특히, 신작로 건설

1907

통감부철도 관리국 설치 경부선(1905), 마산선(1905.5), 경의선(1906.4) 관장

남포, 군산, 목포 등지에 항만시설 마련 → 약탈·공출 물품 국외 반출 목적

내륙의 주요도시 연결 → 대륙 침략의 통로확보 및 경제적 수탈을 손쉽게 할 목적

① 재정정리사업 결과 1910년 재정 규모는 1906년의 3배로 증가 →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사용

② 일제는 조선에서 약탈한 토지를 일본인 농업 이민자나 동양척식주식회사(1908)에 분배하였다.

③ 일제는 조선의 면포수공업뿐만 아니라 근대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정미업, 담배제조업,

성냥업에도 침투하여 이들 기업을 몰락시켰다.

• 통감부 식민지화 정책 정리

① 조선은 일본 독점자본을 위한 식량·원료 공급지, 상품소비지로 정착하였다.

② 조선의 민족자본과 농촌사회는 급격히 몰락하여 1911년 조선인 자본금은 일본인의 1/15에

지나지 않았고, 땅을 빼앗긴 60만 여명의 농민이 1910년 직전까지 만주, 연해주로 떠났다.

 

2 실력양성을 위한 문화계몽운동

1)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

계몽운동단체

연 도

내 용

보 안 회

1904

송수만·심상진. 황무지개간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려던 일제의 계획을 좌절시켰음

헌정연구회

1905

윤효정·이준. 입헌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 정치집회금지로 해산

대한자강회

1906.4

윤효정·장지연. 활동을 ‘국법의 범위’ 이내로 제한. 교육개발과 식산흥업

1907년 7월 정미7조약을 반대하고 시민선동 혐의로 해산

대한 협회

1906.11

대한자강회 계승한 친일적 단체. 이토를 조선의 행복을 증진한 인물로 극찬

분야별 계몽활동

교육 분야

학회

사립학교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호서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기호학회 등

사립학교는 청년·학생들에게 서양근대학문을 가르치고 애국심을 드높였다.

언론·출판 분야

신문·잡지

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만세보』), 잡지(『소년』)

『동국사략』,『대한신지지』,『국어문법』,『을지문덕전』,『월남망국사』등

경제 분야

국채보상운동

1907년2월. 일제는 이 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하여 중단되었다.

① 계몽 운동가들은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실력양성을 위해 주로 교육과 식산흥업에 주력했다.

② 계몽운동의 한계와 의의

․ 의의 : 대중으로 하여금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 한계 : 일제의 침략자체를 부인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으로 계몽 운동가들은 사회진화론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 일본(강대국)이

조선(약소국)을 보호국화한 것을 조선이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긍정하고

실력양성을 주장했다. 오히려 의병을 폭도라고 규정하였다.

 

2) 신민회와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신민회(1907) - 국권회복을 목표로 비밀리에 결성하여 합법적인 활동

① 강령 :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 동지규합과 역량축적,

식산흥업으로 재정과 부력 증진, 교육기관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

② 구성 : 윤치호(회장), 안창호(부회장), 유학자(장지연·신채호·박은식), 청년장교(이동휘·이갑·유갑렬), 자산가(이종호·이승훈) 외 이회영, 이동녕 등 다양한 출신 참여

특히 서북출신 기독교인과 신지식인이 주축

③ 대성학교(교육), 자기회사(상공업), 태극서관(출판) 설립

④ 한일병합 이후 신민회는 실력양성론(안창호)이 거부되고 독립전쟁론을 채택

⑤ 105인사건 : 1911년 일제가 애국지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인해 신민회 해체

⑥ 의의 : 독립전쟁론과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은 1920년대 독립군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 반일의병전쟁

1) 평민 의병장의 등장과 민중의 참여

• 1905년 전후의 반일의병 활동

연 도

내 용

1905.04

활빈당 등 농민무장대 주요 활동지(경기·강원·충청·경북 일대)에서 의병 봉기

재야 유생들도 의병 조직. 원용팔·박정수(원주), 정운경(단양), 이문호(지평), 구만서(광주)

1906.03

전 참판 민종식(충남 정산)이 1000명의 의병을 조직, 홍주성 함락하였으나 일본군에 패전

1906.06

최익현(전북 태인)의 의병은 정부군과 마주치자 동족살육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해산, 최익현도 체포

1906

1906년말 까지 60여 군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났고, 서북부지방까지 확산되었다.

※ 척사파 유생이 가지는 사상적 한계로 재야 유생이 주도하는 의병은 초기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전국의 유생과 민중을 자극하여 항일의병전쟁의 불길을 당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1905년 의병의 구성

① 척사파가 주도했던 을미의병과는 크게 달랐다.

② 평민출신 의병장, 여러 계층에서 참여(소상인·노동자·학생 등), 주민지원으로 연속적인 투쟁

③ 신돌석·정순현·이하현 등이 농민무장집단과 결합하여 맹렬한 반일항전을 하였다.

 

2) 확산되는 의병전쟁

• 항일의병의 새로운 전기 - 해산 군인의 의병 참여

① 군대 해산(1907.8)을 계기로 해산 군인 들이 항일의병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② 해산 군인 참여로 의병투쟁의 변화

․ 의병투쟁이 전국과 전 계층으로 확산되었고 전술도 변화

․ 해산 군인이 가져온 신식 무기는 의병의 무장력을 강화

․ 유격전은 장기전을 가능케 했고, 지역민은 이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였다.

• 의병부대의 인적구성의 민중적 성격 강화

① 다양한 출신 : 김수민(농민군), 연기우(강화진위대), 홍범도(포수), 안규홍(머슴) 외 기타 관노,

헌변보조원, 혁신 유생 등 다양

② 군대해산 뒤 양반출신 의병장은 25%, 나머지는 농민, 노동자, 해산 군인, 포수 등 평민출신

• 13도연합의병부대 결성과 실패

① 경기·충청 등에서 활동하던 유생 의병장들이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결성(1907.12)

② 1908년 1월 서울진공계획이 일본의 선공으로 실패함

③ 원인 : 사상적 한계(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서 의병 해산)와 전술적 한계(전면전 선택)

④ 일본군은 ‘초토화작전’을 벌여 지역 민중과 의병을 격리한 후 의병을 고립시켜 토벌하였다.

 

3) 호남의병과 ‘남한대토벌’

•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이 치열했던 이유

① 호남은 일본의 경제 침탈이 집중되어 타 지역보다도 민족·계급적 모순이 극심했다.

② 의병부대의 결속력이 강했고, 의병 내에서 봉건적 신분차별도 거의 없었다.

• 호남의병의 구성과 역할

① 구성 : 기삼연·고광순(장성, 1907.9), 전해산·신남일·안규홍(보성, 1908.5)

② 역할

․ 일본군을 한 지역에 묶어 둠으로써 다른 지역의 의병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

․ 한일병합을 서두르려는 일제의 발목을 잡았다. → 일본은 대규모 토벌을 단행

• 남한대토벌과 이후의 의병활동

① 일본군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의병장 103명, 의병 4138명 체포 또는 학살

② 의병항쟁은 차츰 중부 이북 지방과 경북과 강원 경계의 산악지대로 이전하며 퇴조하기 시작

③ 한일병합 뒤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고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군 운동으로 계승

• 의의 : 한말의병전쟁은 갑오농민전쟁의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계승한 민중적 민족주의 운동이다.

 

4 사회진화론과 정체 변혁론

1)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제국주의 인식

• 사회진화론

① 구미 열강 제국주의의 침략사상으로서 생존경쟁, 유기체론, 진화의 개념으로 구성

② 사회진화론의 논리 - “힘이 곧 정의이다”

․ 문명 강대국은 비문명 소국을 지배하는 것은 강자의 권리이자 역사의 진보이다.

․ 열등한 국가(인종)는 생존을 위해 서구화하여야 한다. 곧 서구화는 문명과 진보의 척도이다.

• 조선에 사회진화론 소개

① 유길준, 윤치호와 같은 해외 유학 출신자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② 1890년대『독립신문』도 백인 우월주의를 인정했다.

③ 중국인 양계초의 글들이 소개되면서 사회진화론은 국내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 사회진화론의 폐해

제국주의 논리를 체화하여 현실을 인식했을 때 약자에게 남는 것은 패배주의이다. 때문에 이들은 의병을 ‘폭도’로 비난하고 자신들의 활동을 ‘국법 이내’로 제한하며 일제의 침략현실에 순응해 나갔다.

 

2) ‘우민관(愚民觀)’과 입헌군주론

• 개화파는 인민이 무지하면 함께 논의할 수 없다는 민중을 철저히 불신하는 우민관에 의거, 국민 주의에 입각한 공화제보다는 민의 참정권을 제한한 입헌군주제를 선호했다.

• 개화파, 독립협회파, 계몽지식인 등이 주장하는 바는 모두 우민관과 입헌군주론에 일치하였다.

• 이들은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군주권을 제한하고 대의제를 통해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 기득권을

보장받고자 한 것이었으나 한일병합으로 입헌군제론은 사라졌다.

 

 

제13장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1 일제의 무단통치와 식민지 수탈체제

1) 조선총독부와 무단통치

기구 및 제도

임 무

조선총독부

총독

입법·사법·행정·군권을 통수한 식민통치의 최고 실력자

정무총감

총독부의 행정사무를 총지휘

행정·억압기구

정무·내무·탁지·농상공(행정), 경찰기구, 재판소(억압)

경제수탈기구

조선은행, 철도국, 전매국, 임시토지조사국

교육·선전기관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찬양·선전하기 위하여 설치

중추원

총독부의 형식적 자문기관. 황족·친일파·대한제국 시기 친일관료를 임명

헌병경찰제

경무총감부

총독의 직속 경찰기구. 헌병이 경찰지휘와 일반 경찰업무까지 관장

직 제

헌병사령관(경무총감), 헌병대장(각 도 경찰부장), 헌병장교(경시), 헌병하사(경부),

헌병보조원·순사보는 조선인 채용, 소방대, 재향군인회 등을 경찰보조업무 활용

임 무

검사사무대리·범죄즉결처분·민사소송조종·삼림감시·징세사무협조·검열사업·보건업무

범죄즉결례(1910), 조선태형령(1910), 경찰범처벌규칙(1912) → 조선인에게 태형 부과

행정단위

개편

1910.9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령’실시하여 1914년 317군을 220군으로 개편. 군 단위의

전통적 기초행정단위를 면 단위로 바꾸어 조선인의 저항과 자치능력을 억제

 

2) 토지․산림 등 자원 수탈과 회사령

•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① 일본 독점자본의 원시적 축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일본 식민지 경제정책의 일환

② 식민지 경영 재원의 안정적 조달 : 1900~1918년 간 조세총액이 3배 이상 증가

• 토지조사사업의 경과

① 임시토지조사국 설치(1910.9), 토지조사령 공포

․ 1918년 말까지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조사 실시

․ 경작 농민들의 도지권 등 전통적인 부분적 소유권이 완전히 배제됨

․ 황실소유지, 국유지, 문중소유지, 미개간지, 개간지, 간석지 등을 신고주 부재를 핑계로

국유지 또는 유력 인사의 민유지로 편입 → 소유권 분쟁 촉발

② 1930년대까지 총독부 소유 토지는 전 국토의 40% → 동척과 일본인에게 헐값에 매각

③ 토지의 상품화 : 일제는 토지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여 매매와 저당 등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

④ 식민지 지주제 : 조선 쌀의 안정된 수탈과 농촌사회 통제를 목적으로 조선인 지주 보호, 육성

• 회사령 실시(1910.12)

① 강점 초기 일제는 조선인 회사의 설립과 경영을 억제하여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저지

② 회사설립 시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하고, 총독은 임의로 회사를 해산·폐쇄시킬 수 있었다.

③ 1910년대 취약했던 일본 중소자본은 상품수입, 유통부문, 농산물가공업, 방직업 등에 진출

④ 1919년 민족별 자본 구성 : 조선인 기업(11.6%), 일본인 기업(78.4%) 조일합동기업(8.9%)

• 산림령(1911) - 전체 산림 60%를 국유화, 조선어업령 - 조선의 황금어장을 일본인에게 양도

광산개발권 - 1913년 현재 전체 광산의 75%가 일본인 소유로 이전

 

3) 민중의 경제적 몰락

•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정책 결과로 조선인은 급속히 몰락하여 갔다.

① 농촌 계급분화 : 자작농 및 자소작농이 소작농으로 농업 계층의 계급분화가 급속히 진행

② 고율 소작료 : 5할이던 소작료에 2~3할을 증액하고 소작료로 거둔 쌀은 일본에 수출

③ 농민의 생활 : 연명을 위해 고리대 의존 또는 날품팔이, 화전, 만주나 연해주로 이전

• 1910년대 조선인 노동자

① 초기 조선인 노동자는 날품을 파는 자유노동자로서 광산, 부두, 공사장에서 일했다.

② 일본 자본의 근대적 공장 설립으로 조선인 노동자 증가 : 1만 2180명(1911)→3만8000명(1919)

③ 이들은 민족적 차별대우, 장시간 노동, 영악한 노동조건, 저임금 등에 시달렸다.

 

2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소리

1) 나라 안의 비밀결사 운동

• 일제는 한일병합 후에도 대토벌(1910), 안악사건(1910), 105인사건(1911) 등으로 독립세력 탄압

→ 비밀결사를 통한 항일운동으로 발전

1. 유림계열 비밀결사 - 일제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려는 복벽주의 단체

대한독립의군부

1913

임병찬이 각지 유생들로 조직. 총독부와 일본에 조선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

하는 각서를 보내고 의병전쟁 계획. 임병찬의 체포로 무위로 끝남

민단조합

1918

이동하·이은영 등이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

2. 공화주의 비밀결사 - 청년, 학생, 중소상공인, 기독교계 인사가 주도

대한광복단

1915

박상진 등이 풍기 등을 중심으로 결성. 1915년 대한광복회로 확대개편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군자금 모금, 만주 독립운동단체와 연락. 1918년 해체

송죽형제회

1913

평양의 숭의 여학교 교사와 학생. 여성 계몽운동·군자금 모금

조선직산장려계

1915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사와 학생. 경제 자립의 취지로 조직

• 기층 민중들의 반일투쟁

① 농민 : 토지조사사업방해② 소상인 : 시장세, 연초세, 주세 등에 대한 항세투쟁

③ 노동자 : 1918년부터 파업투쟁의 폭발적인 증가 (1917년 연간 10건 대비 연간 50회 발생)

• 투쟁 성격의 전화 -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1910년대 민중투쟁의 기본성격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경제투쟁이었다.

② 일제의 침략에서 비롯된 생존권 문제는 민족적 성격을 띠면서 1910년대 말 정치투쟁으로 발전

 

2) 나라 밖에서의 독립운동

지역

단체

연도

내 용

중국

신민회

경학사(1911)·부민단(1912), 신흥강습소(1919) 설립 독립군 간부양성

신한청년단

1918

상하이에서 이상설·박은식이 신규식의 동제사와 연합하여 결성

연해주

권업회

1911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조직. 이동휘·신채호 참여

대한광복군정부

1914

권업회가 만든 독립군 조직. 이상설·이동휘 정·부통령

미주

대한인국민회

1909

하와이 등지의 노동 이민을 중심으로 안창호·박용만 등이 조직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조직하여 서북간도·연해주의 독립운동 지원

조선국민군단

1911

박용만 창설. 하와이에서 청·장년을 대상으로 군사훈련 실시

• 임시정부 구성 전개

① 만주 :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이 ‘대동단결선언’. 국민주권과 공화주의 임시정부 주장(1917)

② 미주 : 박용만을 중심으로 ‘공화주의에 입각한 무형 정부’건설을 주장

 

3 3․1독립운동

1) 조선독립만세!

• 3·1독립운동 당시 국내외정세

① 사회주의 혁명 : 1917년 레닌은 식민지·반식민지 민족을 대상으로 한 ‘민족자결의 원칙’선언

② 파리강화회의 :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처리 원칙으로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제시

③ 독립청원운동

․ 신한청년단 :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작성 신규식을 대표로 파견

․ 이승만 :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 발송. 골자는 미국 또는 국제연맹이 조선을 위임통치

④ 2·8독립선언 : 도쿄의 조선 YMCA강당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주직한 일본 유학생이 독립선언식

• 민족대표와 3·1독립운동

① 민족대표는 2월 28일 모임에서 만세시위의 폭력 사태를 우려하여 독자적 독립선언식 결의

③ 길선주 등 4인을 제외한 29인은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후 일제에 자수하여 구금됨

 

2) 전국을 뒤덮은 만세시위

• 시위 주체의 변화 : 도시의 청년·종교인 중심에서 지방 군 단위까지 농민·노동자 대중으로

• 시위조직 결성 : ‘국민회(서울)’, ‘결심대(강경)’, ‘광민회(개성)’ 등 자발적인 시위조직이 시위를 지속적으로 인도

• 노동자들의 시위 : 겸이포제철소, 동아연초공장, 철도국 직공, 황해 제철소, 평양 인쇄소 등

일제의 탄압으로 주춤해진 시위의 불길을 다시 지피는 역할을 하였다.

• 민중의 폭력 진출(시위)의 의의

① 일제의 폭압적 지배를 폭로

소수 명망가들의 탁상공론에 불과한 외세의존적 외교독립론을 의지하지 않고, 민중들이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자주적인 독립사상의 발로였다.

• 일제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장기화하자 무력탄압을 시작했다.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 해외 시위 : 만세시위는 서북간도, 상하이, 연해주 미주 지역 등지에서도 이어졌다.

• 엄청난 희생 : 일제의 통계도 학살(7500명), 부상(1만6천명), 검거(4만6천명)를 기록하고 있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기본원인 : 민족 모순과 10여년에 걸친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반일의식과 추상적인 애국심에

고무된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광범한 계층의 민중의 참여를 가능하게 했다.

• 투쟁의 물리적 발전 : 비폭력평화시위의 한계를 깨닫고 폭력투쟁으로 발전

• 3·1민족대표의 과오

① 3·1운동을 준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릇된 정세판단으로 스스로 역할을 제한하였다.

② 이들은 전승국 식민지에는 민족자결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 3·1운동의 교훈

①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해방을 견인할 수 없다는 인식 확산

②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부의 필요성 등장 →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

③ 제1차 세계대전 뒤 전승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민족운동. 중국의 5·4운동 등에 영향

 

 

4 일제의 동화정책과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

1) 식민 교육, ‘충량한 신민’ 만들기

• 일제의 동화정책

① 의도 : 심리적으로 일본인화하고 일본에 대한 융화 친선의 사상, 감정을 함양

② 목적 : 식민지배 합리화하고 궁극적으로 조선민족을 말살

③ 수단 : 식민지 교육정책을 매개수단으로 사용

동화정책

연 도

내 용

조선교육령(제1차)

1911.11

식민교육을 통해 식민정책을 교화. 보통교육·실업교육 강조

사립학교규칙

서당규칙

1911

1915

민족교육의 거점이었던 사립학교와 서당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규정하고 탄압. 사립학교 수자 감소. 1908년(3000개)→1919년(700개)

조선교육령(제2차)

1922.04

3·1운동 뒤 민립대학운동이 일어나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일시동인一視

同仁의 차별철폐를 구호로 적당히 근대교육 보급·확대하여 조선인의 저 항감과 교육열을 억제시킴

조선교육령(제3차)

1938.04

전시동원체제. 황국신민화교육 -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

본국의 교과과정을 동일하게 교육, 일본어 전용專用, 황국신민서사

조선교육령(제4차)

1943.04

학생의 군사·노동요원화 : 수업연한단축, 중등학교 매주 3시간 교련

결전교육조치요강

1945.03

전시교육령. 초등학교 초등과 제외한 학교수업 1년간 정지.

생산에 학생 총동원, 학도대 편성 - 방공과 방위 임무에 투입

식민교육의 최종 종착점 : 교육 포기와 학교의 군대화

④ 일제는 교육을 통한 동화정책을 주장했지만, 실제는 조선인을 식민지 노예로 길들이는데 있었다.

 

2) 식민사관의 생산과 선전

• 일본의 한국사 왜곡 : 일본의 조선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술책으로, 이는 조선을 식민화

하기 이전부터 착수하여 식민화 이후에는 보다 조직적으로 역사왜곡을 강화했다.

중추원

1915

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서 한국사 편찬을 시작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

총독부 산하 기관.『조선사대계』(5권)편찬

조선사편수회

1925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개편한 것.『조선사』(35권)편찬(1931~37)

식민사관 : 한국사의 특성을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일선동조론으로 규정

타율성론

조선인은 주체성이 부족하여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에 종속된 역사라는 주장

단군은 신화로 치부 제외. 한강 이북-중국 식민지(한사군), 이남-일본 식민지(임나일본부)

정체성론

사회경제학자들의 주장. 조선은 너무 낙후하여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고 열강의 식민지가 될 수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 일제의 조선지배는 침략이 아니라는 논리.

당파성론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당쟁이라 하고 그 부정적인 면을 강조.

일선동조론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하나라는 주장. 일본 건국신화의 스사노 오노미코토素戔嗚尊가 신라를

지배했다는 주장 → 한일병합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정당화. 내선일체론 → 강제징용·강제징병

 

3) 조선 민족성의 왜곡

• 일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선인의 민족성을 못난이로 왜곡했다.

• 일제는 조선의 문화 전반에 관련한 자료를 수집·조사·출판하여 조선의 역사와 민족성을 왜곡

하는데 이를 이용했다.『조선의 군중과 사회』(1926),『조선인의 사상과 성격』(1926) 등

→ 일제가 민족성 왜곡을 통해 노린 것은 조선인에게 독립불능론’을 각인시키는 데 있었다.

• 민족성 왜곡을 비판 없이 수용할 경우의 문제점

① 식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패배주의’,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② 일제 침략을 조선민족의 탓으로 돌리고「민족개조론」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광수 이다.

 

 

제14장 일제의 문화정치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

1 문화정치와 식민지 자본주의의 이식

1) 기만적인 문화통치

•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① 3·1운동을 강경 진압한 일제는 1919년 9월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문화정치 시행

② 3·1운동 후 일제의 통치 방침

․ 조선의 독립과 자치는 허용하지 않는다.․ 조선에 지방자치를 허용한다.

․ 장래 조선인을 제국의원을 시킨다.․ 재외 조선인에 대한 보호․단속 방침을 마련한다.

문명적 행정을 한다.

③ 정책 : 조선인의 문화창달과 민력증진, 보통경찰제로의 전환, 총독부에 조선인 관리 등용,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일부 허용, 조선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 간행

• 문화정치는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은폐하는 기만적인 술책

① 경찰 강화 : 경찰관서, 경찰 수가 1920년 4~5배 증가. 1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제도 확립

② 치안유지법(1925) : 사상통제와 민족해방운동 탄압이 목적. 특고형사, 사복형사, 밀정을 편성·운용

③『조선』『동아』등 신문과 사회단체 허용 : 조선인 일부 상층 자산가 계층 개량화 목적.

출판물은 ‘사전검열’과 ‘허가제’로 통제.

④ 지방자치

․ 지방제도 개정, 부·면협의회와 도평의회 설치, 부와 전국 24개 면을 지정하여 선거제 도입

․ 선거권 제한(5원 이상 납세자), 도평의회 등은 실권 없는 자문기관 불과, 일본인 다수 거주지역

․ 결국 지방자치는 조선인에게 마치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처럼 선전하기 위한 생색용 정책

 

2) 민족분열정책과 친일파 양성

• 민족분열정책

①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은 조선민족운동을 와해시키면서 친일파를 양성하기 위한 기만 책동

② 3·1운동 후 대지주·자본가·지식인 등을 ‘실력양성론’으로 회유하여 개량주의·친일파로 편입

• 친일파 및 친일단체 육성 - 일제는 1920년대에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친일파를 육성했다.

교풍회·국민협회·대동동지회

친일여론 조성을 목적으로 조직

대동사문회·유도진흥회

유생들의 친일단체

대정친목회·유민회

대지주·예속자본가들의 친목단체

조선인소작회상조회

농민운동 약화 목적

• 친일파의 역할

친일여론 조성, 독립운동가 적발과 정보수집, 민족운동을 파괴할 테러활동, 대외선전,

해외유학생 감시, 독립운동가의 설득과 회유 등

 

3) 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 자본주의의 이식

• 산미증식계획

①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수출이 막히고, 쌀 부족 현상으로 폭동이 일어나자 이 모두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던 정책 중 하나이다.

토지 및 농사개량수리시설을 확충하여 미곡 생산을 늘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 토지개량 : 일본인 대농장 회사가 미간지나 간석지를 불하받아 조선 농민을 동원하여 개간

․ 수리시설 :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농민을 강제로 가입시켜 저수지 등을 만들어 정비하는 방식

․ 농사개량 : 개량 농구나 금비(金肥 화학비료) 사용을 강요

③ 농민의 몰락

․ 토지개량 지원자금은 일본인 지주, 조선인 대지주에게 집중, 수리조합도 지주 중심으로 운영

․ 농민 → 수리조합비, 농기구, 금비 구입비 부담 증가 → 중소 지주, 자작농, 자소작농 몰락

④ 지목변경사업과 일본품종 벼의 개량 → 전통 농법 파괴 및 쌀 단작(일회 경작) 문제 발생

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식량공급은 성과를 거둔 반면, 조선은 식량부족을 겪어야 했고 일제는

만주로부터 ‘만주속’이라는 잡곡을 들여와 조선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일본

조선

잡곡 (만주속)

만주

• 식민지 자본주의

① 회사령 철폐(1920.4)

․ 총독부는 일본의 과잉자본을 해소할 목적으로 회사령을 철폐, 일본자본의 조선 유입.

․ 이때 일본에서는 주로 중소자본(제사, 면방직, 식료품)이 들어왔다.

․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양조업, 정미업, 요업, 고무신, 양말, 메리야스)에도 다소영향을 미쳤다.

② 일본상품의 관세 철폐(1920.8)

․ 일본은 조선으로 상품수출을 확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감소된 수출문제를 만회하였다.

․ 1920년대 일본에서 유입된 직물·의류·기계 등으로 조선의 공업기반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③ 조선은행령 개정(1928)

․ 은행 자본금을 200만 원 이상의 주식회사로 제한, 조선인 은행이 일본 자본에 흡수되었다.

• 1920년대 일본자본의 유입은 식민지 조선에 왜곡된 형태의 자본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반면 조선인 자본가들의 예속성과 매판성이 심화되었고, 일본자본은 조선 산업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4) 비탈길에 선 식민지 민중

• 노동자 : 1920년대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하면서도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도 안 되었다.

• 농 민 : 산미증식계획, 5할이 넘는 소작료, 각종 세금 부담으로 전체 농가의 75%가 호당 평균 65원의 농가부채를 떠안았다.

 

2 민족주의운동의 분화와 전개

1) 민족개량주의 운동

• 민족개량주의

① 3·1운동 좌절 후 일부 민족 부르주아지 상층과 지식인 등은 ‘즉시 독립’에 회의를 품고,

일제와의 타협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② 대표적인 인물 : 이광수, 최남선, 최린(지식·종교인), 김성수 일가의『동아일보』계열(지주·자본가)

③「민족개조론」

․ 이광수가『개벽』(1922.5)에 기고한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한 글

․ 내용 :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조선민족의 타락한 민족성’의 탓으로 돌리고,

조선 민족에게 당면 과제는 독립이 아니라 타락한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라고 주장

• 실력양성론

① 독립운동을 일본이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하고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길러 자치를 하자는 주장. (이광수,「민족적 경륜」,『동아일보』1924.1)

② 물산장려와 민립대학설립 : 1920년 대 초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한 운동

․ 물산장려운동 : 민족 산업과 생산력이 취약한 관계로 물가만 올라 상인과 자본가만 이익을 얻었음

․ 민립대학설립 : 다수 민중을 위한 대중교육이 더 시급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음

③ 민족주의자와 민족개량주의자의 동참과 결별

․ 운동 초기 민족주의자도 참여 → 일본상품 배척과 민족적 자각을 일으키는 반일운동이 목적

․ 민족개량주의자들에 의해 친일파(박영효·유선중 등)가 참여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이탈함

• 민족개량주의 운동의 평가

① 일제 : 반일 성향의 사회운동을 통제하여 문화운동에 묶어두려는 속셈

② 민족개량주의자 :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에서 일제의 문화정치에 타협을 선택

 

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운동

• 임시정부의 수립 - 3·1운동 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수립에 대한 인식확산에 기인

① 대한국민회의(노령 1919.2),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4.13), 한성정부(국내 4.23)

또한 신한민국정부처럼 정부의 실체가 없는 ‘삐라정부’도 여러 곳에서 선언되었다.

② 정부통합운동

․ 임시정부의 위치를 둘러싼 노령 측과 상하이 측의 진통과 합의

임시정부

노 선

주 장

대한국민회의

독립전쟁론

국내와 가깝고 동포사회가 발달한 간도나 노령에 둘 것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론

활동이 자유로운 상하이에 둘 것

․ 1919년 9월 양측은 통합정부를 상하이에 두는 합의 하에 대통령제의 통합정부 성립

③ 임정 참여세력 : 초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정부 형태

노령 등지의 독립세력 이탈 :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독립을 청원한 사실이 밝혀지자

신채호 등이 발기한 통일책진회는 임시의정원 해산을 요구하다 통합정부 참여를 철회

한인사회당 계열 참여 : 1919년 11월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중시하는 이동휘 등 참여

④ 초기 임정활동

․ 교통국(독립자금과 국내 정보 수집), 연통제, 거류민단체, 간도지역 독립군 단체들과 제휴 노력, 프랑스와 파리에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설치

․ 외교활동에 주력 : 미국과 강대국을 상대로 독립청원을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국민대표회의 개최와 임정의 분열

① 국민대표회의 : 임정에 비판적이었던 중국·만주·노령 등지의 민족·사회주의자, 무장 세력이

독립운동 전선의 정비와 방향전환을 위해 요구. 상하이에서 개최(1923.1~6)

② 임정의 분열 : 세 입장으로 갈라짐 → 임정에 실망하고 많은 세력이 임정에서 이탈

창조파

개조파

임정옹호파

임정을 해체하고 새 정부 수립

임정의 조직만 개편

임정의 현상유지

③ 1925년 독립청원 문제로 독립운동을 분열시킨 책임을 물어 이승만 탄핵·파면, 박은식 추대

④ 임정은 중국 관내의 좌·우를 망라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국공분열에 영향

받아 실패 → 임정의 세력 약화 초래

 

3) 만주에서의 독립군운동과 의열단

• 자유시로 이동하기 전까지 간도지역의 독립군 세력

지 역

독립군

인 물

활 동

북간도

북로군정서

김좌진

봉오동전투(1920.6) 일본군 1개 대대 격퇴

대한독립군

홍범도

청산리전투(1920.10) 김좌진·홍범도 부대 연합전투

대한독립군·대한정의군정사·광복단

경신참변(1920.10) 일제는 간도 침략 구실로 훈춘사건

서간도

서로군정서

이상룡·김동삼

을 빌미로 일본군이 1만여 명의 동포를 학살한 사건

대한독립단

조맹선·박장호

• 자유시참변(1921.6) 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대한독립군단

대한청년단연합회

안병찬

을 조직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내분으로 무장해제 당함

• 자유시에서 만주로 돌아온 이후 독립군 세력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1923·남만주

1925·지린성과 선양

1925·북만주

채찬·김승학

오동진·지청천

김좌진

삼부를 통합한 민족유일당 건설 노력 → 이견 차이로 통합에 실패

󰀻

󰀻

국민부

1920년대

한족총연합회

남만주

말 재편

북만주

삼부(참의·정의·신민)는 입법·행정·사법 기관을 갖춘 일종의 ‘자치정부’로서 민정과 군정을 겸했다.

• 의열단의 활동

1919.11

김원봉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만주 지린에서 윤세주 등 12인과 함께 의열단 결성

노선 : 외교론, 독립군 활동보다는 테러활동으로 민중폭동을 유발하여 독립 쟁취

대상 : 총독부 관리·친일파 암살, 동척·조선식산은행·경찰서 등 일제의 수탈·억압기관 파괴

• 1920.6

조선총독부 폭파계획 사전 발각으로 단원 6명 체포

• 1923.1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 1926.12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 1922

김원봉은 신채호로부터 조선혁명선언문을 베이징에서 받음.「조선혁명선언」은 민족해방운동 을 분열시키던 실력양성론, 외교독립론, 자치론을 비판하고, 조선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

• 1920중반

폭력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새 방향 모색 → 사회주의사상 수용,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

• 1927.4

독립유일당에 참여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로 인해 탄압받음

일부는 중국공산당 가입하거나 국내에서 망명한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활동

• 1929 봄

베이징에 레닌주의정치학교 설립. 청년단원 양성 및 국내파견 → 국내 노동운동에 참여

 

 

3 사회주의운동과 민중운동

1)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조선공산당

•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①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을 이끌 새로운 사상으로 수용, 빠르게 확산되었다.

② 초기 사회주의단체는 사상단체·독서회 형태로 조직(서울청년회, 북성회, 무산자동지회, 신사상연구회)

서울청년회 중심←

서울파

← 경쟁 →

화요파

→ 신사상연구회에서 화요회로 개명

③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 대중조직을 조직하고 투쟁에도 간여하였다.

• 나라 밖의 사회주의 운동

한인사회당 :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이동휘·박진순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결성(1918.4)

② 고려공산당(상하이파) : 한인사회당이 정부통합운동에 참여하며 상하이에서 결성(1921.5)

③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 김철규, 남만춘이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결성(1920.1)

④ 두 고려공산당은 독립운동방법, 민족통일전선 입장차이로 대립 → 코민테른의 지시로 해체(1922.12)

• 조선공산당 건설

①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사회주의자 및 국내 사회주의자 20여명이 창립(1925.4.17)

② 창립과정에서 ‘서울파’가 제외됨으로써 사회주의운동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③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정식 지부 승인을 받고 해외조직을 확대하였다.

④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하여 노동·농민운동의 독자적인

활동기반 마련하였다(1927).

• 공동투쟁 전략

① 조선공산당은 초기부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공동투쟁을 모색하는데 진력했다.

② 공동투쟁 : 6·10만세운동 준비(1926), 신간회 조직(1927.2)

• 조선공산당 해체

① 조선공산당은 4차례에 걸친 탄압을 받아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검거 또는 망명

② 코민테른은 지식인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노동자와 농민 중심으로 다시 조직하도록 지시(1928.12)

③ 1930년대 조선 사회주의운동은 해체된 당을 재건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2) 노동자 조직과 노동자운동

• 노동자 조직

노동자 조직

연 도

내 용

조선노동공제회

1920.4

조선 최초의 전국적 노동단체

조선노동연맹회

1922.10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 목표를 분명히 한 조직

조선노농총동맹

1924.4

전국 260여 개의 노동자·농민 단체 참여. ‘자본가계급과 투쟁한다.’

조선노농총동맹 분리

1927

조선노동자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

• 노동자 운동

① 1920년대 전반기 파업투쟁 : 소규모 사업(정미업·고무업·양말업)과 경기·경남·전북을 중심으로 발생

② 1920년대 후반기 파업투쟁 : 파업참가인원 증가 및 파업지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됨

③ 부산 부두노동자(1921), 목포 제유공장(1926), 영흥 흑연광산(1927), 원산 총파업(1929)

원산총파업

․ 발단 : 1928년 9월 라이징선 석유회사(함남)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

․ 전개 : 이 회사의 상급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주도. 산하 24개 노조와 3천명이 총파업

․ 대응 :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탄압. 함남노동회(어용노조)를 만들어 원산노동연합회를 불법화

․ 의의 : 노동자 등 민중세력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역량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

 

3) 농민조직과 농민운동

• 농민조직의 발전

① 초기 상호부조적 계몽적 농민단체도 농민운동 조직으로 변화

② 농민들은 ‘군단위’로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대중적 기반을 확대

③ 농민운동 : 소작 빈농 중심으로 소작료인하, 소작권이동 반대, 동척이민 반대 등 생존권 투쟁

• 소작료 인하투쟁 - 지주제가 발달한 황해·평안·전라 지역에서 많이 발생

주요 소작 쟁의

연 도

내 용

암태도 소작쟁의

1923.08

1920년 전반기 대표적인 농민운동. 70~80%의 소작료를 지주 문재철· 경찰과 1년간에 걸친 투쟁 끝에 40%로 인하

소작료 불납투쟁

이엽농장(전북 1927.11), 서선농장(평북 1929)

• 수리조합 반대운동 - 수리조합의 설치와 운영을 둘러싸고 일제와 지주에 거세게 저항했다.

• 일제는 노동자·농민운동이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원조를 받고 있다고 판단, 불법화하여 1930년대

에는 비합법적 운동으로 전화해 갔다.

 

4) 기타 부문 운동

• 청년 운동

청년 조직

연 도

내 용

조선청년연합회

1920

116개 청년단체가 모여 결성. 수양과 계몽 성격이 강한 단체

조선청년총동맹

1924

224개 청년단체가 사회주의 성격을 강화하여 결성

노동·농민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러 부문 운동에 개입

• 학생 운동 - 3·1운동 뒤 활성화

① 민족주의 계열(조선학생회 1923), 사회주의 계열(경성학생연맹, 조선학생과학연구회 1925)

특히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6년 6·10만세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② 6·10만세운동과 신간회 결성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조직적으로 발전

․ 학교마다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결사 조직되어 동맹휴교를 주도

․ 광주학생운동(1929)에도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 담당

․ 광주학생운동은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 :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억압 민족해방 만세’ 구호

․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200개 학교, 5만 4000명이 참가하는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발전

• 여성 운동

① 조선여자교육회, 경성여자청년회, 조선여자기독청년회 : 초기 여성단체는 종교·계몽적 성격이 강함

② 조선여성동우회 : 1924년 주세죽·허정숙 등이 조직. 여성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

③ 근우회

․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영향 받아 조직된 민족·사회진영 여성단체들이 통합체

․ 활동 : 여성해방의 인식 확대(강연 개최,『근우』발간), 민중운동에도 적극 개입

․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근우회도 해체되었다.

• 형평 운동

① 조선형평사 : 1934년 4월 경남 진주의 ‘백정’들이 신분차별과 사회적 멸시를 타파하기 위해 조직

②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 사회 각 부문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약화

• 의의 : 1920년대 청년학생·여성·형평운동은 기본적으로 사회·경제적 처지를 개선하려는 운동이었으나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반일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4 신간회의 창립과 활동

• 배경 : 조선공산당 창립(1925)과 6·10만세운동(1926)은 사회·민주 양 진영이 통일전선을 결성 하는 계기였다. 또한 민족계량주의자들에 공동 대응할 필요도 있었다.

• 신간회 창립(1927.2.15 종로구 기독교청년회관<YMCA>)

① 성격 :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이 총결집한 항일단체

② 강령 : 정치·경제적 각성 촉진, 단결, 기회주의 부인. 임원 : 이상재(회장), 홍명희(부회장)

③ 중앙 : 민족계열 우세. 합법적 활동과 모호한 강령으로 구체적 성과를 내지 못함

지방 : 사회주의 우세. 지방 노동·농민운동에 개입하여 일제에 대항

• 복대표대회

① 1929년 중앙의 적극적인 활동과 강령개정을 요구하는 지방지회끼리 대표를 뽑아 정기대회를 대체

② 허헌을 위원장으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집행부에 진출(46%)하였다.

③ 신간회는 이 대회를 계기로 반일 정치투쟁 전개하였다.

원산 총파업 지원, 전남 소작쟁의사건 조사단 파견, 단천 산림조합시행령 반대운동 등

• 민중대회 무산 및 해소

① 광주학생운동(1929)을 3·1운동과 같은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민중대회를

준비했으나 일제가 허헌·홍명희 등 신간회 간부 44명을 검거하여 대회는 무산되었다.

② 해소 배경

․ 국내 : 새 집행부는 타협노선 옹호·자치론자들과 제휴를 주장 → 신간회 해소론의 불씨 역할

․ 국외 : 중국의 국공합작 결렬(1927)로 코민테른은 ‘민족 부르주아지’를 부정적으로 인식,

코민테른은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 → 신간회 해소론의 근거로 작용

③ 해소론자와 해소 반재론자의 의견 대립

․ 해소론 : 노동자·농민을 노동조합·농민조합으로 재편성하여 계급적 이익을 지키는 협동투쟁기관 창설

․ 반대 해소론 : 대중적 역량 분산시키지 않고 진보적 조직이 나올 때까지 해소 금지 주장

․ 1931년 전체회의에서 해소안이 가결되었으나 일제가 이후 집회를 불허하여 사실상 해체됨

• 의의

① 민족의 반일 역량을 한데 모아 일제에 위협을 준 민족통일전선의 역할 수행

② 3·1운동 뒤 민족·사회계열로 양분된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반일민족통일전선으로 결집한 운동

 

 

제15장 일제의 전시파쇼체제와 항일무장투쟁

1 일제의 전시파쇼체제와 전시 수탈

1) 전시파쇼체제와 황국신민화 정책

• 배경

① 1929년 말 대공황으로 위기에 몰린 일본 독점자본주의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과 만주를 새로운 자본 투자처와 상품시장으로 확보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서둘렀다.

② 대동아공영권과 침략전쟁 개시 : 만주(1931), 중국(1937), 태평양전쟁(1941)으로 확대

③ 식민지 조선은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 증대

• 전시파쇼체제 강화

① 일제는 조선에 군사력과 경찰력을 증강하여 파쇼체제를 강화하였다.

② 경찰보조기구(자경단, 경방단, 방공단) : 조선 민중을 감시 강화

• 사상통제 - 1930~1935년에 사상통제를 철저히 강화

사상통제 관련 법령

연 도

내 용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6

민족해방운동자 중심의 치안유지법 위반자를 감시할 목적으로 공포

조선중앙정보위원회

1937

총독 직속기관. 정무총감·각국 부장·관방과장·헌병사령관 등으로 구성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1938

전향자들의 단체. 일본정신 터득, 내선일체, 생활쇄신 주장

국가총동원법

1938

이 법을 모법母法으로 각종 통제법령을 칙령형식으로 선포

국민정신총동원연맹

1938

직장과 말단 지방 행정단위까지 하부조직을 두어 조선 민중을 통제

‘애국반’과 반상회를 운용하여 주민 감시와 침략 동원에 이용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1941

비전향 애국지사를 아예 서대문 형무소 안 예방구금소에 구금

• 내선일체內鮮一體

① 조선총독 우가키(1931) : 전쟁승패는 조선 민중의 민심 향방에 있다고 적시 ‘내선융화’ 강조

② 조선총독 미나미(1936) : 정책강화. 조선인과 일본인은 형태, 마음, 피와 살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선일체 관련 조치

연 도

내 용

황국신민서사·신사참배

1937

일왕에 대한 충성맹세문 암송과 일본 왕족 귀신에 대한 강제 참배

‘조선어(한글)’교육 폐지

1938

일제는 모든 학교교육에서 우리말 교육을 완전 폐지

신문잡지폐간·창씨개명

1940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잡지와 신문 폐간, 일본식 성姓을 쓰도록 강요

• 황국신민화정책의 의도 : 조선 민중에게 천황숭배사상을 세뇌하여 충실한 식민지 노예 및 침략 전쟁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2) 농공병진 정책과 전시 수탈

• 농공병진農工竝進정책

① 목적 : 경제공황의 여파를 해소하고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식민지 공업화 정책

군수산업을 강화하여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농산물과 지하자원을 약탈하려는 정책

② 농업

․ 식민지 지주제의 실행은 소작 농가 몰락과 소작쟁의 등 농촌의 궁핍화를 가져왔다.

농촌진흥운동 : 총독 우가키가 1932년 시행. 자급자족원칙, 소농 경제의 생산력 증진 → 식민권력이 직접 생산자를 통할하여 궁극적으로 이들을 침략전쟁의 물적·인적 기초로 삼으려는 의도

관련 시책

연 도

내 용

자작농지 창설유지사업

1932

농민에게 농지구입자금 대부

조선소작조정령

1932

사법기관의 조정으로 소작쟁의 방지 목적

조선농지령

1934

지주의 고율 소작료를 일정 수준 통제

․ 일련의 농촌진흥대책에도 불구하고 ‘높은 소작료’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농민의 자력갱생은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오히려 강제공출과 같은 전시 수탈이 기승을 부렸다.

③ 공업

․ 1920~30년대 전후 불황과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독점자본은 자원과 값싼 노동력이 풍부한 조선에 진출하였다. 중화학공업(시멘트·비료·화학)과 제사·방직업에 대규모로 진출하였다.

총독부의 지원 : 수력발전개발, ‘중요산업통제법’, ‘공장법’ 등 비적용, 남면북양南綿北羊정책

․ 군수·중화학 공업화 : 중일전쟁(1937)으로 일제는 전시산업체제를 서두르며 군수산업에 집중적 진출

․ 1938년 무렵 공업생산액이 농업을 초과, 일본 자본이 공업투자 자본의 94% 차지하였고

산업구조는 민수 용품 생산이 억제되고 군수산업이 기형적으로 발전하였다.

․ 일제의 공업화 정책은 조선경제의 발전이 아닌 원료약탈과 침략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 전시 수탈

① 강제인력동원

관련 법령

연 도

내 용

특별지원병제

1938

전쟁 인력 충원

학도병지원제

1943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을 전쟁터로 강제로 연행

징병제

1944

1년 만에 20여만 명의 조선청년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국민징용령

1939

1939~45년간 113~146만 명 강제동원. 광산·토건공사·군수공장에 투입

여자정신대근무령

1944

12~40세 까지의 여성 수십만 명이 군수공장과 전쟁터로 끌려감

② 강제 공출

․ 식량 공급제와 공출제 실시(1939) : 일제는 전시 군량미 확보에 열을 올렸다.

․ 1940년 이후 일제는 쌀과 잡곡을 포함한 전체 생산량의 40~60% 이상을 강제 공출로 빼앗았다.

 

3) 친일파의 군상

• 전시체제 하에서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적극적 친일파로 변신, 황국신민화 정책의 나팔수 역할 자처

① 언론계 :『조선일보』,『동아일보』는 일제의 강제징병을 찬양하고 독려했다. 두 신문은 1941년 폐간될 때까지 친일 경쟁을 하였다.

② 종교계

․ 불교, 천도교, 천주교, 개신교, 유교 등 종교단체들도 일본군 위문행사, 국방헌금 모금, 조선 민중에게 침략전쟁 참여를 선전

③ 여성계

․ 송금선, 이숙종, 김활란, 고황경, 배상명, 박인덕, 황신덕 등

․ 총후보국銃後報國을 강변하며 각종 친일단체에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선전·활동

④ 문학계

․ 이광수, 서정주, 모윤숙, 노천명 등

⑤ 경제계

․ 박흥식(화신백화점), 김연수(경성방직), 방응모(조선일보)

․ 자금력을 이용하여 일제에 국방헌금 및 무기 기증(

⑥ 기타 정·관·군계

․ 중추원 귀족, 총독부 관리, 경찰과 판·검사, 일본국 또는 만주국 군인

⑦ 친일단체

․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조선방공협회, 녹기연맹, 조선문인보국회, 임전보국단, 애국금차회

 

2 나라 안의 민족해방운동

1)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① 조선혁명은 제국주의 타도와 토지문제의 해결을 골자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

② 코민테른은 ‘12월 테제’에 의거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당 재건을 지시함(1928.12) → 민족 부르주아지는 반제국주의 투쟁세력이 아니라는 부정적 평가

• 당 재건운동(1931~1936)

① 사회주의자들은 당재건위원회를 만들고 조직원을 생산현장에 보내 혁명적 대중조직을 만든 후 당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파벌 문제로 인해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② 재건 방침의 변경 : 1931~1932년 혁명적 대중조직을 먼저 만들어 공산주의자 그룹을 강화한

후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것으로 변경 →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서울 상하이파)

③ 노동현장 중심의 공산주의자 그룹 발생 : 이재유그룹은 ‘경성트로이카’(1934), ‘경성재건그 룹’(1934), ‘조선공산당경성준비그룹’(1936)을 조직 → 노동계급에 큰 영향을 끼쳤음

• 의의와 한계

① 의의 : 당 재건운동은 파벌을 극복, 노·농 출신 활동가를 배출, 새로운 운동노선을 모색하였다.

② 한계 : 서로 흩어져서 한 지역에 고립된 운동 방식은 일제의 조직적인 탄압을 극복하지 못했다.

 

2) 노동자의 생활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 노동자의 생활

① 공장노동자 : 장시간 노동(평균 12시간 이상)과 저임금(성인 남성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시달렸다.

② 자유근로자 : 토막민의 증가. 날품팔이, 공사장, 지게꾼, 인력거꾼, 행상 등에 종사

•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① 일제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합법적인 투쟁을 탄압하자 노동자들의 비합법 투쟁과정에서 발생

②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주의자들의 당 재건운동과 결합되었다.

③ 목표 :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결성(←산업별 노조←공장위원회, 파업위원회←분회←세포조직)

• 의의와 한계

① 의의 : 생존권 투쟁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족해방·계급해방을 목표로 투쟁했다.

② 한계 : 전국적 조직이 없어 파업투쟁은 분산적이었고, 1930년 후반 일제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3) 농민의 생활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 농민의 생활

① 대공황으로 농산물 가격폭락과 비료 가격인상, 고율의 소작료로 인한 지주-소작농의 계급모순 심화로 1930년대 초 농민의 생활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빈농은 가장 혁명적인 계급이 되었다.

② 1931~1935년간 전국 80개 군에서 103건의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함경·경상·강원도에서 활발했다.

•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①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 사회주의자들은 선진적인 빈농 출신의 활동가를 양성

② 목적 : 농조반 결성(동·리 단위) → 면 단위 농민조합 지부 결성 → 군 단위 농민조합 조직

③ 구호 : 토지혁명과 노농소비에트 건설

④ 활동 : 고율 소작료 인하, 공과금 납부 거부, 군수용 강제수매 반대, 부역동원 반대운동 등

→ 일제의 전시 수탈에 맞서며 폭력투쟁도 불사하였다.

• 의의와 한계

① 의의 : 전국적인 노동·농민조직과 지방 건국준비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가 조직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② 한계 : 민족개량주의자를 타격 대상으로 삼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자까지도 배척한 “좌편향‘의

잘못도 있었다. 1903년대 후반기 일제의 탄압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무너졌다.

 

4) 비밀결사 투쟁과 건국동맹

• 국학운동 : 신간회 해소(1931) 후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맞서 안재홍·정인보 등은 조선 후기

실학을 연구하며 민족성을 지키려고 애썼다.『여유당전서』편찬사업 등

• 조선어학회(1931)

① 일제의 우리말 사용 탄압에 맞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여 보급

②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 ‘조선어학회사건’(1942)을 일으켜 내란죄로 처벌

• 비밀결사 투쟁

① 소극적 형태이나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을 기원하는 선전이 광범위하게 확대

② 대한애국청년단 : 부민관 폭발사건(1945.7.24)으로 친일파 박춘금 일당을 징계

③ 건국동맹

․ 여운형 등이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1944년 8월 결성 → 갑자기 다가올 해방을 준비

․ 활동 : 10개 도에 지방조직, 경기도 용문산에 농민동맹을 만들어 반일활동(1944.10)

무장봉기를 위해 공산주의자협의회와 군사위원회 조직하여 군사활동 준비

․ 의의 : 건국동매의 기반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3 나라 밖의 민족해방운동

1)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동북항일연군

• 배경

①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② 이후 공산당 계열의 항일 유격대가 조직됨<아래 도표>

연 도

내 용

조·중 연합 항일유격대

1932

북간도 지역에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조직.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

동북인민혁명군

1933

항일투쟁 강화 목적으로 통일. 해방구와 자치정부를 만들어 사회개혁 실시

동북항일연군

1935

일제의 토벌과 민생단의 공작으로 타격을 입은 동북인민혁명군은 남만·북만

으로 이전.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개편

재만한인조국광복회

1936

동북항일연군 2군이 장바이현에서 결성. 1937년 국내 민족주의자와 손잡고

한인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여 국내지지 기반 확대

③ 일제는 민생단(친일단체)을 조직화여 중국인과 조선인을 이간질 획책 → 상당한 성과를 거둠

• 동북항일연군의 국내 진공

① 보천보 전투 : 동북항일연군 제2군 대원 80여 명이 보천보를 점령하여 경찰주재소 등을 습격

② 혜산진사건 : 보천보 습격에 놀란 일제가 조국광복회 국내 조직원 739명을 검거한 사건(1937.10)

③ 1939년 겨울부터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은 만주 항일유격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동북항일연군은 소부대활동으로 전환하여 항일 역량을 보존하는 동시에 소련 땅에 들어가 군 사훈련과 정치교육을 받으면서 일제의 패망을 기다렸다.

 

2)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윤봉길 의거

※ 1932.4.29 중국 관내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음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한국혁명당

조소앙

지청천

김원봉

김규식

윤기섭

<※한국혁명당은 이후 민족혁명당에 참여할 때,

재만한국독립당+한국혁명당=

신한독립당으로

변경(1934)>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통일동맹)

※ 1932.11 관내 항일전선의 통일 목적의 협의체. 활동에 제약이 많았음

민족혁명당

※ 1935.7 각 당을 해체하고 결성한 통일전선정당. 임정해체계획에 대한 임정고수파의 반발과 당 운영 주도권 문제로 세력이탈. 성격 약화됨

이탈

잔류

한국국민당

김구

연합

재건 한국독립당

재건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

연합

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

한국광복운동단체협의회

1937.8 민족우익전선을 통일

조선민족전선연맹

1937.12 관내 민족좌익전선 통일. 조선의용대 창설

이후 두 단체는 통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임정해체 문제, 조선의용대 지휘권 문제 등으로 의견이 양분, 성공하지 못했음

한국독립당

1940.5 중경에서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 합당. 삼균주의. 1941년 건국강령 발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1941.1 중국 공산당 내의 한인 세력과 조선의용대가 연합하여 결성. 조선의용대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

임정과 한국 광복군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김규식, 김원봉, 유자명이 참여, 중국 관내 민족전선의 통일전선정부로서 자리 잡음

화북조선독립동맹(독립동맹)

1942.7 주석에 김두봉. 항일민족통일전선체로 발전적 해체. 조선의용대도 조선의용군으로 개명

• 1940.9 창설. 사령관 이청천

• 1944.8까지 중국군사위원회가 지휘

해방 후 임정은 개인자격으로 귀국, 한국독립당으로 결집

•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협동작전을 펼치며 항일전 참가

일제 패망 후 국공내전 참여, 상당수 북한 인민군에 편입

해방 후 독립동맹은 북조선신민당을 조직 ‘연안파’로 활동

 

3) 충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 기구의 변천은 <위의 도표> 참조

• 삼균주의

① 보통선거제(정치 균등), 토지와 대기업 국유화(경제 균등), 국민 의무교육제(교육 균등)

② 1941년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 발표한 ‘건국강령’도 삼균주의에 기초한 것 이었다.

• 한국광복군

① 1940년 창설한 한국광복군은 1941년 11월 국민당 정부와 ‘한국광복군 행동9개준승’을 맺고 원조를 받으면서 1944년 8월까지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았다.

② 광복군은 북상하지 않은 조선의용대 일부와 서안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면서 군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 일제 패망 후 임정과 광복군은 미·소 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남한에서 김구를 중 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결집되었다.

 

 

4 일그러진 식민지 근대화의 일상

1) ‘조선인의 서울’, ‘일본인의 서울’ - 북촌과 남촌

• 서울의 민족적 공간 분화

① 북촌지역

․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인이 거주하는 피지배민족 지역

․ 도시계획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식민 권력의 규율이 일상화된 서울 속의 또 다른 식민지

② 남촌지역

․ 진고개를 중심으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배민족 지역

․ 도시계획에서 공공재 등을 우선적으로 배치,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삼음. 조선 속의 작은 일본

• 중심과 주변부의 공간 분화

① 1920~30년대 도시로 몰려온 몰락농민, 도시빈민계급 등은 서울 주변으로 밀려나 토막민 형성

② 토막민 : 현저동 산골, 이촌동 모랫벌, 광희동 성벽그늘 등 주로 제방, 산림, 다리 밑 등지에 거주

③ 토막민은 식민지 조선의 특수한 계급이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의 산물이었다.

 

2) ‘환희’와 ‘절망’의 서울

• 백화점 -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 1920년대 서울에 본격적으로 등장.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조 지아<丁字屋>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히라다<平田>백화점

• 화신백화점 - 1932년 조선인 자본가 박흥식이 세운 종로의 상징이자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었 으나 조선인에게 강요했던 민족적 열등감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 조선의 식민지 근대화란 일본 독점자본의 상품 공급을 수용할 소비지이자 새로운 수요 창출이 었고 1930년대 남촌의 백화점들은 그 상징이었다.

 

3) ‘모던 뽀이’와 ‘모던 껄’

• ‘모던 뽀이’와 ‘모던껄’은 이룰 수 없는 식민지 자본주의 소비유혹의 절망에서 파생된 단면이다.

• 신여성, 신사와도 확연히 달랐던 ‘모던 뽀이’와 ‘모던껄’

① 모던 껄 : 양장, 짧은 양말과 치마, 구두, 스커트, 외투, 단발 혹은 미미가꾸시, 모자, 짙은 화장

으로 뭇 남성을 유혹하는 미를 가진 현대적 색시

② 모던 뽀이 : 양복, 단장, 각테 안경, 모자, 코 높은 구두를 걸친 젊은 남자

• 계층 : 대다수 자본가 또는 부르주아의 자식, 식민교육을 통해 근대문화의 세례를 받은 인텔리 등

• ‘못난 뽀이’와 ‘못난 껄’ : 젊은 인텔리의 절반 이상이 취업을 못하는 식민지 조선에서 거리를 방황하며 부유층에 기생하거나 타락해가는 이들에게 붙은 별명. 서울로 상징되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는 민족의 앞날을 지향해야 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경박하고 천박스러운 유행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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