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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건 정리 |
제목 : 대공의 난 大恭--亂
신라 혜공왕 때에 일어난 귀족들 간의 권력 싸움. 신라 하대 정치적 혼란의 시초로, 전국의 96각간이 중앙 집권적 정치에 반발하여 서로 싸웠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난으로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혜공왕은 죽고 김양상이 즉위하여 선덕왕이 되었다. 이 때부터 무열왕계 자손의 왕실은 무너지고 내물왕계 자손들이 왕위를 독차지하였다. 무열왕부터 혜공왕 까지를 신라 중대, 선덕왕 이후 내물왕계 시대를 신라 하대라고 한다.
제목 : 김헌창의 난 金憲昌(?∼822)
신라의 헌덕왕 때 반란을 일으킨 사람. 821년(헌덕왕 13년)에 옹천주(공주)의 도독으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이라 하였다. 지금의 전주, 상주, 청주, 김해 등을 차지하여 한때 세력이 대단했으나, 1년도 못 되어 관군에게 쫓겨 웅진성(공주의 공산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목 : 김범문의 난 金梵文 ?∼825
통일 신라 시대의 반란자. 도독 헌창(憲昌)의 아들로 825년(헌덕왕 17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고달산의 산적 수신 등과 100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북한산주(지금의 서울)를 공격했으나 도독 총명에게 패하고 붙잡혀 죽었다.
제목 : 장보고의 난 張保皐(?∼846)
신라 시대의 장군.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의 해적들에게 잡혀 간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자 관직을 버리고 귀국하였다. 이 사실을 왕께 보고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군사를 길러 해적을 소탕하였으며, 신라와 당나라, 일본 사이의 무역을 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 무렵 그는 왕위 계승 싸움에서 밀려 난 김우징(신무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그 뒤 그를 시기하는 신하에게 암살당하였다.
제목 : 왕규의 난 王規--亂
고려 초에 왕규가 일으킨 반란 사건. 고려 태조(왕건)는 지방의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일종의 결혼 정책을 통해 이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광주의 호족 왕규도 그의 두 딸을 태조의 제15비와 제16비로 보냈다. 왕규는 태조가 죽자 제16비가 낳은 광주원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자 혜종을 암살하려고 음모하다가 실패하고, 혜종이 죽은 뒤 난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정종과 왕식렴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945년).
제목 : 강조의 정변 康兆(?∼1010)
고려 때의 장군. 제7대 목종의 어머니 천추 태후의 외척인 김치양이 권력을 잡고 횡포가 심해지자, 1009년(목종 12년)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처형하였다. 병약한 목종마저 시해하고 현종을 임금으로 내세워 스스로 중대사의 벼슬에 올라 세력을 떨쳤다. 이듬해 거란의 성종이,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것을 문책한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통주(지금의 선천 근방)에서 맞아 싸우다가 사로잡혀 죽었다.
제목 : 이자겸의 난 李資謙(?∼1126)
고려 인종 때의 문신. 예종 3년(1108년)에 둘째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되어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졌다. 1122년에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예종의 왕제들을 물리치고, 어린 태자(뒤의 인종)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양절익명 공신이 되어, 권세를 한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자기의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했고, 벼슬자리를 팔아 돈을 모으는 등 부정한 짓을 일삼았다. 인종 4년(1126년)에 상장군 최탁 등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오히려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뒤에 척준경에게 붙잡혀 영광으로 귀양가 있다가 죽었다. 이 사건을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
제목 : 묘청의 난 妙淸--亂
고려 인종 때(1135년) 묘청이 일으킨 난.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한 데다 밖으로는 새로 일어난 금나라가 고려에 압력을 가해와 사회가 크게 불안하였다. 이에 서경 출신 귀족들은 개경파 귀족을 몰아 내고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자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보수적인 개경파 귀족들이 이에 적극 반대하므로,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묘청의 무리는 한때 자비령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 난이 있은 뒤 고려 지배층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져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제목 : 정중부의 난 鄭仲夫(1106∼1179)
고려 시대의 무신. 인종 때 견룡 대정 벼슬에 올라 의종 때 교위를 거쳐 상장군에 이르렀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서 모욕을 당한 일이 있는 데다, 임금이 문신들만 우대하고 무신을 차별 대우하는 데 늘 불만이 쌓여 있었다. 때마침 1170년 왕이 보현원에 행차할 때 무신인 이소응이 문신인 한뇌 등에게 모욕을 당하게 되자, 그것을 계기로 삼아 이의방, 이고 등과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모시던 문신들을 죽이고 임금을 거제로, 태자를 진도로 각각 보낸 다음, 임금의 아우인 호(晧 : 명종)를 받들어 정권을 잡았다. 이후 스스로 참지정사를 비롯한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무단 정치를 폈다. 1173년(명종 3년)에 무신 정권을 몰아 내고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반란이 일어나자 그것을 진압하고 의종마저 살해하였다. 그 뒤 1179년에 무신인 경대승 등에게 아들 및 사위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제목 : 김보당의 난 金甫當(?∼1173) 고려 시대의 문신. 1173년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물리치고 전왕인 의종을 왕위에 복위시키고자 군사를 일으켰다(김보당의 난). 그러나 정중부가 보낸 이의민, 박존위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체포된 뒤 죽으면서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 고 말하여 많은 문신들이 처형당하였다. 이를 계사의 난이라고 한다.
제목 : 조위총의 난 趙位寵(?∼1176)
고려 중기의 문신. 병부 상서로 서경 유수를 겸하고 있을 때인 1170년(의종 24년)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키자, 1174년(명종 4년)에 절령 이북 40여 성의 호응을 얻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중앙군의 총공세로 위기에 몰리자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병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고, 1176년(명종 6년) 서경이 함락된 뒤에 처형당하였다.
제목 : 망이 . 망소이난 .명학소의난 亡伊 亡所伊亂
1176년 고려 명종 때 충청 남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의 난. 천민 수공업자의 집단 거주 지역인 명학소에 살던 천민들이 망이·망소이의 주도 아래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이다. 고려 무신 정권하에서 일어난 천민의 저항 운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한 후 북진하여 1년 반 동안 청주와 아산 등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었다. 정세유가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난을 계기로 정부는 향·소·부곡 등 천민 거주 지역을 군현으로 승2격시키는 등 천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게 되었다.
제목 : 만적의 난 萬積--亂
고려 신종 1년(1198년)에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 운동. 만적은 개성의 북산에 공사 노비가 모인 자리에서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우리네도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면서 난을 일으킬 것을 의논했다. 이에 여러 노비가 찬동하여 관노는 관청에서, 사노는 성내에서 들고일어나 권신과 상전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린 뒤에 정권을 잡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한 사노의 밀고로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 노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목 : 삼별초의 난 三別抄--亂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몽고의 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 몽고의 침략 아래서의 조정에 대한 반란이자 항몽의 싸움이었다. 최씨의 무인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 피란해 있던 조정은 환도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개경 환도(開京還都)는 몽고에 굴복하는 일이라 하여 삼별초에 속하는 무신들은 환도를 주장하는 문신들과 맞서게 되었다. 몽고에서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온 왕이 삼별초를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환도가 결정되고 삼별초를 해체시키자는 조정의 결의가 있었다. 이에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을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000여 척의 배로 강화에 있는 가족들과 재물을 싣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은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잡았으나, 관군과 몽고군에 밀려 일부는 달아나고 일부는 탐라(제주도)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조정에서 회유책을 써 보았지만 그들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군의 탐라 공격으로 결국 삼별초는 항몽 정신만 남긴 채 저항하다가 진압되고 말았다.
제목 : 이징옥의 난 李澄玉 ?∼1453
조선 초기의 무관. 그의 형 징석(澄石)과 더불어 뛰어난 무인으로 알려져 많은 일화를 남겼다. 1424년(세종 6년)에 김종서와 함께 침입해 온 여진족을 물리치고 영진 절제사가 되었다. 뒤에 6진을 개척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김종서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1453(단종 1년)에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 대군(뒤의 세조)에 의해 김종서의 일파라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자, 후임자 박호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대금 황제'라 일컬었으나 종성 판관 정종의 반격을 받고 아들 셋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징옥의 난'은 그 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에 영향을 미쳤다.
제목 : 삼포 왜란 三浦倭亂
1510년(조선 중종 5년)에 삼포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폭동. 삼포를 연 뒤 일본인들의 무역과 거주가 허가되자 삼포의 일본인 수가 점점 늘어갔고, 교만해진 일본인들은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관리와 충돌하는 등 그 폐단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중종은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쓰시마섬의 도주에게 그들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것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은 쓰시마 도주의 군사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고, 한때는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킬 계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의 토벌로 그들은 크게 패하여 물러간 이후 일본인과의 교역을 금하였는데, 그 뒤 일본의 애원으로 다시 임신약조를 맺고 제포 항구만 열어 교역을 허락하였다.
제목 : 임꺽정의 난 林----(?∼1562)
조선 시대의 의로운 도둑. 임거정(林巨正)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백정으로, 당시 나라가 혼란하고 관리들이 부패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았다. 1559년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관리를 죽였으며, 관의 창고를 털어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때는 장연과 풍천 등지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당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참모인 서임이 잡히자 세력이 약해졌으며, 1562년에 남치근의 토벌 작전으로 구월산에서 잡혀 사형당하였다.
제목 : 정여립의 난 鄭汝立(?∼1589)
조선 중기의 모반자.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와 성혼의 제자가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세상을 떠나 동인 세력이 우세해지자 동인편이 되어 이이 등을 배반하고 박순, 성혼 등을 비판하였다. 왕이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득세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백성의 마음을 선동하였다. 그 뒤 반란을 꾀하다가 탄로나자 죽도로 도망가 있던 중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하였다.
제목 :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싸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배경 조선은 선조 때에 접어들어 양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이이(李珥)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해도 도리어 지배 계급들은 배척하는 실정에 있었다. 그처럼 조선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와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국내 통일에 이용한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체의 불안을 없애려 했다. 특히 당시 유럽에 의해 발전한 신흥 상업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침공하자는 데에 있었다.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통신사를 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무례한 구절이 있어 거절했으나 재차 교섭이 와서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내어 그들의 속셈을 살폈다. 그러나 두 사신의 보고는 상반되어 조정의 대신들도 의견이 엇갈렸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라 감정이 대립된 것이다. 결국 조정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는 황윤길의 보고를 무시하고,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게 되어 국방을 소홀히 했다. 늦게서야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을 알아 낸 조정은 요충지인 영남(경상도)에 힘을 기울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다만 전라 좌수사 이순신만이 전쟁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섭이 결렬되자, 곧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반도를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해 올라왔다. 조정에서 급파한 이일과 신입이 상주와 충주에서 전사하자 서울의 민심이 동요되었다.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에 평양을 빼앗겼다. 대궐을 불태우고 임금이 피난을 가자 백성의 원망이 극도에 이르렀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북진, 회령에서 두 왕자를 포로로 잡기에 이르렀다. 한편 해상에서는 경상 우수사 원균이 패하여 많은 함선을 잃었으나,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거북선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은 평상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전선을 이끌고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의 수군을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1차는 옥포에서, 2차는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3차는 한산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 해전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했다. 특히 한산섬에서 적선 60여 척, 부산에서 100여 척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의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한편 내륙에서는 각계 각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했고,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평양을 다시 찾고 남진해 왔다. 서울에 모였던 왜군은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 군과 합세하여 행주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권율에 의해 크게 패하였다. 이 싸움은 김시민의 진주 싸움, 이순신의 한산섬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삼대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명나라 군대는 심유경을 내세워 서울에 있는 적과 화의를 교섭, 왜군이 거기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켰다. 불리한 처지에서 화의에 응했던 왜군은 갑자기 지난 진주 싸움의 치욕을 보복하려는 듯 진주 산성을 공격하여, 전란 중 가장 치열한 육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영에 들어가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일단 싸움은 멎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2, 3년 만에 화의는 결렬되었다.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4만 대군으로 재침공하니, 그것이 1597년(선조 30년)의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다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침입해 왔다. 그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간첩을 침투시켜 그를 모함하는 데에 성공했다. 결국 이순신은 원균을 옹호하는 일파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 마침내 일본의 대군이 계속 상륙하자 명나라에서도 다시 원군을 급파했다. 조선에서도 이원익을 체찰사, 권율을 도원수로 삼고, 이덕형, 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를 굳게 하였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서 해전을 벌이니 원균 등이 전사하고 전선이 대파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명나라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고,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여 남은 선박 12척으로 해군을 재편성, 결사적인 항전 끝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명량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도망가는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결과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 명, 일본의 3국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전란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재의 손실과 각처에서 도둑이 날뛰었다. 한편 조정은 유비 무환을 깨닫고 훈련 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사상이 굳혀지는 반면, 왜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민 경제를 퇴락시켜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권 장악을 쉽게 만들었다. 조선에서 다수의 백성을 포로로 데려다 경작 노동에 이용하는 노예 매매를 시작했다. 그 중에는 도자기 기술자가 있어 일본 도자기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활자를 탈취해다가 활자 기술의 커다란 발전을 보았다. <퇴계집> <동의보감> 등의 서적을 가져다 문화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이 소모된 데다 국가 재정까지 어려움에 빠져, 만주에 있던 여진족의 세력이 팽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마침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고, 동양의 국제 정세를 크게 전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목 : 이괄의 난 李适--亂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난. 이괄은 인조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그 뒤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잡혀 가자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으나 서울 점령 하루 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달아나 선동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목 :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조선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싸움. 광해군을 몰아 내고 즉위한 인조가 친명 배금 정책을 쓰고,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진을 치고 요동 회복을 꾀하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후금이 그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침입했다.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의 폐위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의주, 정주,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와 이입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적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본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과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제목 :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났던 우리 나라와 청과의 싸움. 정묘호란 후 내몽고의 지배에 성공한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군신의 예를 요구해 왔다. 이에 인조는 전국에 선전의 교서를 내리고 결전의 뜻을 밝혔는데, 이를 안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임경업 장군이 의주에서 이를 막아 싸웠으나, 청나라군은 이를 피해 곧바로 서울을 점령했으므로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해 저항하였다. 그러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45일 만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나라와 화의를 맺기로 하여 인조가 몸소 삼전도에 나가 강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제목 : 홍경래의 난 洪景來--亂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도 출신인 홍경래가 일으킨 반란.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우군칙 등과 더불어 서북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구실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 대원수라 일컬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된 홍경래의 난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땅이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난은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 및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그 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란에 영향을 끼쳤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초에 우리 나라 서북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대규모의 농민 항거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제목 : 홍경래 洪景來(1780∼1812) 조선 시대의 반란 지도자. 평안도 용강 출생이다. 지혜가 있고 문재에 뛰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지방 차별의 폐습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패한 국정에 불만을 품고, 순조 11년(1811년)에 평북 가산에서 군사를 모아 난을일으켰으나 그 이듬해 4월 정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제목 : 진주 민란 晋州民亂
1862년(철종 13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보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난을 계기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목 :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고종 3년)에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우리 나라의 문호를 열고자 로스(Ross)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로 쳐들어왔으나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한 달 만에 물러갔다. 그 결과 프랑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더욱 쇄국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제목 : 신미양요 辛未洋擾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군함이 우리 나라 강화도 일대에 쳐들어온 사건. 1866년(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하자고 대동강으로 와 소란을 피우자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우리 나라를 책망하고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베이징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아시아 함대를 출동, 강화도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국의 군함은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조선은 무장 어재연(魚在淵) 등이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양쪽 군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미군은 물러갔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의기 양양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폈다.
제목 : 임오군란 壬午軍亂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우리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제목 :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고종 21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적인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배경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고,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경과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결과 이 정변은 오히려 조선 국내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었다. 의의 그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과 외국 세력에 기대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한 점이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뜻이 있다.
제목 : 동학 운동 東學運動
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 농민 전쟁 또는 동학 혁명이라고도 한다. 우리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배경 동학 운동의 역사적 배경은 1862년에 벌어진 진주 민란을 시초로 하여 삼남 지방의 농민들이 벌인 삼정 문란에 대한 반항에서 이미 싹터 있었다. 동학은 원래 외국 세력의 배척과 사회 개혁을 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농촌 사회에 그 교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계기 동학이 외세 배척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그 교세가 날로 커져 가자, 조정에서는 교조인 최제우를 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이에 교도들은 교조의 죽음이 억울하다 하여 그 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펴게 되었다. 여러 고장에서 큰 모임을 열어 교조 신원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정과 나쁜 짓을 일삼자, 농민들이 그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1894년). 이에 조정에서는 관리의 잘못을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동학 교도와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 맞서게 된 것이다. 경과 농민들과 합세한 동학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청·일 양국의 군대까지 출병하게 되고, 동학군은 그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하여 동학군 쪽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정부와 화해를 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일본군의 침략 행동이 강화되기만 하자,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결과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영향 동학 운동은 비록 불리한 국제 정세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내적으로는 갑오개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본의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기세가 더욱 거세게 되었다. 의의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제목 : 을미사변 乙未事變
1895년(고종 32년)에 일제가 명성 황후를 살해하고 일본 세력의 강화를 꾀했던 정변. 삼국 간섭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 황후 등 민씨 세력이 친러 정책을 고집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친러 세력을 죽인 다음, 친일파 인물들로 내각을 꾸며 갑오개혁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잔인 무도한 일본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러한 배일 감정을 틈타 친러 세력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제목 : 선덕왕 (김지정의 난) 宣德王 ?∼785
신라 제37대왕(재위 780∼785년). 성은 김씨, 이름은 양상(良相)이고, 내물왕의 10대손이다. 780년, 혜공왕이 술과 놀이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자 이찬 벼슬에 있는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상대등으로 있던 그가 김지정을 토벌하고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중에 혜공왕이 죽자 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있지 못하고 죽었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뼈는 동해에 뿌려졌다고 한다.
제목 : 무신의 난 (최질의 난) 武臣--亂
고려 때 무신들이 일으킨 변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와 무신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났다. 좁은 뜻으로는 정중부의 난(1170년)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무신의 난 모두를 가리킨다. 무신의 난이 처음 일어난 것은 현종 때의 김훈, 최질의 난이며, 그 뒤 정중부의 난으로 본격화하여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이 잇달아 집권자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무신 정권 시대를 이루었다.
제목 : 을묘왜변 乙卯倭變
조선 명종 10년인 1555년에 왜구가 전라 남도 연안 지방에 침입한 사건. 1510년 삼포 왜란 이후 조선 정부가 왜인들의 왕래와 상품 거래를 엄격히 제한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이 일으킨 난이다. 왜구들은 전라 남도의 달량성, 어란포, 장흥, 강진, 진도에 침입하여 갖은 만행을 다하였다. 왜구들이 조선군에게 쫓기어 돌아간 후 쓰시마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였다.
[청·일 전쟁 淸日戰爭]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쳐 청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 대하여 종주권(지배권)을 주장해 오던 청나라와, 메이지 유신 이후 우리 나라에 대하여 끊임없이 세력을 뻗쳐 오던 일본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서로 관여하여 알력을 빚어 왔다. 그러던 중 동학 운동이 일어나 우리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청나라 군대가 파병되자, 이에 맞서 일본은 그들의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보내 옴으로써 양국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1894년 7월 25일에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군도 등을 일본에 떼어 주게 되었으며,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게 되었고, 대륙 침략의 기초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규수 朴珪壽 (1807∼1876)]
조선 말기의 문신. 호는 환재(桓齋)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848년(헌종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을 거쳐 열하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2년에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파견되어 사태 수습을 하였다. 1866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하여 그 배를 불살라 버렸다. 또 1875년에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최익현 등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는 서양 사정에 밝아 문호를 개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저서에 <환재집> <환재수계> 등이 있다.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조선 세조 때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회령부사를 사퇴한 이시애가 세조의 중앙집권 강화정책에 반발하여 아우 시합(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와 음모하여 1467년(세조 13)에 반란을 일으켰다. 허종(許倧)·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의 3만 관군이 이원(利原)의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던 이시애는 허유례(許惟禮)의 계교로 잡혀 참형되었다.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조선 영조 때 소론 일파가 일으킨 반란. 1728년(영조 4) 노론(老論)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3월 이인좌 등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격문을 돌리는 한편, 평안병사(平安兵使)· 금군별장(禁軍別將) 등과 통모, 서울· 평양 등지에서 반군에 호응토록 꾀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원로 최규서(崔奎瑞)에 의해 조정에 고변되어 계획은 무너지고 반군은 관군에 패하였고, 이인좌 등 반란군 주모자들이 처형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