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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그날, 찻잔이 하나뿐이었다/안성환

작성자안성환(23회)|작성시간26.06.19|조회수13 목록 댓글 0

그날, 찻잔이 하나뿐이었다/안성환

아내는 1982년 4월 1일, 산청의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집 장손인 나에게 시집왔다. 그것도 6남매의 맏며느리로 말이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대가족 속에서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아내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학위는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만큼은 심리학 박사보다 못하지 않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늘 오래된 투명 찻잔 두 개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머리맡에 둔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아내의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너무도 익숙했던 풍경이다.

그런데 오늘 밤은 달랐다. 찻잔 하나만 꺼냈다. 물도 한 잔만 따랐다. TV를 켜고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예전 같으면 보고 싶은 채널이 달라 실랑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결국 내가 양보하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마저도 우리 부부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채널을 바꾸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편해야 하는데 편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내가 갑상선암 수술을 받는 날이었다. 아내에게는 이번이 네 번째 전신마취 수술이다. 두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았고, 한 번은 임신으로 착각할 만큼 커진 4kg의 물혹을 제거하는 큰 수술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갑상선암 수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수술도 그저 지나가는 일인 줄 알았다. 직장 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의 두려움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은 다르다. 아내가 없는 하루를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다. 4개월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아내는 크게 낙심했다. 늘 씩씩하고 강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말수가 줄었다. 웃음도 줄었다. 수술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깊어져 갔다.

수술 전날 밤이었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나 이번이 네 번째 전신마취야. 혹시 이번에 못 깨어나면 어떡하지?” 그리고는 나보다 먼저 내 걱정을 했다. “당신은 밥도 잘 못 하고, 빨래도 잘 못 하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요즘 갑상선암은 치료도 잘 되고 금방 회복돼.” 하지만 그 말은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내 마음까지 안심시켜 주지는 못했다. 병원에서는 처음에 1인실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는 병원에서 같이 자자고 했고, 나도 옷가지를 챙겨 따라갔다. 그런데 막상 병실에 들어가 보니 6인실이었다. 아내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집에 가서 편하게 자.” 수술을 앞둔 사람은 자신인데 끝까지 남편 보태비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는 찻잔 하나만 놓여 있었다. 거실은 조용했고 집은 텅 빈 듯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온기는 아내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7시 50분.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는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편안하게 잘 받고 와.” 아내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1시간 40분 후. 로봇수술을 마친 아내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마취에서 깨어난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담당 교수님은 수술이 아주 잘 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특별한 날의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매일 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찻잔이었다. 채널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사소한 다툼이었다. 분리수거를 하라고 잔소리하는 목소리였다. 퇴근하면 환하게 켜져 있는 거실의 불빛이었다. 아내가 차려 주는 밥상이었고, 내 건강을 걱정하는 한마디 말이었다. 만약 어느 날 찻잔이 하나만 필요해진다면, TV 리모컨을 두고 다툴 사람이 없다면, 집 안의 불빛이 꺼진 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침에 눈을 떠도 곁에 아무도 없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아내는 내 인생의 절반이 아니었다. 내 삶의 가장 큰 축이었고, 내 일상의 이유였으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행복 그 자체였다. 이번 수술을 겪으며 나는 다시 배웠다. 평생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을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더 깊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 밤도 나는 찻잔 두 개에 물을 채운다. 그리고 그 평범한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조용히 감사한다.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늘 내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그리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여보, 당신이 있어서 내 인생이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남은 시간, 두 개의 찻잔을 함께 채워가며 살아갑시다.”

2026년 6월 18일. 남편 안성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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