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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임진왜란

임진왜란 시기, 세계 정세와 동아시아 3국에 끼친 영향.

작성자태홧강|작성시간26.06.16|조회수5 목록 댓글 0

우리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울산의 땅은, 사실 430여 년 전 세계 역사의 거대한 폭풍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가장 뜨거운 현장이었습니다.
1592년 4월, 한반도를 뒤흔든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과 일본의 싸움만을 보는 게 아니라, 당시에도 지금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1592년의 전 세계’라는 거대한 지도 위에서 우리 울산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리고 이 전쟁이 동아시아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1. 1592년,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을까? (대항해시대)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단독 전쟁으로 보기 쉽지만, 당시 세계는 유럽이 주도하는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고 땅을 차지하던 시기였죠.

유럽의 패권 경쟁과 무역의 활성화
당시 유럽의 절대 강자는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이들은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은(Silver)을 캐내어 전 세계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죠.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아래서 막 힘을 키우며 스페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고, 과학과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유럽의 배들이 아시아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 가톨릭 종교와 함께 아주 무시무시한 물건을 전해줍니다. 그게 바로 ‘조총(화승총)’입니다. 1543년 일본 다네가섬에 난파한 포르투갈 배를 통해 일본에 들어온 조총은, 당시 100년 넘게 내전(전국시대)을 벌이던 일본의 전투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은(Silver)으로 연결된 세계 경제와 글로벌 네트워크
16세기 후반 세계 경제의 핵심 키워드는 ‘은’이었습니다.
스페인은 남미 포토시 은광에서 엄청난 은을 캐냈고, 일본 역시 이와미 은광 등에서 전 세계 은의 30%가량을 생산하는 은 강국이었습니다. 이 은들이 어디로 흘러갔을까요? 바로 명나라(중국)였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모든 세금을 은으로 내게 하는 ‘일조편법’이라는 제도를 쓰고 있어서 은이 엄청나게 필요했거든요. 전 세계의 은이 명나라의 비단, 도자기, 차(Tea)를 사기 위해 중국으로 모여들던 시기였습니다. 즉, 1592년의 세계는 이미 상업과 무역, 그리고 신무기로 촘촘하게 연결된 ‘글로벌 사회’의 초기 단계였던 셈입니다.

2. 전쟁 직전, 동아시아 3국의 속사정
그렇다면 우리 동아시아 삼국의 발전 양상과 속도는 어땠을까요? 세 나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조선: 200년 평화, 문화와 학문의 정점 (국방력 약화)
우리 조선은 성종, 중종, 명종을 거치면서 유교적 법질서와 학문, 인쇄술, 예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서원들이 들어서고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활약하던 문화의 황금기였죠.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큰 전쟁이 없다 보니 국방에는 무뎌져 있었습니다. 
군대 시스템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고, 성벽은 낡아 있었습니다. 
평화가 너무 길었던 것이 독이 된 것이죠.

일본: 100년 내전 종식, 무력과 조총으로 무장한 군사 대국
반면 일본은 달랐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던 ‘전국시대’였습니다. 매일 피 터지는 실전을 치르다 보니 군사 기술과 전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죠. 그리고 이 혼란을 최종적으로 끝낸 인물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고민에 빠집니다. "이제 싸움이 끝났는데, 넘치는 군인들의 힘과 불만을 어디로 돌리지?" 결국 그는 대륙 침략이라는 무모한 야욕을 품게 됩니다.

명나라: 경제적 번영의 이면, 정치적 부패와 쇠퇴의 시작
명나라는 만력제라는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황제가 정치를 정말 안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조참(아침 회의)에 나오지 않을 정도였죠. 경제적으로는 은 무역 덕분에 겉보기에 화려하고 풍요로웠지만, 지배층의 부패와 농민들의 반란으로 속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던 ‘덩치 큰 거인’이었습니다.

3. 1592년 4월, 폭풍이 울산을 덮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가 부산포를 기습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울산은 왜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세 갈래 길로 나누어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그중 동쪽 길(동로)을 맡았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거쳐 간 곳이 바로 우리 울산이었습니다.
왜군에게 울산은 단순한 지나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울산은 동해안을 따라 북쪽(강원도, 함경도)으로 올라가기 위한 핵심 교통 요충지였고, 넓은 곡창지대와 태화강을 품고 있어 군량미를 조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게다가 바다와 접해 있어 일본 본국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기 너무 좋은 항구 도시였죠. 그래서 왜군은 울산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날의 울산
《선조실록》을 보면 전쟁 초기 울산의 참상이 아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을의 수령들은 도망치고, 성은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왜군의 칼날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왜군은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울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죠.

4. 반격의 서막: 울산 의병의 위대한 투쟁
"나라가 우리를 버렸다면, 우리 손으로 이 땅을 지키겠다!" 울산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기억해야 할 ‘울산 의병’입니다.

기박산성에서 울려 퍼진 함성
1592년 4월 말, 전쟁이 터진 지 불과 보름 만에 울산의 지사들이 북구 매곡동에 있는 기박산성에 모였습니다. 이응춘, 신홍춘, 이한남 등 울산의 토착 성씨를 가진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군사를 모으니, 며칠 만에 수천 명의 백성들이 농기구와 죽창을 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정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붓을 잡던 선비들, 그리고 땅을 일구던 농민들이었죠. 하지만 내 고향과 내 부모 자식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쳤습니다.

왜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린 유격전
울산 의병들은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대군이 북쪽으로 올라간 사이, 울산에 남아있던 왜군들의 뒤통수를 치는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경주로 가는 길목, 부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하여 왜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렸죠. 이들의 활약 덕분에 왜군은 울산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늘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5. 전쟁의 막바지, 세계사적 격전지가 된 ‘울산왜성 전투’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가장 잔혹하고 치열했던 전투가 어디서 벌어졌는지 아시나요? 바로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공원 자리에 있는 ‘울산왜성(학성)’입니다. 때는 전쟁의 막바지인 1597년 정유재란 시기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철옹성
명나라 군대의 반격과 이순신 장군의 해상 장악으로 밀려나던 왜군은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버티기 전략에 들어갑니다. 그중 동쪽 끝 방어선이 바로 울산왜성이었습니다. 축성의 대가라 불리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단 40일 만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3중으로 된 견고한 돌성을 쌓았습니다.

조·명 연합군의 총공격과 ‘지옥의 13일’
1597년 12월, 조선의 도원수 권율 장군과 명나라의 총병 양호가 이끄는 5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성안에는 약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의 왜군이 고립되었죠.
연합군은 대포(천자총통(天字銃筒), 불랑기포(佛郞機砲))를 쏘며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외성을 깨부수고 왜군을 본성(내성)으로 몰아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성이 너무 견고하여 마지막 고지를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성안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굶주림의 지옥이 시작됩니다.

"말을 잡아먹고, 성벽의 흙을 끓여 먹었다"
당시 울산왜성 안에는 우물이 없었습니다. 태화강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연합군이 물길을 완전히 끊어버렸기 때문이죠. 게다가 한겨울이었습니다. 왜군들은 극심한 추위와 갈증,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왜군들은 탈 수 있는 나무는 다 때워서 불을 피웠고, 군마(말)를 죽여 그 피로 목을 축이고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성벽의 흙을 긁어내어 말 피에 섞어 끓여 먹기까지 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자신도 할복(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한계에 다다랐을 때, 부산과 서생포에서 왜군의 구원병이 도착하면서 결국 연합군은 후퇴하게 됩니다. 이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처절한 공방전이었으며, 왜군에게 ‘조선 전쟁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공포와 절망을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삼국에 끼친 거대한 영향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이 철수하면서 7년의 대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① 조선: 국토의 황폐화와 문화재 약탈, 그리고 ‘도자기 전쟁’
7년 동안 전쟁터가 된 조선의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구의 엄청난 수가 사망하거나 일본으로 잡혀갔고, 경복궁, 불국사 등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습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우수한 기술자들을 집중적으로 납치해 갔습니다. 대표적인 이들이 도공(도자기 만드는 장인)들입니다. 당시 일본은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낙후되어 있었는데, 울산과 남해안 일대에서 수많은 도공을 잡아갔습니다. 이들이 일본에 정착해 만든 도자기가 훗날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일본은 엄청난 부를 쌓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사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 기술을 통째로 도둑맞은 아픈 역사입니다.

② 명나라: 무리한 파병으로 인한 파산, 그리고 여진족(청나라)의 부상
명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수많은 군대와 엄청난 비용을 썼습니다. 안 그래도 속으로 곪아가던 명나라 재정은 이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바닥이 나버렸죠.
명나라가 조선에 신경을 쓰는 사이, 만주 벌판에서는 여진족(누르하치)이 무서운 속도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몇십 년 만에 명나라는 멸망하고, 여진족이 세운 청(淸)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됩니다. 임진왜란이 중국의 왕조 교체를 앞당긴 셈입니다.

③ 일본: 정권 교체(에도 막부의 시작)와 문화적 대도약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정권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그 뒤를 잡은 인물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그는 도쿄를 중심으로 ‘에도 막부’ 시대를 열며 조선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탈해 간 수만 권의 책과 활자, 그리고 도공들을 통해 성리학, 인쇄술, 도자기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쟁은 조선이 치렀는데, 문화적 보너스는 일본이 챙겨간 꼴이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픈 대목입니다.



7. 이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중구의 학성공원(울산왜성), 북구의 기박산성, 그리고 울주군의 서생포왜성은 그냥 오래된 돌덩어리가 아닙니다. 1592년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던 대항해시대의 거대한 파도가, 은과 조총이라는 글로벌 네트워크가 우리 울산이라는 땅에서 격렬하게 부딪혔던 역사적 증거물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죠. 200년 평화에 취해 국방을 소홀히 했던 조선의 조정처럼, 우리도 평화와 풍요에 취해 위기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울산은 예로부터 국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 나라를 구했던 ‘의로운 도시’였습니다. 
그 피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울산 시민들의 몸속에도 고스란히 흐르고 있죠. 이러한 자부심을 잊지 말고, 위와 같은 대단한 울산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 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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