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태화동 일대에는 신라시대에 태화사(太和寺)라는 대 가람이 있었던 자리다.
자장율사는 시라 제28대 진덕여왕 때의 중이다.
귀족인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의 아들로 태어난 김선종(金善宗)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가슴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그러자 마침내 석가모니의 탄신일인 4월 초파일에 그를 낳았다.
일찍이 양친을 여이고 속세가 싫어져서 처자를 버리고 불가에 귀의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세워 홀로 수도에 정념하였다.
그 당시 나라에서는 대보(臺輔)라는 높은 벼슬자리가 비어서 임금은 그를 여러 번 불러 벼슬자리에 오르도록 분부했으나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왕이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끝까지 응하지 아니하고 수도에만 열중한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자장의 뜻을 굽힐수 없음을 짐작하고 불가에 귀의함을 허락하고 말았다. 자장은 그때부터 불교 중흥에 힘을 기우려 여기 저기 절간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한 사찰이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의 서쪽에 높이 솟은 신불산 기슭에다 간월사를 세웠다.
대 가람으로서 웅장한 대웅전에 모셨던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370호로 지정받아 오늘에 전한다. 또한 2기의 탑은 비록 도괴가 되었고 파손도 되었으나 기단석, 탑신석, 옥개석 등의 정교한 조각수법은 현대미술조각도 능가하기 어려우리 만큼 훌륭하다.
사찰은 역대의 병란으로 파괴되고 말았으나 축대며 주초석의 규모로 보아서 대 가람이였음을 역역히 증명해 주고 있다.
자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5년(636년)에 그의 제자 실(實) 등 10여명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들어가 8년간이나 불경을 연구한 끝에 장경(藏經( 한부와 불법에 필요한 여러가지를 입수하고 돌아와서 신라 불교 중흥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자장의 일행이 당나라 오대(五臺)를 떠나 태화지(太和池) 가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백립(百粒)과 불아(佛牙)및 홍가사(紅袈娑)를 주면서 해동신라국으로 돌아가거든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라고 당부하였다.
자장은 이같은 당부를 듣고 떠나려는데 태화지에 살고 있는 용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해동 신라국에는 나의 작은 아들이 살고 있으니 내 아들의 식복(食福)을 빌어주는 절간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다. 자장은 문수보살과 태화지 용의 청을 모두 수락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신라로 돌아온 후에 문수보살과 태화지 용의 간청대로 여기 저기에 절간을 세워 신라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양산 통도사를 지었고, 황용사 탑을 세웠으며, 울산 태화사를 지었다.
문수보살이 준 석가모니 진신사리 백알을 3등분해서 황룡사탑과 울산 태화사 부도와 양산 통도사 계단에 각각 나누어 봉안하였다.
자장율사가 세운 울산 태화사는 양산 통도사에 못지않는 대 가람으로 신라 10대 사찰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당나라 태화지의 이름을 따서 태화사라고 명명하고 태화사 앞으로 흐르는 강을 태화강이라 불렀다. 그리고 태화지 용의 작은 아들 용이 편안하게 머물게한 곳이 지금의 태화교 웟쪽의 속칭 용금소를 황용연(黃龍淵)이라 명명하였다.
지금도 태화동 일대의 밭이나 집터에서는 신라 시대의 토기편과 기와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부도들이 세워졌던 골짝을 부도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같이 유서 깊고 유명하던 태화사의 대 가람은 역대의 병란으로 파괴되고 회진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고려 제 6대 성종대왕은 영남지방을 두루 순행한 후에 이곳 울산에 당도하여 이 누각에 올라가보니 강벼랑 위에 우뚝솟은 누각 경관이 과연 장관이요, 절경이라고 감탄했다. 벼량 아래로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태화강에는 고기떼들이 뛰놀고 강 건너 장춘오(藏春塢)에는 우거진 해죽림(海竹林) 사이에 산다(山茶)를 비롯한 오색찬란한 꽂들이 피어 있고 동남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 넘어로 울산만이 안중에 들어오는데 동해의 창파가 밀고온 잔잔한 물결 위에는 한가로히 갈매기 떼가 날으고 있으니 천하 제1경이라고 찬사를 남겼다.
저절로 시상이 떠오르고 상쾌하기 이를데 없는지라 왕은 산해진미로 차린 술상을 대하여 신하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는데 악공들의 풍악소리에 관기들의 노래와 춤이 더 한층 흥을 도도하게 하고 말았으니 왕과 신하들은 아름다운 경관에 취하고 산해진미에 취하고 천일주 연엽주에 취하고 흥겨운 풍악에 취하고 선녀같은 관기들의 노래와 춤에 취하여 한바탕 더덩실 춤을 추며 즐겼다.
이때 마침 성종대왕의 행림을 환영하기 위하여 사방에서 운집해온 향민들은 조심스럽게 누각의 아랫쪽에 부복하고 하해 같으신 성은에 감사하고, 왕의 만수무강을 축수하였다. 그런데 누각 아래로 흐르는 태화강 물에 큰 해어(海魚) 한마리가 난데없이 화닥딱 치솟아오르더니 물가의 백사장에 툭 떨어져서 꿈틀거리지를 않는가. 이를 본 한 향민은 얼른 뛰어가서 이 고기를 붙들어 부둥켜 안았다. 대왕마마가 납시었다고 동해용왕이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입을 모아 기뻐하면서 이 고기를 가납하였다. 즐거운 한 때를 이 누각에서 보낸 성종대왕 일행은 곧 고려 서울인 송도(개성)으로 환궁하였다 울산 태화강에서 생포한 고기도 송도로 운반되어 왕과 신하들이 귀한 선물이라면서 나눠먹은 것이다. 그런데 왠일일까 그날로부터 성종대왕은 병석에 드러 눕드니 영영 회복하지 못한채로 승하하시고 말았다.
성종대왕이 이같이하여 승하하자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고기는 선물로 바친 것이 아니고 동해용왕이 대왕을 환영하는 특사로 보낸 것을 속세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잡아먹었으니 동해용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이 승하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렇지 아니하고 그 고기를 도로 강물에 넣어 살려 보냈으면 성종대왕이 승하하지 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으면 그 반대로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나게 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종대왕에 얽힌 이같은 일화를 지닌 이 누각은 그후 이 고을을 다스리기 위하여 부임해 온 역대의 수령방백들도 이 누각의 아름다운 경관에 놀라고는 수축하고 단장을 하니 울산 고을을 찾아드는 귀빈들의 영비관으로서 안성맞고 없어서는 안될 공청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후 누각은 태화루(太和樓)라고 명명되어 전국 경향 각지의 시인 묵객들이 태화루를 찾아 주옥같은 시영(詩詠)을 남겼으며, 이조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술하는 등 우리나라 근세 사학계의 거성이던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은 진주촉석루, 밀양 영남루도 좋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누각은 울산의 태화루며, 태화루는 영남의 제1경이라고 극찬하고 친필로 태화루 기문을 짓고 태화루 현판을 써서 걸었다.
이렇듯 훌륭했던 태화루가 이조 제14대 선조 25년 4월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하여금 그만 불타고 파괴되었다.
태화루가 한창 불타고 있을 때, 이 고장의 한 향노(鄕老)가 와보니 그토록 훌륭했던 태화루가 왜병들의 방화로 불타고 있음을 보고 애석해 통곡하고 왜국의 야수적 만행을 통분하면서 당에 떨어진 태화루 현판을 걷우어 집으로 달아왔다. 향로는 현판을 곱게 닦아서 정성껏 포장하여 장속에 소중히 간직하고는 자손들에게 현판의 귀중성을 설명했다. 그후 가문의 후손들은 마치 가보처럼 현판을 소중히 소장하면서 세월은 흘렀다.
그후 이조 제18대 현종 8년(1667) 불타버린 객사(客舍) 학성관(鶴城館)을 부사 유지립(柳志立)이 중건하였고 이조 제12대 영조47년(1771)에 다시 불탄 것을 영조 51년(1775) 부사 윤득림(尹得霖)이 중건했는데 이조 제23대 순조 31년(1831)에 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된 것을 그해 여름에 부사 민치문(閔致文)이 또 중창을 했다.
정청육간, 동헌 육간, 서헌 육간이였다. 그 위치는 부사청(경찰서자리)의 동쪽인 지금의 울산초등학교의 자리다. 이 학성관의 남쪽 문루를 웅장하게 세웠는데 이 문루에 누명을 지어 현판을 올리려고 의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태화루 현판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 문루에 새로운 누명을 지어 현판 할 것이 아니라 우리조상께서 임진왜란때 거두어 둔 태화루 현판이 지금도 그대로 우리집에 소장되어 있으니 그 현판을 이 문루에 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뜻을 모으고 그 현판을 가져다가 이 문루에 걸었다.
이때부터 학성관 남문루는 태화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후 우리나라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왜정 36년의 악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본은 합방 후 우리나라 도처에 학교를 세웠다. 이때 울산 보통학교를 학성관으로 정하고 여기서 교육을 실시했다.
그 후 1934년 8월18일자로 학성관 건물이 헐리고 현대식 학교 건물로 개축되었다.
학교명칭도 보통학교에서 심상 소학교로 되었다가 다시 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학교 건물이 현대식으로 개축되고 다시 운동장을 확장하게 되었을 때 남문루인 태화루 아닌 태화루가 헐리게 되었다.
이때 헐린 이 문루의 재목은 학성이씨 월진파의 제실 개축용으로 쓰이게 되어 지금 남산입구에 있는 이휴정(二休亭)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때 사가 서거정의 친필인 태화루 현판은 이휴정으로 옮겨져서 소중하게 소장되고 있는 것이다.
울산 공립학교를 다닌 이 고장 사람들은 태화루라고 쓰인 현판 걸린 문루 아래로 책보따리를 머ㅔ고 다녔으니 태화루는 울산초등학교의 정문 자리에 있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본시의 태화루는 태화사의 남쪽 종루각을 보수 단장하여 태화루로 명명한 것이며 그 위치는 황룡연 북쪽 돌벼랑 위인 지금의 로얄예식장이 서있는 자리에 있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태화루의 현판은 지금으로부터 약 5백년 전의 것이며 사가 서거정의 친필로서 울산의 문화재인 것이다.
<자료참조> "울산의 전설과 민요" 울산문화원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