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민(朴濟敏)은 1919년 7월 24일, 경상남도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38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사범학교 재학 당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에 전극 전개하였다.
1939년 일제가 전시 동원 체제의 일환으로 ‘근로보국대’라는 이름하에 학생들에게 노동을 강요하였을 때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경부선 철도의 복선 공사에 동원되었다.
일하는 도중 한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반일적 행동을 보이자 학교 당국은 관련 조선인 학생을 가려내 퇴학 및 정학 조치를 취했다. 사건을 계기로 대구사범학교의 학생들 비밀결사대가 조직적으로 만들어지 계기가 되었다.
대구사범학교생들은 교내에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의 3개비밀조직을 결성한다. 이들은 항일의식을 고취, 민족의식 앙양과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 결사대였다.
이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여 각기 전문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1940년 1월 비밀 문예작품지 《반딧불》을 발간하였고, 그해 2월 박제민(朴濟敏)은 교내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에 가입하여 농업부의 책임을 맡아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졸업 후, 1941. 4. 경주 하서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부모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박제민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연구회(硏究會) 조직에 보고하였다. 이때 우송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였다.
1941년 여름, 문에부의 비밀지《반딧불》이 대전에서 일본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조직, 일명 ‘대구사범학교 독서회’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해 7월 가담자 박제민(朴濟敏)을 포함하여 35명이 붙잡혀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박제민(朴濟敏)은 미결수로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0월 6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출처> '울산보훈처' ''국가 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