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한국축구, 첫 골의 주인공 최성곤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절, 축구로 우리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 이름은 최성곤! 그는 ‘그라운드 표범’ ‘아시아의 준족’이라 불리며, 자신의 학교 보성고보를 여러 차례 우승으로 이끌며 축구로 식민지의 설움을 씻어내며 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이는데 앞장섰다.
최성곤(崔聖坤)은 1922년 5월 6일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에서 태어났다. 1935년 울산공립보통학교(現 울산초등학교) 25회로 졸업하고, 그해 보성고보(중학)에 입학하여 축구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보성고보는 축구명문 학교로 최성곤이 재학 시기에 보성고보는 우승기록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조선에서 열리는 대회뿐만 아니라, 일본 대회까지 나아가 우승했다. 1940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주최 제22회 전 일본 중등학교 축구대회에서 결승 올라온 고베(神戶) 삼중(三中)을 4대0으로 물리쳤다. 이때 최성곤은 5학년이었다. 1941년 3월에 제 32회로 보성고보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게 된다.
1945년 해방 후, 최성곤은 조선전업 소속 축구 선수로 활약했고, 상해, 홍콩,사이공,마카오 등 해외원정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울산에선 그를 위한 응원가까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장백산의 성난 범도 겁나지 않고,
동해바다 뛰는 용도 무섭지 않다.
대동반도의 역장사
우리 울산 축구 선수, 너 몰랐더냐.“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은 정부수립 전에 태극기를 달고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이었다. 이때 한국축구는 올림픽 축구 8강 진출을 이루는 신기원을 수립하였다.
1947년 올림픽 대표팀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정상급 팀은 조선전업, 인천조우, 연희대학, 고려대학, 동국대학이었는데 이들 팀 간에 선발전을 벌려 45명 추보를 선발했다. 다시 2차 선발전을 열어 26명을 뽑았고, 이들을 홍백 팀으로 나누어 2차례 선발전을 치러 16명의 대표단을 확정했다.
감독 박정휘, GK 차순종.홍덕영, FP 박규정.박대종.이시동, HB 최성곤.민병대.이유형.김규환, FW 우정환.배종호.정남식.김용식.정국진.안종수.오경환 이었다.
최성곤을 포함한 10명이 조선전업 소속이었다. 축구 대표팀의 평균연령은 30세를 넘었고, 대표팀 선발에 따른 불평불만으로 서울을 출발할 때까지 합동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각기 소속팀에서 훈련하거나, 뜻맞는 선수끼리 훈련하였다고 한다. 체육회는 감독 없이 가라고 지시하여, 16명의 선수만 런던으로 출발했다. 런던에서 감독은 이영민이 맡았다.
1948년 8월 2일 멕시코와 첫 경기가 런던 남부의 참피언스 힐에서 열렸다. 한국은 붉은색 상의에 흰색 하의를 입고 있었다. 약체로 평가된 한국은 경기 시작 13분만에 최성곤이 첫 골을 기록했다.
최성곤은 올림픽 축구팀 첫 골의 주인공이란 역사적 기록을 갖게 되었다. 10분 뒤 동점골을 내줬지만, 이후 30분 배종호(1922~1963), 63분 정국진(1917~1976), 66분 정국진, 87분 정남식(1917~2005)이 골을 넣어 5대3으로 첫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8강에 진출한 한국은 8월 5일 강호 스웨덴과 경기에서 0대12라는 치욕의 패배를 당한다. 스웨덴팀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축구팀 첫 골를 기록한 최성곤은 그후 부산 광복동에서 운동구점을 경영하면서, 부산상고 축구팀 코치를 맡았다. 1950년 1월 대한축구협회 경남지부 이사로 재직했으며, 전쟁통인 1951년 12월, 최성곤은 울산 방어진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실종됐다. 일주일 뒤 바닷가에서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치명적인 총상이 있었다. 강도를 만났다는 설과 공비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29세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한편, 그의 영모비(永慕碑)는 중구 복산동 송골에 세워져 있다.
<자료출처>
- 울산박물관 전시자료 ‘축구선수 최성곤’
- 중앙일보 2012.07.20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