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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희춘(蔣希春), 1556∼1618

작성자태홧강|작성시간10.08.03|조회수210 목록 댓글 0

     의병을 일으켜 울산과 경주를 방어

울산에서 태어난 장희춘은 본관이 아산(牙山)이며 자는 인경(仁敬)이다. 그의 호는 성재(誠齋)로서 아버지는 참봉 훈(薰)이며, 어머니는 울산박씨(蔚山朴氏)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경연(李景淵) 등과 의병을 일으켜 박봉수(朴鳳壽)를 대장으로 삼고, 스스로 우익장(右翼將)이 되어 함월산성(含月山城)과 경주 금오산(金鰲山)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8월에서 10월 사이에는 주력부대가 일본으로 철수하고 1594년 까지의 전류병은 약 4만 3천에 불과하고 울산의 서생포성에는 가꼬오의 6천군이 수성하고있었다.

 

이때에 명나라와 일본은 회의를 계속하여 가또오는 경상좌병사에게 글을 보내서 화의 에 관하여 의논 하자는 것이었다.

 

장 희춘은 이때 울산교생(蔚山敎生)으로 있으면서 고언백(高彦伯) 병사의 답서를 가지고 서생포 왜성으로 가서 답서를 전하고 적정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또 사명당 유정(泗溟堂維政)이 1594년(선조 27) 7월6일에 서생포성에서 가졌던 가또와 와의 2차화담에서도 사전에 울산군수 군관(軍官)으로 있든 장 희춘을 보내서 절층하게 되어 화의의 노력에 투신한 외교간(外交官)으로 활약 하였다

 

1594년 전공으로 인하여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용양위 부사정(龍양衛副司正)을 거쳐 부사과에 올랐다.

1596년 제1차 팔공산회맹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방어사 곽재우가 지휘하는 화왕산성에 들어가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1597년 동래·울산·장기 현감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훈련원판관, 이어서 장례원사평을 지냈다.

 

장 희춘이 서생포성에 들어가서 적장과 담판할 때의 일화가 하나 전해온다

적의 주장들과 반복 논변할 때 조리정연하고 당당한 변론에 적의 주장들도 서로 돌아보며 찬탄하여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드리니 장 희춘이 이를 받지않고 말하기를

 '나는 본시 산림인(山林人) 이라 그를 차고 어디 쓰겠오?' 하였다.

 

1606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어 쇄환사(刷還使) 여우길(呂祐吉)을 따라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저서로는 《성재실기》 4권이 있다.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자료출처>  '아산장씨 종친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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