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현 호적대장 (彦陽縣戶籍臺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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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청 內 - 지정일 1997.10.09 - 시 대 조선시대 - 소유자 울산향교재단 - 관리자 울주군청
조선시대에 부세와 요역수취를 위하여 전국적인 호구 파악의 일환으로 언양현에서 동현의 호구를 조사하여 만든 호적이다.
호적은 식년 자, 묘, 오, 유 마다 만들었는데 호적작성시에는 각읍, 면의 감관을 사대부로서 임명하여 이들의 관리하에 각호마다 호구단자 2부를 작성, 이를 이임면임이 모아서 주, 군, 현에 보내게 된다.
군, 현에서는 그 호구단자를 동호적과 비교한 후 1부는 성급호적으로서 호주에게 교부하고, 1부는 호적작성의 자료로 삼게된다. 군, 현에서는 호적을 3부 만들어 1부는 군, 현에, 1부는 감영에, 1부는 호조에서 보관하였으며 이 호적이 세공부과의 기본이 되었다.
호적의 작성은 대개 면단위로 수록되어 면의 호구, 전식년의 원호구, 변동사유9물고, 도망, 이거, 신가입 등)와 그 호구수, 호적작성에 참여한 인원(풍헌, 약정, 별유사, 서원, 감관 등)이 기록되며, 호적에 따라서는 물고질(사망자와 그 면명)이 거이래질(이래지와 성명, 이거지와 성명)이 수록되기도 하며, 책 끝에는 직역별 구수집계와 승호의 사찰별 구분 기록이 있다.
각 호의 기재방법은 호주의 직역 신분과 성명, 연령, 생년, 본관, 부, 조, 증조의 직역, 외조의 직역 성명 본관, 처의 성 신분표시호칭(○씨, ○성, ○등) 연령 생년(간지) 처의 사조, 동거식구(모, 제, 자, 여 등) 이름, 나이, 생년, 거주지(외거노비의 경우) 변동상황(매득, 도망 등)을 기재하며, 천인의 호주인 경우도 동일한 형식에 준하되 사천인 경우는 주인을 기재한다.
현존하는「경상도언양현호적대장(慶尙道彦陽縣戶籍大帳)」은 모두 8式年分 10冊으로 아래와 같이 알려져 있다.
肅宗 37년(1711) 辛卯式 1冊 79×57cm 全邑 前面上部 12校腐飾表紙 麻布 蔚山郡
正祖 19年(1795) 乙卯式 1冊 51×36 天(川北三面) 良好 韓紙 蔚山郡
正祖 22年(1798) 戊午式 2冊 51×36 天, 地(全邑) 良好 韓紙 蔚山郡
純祖 13年(1813) 癸酉式 1冊 51×36 地(川南三面) 良好 韓紙 蔚山郡
純祖 25年(1825) 乙酉式 1冊 44×28 上北面六里 良好 韓紙 정인태
哲宗 9年(1858) 戊午式 1冊 44×28 地(川南三面) 良好 韓紙 정인태
哲宗 12年(1861) 辛酉式 2冊 49×29 天, 地(全邑) 良好 韓紙 정인태
위의 호적대장 중, 울주군청(5식년 6책)과 정인태씨 소장분(2식년분 3책) 등 모두 7식년분 9책이 일괄해서 학계에 발견된 것은 1982년 4월의 일이었다. 당시 부산대학교 한국사 담당교수인 김석희(金錫禧)박용숙(朴容淑)채상식(蔡尙植) 3인이 현지 답사를 통해서 울주군청(언양향교 소장본), 상북면 향산리(능산마을) 정인태(鄭寅泰 : 본관 東萊, 병자호란 순절 義士 증선무랑호조좌랑 鄭大業 宗孫)씨 댁에 흩어져 있던 9책을 발굴한 것이 학계의 연구자료로서 처음 이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자료는 1988년 10월 초순 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발행인 金容俊)의 이름으로 도서출판 민족문화(부산 남구 대연6동)에서 영인(影印)합본(合本)하여 해제(解題 : 김석희 교수)를 붙혀 한국문화자료총서(I)로 출간했으니 그 이름은「慶尙道彦陽縣戶籍大帳」(上)(下)이다.
영인, 출간된「언양현 호적대장」은 18세기 초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약 150년에 걸친 것이며, 이 가운데 전 고을(全邑)의 기록이 완질(完帙)로 온전한 것은 1711년(신묘식), 1798년(무오식), 1861년(신유식)의 것 3질 뿐이다.또 최근(1999, 5)에 (천주교)부산교회사연구소가 발간한「朝鮮後期 彦陽의 鄕班 昌寧成氏 家門과 天主敎 受容者들 그리고 이에 관한 古文書」(李勛相孫淑景 공편)의 부록으로 새로 발굴 영인된 <慶尙道彦陽縣丁酉式戶籍大帳>(1777 : 정조 1년)도 온전한 것이다.
나머지의 것은 일부(全六面 가운데 1면 또는 川北(또는 川南) 3개 면 등)만 남아 있는 불완전한 것들이다.
1777년(정조 1년) 정유식(丁酉式) 호적대장(全帙, 1식년분)은 전술(前述)한 바와같이 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서 한국문화자료총서로 이미 영인출간(1988. 10)된 것에서 빠진 부분으로, 경주시 황오동(皇吾洞)에 거주하는 최상은씨가 소장한 것인데, 1990년 동아대학교의 이훈상(李勛相) 교수와 당시 대학원생 민선희, 방현주, 손숙경 등의 현지조사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이「언양현 호적대장」은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지방의 호적대장보다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들 수가 있다.
첫째, 이 호적대장은 18세기 초(1711)에서 19세기 후반(1861)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간에 걸쳐서 누차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중 7-8회에 걸쳐 작성된 것이 소장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하나의 행정단위인 현(縣) 전체의 상태를 담고 있는 호적대장이라는 점이다.
셋째,「언양현호적대장」은 기왕에 알려진 타군현 호적대장과는 달리 호당(戶當) 인구수가 매우 많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넷째,「언양현호적대장」에는 협인(挾人 : 俠人 : 夾人)으로 파악되는 인구가 조사.기재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자료참조> '역사와 문화의 고장 언양' -최철근 홈페이지(www.eon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