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래 동물의 한 분류였다.
동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날것의 본능과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감성이다.
눈앞의 공포에 도망치고, 작은 자극에 분노하는 것이 동물의 본성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끊임없는 교육과 성찰을 통해
그 동물적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을 장착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냥개가 본능적인 흥분에 휩쓸리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처럼,
인간 역시 감성에서 멀어지고 이성적 사고를 체화할 때 비로소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가 그토록 고생스럽게 멀어져 왔던 그 날것의 감성의 세계로
현대인들은 자꾸만 퇴행하고 있다. 세상에는 전혀 감성적이지 않고 냉혹하리만치 악랄한 이성을 가진 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중의 감정적 약점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교묘한 ‘감성의 트랙’을 설계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나치의 광기나 중세의 마녀사냥,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수많은 선동과
‘선택적 슬픔’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이 감성의 덫이 있었다. 사물의 인과관계를 따져보는 성찰의 단계를 완전히
생략해버린 대중은, 광장에 모여 다 함께 분노하는 집단적 광기를 ‘정의’라고 착각한다.
스스로 자유롭다 믿지만, 실상은 악랄한 자들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트랙 위에서 춤추는 가장 비참한
예속 상태일 뿐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외부 자극에 그대로 흔들리는 상태를 ‘감정의 노예’라 불렀다.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사물의 이치와 원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자극적인 슬픔과 선동의 파도로 출렁일지라도, 나는 사물의 인과관계와 자연의 필연적인 이치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사람이고 싶다.
내 알맹이보다 커 보이기 위해 삶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복잡함을 버리고, "모른다", "이것이 나의 전부다"라고
툭 내놓는 정직한 단순함을 무기 삼아 살아갈 것이다. 내 능력만큼만 욕심내고, 내 그릇만 큼만 담아내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온전한 주권을 쥔 자립의 삶을 완성할 것이다.
감성에서 멀어질수록 삶은 명징해지고, 이성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이 당연하고도 서슬 퍼런 진리를 품고, 나는 오늘도 흔들림 없이 나만의 길을 걷는다.
거짓의 미궁과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걸어 나와,
내 안의 이성이라는 단단한 방파제를 믿고 가볍고 소박하게,
그러나 가장 품격 있게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