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동>
답동성당 맞은편 재래시장에 있는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川)가 있으므로 순 우리말로터 진개 또는 탁포라 하였다.
(지형의 특징으로 이름을 정함)
한편으로는 신포동이란 이름은 「터진개」의 의미에서 개포동이란 뜻에서 취하고새릅게 발전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이 동네는 개항 후 생겼는데, 구한말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한 마을이 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중에 지금 신포동의 일부인 사동지역 3만여 평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앞바다를 매립해 생긴 땅이다.
개항후 외국인들이 몰려와 조계가 생기고 각종 건설공사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창고나 하차장을 만들기 위해 넓은 땅이 필요해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바다를 매립하게 된 것이다. 1914년 4월 1일부터 일인들에 의해 일본식 동명의 이름으로 신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정은 유곽촌을 뜻하데 일정 때 지금의 답동성당과 인천여상 부근에 일본인 여자들의 사창가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동명 개칭에 의해 신포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신포」는 말 그대로 「새로운 포구」라는 뜻이었지만 일제가 1910년부터 바다를 매립해 지금의 항동까지 육지화했기 때문에 현재는 바다와 완전히 분리된 동네가 되었다. 그후 1977년 5월 10일 시조례 제1075호(1977.4.18)로 법정동인 사동, 신생동, 신포동, 답동 등 네 개 동을 합하여 신포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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