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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의 빛과 소금이신 마리아

작성자저녁노을|작성시간26.06.08|조회수3 목록 댓글 0

교회의 빛과 소금이신 성모 마리아

1열왕 17,7-16; 마태 5,13-16 /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2026.6.9.

 

  어제 들으신 복음인 진복팔단의 말씀에 이어 오늘은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가 쓰여진 지 20여 년이 흐른 후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 마르코가 전하려던 메시지, 즉 십자가에 달리어 죽음의 희생을 바치고자 했던 메시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알 수 없고 또 바로 그 십자가의 삶 속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담겨 있다는 메시지가 공유되어 가고 있을 무렵에, 이 메시지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마태오는 그 동안 신자들의 공동 기억을 통해서 취재한 예수님의 말씀을 집대성했는데 그 첫 번째 설교가 산상설교였고 그 첫 가르침이 진복팔단에 이은 소금과 빛의 말씀이었습니다.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금이 되셨던 분이셨는가 하면 그런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현실 즉 하느님 나라를 땅에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 빛이 되어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당신을 본받아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을 여러 가지 상, 즉 금상이나 은상 또는 석상으로 만들어 놓고 예배하기도 하는 바람에 모세는 하느님의 상을 만들지 말라고 엄히 일러 놓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에 아랑곳 없이 온갖 상을 만들어 우상을 숭배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보지 않고는 도무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하느님을 알아보는 방식을 제시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는 이들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믿는 이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세상에 하느님을 보여주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에 의하면, 그리고 마태오가 강조하고자 한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는 지상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를 ‘대조사회’(對照社會)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시켜 말씀하실 때 시돈 지방 사렙타의 한 과부를 선택하시어 표징을 보여주신 일화를 전합니다. 그것은 큰 가뭄이 들었던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유독 그 과부의 집안에서는 단지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도 마르지 않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표징을 보여주신다는 것, 그리고 그 표징에 담긴 보편적 구원의 의미를 백성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어 땅을 썩지 않게 하고 빛이 되어 세상을 어둡지 않게 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땅에 비유되는 인류가 부패되지 않게 막는 소금과 세상에 비유되는 인간 사회가 어둡지 않게 비출 수 있는 빛이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이래 선포된 복음의 실체가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두 가지가 인간 양심의 부패와 오염을 예방해 주는 기능과, 인간 사회의 타락과 분열을 방지해 주는 기능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부활 신앙이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소금 역할을 하는 이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관계는 부활 신앙이라는 목표와 기준 그리고 기운이 주어지지 않으면 흔히 죄에 기울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새 인간이라는 이 부활 신앙의 목표와 기준이 사람들을 새 인간으로서 새 삶을 살아갈 기운을 줍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네 인간관계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줄 수 있지만 부활 신앙이 없거나 희미하면 우리네 인간관계는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 등 온갖 이익과 편함을 주는 힘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이 들어오시지 못하면 결국 마귀가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힘과 돈과 쾌락을 좇아가도록 조종함으로써 결국 죄를 짓게 하는데, 여기에 인생의 비극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뿌리내리고 성령께서 들어오시면 사람들의 마음이 마치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물처럼 세상의 죄악이 들어와도 썩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토록 많은 가르침을 듣고도 믿음이 흔들렸던 제자들의 중심을 바로 잡아 주셨고, 아예 믿음이 없었던 친척 형제들을 타일러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자리에 모이게 만드신 역할도 분명한 소금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다음, 공동생활 양식이 우리의 사회활동에 있어서 빛이 되는 이치를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이 공동체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부활 신앙에로 이끌릴 것과 사회의 제도와 운영 방식 또한 공동선에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공동선이 위협받게 되고 따라서 공동체는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공동체와 공동선은 빛이요 그렇지 못한 모든 것은 어둠입니다. 이는 누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닙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은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 들어옵니다.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존재하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이 아니라 아직 선을 이룩하지 못해서 악이 남아 있는 것이고, 진리와 오류가 있는 게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가 오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카나 마을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역할, 즉 사람들의 필요와 공동선의 요청을 헤아려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뜻에 따르게 한 전구자(轉求者)로서의 역할은 분명 빛의 역할이었습니다. 아직 어느 누구도 혼인 잔치의 상황을 짐작하지도 못하고 있었을 때, 포도주가 떨어진 사정을 센스 있게 파악하고 예수님께 청하셨으며 그분이 미처 마음을 정하지도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사람들에게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라고 분부하신 역할은 매우 돋보이는 빛이었습니다.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이라는 목표와 기준이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통하여 소금과 빛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조차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친척 형제들의 불신을 성령 강림을 기다릴 정도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고, 또 예수님조차 내켜 하지 않으셨지만 혼주의 난감한 처지를 조용히 해결하고 마는, 이런 역할이야말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감당하신 소금과 빛의 역할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를 선택하신 것처럼 성경 안에서 성모 마리아와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선택적으로 보여주신 표징은 비록 적어도, 그 과부의 집안에 일어난 표징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믿는 이들을 통해 보편화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모 마리아께서 인간관계의 소금과 공동선을 위한 빛의 역할을 수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에서 행해야 할 역할도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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