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예언자, 예리야
집회 48,1-14; 마태 6,7-15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2026.6.18.
오늘 독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회고하는 집회서의 기록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1열왕 21,17-19 참조) 불처럼 일어선 삶에서 그는 횃불처럼 타오르듯이 열정적으로 임금 아합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집회 48,5-9 참조) 이렇듯 뜨거웠던 엘리야의 열정이 절정에 달했던 때가 카르멜산에서 4백5십 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했을 때입니다.(1열왕 18,20-39 참조) 집회서의 저자가 6백 년 전의 인물인 엘리야에 대해 이런 후한 평가를 내리면서 특히 그가 생을 마치고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았다고 기억한다는 것은, 후대 유다인들이 예언자들 가운데에서도 엘리야가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선용하여 자신의 생애를 천상적 가치로 들어 올림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타볼 산에 올라 제자들에게 거룩한 변모의 기적으로 보여주셨을 때에도(마르 9,2-10 참조) 그는 모세와 함께 소환되었던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에 대한 상징으로서 불이 지니는 숨은 뜻은 물이 성경 안에서 지니는 뜻과 비교하면 잘 드러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알려주는(창세 1,1-24 참조) 성경은 또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가 하도 많아서 물로 심판하셨다고 전해줍니다.(창세 6-8장 참조) 이 사건은 지구가 창조된 이래 가장 큰 격변이었습니다. 대홍수에서 방주를 만들어 살아 남은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지구의 기후와 환경도 급격하게 달라졌습니다. 한처음보다 크게 악화된 이 기후와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은 전 지구상에 퍼져 민족과 나라를 이루고 문명을 일으켜 왔습니다. 그런데 대홍수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어서, 이제 앞으로 하느님께서 ‘물의 심판’에 이어서 ‘불의 심판’을 내리실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 심판의 재앙도 어마어마했지만, 불 심판의 재앙도 이에 못지않게 파괴적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은 대홍수로 일어난 심판의 역사적 사실(史實)마저도 무시하고 있지만, 사실 종말과 불의 심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예언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 그러니 깨어 있어라. …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36-39.42.44)
물로 세례를 주었던 요한은 예수님께서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 이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경고하면서 ‘성령과 불’ 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언한 한 바 있습니다(마태 3,11-12).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라지에 비유하시면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마태 13,40)인데, 그 정황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천사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1-43)
이처럼 예수 재림으로 진술된 심판은 분명히 예고된 바 있으며, 그 심판이 불로 인한 것임도 명확하게 경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불의 심판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악인들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재앙일 수밖에 없겠지만, 노아처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의인들’(마태 13,43)에게 이 불은 이 죄 많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퍼뜨리는 ‘사랑의 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불의 세례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그러니까 ‘사랑의 불’은 십자가의 희생, 즉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실행하는 데 따르는 희생을 뜻하는 것이었던 셈이고, 이 십자가는 물의 심판에서 노아 일가를 구해 낸 ‘방주’를 연상시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대홍수로 심판하시면서도 이 재앙에서 구하시려던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당부하신 것처럼,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예외없이 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신 바가 있는데, 십자가는 부활의 조건인 동시에 그 자체가 부활의 과정임을 가르치셨습니다(마르 8,31; 9,31; 10,33-34 참조). 이와 동시에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이유와 목표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으니,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의 기도’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가 이 주의 기도에 표준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엘리야처럼 몰입하는 열정가가 있는가 하면,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바리사이들처럼 빈말로 떠벌리는 위선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담긴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위선자가 아니라 열정가를 본받아 실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주의 기도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계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주의 기도 전반부에 나오는 세 가지 찬양 기도, 즉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몰입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 기도문의 후반부에는 네 가지 청원 기도가 나옵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함은, 노동과 경제의 질서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로부터 우리도 용서받기 위한 선결 조건입니다. 그래서 용서란 죄를 끊어버리게 하고 뉘우치는 이웃을 형제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네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서로 경쟁하는 배타적 질서로부터 서로 받아들이는 수락의 질서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이 찬양과 청원으로 이루어진 일곱 가지 지향 가운데 으뜸은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입니다. 이 지향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설교의 대주제이기도 했습니다.(마르 1,15 참조) 그분이 선포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는 이미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오는 나라가 아니요 우리가 노력해서 오게 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향은 엄밀히 말하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알아보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셨고 또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진정한 기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일, 이것이 두 번째 지향의 진정한 의미일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도의 핵심입니다. 자유와 양심의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기울면 하와와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듯이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교만해질 수도 있고, 선으로 기울면 엘리야처럼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일으키거나 바알 우상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주어진 자유를 선용하여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며,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 쓰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란 인간의 자유를 하느님께 주파수를 맞추어서 영적 교감을 이루고 이를 통로로 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 주는 영적 노동이며, 여기에 힘을 보태어 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으로서 인간 자유를 하늘에로 고양시키는 영적 에너지이자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은총을, 엘리야를 회오리 바람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던 불 마차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2열왕 21,11 참조)
교회란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모임이며, 기도로 각성되어 주어진 자유를 선용할 줄 아는 개인들의 연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임이자 연대로서의 교회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키실 수 있습니다. 힘의 크기로만 따지면, 우리 사람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의 권능에는 턱없이 못 미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99%라면 인간 모두의 힘을 합친 크기가 1% 정도 밖에 안된다고 볼 수 있지만, 하느님의 99%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상수인 반면에, 인간의 1%는 매우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변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 없이 당신의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함으로써, 그것도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 기도함으로써 주어진 자유를 올바로 쓰라고 가르치셨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어 그 나라가 다가오게 하는 데에 협조자가 되기를 바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느님의 뜻이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리 세상의 현실은 남용되는 인간 자유의 무대입니다. 숱하게 시행착오를 저지르다가 드물게 성취한 결과가 크게는 인류 문명이며 작게는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특히 중요해 보입니다. 사탄의 유혹도 하느님의 은총처럼 상수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올바로 행사하면 사탄도 인간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운명과 성패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를 성숙시켜서 그 품위를 높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나 우리 주변의 세상 현실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는 지름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심판의 공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는 이들은 엘리야처럼 하늘로 들어올려지는 상이 주어질 것이며, 반면에 하느님을 저버리고 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지는 재앙의 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기도에 나오는 마지막 청원인,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주의 기도에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에 집중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선용할 일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차원과 위계 질서에 따라서 찬미(찬양)와 감사에 바탕하여 속죄와 청원의 기도를 올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