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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금률의 최대한과 최소한

작성자저녁노을|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황금율의 최대한과 최소한

2열왕 19,9-36; 마태 7,6.12-14 /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026.6.23.

 

  오늘 독서의 말씀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서 두 쪽으로 갈라졌어도 왜 열 지파를 거느리고 떨어져 나간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 겨우 두 지파만 남은 남 유다는 나중에 가서야 멸망했는지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우상숭배에 물들어 나라의 공동선이 심히 무너져 있었는데 비해서 남 유다 왕국은 적어도 히즈키야가 임금으로 있는 동안까지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기준을 새로이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산상설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서는 단순히 금 상, 은 상, 석상 등 보이는 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을 넘어서서 믿는 이들이 어떠한 인간관계로써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지가 결정적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선포 활동을 하시던 때는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식민통치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로마의 억압과 착취에다가 이 권세에 기댄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동족 엘리트들까지도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백성의 삶이 고통을 당하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선의 가치 대신에 현세적 권세의 힘을 우상처럼 숭배하던 그들 세 부류의 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개들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하고, 돼지들에게는 진주를 던져주지 말아야 한다.”(마태 7,6)는 말씀을 통해서, 조상들을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받은 신앙과 전통을 보전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세력들의 행태를 본받다가 함부로 오염시키지 말라는 경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마태오가 복음서를 쓸 당시에 개와 돼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비속한 은어였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충직한 동물이지만 주인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복종하는 데다가 툭 하면 다투고 짖어대기 때문에 종종 이방인에 빗대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돼지는 이동하며 유목하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기르기도 힘들었거니와 그 고기는 더운 날씨에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먹기도 조심스러워 멀리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스라엘 백성이 돼지를 처음 접한 때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며 돼지고기를 상에 올리고는 음식으로 먹는 관습을 접하며 자연스레 돼지(고기)=이방인이라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돼지는 식성이 좋아 잡식성이어서 아무 먹이나 먹는 데다가 땀샘이 없어 깨끗하게 씻겨 놓아도 체온을 식히기 위해 진창에 뒹구는 습성이 있어 온몸이 더러워진 채로 지내곤 하였기 때문에 야훼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 신이나 믿는 이방인을 빗대는 소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배교자들을 개와 돼지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2). 

 

  개와 돼지에 빗댄 이 말씀이 외부의 악에 대해서 신앙의 계시를 보전해야 한다는 당부라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말씀은 제자들을 비롯해서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군중이 내부에서 지켜야 할 공동선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금처럼 귀하다고 해서 윤리의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이 가르침의 최대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가 먼저 남에게 해 주라는 것이고, 그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를 끝까지 우리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시 황금률은 수학적인 개념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절에 만물의 근원을 수로 설명하고자 했던 피타고라스는 오각형이라는 도형에서 황금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 비율은 전체 길이 대 긴 부분의 비율이 긴 부분 대 짧은 부분의 비율과 같아질 때 생겨나는 기하학적 원리로서 인간이 눈으로 보았을 때 가장 안정적이고 균형감 있게 느끼는 비율을 말합니다. 이 두 숫자 사이의 비율의  근사값이 약 1.618입니다. 우리 실생활에서 황금 비율이 적용된 사례로는 주민등록증이나 신용카드, 명함 또 엽서 그 밖에도 책이나 모니터 화면, 스크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황금률에 따라서 먼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그분께 우리가 어떠한 지향과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가 이 본문에서 명쾌히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마태 7,8)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엄청난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한 대전제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것입니다. 흔히 신앙인들이 기도로 청하는 지향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공리(公理)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의 가르침에 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가르치셨습니다. ‘좁은 문’이란 폭이 좁아서가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좁아  보이는 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멸망에 이르는 문만 넓게 만들어 놓으셨을 리는 없지요. 물론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림으로써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채워야 할 조건이 엄정하기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고 생명에로 이끄는 길이야말로 구원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비좁아 보이는 문일지언정 그리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22,37) 길이 이것이기 때문이고, 넓어 보이거나 좁아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윤리적인 착시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자녀로서, 진실한 천주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탄의 유혹이 닥칠지라도 죄를 짓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황금률을 공동체 안에서 곧이 곧대로 지키는 신자들에게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더 쉽습니다. 진주 같은 귀한 보석에 비길 수 있는 거룩함의 가치를 함부로 믿지 않는 이들과의 인간관계에 적용하지 말 일입니다. 그보다는 믿는 이들 안에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값진 지혜로 삼아야 합니다. 더욱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이 주간에, 자국의 이해관계에만 골몰하고 있는 주변 4대 강국과의 관계가 아니라, 5천 년을 함께 살아왔고 고작 70년 간 떨어져 살아왔을 뿐인 남녘과 북녘의 동포들 사이에 적용해 봄직한 지혜가 아닐까요? 아무리 북녘의 김정은이 남북을 서로 적대적인 두 나라로 규정하고는 물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또 문화적으로 장벽을 높게 쌓아 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통미봉남'(通美封南) 노선에 매달려온 북측의 태도 역시, 내년에 전시작전권을 남측이 회수하여 자주국방의 역량을 명실상부하게 갖추고 나면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을 지향하면서, 북측의 체제를 인정하고 흡수 통일을 배제하며 적대적 행위를 포기한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 정책의 기조 위에서, 내년 방한을 앞두고 있는 교황 레오 14세의 기도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꽃을 피우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좁은 문을 열어주실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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