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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 세례자 탄생] 민족들의 빛

작성자저녁노을|작성시간26.06.23|조회수2 목록 댓글 0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1-6; 사도 13,22-26; 루카 1,57-80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6.6.24.

 

1. 전례의 취지와 말씀의 초점

한민족의 분단을 결정적이고도 장기간 고착시킨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난 지 76주년을 하루 앞두고, 교회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한 요한처럼,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끔찍한 냉전 구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서 민족이 화해하고 한반도에 평화의 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은 단지 한민족의 숙원을 해결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와 전체 아시아의 평화를 앞당기는 파스카 과업의 출발이 될 것입니다. 

 

 일찍이 메시아의 출현을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는 ‘민족들의 빛’(이사 49,6)이 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이라고 알아보았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도 전이라서 사람들은 그분의 정체는 물론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

 

  요한은 이 메시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이며 “그분은 갈수록 커지실 것이지만 자신은 갈수록 작아질 것”(요한 3,30)이라고 한껏 낮추었습니다. 갈수록 작아진 가치는 정의였으며, 갈수록 커져 갈 가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치가 모두, 이사야와 요한 같은 예언자가 광야와도 같이 '가치'가 메마른 황량한 인류 역사에서 민족들을 진리의 빛으로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의와 사랑의 가치가 어둠을 비추어 인류의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으로 창조하고 ‘사랑의 문명’(간추린 사회교리 결론)을 이룩할 하느님 섭리의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가치와 진리의 빛이 비치기 전, 세상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이 어둠의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대신에 섬기는 이 힘은 우상처럼 군림해 왔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저 의미없이 광야에서 외쳐진 소리가 아니라 평화의 군주이신 메시아를 준비시키는 ‘하느님의 소리’ 였습니다.

 

2.  평화를 위한 메시지

사실 이 힘을 정의롭게 또 사랑을 위하여 쓸 줄 모르는 사이에 인류 사회는 무법천지의 광야처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해 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특히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냉전 구도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이 이를 여실히 입증합니다. 분단의 굴레 속에서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이 이 마지막 냉전 구도를 해체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시적 전쟁으로 위협받고 있는 인류의 평화도 실마리가 풀릴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내밀한 마음 속에 섭리적 질서를 새겨 주셨는데, 이것이 양심을 일깨워 정의와 사랑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 머리말)  이 진리를 현대인들에게 일깨운 인물은 또 다른 요한이었으니, 바로 요한 23세 교황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여 현대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킨 요한 23세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묵상한 듯합니다. 그리하여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선종했으니 이 회칙이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된 셈이었는데,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이 회칙을 내용을 근간으로 공의회 회기 말기에 치열한 토론을 거친 끝에 사목헌장을 반포하였습니다. 

 

  이 회칙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세상의 질서는 조화와 균형입니다”. 이 질서의 기준은 공동선인데 이에 따르면, 책임에서 자유가 나오고, 의무에서 권리가 발생합니다. 개인도 집단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율의 최대한과 최소한을 이 기준에 적용하면,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자유와 권리를 선용하는 것이 사랑의 최대한이고, 적어도 우리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여 다른 이들의 자유와 권리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사랑의 최소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거슬러 책임지지 않는 자유를 내세우고, 의무를 소홀히 한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이 세계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패권을 추구하면, 제국주의 세력이 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국제 질서를 어지럽힌 무리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백 년 전 일제가 조선의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을 때에도, 80여 년 전 남북으로 나라가 분단될 때에도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세력들이 야합하여 결정해 버렸습니다. 민족의 자주와 자결 논리가 짓밟히고 오직 힘의 논리로 움직여지고 있는 한반도의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아직 어둠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빛을 비추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준비하고 닦아야 할 길에 빛을 비추어야 할 때가 지금입니다. 그래서도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하루라도 빨리 회복되어야 합니다.

 

3.  민족들의 빛이 되는 길

어둠의 그림자가 이 시대에 짙게 드리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여 우뚝 서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해서나 국민들의 삶에 대해서 또 민주주의 질서에 있어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라 자유와 권리를 선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시민들 각자가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치를 창조하는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요한과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데에서 가능합니다.

 

  지난 시기에,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대다수 국민들이 시민 의식으로 각성하여 대한민국의 국력을 신장시켰다면, 지배 엘리트들은 아직 그에 한참 못미칩니다. 특히 사법 질서를 농단하고 있는 판검사들과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언론인들의 의식이 시민들의 평균 의식에 한참 못미칩니다. 하지만 ‘국민주권 정부’를 내세워 지난 한 해 동안 민주주의 질서를 회복시켜 온 현 정부가 내란의 완전 극복과 ‘대체불가 대한민국’이라는 국정 목표를 실현하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사법 질서도 언론 질서도 시민 의식에 의해 정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 각자가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을 정의와 사랑의 가치에 있어서도 살아가면, 우리 교회도 민족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머지않아 민족의 화해와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그 날이 오면 우리 민족이 인류를 위한 민족들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미 세계 유수한 대학의 석학들이 그러한 밝은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인 공감을 불러 오고 있는 한류가 그러한 전망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 근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 약했을 때 중국은 상전 노릇을 하려 들었고, 일본은 아예 백성을 노예로 삼았으며, 미국은 나라를 쪼개어 민족을 갈라 놓았고, 북한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힘을 추구하면서만 살아온 이웃 나라들이나 강대국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힘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을 닮지 말고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메시아적 백성으로 부름 받고 있고 홍익인간 정신으로 지난 5천 년 동안 살아온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한 15,4-5)

 

4.  바오로의 메시지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유다인들의 역사의식과 사명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사도 13,26) 이 발언은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처음으로 키프로스를 시작으로 소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 여행에 나서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행한 설교의 일부였습니다. 소아시아의 내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피시디아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예배를 바치던 유다인들은 낯선 땅에서 흩어진 물방울처럼 디아스포라(Diaspora)로 살아가던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은 물론 신앙의 정통성까지도 흔들리기 쉬운 처지에서 살아가던 그들에게 바오로는 역사의식과 사명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비슷한 시기에 파트모스 섬의 채석장에서 중노동으로 하는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환시를 본 사도 요한이 밝힌 계시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다는 메시지가 바로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의 뜻이기 때문입니다.(묵시 5장 참조)

 

  우리도 비록 민족이 갈라져 있고 한반도 평화 회복의 길이 요원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록 우리 겨레가 신앙을 받아들여 증거해 온 순교의 역사를 더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역사에 뿌리를 내린 순교 정신으로 현 시기에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더 지향해야 할 가치라면 정의로운 삶을 기반으로 사랑의 삶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우리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자면 박해 받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꿈꾸었던 ‘주의 나라’를 이 땅에 펴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하는 삶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지 사회생활에 있어서 책임과 자유, 의무와 권리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복음화를 지향하는 마음으로 자기 희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체의 신심과 성혈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이 우리 교회의 겨레 사랑을 진정성 있게 느끼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5.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우리 교회가 전례력에서 기념하는 성인들에 대해서는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간 날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처럼 태어난 날에 기념하는 유일한 성인입니다. 그만큼 그의 삶이 의로웠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애를 썼던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던 어둠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 크신 자비와 은총으로 세례자 요한 같은 의인들을 이 땅에 보내주시기를 기원하게 됩니다. 그래야 민족의 평화를 실현하고 복음화 과업에까지 나아갈 길을 그 의인들이 닦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와 겨레가 민족들의 빛이 되는 길일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이 빛을 소망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이사 45,8) 아울러 오늘 제1독서에서 들으신  이사야의 예언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교우 여러분!
우리가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민족들의 빛이 되라고 불리운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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