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토) 복음 묵상 (마르 12,38-44) (이근상 신부)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이 본문은 흔히 과부의 전적인 헌신, 혹은 신앙의 모범으로 읽힌다.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때, 주님이 그것을 알아보신다는 격려, 가난한 이의 작은 봉헌이 부자의 큰 헌금보다 더 크다는 말은 참으로 복음답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건 이야기의 반쪽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과감한 주석가들이 이런 시각을 가르쳐 왔다. 본문이 놓인 자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 바로 앞에서 예수는 율법 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대목 바로 뒤에서는 성전의 파괴가 예고된다. 주석가들은 이 장면은 단순히 가난한 과부의 아름다운 헌금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곧 생계 전체를 삼켜 버리는 비정한 성전 체제에 대한 폭로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생활비”라고 번역된 비오스βίος는 단순한 여윳돈이 아니다. 삶이다. 생계다. 살아갈 몫이다. 그러니 과부는 남는 것을 넣은 것이 아니라, 살아갈 것을 넣었다. 본문에서 예수는 “너희도 이 여인처럼 하여라”고 말하지 않는다. “잘했다”고 칭찬하지도 않는다. 다만 제자들을 불러 그 장면을 보게 한다. “보아라. 저 여인은 자기 삶을 넣었다.”
주석가들이 모두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주장이 오늘날 해석의 한 흐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비교적 온건한 주석가들조차, 이 본문을 “교회에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야 한다”는 식의 근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성전비판의 맥락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생계의 마지막까지 교회에 바치는 것은 격려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멈추어 세워야 할 무책임한 일이다. 그리고 그리 자신이 가진 것을 내던져버리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을 심리/영성/경제적으로 부축해 주어야 한다는게 복음이 뜻하는 바일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주님이 정말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우리는 정확히는 모른다. 이 말씀이 여인에 대한 말씀인지, 성전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우리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언젠가 가서 여쭈어 보아야 한다. 다만 그날이 오기 전, 그 중간을 살아가는 이로서 우리는 우리 몫의 봉헌을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봉헌이란, 그 봉헌을 아시는 분, 그 분이 보고 계신 그 시선을 따르는 봉헌이어야 한다.
과부는 자기 삶을 넣었다. 예수는 그 삶을 보았다. 그 봉헌을 존중하고 크게 보았다. 그러나 그 봉헌?, 그 삶을 삼키는 성전이 무너지리라 예언하였다. 이야기는 해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봉헌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느 편에 서서 누구를 부축해 주어야 하는지. 무엇이 무어져야 하고 무엇이 끝끝내 살아갈 것인지 물어야 한다. 묻고 대답해야 한다. 봉헌하며 연대하며 부축해 주어야 한다. 인색한 봉헌과 가난한 과부의 두 닢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