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화) 복음 묵상 (마태 5,43-48) (이근상 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3-48)
이웃이란 숙제다.
그 숙제는 내가 고른 문제가 아니다. 이미 내 앞에 놓인 문제다. “이웃”은 그리스어로 플레시온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라틴어로는 프로시무스다. 여기서 영어 proximity, 곧 근접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 이웃은 내가 좋아해서 가까워진 사람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곁에 와 버린 사람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들어와 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이웃은 사랑할 만한 사람의 범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범주를 깨고 들어오는 사람이다. 사실 예수는 이웃이 무엇인지 더 적나라하게 가르쳐주시기는 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원수는 사랑하는 마음 바깥에 두어야 편하다. 그래야 내 미움이 정당해지고, 내 닫힘이 설명이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어쩌다 보니 곁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하필이면 원수가 많다. 곁에 있는 이들. 우리 증오의 대상은 사실 가깝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해야 할까? 왜냐하면 하늘의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악인에게도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선인에게도 해를 떠오르게 하신다. 의로운 이에게도 비를 내리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리신다. 해는 자격을 심사하지 않는다. 비는 사람을 가려 내리지 않는다. 이것이 아버지의 완전함이다.
“완전한”은 그리스어로 텔레이오스다. 이 말은 텔로스, 곧 목적지, 완성, 마땅히 이르러야 할 자리를 뜻한다. 그러니 완전하다고 번역은 하였지만 이는 흠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말은 아니다. 복음의 완전함은 하느님의 마음을 향해 되어 가는 과정을 뜻한다. 목적지를 향하는 여정에 있는 자가 완전한 이의 본래적인 의미다. 다 이룬자는 완전한 자가 아니라 하느님뿐이다.
완전함이란 사랑이 멈추려는 자리에서 다시 조금 더 아버지 쪽으로 움직이는 일. 여하튼 이웃은 숙제다. 원수는 그 숙제의 가장 아픈 이름이다. 그리고 완전함은 그 숙제를 다 풀어낸 사람의 자랑이 아니라 그 숙제 앞에서 도망가지 않는 자의 애닮은 시도다.
결국 내, 우리 곁에 주어진 사람 때문에 내, 우리 사랑이 넓어지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때문에 내 기도가 깊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해진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닮아 가기 때문에. 가는 중이기 때문에 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