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상 신부]2026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금) 복음 묵상 (마태 6,19-23) (이근상 신부)

작성자박베드로SJ|작성시간26.06.19|조회수82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금) 복음 묵상 (마태 6,19-23) (이근상 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19-23)

복음은 보물, 마음, 눈 이야기를 산만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셋이 다 하나의 뜻을 펼치는 중이다. 그 뜻을 알아들으려면 먼저 복음의 전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복음 속 청자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을지 땅에 보물을 쌓을지 양자선택 중인 사람들이 아니다. 청자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게 더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더 오래가는 것, 더 참된 것, 하느님의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이들이다. 문제는 그 마음이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마음이 있으면서도 땅의 보물에 미련을 끊지 못한다는 데 있다. 복음 속 청자들은 하늘을 바라지만 손은 땅의 것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다. 영원을 믿지만 오늘의 안심, 재물의 달콤함, 잃을까 두려운 소유에서 마음을 떼지 못하는 중이다. 그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말씀은 이상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쌓고, 지키고, 계산하고, 잃을까 불안해하는 바로 그곳에 내 마음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눈에 관한 말씀도 같은 뜻을 전하는 중이다. 눈은 온전함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는 눈을 밖의 빛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으로 이해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눈은 내 안의 빛이 밖으로 나가는 자리로도 이해되었다. 그래서 눈은 단순히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의 빛으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였다. “네 눈이 맑으면”에서 맑다는 말은 그리스어 하플루스(ἁπλοῦς)다. 이는 '단순한, 하나인, 나뉘지 않은, 순전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곧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갈라지지 않은 눈, 선을 향하면서도 탐욕에 끌려 찢기지 않은 마음을 뜻한다. 반대로 “성하지 못하면”의 포네로스(πονηρός)는 '악한, 병든, 삐뚤어진'이라는 뜻으로, 성서적 표현으로는 시기와 탐욕과 인색함에 물든 “악한 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결국 앞선 이야기들과 같은 권고를 반복하는 셈이다.

복음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아는 청자에게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돌아오라 말하고 있다. 네 안에 본래 주어진, 하느님을 향하고 선을 향하고 사랑을 향하려는 그 깊은 마음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눈이, 곧 마음이 한마음이면 온몸이 환하고, 마음이 갈라지면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는 말씀이다. 복음은 마음이 갈라진 우리에게, 마음을 잡으라 초대하고 있다. 둘을 다 섬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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