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present)라는 선물(present) / 김이후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한 친구를 만났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는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던 친구였다.
친구는 학창 시절부터 동기들 사이에서 ‘악바리’로 유명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그녀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대여섯씩 하며 웬만한 직장인 이상의 소득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전 과목 A학점을 받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동시에 사법고시까지 준비했다. 결국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친구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동창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자녀들의 입시 이야기로 옮겨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입학한 아이도 있었고, 재수나 삼수를 이어가는 아이도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의 근황이었다.
친구의 딸은 유명 공과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현재 세 가지 진로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다. 내년에 있을 대학 입시 변화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의대에 도전하기 위해 수능 공부를 하는 한편, 의대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5급 공무원이 되기 위한 기술고시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둘 다 실패할 가능성에 대비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입사할 수 있도록 만점에 가까운 학점 관리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와 5급 공무원, 대기업 직원은 업의 본질과 요구되는 역량이 전혀 다른 진로다. 이는 마치 연예인과 철학자, 군인을 동시에 준비하는 것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조합이다. 계통도 방향도 다른 세 가지 미래를 동시에 저글링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딸을 빈틈없이 관리· 지원하기 위해 나의 친구 역시 변호사 일을 잠시 쉬면서 딸과 함께 독서실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도 친구는 딸의 야식을 챙겨줘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딸을 위해 변호사를 관두고 독서실로
인생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마치 과거만 있는 것처럼 살고, 어떤 사람은 마치 미래만 있는 것처럼 산다. 과거에 사는 사람들은 분노와 원망에 붙들려 있고, 미래에 사는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붙들려 있다.
심리상담실에는 과거의 상처 때문이든 미래의 불안 때문이든, 대체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래서 상담은 내담자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과정이다.
한국에는 유난히 ‘미래 중독자’가 많다. 유아기부터 좋은 대학을 위해 준비해야 하고, 청년기에는 취업을 위해 달려야 하고, 중년기에는 자신의 노후와 자녀의 미래까지 대비해야 한다. 진짜 인생은 늘 미래에 있다고 믿으며 현재를 희생하고, 삶을 사는 데보다 삶을 준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운이 좋게도 나는 10여년 전에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맞벌이하던 우리 부부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던 육아도우미 아주머니였다.
시골에서 자란 아주머니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공장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두 아들을 낳아 키우던 40대 초반, 남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주머니는 식당 노동자와 가사도우미, 육아도우미 등을 하며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아주머니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리 집에 출근해 아이를 돌보았는데, 금요일 퇴근 무렵이면 늘 신나는 목소리로 주말 계획을 이야기해주곤 했다. 주말 계획의 대부분은 고향 친구들이나 동네 이웃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었다. 봄에는 남산 둘레길을 걸으며 진달래전을 부쳐 먹었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다니고 전어와 대하를 구워 먹었고, 겨울에는 뜨끈한 아랫목에 둘러앉아 화투를 치며 김장김치에 군고구마를 싸 먹었다.
친구와 놀이, 계절과 제철 음식. 그것이 아주머니 삶의 중심이었다. 그녀의 삶에는 계절의 바이브와 자연의 리듬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절에도 계절이 바뀌는 순간만큼은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그녀의 어깨에는 흥겨움이 있었다.
“나는 세월 가는 게 그렇게 아깝더라고. 살아 있을 적에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살아야제. 나중에 가서 후회하면 뭐 혀. 우리 집 아저씨도 평생 돈 번다고 고생만 하다가 가버렸잖여. 그것만 생각하면 너무 짠하제. 그래서 나는 가고 싶은 데도 다 가고, 보고 싶은 것도 실컷 보고, 재밌게 살다 갈라구.”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웃으며 덧붙였다. “봄에는 딸기 많이 먹고, 여름에는 복숭아 실컷 먹고, 가을에는 사과 많이 먹고, 겨울에는 귤 실컷 까먹어. 그러면 그해는 잘 보낸 거여.”
가을 준비하느라 여름 잃을라
당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주말이면 추가적인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를 하거나, 재테크 공부를 하거나, 자기계발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우리 대부분은 계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당신이 가진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영성가 에르하르트 톨레의 말을 본능적으로 아는 분이었다.
과거에만 사는 사람에게도, 미래에만 사는 사람에게도 언젠가 인생의 청구서는 반드시 날아온다. 과거에만 사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미래에만 사는 사람은 삶의 기쁨을 끝없이 유예한 대가를 치른다.
니체는 “우리 불운한 인간들은 과거와 미래에 너무 얽매여 있어서 현재에는 잠시 머물다 지나갈 뿐”이라고 말했다. 영어로 선물을 뜻하는 ‘present’가 현재를 뜻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여름이다. 다가올 가을을 준비하느라 여름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수정 2026-06-09 09:02 등록 2026-06-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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