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앞에 서면 / 박미숙
추석을 앞두고 친정 형제 단톡방에 “우리 내일 벌초하러 갑니다.”라는 올케의 글이 올라왔다. 언니들은 일하는 날이어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한다며, “두 분이 늘 고생이 많으세요.”라고 답했다. 작은언니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딸자식은 필요 없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아무도 못 가네요.” 했지만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항상 부모님 산소는 오빠 부부가 돌봤기 때문이다.
올해 이른 봄, 오랜만에 6남매가 부모님 산소에 모두 모였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다 보니 10여 년 만의 일이다. 오빠 집에서 모시는 제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지만, 합천 산소에는 좀처럼 가지 못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발길이 쉽게 닿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 동안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담담했다. 오랜만에 찾아가 보니, 주위의 나무가 훌쩍 자라 있었고 봉분은 여전히 단정했다. 그동안 오빠 부부가 얼마나 수고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저 감사하고 또 미안했다.
다 같이 절을 했다. ‘엄마, 아버지! 그곳에서는 편안하시지요? 하늘에서 보살펴 주시는 덕분에 우리들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인사를 드렸다. 산소에 가면 자연스레 부모님 살아오신 여정이 떠 오르며, 그것이 현재의 나를 있게 한 뿌리라는 생각을 한다. 일흔 살인 오빠도, 환갑을 지난 나도 그 앞에선 늘 아이가 된다. 남편과 오빠가 친정아버지께서 하셨던 일을 하고 있으니, 부모님의 시간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많다.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두 분, 지금 살아계신다면 좋은 곳 모셔 가고 맛있는 것 많이 사 드리며 더 잘 챙겨 드릴 수 있는데, 형제들 모두 그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아직도 부모님이 살아 계신 친구들을 보면 부럽다.
자주 가 보지 못하는 친정 부모님과는 달리, 시부모님 산소는 우리 집 바로 뒤편에 있다. 남편은 거의 매일 같이 찾아뵙고 주변을 손질한다. 덕분에 늘 말끔하다. 어머님은 봉안당에 계셨다가, 아버님 장례식 때 모셔 와 나란히 봉분을 만들었다. 앞을 가리던 소나무를 베어 내자, 두 분이 살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으며, 자식들이 틈만 나면 찾아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난 시부모님 봉분을 자주 손으로 쓰다듬는다. 마치 당신들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마지막을 우리 집에서 모셨지만, 더 잘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읊조린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부모님께 잘한 일보다 못한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얼마큼 더 잘했어야 후회가 없을까?
‘죽음’은 언제나 부모님 세대의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난 3월, 큰시누이를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 우리들 차례다 싶었다. 시댁 형제들은 유난히 우애가 깊다. 시누이를 제각의 정원에 모시고 싶어 했다. 한쪽 끝에 돌을 쌓고 흙을 갖다 부어 평평하게 만들어 떼도 입혔다. 그리고 일곱 남매 부부 열네 명이 묻힐 위치를 줄로 표시했다. 나이와 돌아가신 순서 중 무엇으로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태어난 것은 차례가 있어도 떠나는 것은 그렇지 않아서 뒤죽박죽될 수 있으니, 첫째부터 왼쪽으로 나란히 하기로 했다. 열네 자리 다 해 봤자 봉분 하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많은 땅을 차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묻힐 자리를 마련해 두고 나니 마음이 묘했다. 그냥 바다에 뿌리거나 나무 밑에 묻어도 되는데. 그러나 자식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산에 뿌려달라는 어머님 말씀을 뒤로 하고 아버님과 나란히 모셨으니 말이다.
내 자리를 보니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곳이구나 싶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더욱 또렷이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그러셨듯이 나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 충실하게 지내야겠다. 산소 앞에 서면 여전히 딸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은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나둘 물들어 가는 나뭇잎에 더욱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