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서랍 / 이미옥
갠 빨래를 넣으려 아이 서랍장을 열었다. 반팔 티셔츠와 얇은 긴팔 옷이 뒤죽박죽 엉켜 있다. 가을이 제 맘대로 온다는 사실을 매년 잊는다. 어느 해는 옷을 너무 이르게 정리해서 반팔을 찾는 식구들로 아침부터 옷장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올해는 늦더위가 한참이나 이어져 서랍장에 여름옷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조금 기온이 떨어지면 그 위에 얇은 긴 옷을 얹어두었다.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다. 어제저녁, 작은아이가 자신의 겨울옷은 언제쯤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요 며칠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단풍이 들 것 같지 않던 초록 잎사귀가 하루가 다르게 붉어지고 있다.
옷을 꺼내 침대에 차곡차곡 쌓는다. 올봄에 정리해 둔 겨울옷 상자를 꺼내 와 빈 공간에 채워 넣었다. 빵빵해진 서랍은 겨울을 품은 채 한동안 바쁠 것이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집안 곳곳의 서랍을 외면하고 소파에 벌렁 누웠다. 어렸을 때는 책상 서랍만 정리하면 되었는데 무슨 서랍 달린 물건이 이리 많은지. 하나 같이 열고 싶지 않다. 서랍 안의 물건들은 죄다 생명력이 있는지. 내가 넣어 둔 것은 사라지고 없던 것은 생겨나 서로 뒤죽박죽 살고 있다. 당분간 맘대로 살게 두자.
이렇게 진저리를 치는데 또 새로운 서랍이 생겼다. 작년 여름 ‘브런치(카카오의 블로그)’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가의 서랍'이라는 공간이 생겼다. 민망하게도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곳이다. 처음에는 신나서 다른 글도 열심히 읽고 댓글도 달았다. 내 글에 달리는 라이킷(좋아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구독까지 하는 사람이 생기면 찾아가 꼭 구독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작가가 된 것 같았다. 마감에 치이는 작가처럼 글도 주기적으로 올렸다. 서랍을 열고 닫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내 구독자는 거기서 거기였다.
먼저 시작한 쌤들이 다른 작가의 글에 라이킷과 댓글을 부지런히 달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공짜는 없는 법이다. 서로 부지런히 품앗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일일이 읽고 호감을 표시하던 라이킷을 어느새 읽지도 않은 글에도 눌러댔다. 어떤 작가는 하루에 서너 편을 올려서 휴대폰 알림이 수시로 울렸다. 내 글을 쓰는 시간보다 남의 글을 읽는 아니 훑어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좋은 작가도, 글도 많다. 꾸준히, 많이 쓰는 이들을 욕하는 것은 질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런 작가들을 보면서 내가 진짜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 자꾸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합니다...’라는 알림이 온다. 글을 몇 주 동안 올리지 않으면 어김없이 받는 메시지다. 처음엔 깜짝 놀라 묵힌 글이라도 올렸는데 경고가 몇 번 쌓이니 무던해졌다. ‘내 서랍’은 오프라인 공간의 서랍과 달리 아주 깔끔하다. 스물아홉 벌의 옷이 딱 두 개의 서랍에 단정하게 나뉘어 있다. 다시 입고 싶은 옷도 버리는 게 나을 거 같은 옷도 있다. ‘내가 이런 부끄러운 옷을 샀다고?’ 의심하지만 서랍에 있는 것은 내 흔적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랍을 정리하듯 인생의 어느 계절에 문득 ‘내 서랍’을 열고 흔적을 지우고 싶은 날도 오겠지. 비울 때 비우더라도 일단 채워둬야겠다. 나는 옷을 좋아하니까.
오늘, 또 한 벌 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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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미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25 선생님은 바로 되실 거예요. 글도 많으셔서 묶어서 연재로 브런치 북으로 올려도 좋을 거구요. 하는 법 따로 알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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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팝나무 작성시간 25.11.24 작가의 서랍. 제목도 글도 멋져요. 브런치에 글이 쌓이는 걸 서랍의 옷과 대비하여 글을 쓰신 게 창의적이예요. 날로 글이 좋아지는 게 보입니다.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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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미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25 와, 진짜요? 고맙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재미난 이야기가 없어서 늘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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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숙희 작성시간 25.11.25 '브런치 작가' 너무 멋지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도전해 봐야지. '일상의 글쓰기' 20학기 정도 마치고 나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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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미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25 '일상의 글쓰기 ' 선생님들은 지금 당장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도전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