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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야기(26-1)

내가 글을 쓰는 이유 / 이미옥

작성자이미옥|작성시간26.06.07|조회수76 목록 댓글 3

내가 글을 쓰는 이유 / 이미옥

 

책을 읽은 지 다섯 시간이 지나니 글자가 겹쳐 보인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작은아이가 들어온다. 열두 시가 막 지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간 터라 왔냐고 가볍게 인사만 한다. 소파에 앉더니 본격적으로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엄마, 바빠. 오늘 이거 다 읽어야 돼.” “?” “내일 고창에서 선생님들 만나는데 이 책 얘기하기로 했어.” “, 엄마 재밌게 산다.” 웃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이 주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왔는데 목요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토요일 모임이라 마음이 급하다. 다행히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술술 잘 넘어간다.

 

다음날 약속 시간이 열 시 30분이라 여유롭게 여덟 시에 출발했다. 고창 고인돌 박물관에 도착하니 열 시가 조금 지났다. 습도가 낮아서 나무 그늘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하다. 30분쯤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온다. 벌떡 일어나 차로 향한다. 한 달 바쁘면 두 달에 한 번꼴로 보는 데도 오랜만에 보듯 반갑다. 우리는 만나기 무섭게 수다를 떨며 고인돌 공원으로 걸었다. 강한 볕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깊게 그늘진 운곡 람사르 습지는 바짝 말라 있었다. 모형 개구리만 봐도 깜짝 놀랄 만큼 으스스했다. 송쌤은 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배경과 닮았다며 신기해했고 황쌤은 시종일관 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잔뜩 겁을 먹었다. 좁은 데크 길을 따라 생태 연못까지 갔지만 공사 중이라 바로 발길을 돌렸다.

 

바지락 솥밥을 든든하게 먹고 한옥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탁자 위에 면도날세 권을 펼쳐 놓고 시원한 바닐라 라떼 먼저 쭉 마셨다. 면도날은 서머싯 몸이 1944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미국 일리노이주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래리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기대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친한 동료가 자신 때문에 죽자 심경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집으로 돌아온 래리는 보장된 상류층의 미래와 약혼녀 이사벨과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정신적 구원을 찾아 떠난다. 제각각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서머싯 몸이 화자(소설가로 등장)가 되어 풀어나간다. ‘면도날이라는 제목은 날카로운 면도날의 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라는 인용구에서 나온 것이다.

 

책을 추천한 송쌤의 질문에 우리는 돌아가며 각자의 생각을 말했다.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누구인지? 주인공 래리는 깨달음을 얻었는지? 약혼자 이사벨의 행동(래리가 결혼하기로 한 소피를 곤경에 처하게 한 일)에 공감하는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다소 진지하게 때론 가볍게 질문에 답했다. 양귀자의 모순에 나오는 인물,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인물과도 자연스레 연결해서 이야기 나눴다. 왜 고전문학을 읽어야 하는지까지. 초여름의 긴 오후가 끝나갈 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일정은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서점 마을에서 책을 사고 고창 읍성에서는 새카맣게 익은 산버찌를 한 움큼씩 따서 입에 넣고 아이처럼 깔깔거렸다. 만남은 늘 아쉬움을 남긴다. 아니 다음을 남기는 것이리라.

 

내게 글을 쓰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이들이 고맙다. 여전히 글쓰기가 어렵지만 일상의 글쓰기공간에서 꾸역꾸역 내 흔적을 남길 수 있어 좋다. 이번 학기는 글도 몇 편 안 쓰고 끝난 거 같다. 딸아이가 밤 산책을 가자고 옆에서 자꾸 조른다. 마지막 글은 좀 더 잘 쓰고 싶었는데. 아쉽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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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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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팝나무 | 작성시간 26.06.08 고창에서 멋진 하루를 보내셨군요. 제가 좋아하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책이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그곳의 습지를 연상시킨다는 운곡습지도 떠오르고요. 글쓰기 함께하니 참 좋아요.
  • 작성자조미숙 | 작성시간 26.06.09 그 흔적을 따라가며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더 잘 쓰면 안 돼요. 하하!
  • 작성자정희연 | 작성시간 26.06.09 부럽습니다. 그 모임에 같이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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