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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료]오장환에 대하여

작성자수탉|작성시간09.09.19|조회수108 목록 댓글 0

중등 우리교육 1996년 7월호
시인을 찾아서-오장환

낭만과 격정의 시인 오장환- 글 신경림


80년대 초, 광주 대학살로 세상이 뒤숭숭하던 때다. 한 지방도시의 고교 국어교사가 금서로 묶여 있던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복사판을 구했다. 그는 당시의 우리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서와 가락과 힘에 압도당하면서 그 시집에 사로잡혔다.

시집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 읽있다. 그러다가 시내 버스에서 시집을 흘렸다. 당연히 시집은 수사기관의 손에 들어갔는데 불운하게도 시집 갈피에 소지자의 소속을 알게 하는 단서가 들어 있었다. 소지자가 그러잖아도 손좀 보아주어야겠다고 노리고 있던 인물인 데 수사기관은 쾌재를 불렀다. 며칠 미행 끝에 그가 몇몇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덮쳤다. 이렇게 해서 어처구니없는 용공조작사건인 오송회는 만들어진다…….

지난 권위주의시대에 흔히 있던 일로, 오장환 시집이 고생을 시킨 사람이 이 교사 하나뿐이 아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고생을 시킨 것이 오장환 시인만이 아니었겠지만, 당시 오장환 시를 읽는 감동은 이런 고생쯤 해도 별로 억울하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다. 그의 시에는 군사독재라는 폭력 아래 사는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고 주먹을 부르쥐게 하는 힘이 있었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나라

─ 「병든 서울」 부분



해방 후 월북, 북에서 시작활동을 하다가 50년대 초엽 신장결핵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거기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박남수 시인의 증언) 오장환은 출생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그는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호적에 첩으로 등재되어 있다. 아버지 오학근은 본디는 안성 사람으로 시인의 어머니를 첩으로 들이면서 전장이 있는 회인에 살림을 차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회인(지금의 회북)과 안성을 오가며 호적을 조사하고 이웃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충북 민예총의 김하돈의 추론이다. 그 일가는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안성으로 되돌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오학근의 본처가 사망하고서 두 해 뒤가 된다. 이것이 그의 일생을 좌우한 컴플렉스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어머니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만든 것이냐!”(「향수」) 등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거나 냉소하는 표현이 적지 않게 나타나 있는 바, “오래인 관습 ─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라는 앞말이 붙은 「성씨보(姓氏譜)」가 그 대표적인 예다.



내 성은 吳씨. 어째서 吳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승배를 유─심히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지는 진실 李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 「姓氏譜」 전문



회인공립보통학교(현 회북초등)에서 처음 3년을, 안성공립보통학교에서 다음 3년을 보낸 그의 초등학교시절은 평범했던 것 같다. 다른 성적은 중간인데 도화(미술)만은 점수가 높다.

보통학교 졸업후 중학교시험에 떨어져 숙성과를 다닌 것을 보면 공부에는 애당초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후 휘문고보에 들어가지만 자퇴하고 토쿄(東京)로 유학, 지산중학교를 거쳐 메이지(明治)대학에 들어갔다가 역시 중퇴로 끝낸다. 문예과 별과라 했는데 아마 청강생 비슷한 위치가 아니었나 싶다. 휘문고보 시절에는 정지용 시인으로부터 배웠으며 이로써 둘은 사제지간의 연을 맺게 된다. 끊임없이 나도는, 오장환의 권유로 정지용이 월북했다는 설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는 곧바로 귀국, 종로 관훈동에 ‘남만서점(南蠻書店)’이라는 책방을 내는데 이때 그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남만서고’라는 이름으로 출판도 했는데, 남만이라는 이름으로 한껏 멋을 낸 점이 과연 오장환다웠다는 것이 첫시집인 『성벽(城壁)』의 재판에 발문을 붙인 소설가 이봉구의 말이다. 같은 해 부친이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유산이 그 자본금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오장환을 이봉구의 소설 「도정(道程)」은 갖가지 색깔의 넥타이를 매일처럼 갈아 매고 툭하면 가게문을 닫고 명동과 종로로 놀러 다니는 멋장이로 그리고 있다.

이미 그는 서정주, 김광균, 함형수,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을 하면서, 「성벽」, 「어포(漁浦)」, 「모촌(慕村)」, 「전설(傳說)」, 「우기(雨期)」, 「온천지(溫泉地)」, 「매음부(賣淫婦)」 등 한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형상한 짧은 산문 형식의 음울한 분위기의 시들을 발표하고 있을 때였다. 자비출판의 첫시집 『성벽』을 백 부 한정판으로 낸 것도 바로 그 직전의 일이다.



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는 진보를 허락지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춧가루 뿌리던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이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

─ 「城壁」 전문



헐리고 무너진 성이 꼭 나라를 빼앗기고도 멍청한 얼굴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바보스러운 모습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시다.



장판방엔 곰팽이가 목화송이 피듯 피어났고 이 방 주인은 막벌이꾼. 지게목발에도 훈김이 서리어 올랐다. 방바닥도 눅진눅진하고 배창자도 눅진눅진하여 공복은 헝겊오래기처럼 뀌어져 나오고 와그르르와그르르 숭얼거리어 뒷간 문턱을 드나들다 고이를 적셨다.

─ 「雨期」 전문



방바닥도 눅진눅진하고 배창자도 눅진눅진하여 공복이 헝겊오래기처럼 뀌여 나오는 것이야말로 당시의 조선인의 초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끈끈하고 축축한 분위기에 더하여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언어의 응축, 팽팽한 긴장감, 산문 속에 내재해 있는 힘찬 리듬을 가진 그의 시는 크게 주목을 받게 된다.

남만서점을 내기는 했지만 그는 장사에는 별로 열심이었던 것 같지 않다.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팔릴 까닭이 없는 시인부락의 동인인 서정주의 처녀시집을 호화판으로 만든 것만 보아도 그가 돈벌이에 큰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낸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헌사(獻詞)』는 자신이 발행인이면서도 싸구려로 만들었다. 자기보다 친구를 더 중히 여기는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남만서점 경영을 그가 오래 한 것 같지는 않다.

1940년 4월에 쓴 산문 「여정(旅情)쌓인 눈바람에 흐트러지고

산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에 나려 비애를 적시울 듯

徒刑囚의 발은 무거웁다.

─「小夜의 노래」 전문



작중 화자가 스스로를 “무거운 쇠사슬을 끄”는 “도형수”로 인식하고 있는, 식민지 지식인이면 당연히 가짐직한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한 시다. 오죽이나 절망적이면 이정표를 “썩은 막대”로, 눈 위에 찍히는 발자욱을 “드런 발자욱 함부로 찍”힌다고 표현했겠는가. 미움이 치밀어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라는 알레고리가 이 시에서는 절창이다. 낯선 집 울타리란 곧 일제의 관청을 뜻하며 개는 바로 경찰류를 가리키는 것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그를 단박에 가장 인기있는 시인으로 올려 놓은 것은 역시 그 리듬이 흡사 통곡과도 같아서 낭송에 가장 적합한, 오늘의 감각으로 보면 조금은 치기가 엿보이는 시 「The Last Train」이다. 이 시야말로 당시의 젊은이들의 절망적이고 허무적이고 퇴폐적이고 병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에 어느 술자리에서고 자주 낭송되는 시였다는 것도 이봉구의 소설에 나오는 얘기다. 하지만 오장환 자신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에 “오늘도 무위한 날을 보냈다. 어제도 무위한 날을 보냈다. 내일도 무위한 날을 보내리라” 한 것이나, 7월에 쓴 「팔등잡문(八等雜文)」에 “오늘도 명치정엘 나와 당구를 하며 콩가루 섞인 커피를 마시며 어쩌면 지방 문청(文靑)이나 올라와서 어떻게 인사할 기회를 얻어가지고 맥주나 마실까 맥주나 마실까……” 한 것을 보면, 남만서점 경영은 겨우 2년 남짓으로 끝나고 이내 전형적인 식민지의 룸팬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그러나 룸팬의식은 이미 『헌사』 이전부터 그를 지배, 그의 시에 무게와 깊이를 더해준다. 그리하여 『성벽』에서 약간은 추상적인 분위기로 나타났던 암울한 식민지적 현실은 『헌사』에서 구체화되면서 큰 울림을 지니게 된다.



눈 덮인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머구리 울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 버린다

어린애는 유리창을 쥐어 뜯으며 몸부림친다.

─「北方의 길」 전문



……기차는 눈 덮인 철로를 느릿느릿 달려간다. 일제에 농토를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가는 농민들을 실은 기차다. 짐이라야 무엇이 있겠는가. 다 부서진 소반에 바가지가 두엇, 그리고 좁쌀이나 강냉이를 담은 자루가 고작이리라. 어린애는 청개구리처럼 울어대고 아직 몸에서 빚으로 빼앗긴 송아지 냄새가 빠지지 않은 농군은 어린애를 달랠 염도 않고 힘없이 웃기만 한다. 어린애와 함께 훌쩍이는 헐벗은 아내에게 그는 말하겠지, “이제 차 탔으니 북으로 갈 테고, 거기 가면 무슨 수가 안 생길라구” 겨우 여섯 줄로 이농민의 모습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그린 그의 솜씨가 새삼스럽게 돋보인다.



무거운 쇠사슬 끄이는 소리 내 말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드런 발자욱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 기울어 낙엽송에 봄은 오는가」를 즐겨 외었다고 한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The Last Train」 전문



『헌사』 이후에도 그는 중단없이 시를 써, 그것이 대개 해방 뒤 네번째 시집 『나 사는 곳』으로 묶이지만, 세월 탓도 있는 듯 이때의 시가 그의 시로서는 가장 처진다. 그는 해방을 신장병으로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맞는다. 해방을 맞자 그의 시는 우렁차고 씩씩해지면서 조금은 병적이고 퇴폐적이었던 가락을 말끔히 씻어버린다. 「깽」,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 「지도자」, 「병든 서울」을 잇달아 발표, 그의 시는 마침내 인민의 정서를 대표하는 인민의 시로 자리잡게 된다. “8·15 이전부터 나의 바란 것은 조선의 완전한 계급혁명이었다. 이것만이 우리 민족을 완전 해방의 길로 인도할 줄로 확신”(「에세닌에 관하여」, 오장환 역 『에세닌시집』소수)했다는 고백으로 미루건대 뜻밖의 일은 아니다. 이때 그가 그 나름의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시를 썼다는 것은 “깽은 고도한 자본주의 국가의 첨단을 가는 직업이다/……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번창해질 장사를 위하여/ ‘한국’이니 ‘건설’이니 ‘청년’이니/ ‘민주’니 하는 간판을 더욱 크게 내건다”(「깽」) 또는 “동무, 동무들의 가슴, 동무들의 입, 동무들의 주먹,/ 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延安서 오는 동무 沈에게」)라는, 우익을 직접적으로 공격했거나 진보진영에 지지를 보낸 표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때의 오장환에 대해서 김동석은 “‘탁류’-나비들은 역사를 이렇게 본다-‘탁류’를 마음껏 노래하라. 조선시단이 ‘탁류의 음악’을 낳을 수 있다면 장환이 누구보다 기대되는 바 클 것이다”(탁류의 음악─오장환론)라고 격려한다.



우렁찬 우렁찬 노래다.

모두 다 합하여 부르는 이 노래

그렇다.

번연히 앞서보다 더한 쇠줄을

배반하는 무리가 가졌다 하여도

우리들 불타는 억세인 가슴은

젊은이 불을 뿜는 노래는

이런 것을 깨끗이 사뤄 버릴 것이다.



우리들의 귀는 한 번에 두 가지를 들을 수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없다.

벗이여! 점점 가까워 온다.

얼마나 얼마나 하늘까지 뒤덮는 소리냐

“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

─「讚歌」 부분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야,

강도만이 복받는

이처럼 화려한 세월 속에서

아 우리는 어찌하야

우리는 어찌하야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형제와 우리의 동무 속에

찾아야 하느냐.

─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 부분



오장환의 ‘탁류의 음악’은 1948년 그가 월북함으로써 아쉽게 막을 내린다. 당연히 북에서도 작품활동을 했겠지만 알 길이 없다. 시집 『붉은 깃발』을 출간했다고 전하나 그것도 확인되지 않는다. 6·25 때는 서울까지 왔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다. 그의 생사에 관해서는 50년대 초 신장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가 거기서 사망했다는 설이 역시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는 1971년 이복누이 오열환에 의해 실종으로 신고되어 호적에서도 제적당한다.

그래도 그의 생가는 주인이 바뀐 채 바깥채와 행랑채가 헐린 변형된 모습으로 옛고을 회인, 지금은 보은군 회북면으로 행정명이 바뀐 중앙리 140번지에 남아 있다. 늙은 감나무로 둘러싸이고 넓은 텃밭에 콩, 상추, 아욱 등이 심긴 그 집을 이웃 할머니들은 아직도 오부자집으로 부른다. 씨만 천석을 넘긴 큰 부잣집이었다는 것이다. 충북 민예총에서는 금년 5월 4일 청주의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오장환 문학제’를 하는 한편 보은 문협과 함께 생가 입구에 ‘시인 오장환 생가터’라는 표지석을 세울 계획을 했다가 주인의 반대로 일단 면사무소 마당에 세워 두었다. 내년이면 주인의 양해 아래 본 자리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한다. 그가 열살에 떠나 한 번도 돌아온 일이 없는 고향.

그러나 그가 「전설」에서 “느티나무 속에선 올빼미가 울었다. …… 항상, 음습한 바람은 얕게 나려앉았다”라고 표현한 그 고향은 옛 정취를 짙게 안은 채 그의 시처럼 아직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고향이 자신의 무릎에서 자란 시인의 우렁하고 씩씩한 노래가 한 세대를 뛰어넘어 7, 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이땅의 민중시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알랴. ▣





● 최초로 발굴된 오장환 시인의 모습. 충북 민예총 문학위원회에서 발굴했다.



●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

속칭 ‘사잣골’에 자리잡고 있는 오장환의 생가.



● 시인이 회인공립보통학교에 다닐 적의 학적부. 3학년까지의 성적이 기록되어 있다.



● 오장환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충북 민예총의 김하돈과 도종환 시인.



● 100부 한정판으로 자비출판한 첫시집 『성벽』과 두번째 시집 『헌사』, 세번째 시집 『병든 서울』.



● 아직 시인의 생가에 자리잡지 못하고 면사무소 앞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생가터비.



● 충북 민예총에서 주관한 오장환 문학제.

시인의 시집을 갖고 있다가 고초를 치른 시절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글/ 신경림(시인)

사진/ 류우종(우리교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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