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명대사와 명장면

작성자얼레꼴레윤영선|작성시간04.01.17|조회수810 목록 댓글 1

1.

어머니는..평양에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2.

내가 왜 이름이없어!!나 한상필이야!!!!

3.

비겁한 변명입니다!!

4.

패도좋고,죽여도좋습니다 평양에만 보내주십시오!!

5.

이것도 저것도 말도 안됩니다...왜 저 아까운 새끼들을 죽입니까!!'

6.

재네들이 왜 무장공비입니까?

재네들은 제 부하입니다!!!!!

7.

'죽더라도 국립묘지에 묻힐줄 알았는데'

8.

'형, 우리죽는거야??'

9.

'중앙정보부가 국가란 말씀이십니까??'

10.

'무장 공비는 심하잖아!'

11.

김일성 목아지를 따오겠습니다

12.

대장님의 임무는 저희를 평양에 보내주시는 거였습니다

13.

한번 조장은 영원한 조장이다.
한번 따까리는 영원한 따까린거 몰라?

14.

민중의 기 붉은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깃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15.

오늘밤 출정이다

16.

1968년... 국가가 우리를 불렀다...
1971년... 국가가 우리를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를 버리지 않았다...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였다.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된다.
침투한 공비 31명중 29명이 사살된다. 한명은 자폭하고 김신조는 생포된다.
청와대를 노린 무장공비 침투에 분노한 박정희가 그 보복 조치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의 기간요원들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고 같이 행동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들은 혹독한 지옥훈련 3개월만에 북한 주석궁을 침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
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하극상, 청와대행, 자폭과 함께 훈련원 31명은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데올로기 시대 한반도 역사의 씻을수 없는 오욕으로 남아있다.
30년전 실미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71년 8월23일 난동 당시 총알을 피해 살아남은 기간요원은 모두 6명.
변소간에 숨어있거나 매트리스에 몸을 숨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실미도 최고 실무책임자인 소대장으로는 유일하게 현장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김방일씨는 당시상황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끔찍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해도 이보다 더 처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훈련병들에 의해 피살된 기간요원들의 시신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머리가 으깨져 뇌수가 방안 천장과 벽에 흩어져 있는 현장을 보는 순간
차라리 내가 먼저 죽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들은 왜 기간요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을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며 청와대로 향하게 했는가?
"만들어만 놓고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상이나 받으면서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떨어진 해발 80m, 2제곱 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중앙정보부가 당시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지적했다.
그들은 3년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을 하루에도 몇번씩 받았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을 만들어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다.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그들보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렸다.
훈련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에 달했다.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면서 똑같이 생활했다.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어들었고
실미도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전명령만 눈 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석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에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되고 만다.
그이후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한번도 북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당시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장본인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을 받아 남북한 역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없이 버려진 684부대.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이 다가온다.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삽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이 일당백의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한다.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하였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등 모두 6명.
기간병이었던 김태수씨는 화장실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건졌다.
이틀전에 화장실 청소를 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황석종씨는 매트리스 속에 들어가 오른팔로 머리 모양을 해서 살았다.
훈련병들은 그가 위장한 팔을 머리로 알고 명중시키는 바람에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훈련병들은 인근섬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혀 있던 실미도를 빠져 나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인다.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

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는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
28년간 묻혀있던 실미도 문제를 다시 세상에 들고 나온 사람은 소설 실미도를 쓴 소설가 백동호씨였다.
공군 정보부대 중앙정보부는 실미도에서 벌어진 난동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당시 소대장 김방일씨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까?
실종돼 버린 이사건의 진실을 이제는 그가 밝히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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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miffy | 작성시간 04.01.27 이 영화를 보며 참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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